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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 류시화 책 해석

September 19, 2026 by 신일 문 Leave a Comment

들어가는 글

상처받은 뒤에도 우리는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면 사랑에 상처받은 사람을 위한 책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시 사랑하는 법.

상처를 놓아주는 법.

아픈 기억을 치유하는 법.

물론 그것도 이 책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류시화가 여러 시대와 문화의 시와 글을 모아 만든 이 책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질문은 사랑의 상처를 훨씬 넘어갑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가?

왜 우리는 평범한 행복을 잃고 나서야 알아보는가?

고통 속에서 인간은 왜 신과 의미를 찾는가?

그리고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번 가상 대화에서는 류시화와 함께 루미, 카비르, 메리 올리버, 헤르만 헤세, 오라이아 마운틴 드리머가 한자리에 모입니다.

그들은 강가의 나무 아래에서 다섯 가지 질문을 따라갑니다.

상처.

슬픔.

현재.

신과 의미.

죽음과 삶.

그리고 대화가 깊어질수록 책 제목도 조금씩 다른 의미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말은 정말 상처를 잊으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상처받았다는 사실이 앞으로의 삶 전체를 결정하게 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어쩌면 치유란 상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슬픔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상처가 있어도 삶 전체가 상처만은 아니게 되는 것.

이 대화가 마지막으로 향하는 질문은 아주 단순합니다.

삶이 완전해진 뒤에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불완전한 이 삶을 지금 사랑할 것인가?


Table of Contents
들어가는 글
Topic 1 상처받은 뒤에도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Topic 2: 슬픔은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일까?
Topic 3: 우리는 왜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이 행복이었다는 걸 알게 될까?
Topic 4: 신은 종교 안에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 있는가?
Topic 5: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나는 내일부터 무엇을 바꿀까?
마지막 글

Topic 1 상처받은 뒤에도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saranghara

저녁빛이 강 위에 길게 내려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큰 나무의 잎들이 천천히 흔들렸다.

멀리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진행자는 한동안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행자: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책의 제목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처음 들으면 정말 아름다운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을 오래 생각할수록 조금 불편해집니다.

류시화:
왜 그렇습니까?

진행자:
왜냐하면 정말 크게 상처받은 사람에게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사람.

평생 믿었던 배우자가 떠난 사람.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사람.

친구에게 배신당한 사람.

누군가를 믿었다가 몇 년 동안 그 상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

그런 사람 앞에서 제가

“사랑하세요.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아름다운 시가 아니라 잔인한 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잠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강 위의 빛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류시화:
그럴 수 있습니다.

특히 그 말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라.”

라는 뜻으로 이해한다면요.

저 역시 그렇게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이 제목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류시화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류시화:
그 질문에 너무 빨리 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나눌 대화 전체가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일 테니까요.

대신 먼저 묻고 싶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왜 마음을 닫을까요?

진행자:
다시 다치기 싫어서겠죠.

류시화:
그렇겠지요.

그러면 마음을 닫는 것은 잘못일까요?

진행자가 대답하려는 순간, 헤르만 헤세가 조용히 말했다.

헤르만 헤세: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즉시 다시 마음을 열라고 요구하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문을 닫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단둘이 있어야 할 때도 있고요.

진행자:
그렇다면 마음을 닫는 것도 치유의 일부일 수 있다는 말인가요?

헤르만 헤세:
잠시라면요.

문제는 그 문을 닫은 이유조차 잊은 채 평생 그 안에서 살아가게 될 때입니다.

처음에는 상처를 피하려고 만든 방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 방 자체가 인생이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루미가 미소를 지었다.

루미:
사람은 상처받았기 때문에 문을 닫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문을 닫으면 고통만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진행자:
하지만 그것도 선택 아닐까요?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다시는 크게 사랑하지 않으면 크게 상처받을 일도 없지 않을까.

사람에게 너무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줄어들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전부 주지 않으면 배신당해도 덜 아프고.

솔직히 말하면 꽤 합리적인 전략처럼 보입니다.

카비르:
그렇다면 죽음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군요.

진행자:
어떤 방법입니까?

카비르:
태어나지 않는 것.

진행자가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미소를 지었다.

카비르:
농담 같지만 진지한 말입니다.

삶에는 위험이 있습니다.

사랑에도 위험이 있고,

친구를 만드는 데도 위험이 있고,

아이를 사랑하는 데도 위험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합니다.

잃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위험을 완전히 없애려 한다면,

결국 삶 자체를 줄여야 합니다.

진행자:
그러면 결국 상처받을 각오를 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오라이아가 고개를 저었다.

오라이아 마운틴 드리머:
저는 그 표현도 조금 조심하고 싶어요.

“상처받을 각오를 해라.”

이 말은 때때로 아주 위험하게 사용될 수 있으니까요.

누군가 계속 당신을 무시하고,

거짓말하고,

통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데도

“진짜 사랑은 아픔을 견디는 거야.”

라고 말한다면,

그건 사랑을 아름답게 포장해서 사람을 위험 속에 머물게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그렇죠.

저도 그 부분이 걱정됐습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말을 잘못 읽으면,

“용서해라.”

“다시 믿어라.”

“돌아가라.”

“사랑한다면 참아라.”

이렇게 될 수도 있잖아요.

오라이아: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다른 문제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과

그 사람을 다시 신뢰하는 것은 다릅니다.

용서와 화해도 다릅니다.

사랑과 함께 사는 것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는 것이 가장 건강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진행자:
사랑하면서 떠날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오라이아:
물론이죠.

때로는 떠나는 것이 자신에게 하는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진행자는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진행자:
그런데 사람이 한번 크게 상처받으면 이상한 일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과거의 사람이 같이 따라옵니다.

새로운 사람이 답장을 조금 늦게 하면,

“전에 그 사람도 이랬는데.”

조금 차갑게 말하면,

“시작됐구나.”

약속 시간이 늦으면,

“결국 이 사람도 똑같구나.”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마음속에서는 이미 과거가 다시 시작되는 거죠.

헤세:
인간은 기억 없이 사랑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을 데리고 새로운 관계로 들어갑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정말 새로운 사랑이라는 것이 가능할까요?

헤세:
완전히 백지인 사랑이라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꼭 백지여야 할까요?

진행자:
무슨 뜻인가요?

헤세:
우리는 자주 새 출발을

“과거가 없는 상태”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새 출발은 대부분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과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과거와 똑같은 결말을 선택하지 않는 것.

그것도 새 출발입니다.

메리 올리버가 나무 사이로 비치는 빛을 바라보았다.

메리 올리버:
자연에서도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나무에 오래된 흉터가 남아 있기도 하고,

부러졌던 가지의 흔적이 그대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봄이 오면 새로운 잎이 나옵니다.

그 나무가 상처받지 않았던 나무가 된 것은 아니죠.

진행자:
상처가 있는데도 새 잎이 나는 거군요.

메리 올리버:
네.

저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치유를

“흔적이 없어지는 것”

으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너무 많은 삶을 실패라고 부르게 됩니다.

류시화:
아마 그래서 이 제목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상처받지 않았다”가 아니라

“것처럼”

일지도 모릅니다.

진행자가 류시화를 바라보았다.

진행자:
“것처럼.”

류시화:
네.

상처받지 않았다고 거짓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을 지우라는 것도 아닙니다.

상처를 아름답게 포장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런 질문일 수 있습니다.

그 상처가 앞으로의 내 삶 전체를 결정하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진행자:
조금 더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류시화:
한 사람에게 배신당했습니다.

그 일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에서

“그러므로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라는 결론까지 반드시 따라와야 할까요?

한 번 사랑이 실패했습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므로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라는 결론까지 사실일까요?

진행자:
아니겠죠.

하지만 상처받았을 때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류시화:
맞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틀렸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감정이 진실하다는 것과 그 감정이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진행자는 잠시 생각했다.

진행자:
예를 들어,

“나는 지금 버려질까 봐 무섭다.”

그 감정은 진짜입니다.

하지만

“그러므로 이 사람도 반드시 나를 버릴 것이다.”

는 아직 사실이 아니다.

그런 뜻인가요?

류시화:
그렇습니다.

루미:
상처는 미래를 예언하고 싶어 합니다.

“한번 일어났으니 또 일어날 것이다.”

“한번 잃었으니 또 잃을 것이다.”

그러나 상처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상처는 기억입니다.

그 둘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행자:
그 말은 강하네요.

상처는 예언자가 아니라 기억이다.

그런데 실제로 세상에는 또 나를 상처 입힐 사람이 있잖아요.

카비르:
물론입니다.

진행자:
그러면 어떻게 구별합니까?

내가 과거 때문에 의심하는 건지,

정말 이 사람이 위험한 건지.

오라이아:
그것이 어른의 사랑이 어려운 이유겠죠.

무조건 믿는 것도 답이 아니고,

무조건 의심하는 것도 답이 아닙니다.

사람을 봐야 합니다.

그 사람이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지.

당신의 “싫다”를 존중하는지.

실수했을 때 책임을 지는지.

당신이 약해졌을 때 그것을 이용하는지, 보호하는지.

사랑은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잘 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말이

순진해지라는 뜻은 아니군요.

오라이아:
저는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순진하지 않으면서도 냉소적이지 않은 것.

그게 훨씬 어렵습니다.

헤세:
젊었을 때의 사랑에는

“나는 당신을 믿는다.”

가 있을 수 있습니다.

상처를 겪은 뒤의 사랑에는

“나는 인간이 서로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래도 당신을 알아가겠다.”

가 있을 수 있겠지요.

그 사랑은 덜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더 의식적인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상처가 사람을 더 깊게 만들 수도 있습니까?

류시화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류시화:
여기서는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상처가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을 너무 빨리 아름답게 만들면 안 됩니다.

어떤 상처는 사람을 오랫동안 무너뜨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상처 때문에 평생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겪어서 더 좋은 사람이 되었잖아.”

라고 말하는 것은 때로 매우 잔인합니다.

진행자:
그러면 고통 자체가 선물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군요.

류시화:
저는 그렇게 단순하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처가 선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처 이후의 삶에서

내가 무엇을 만들어갈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차이는 큽니다.

메리 올리버:
상처를 사랑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오늘 아침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다시 완전히 믿지 못하면서도

한 사람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삶은 언제나 전부 아니면 전무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진행자:
그런데 저는 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마음을 닫으면,

주변 사람들은 자주 말합니다.

“이제 그만 잊어.”

“좋은 사람 만나.”

“과거는 과거야.”

하지만 그런 말이 오히려 더 외롭게 만들 때도 있죠.

오라이아:
왜냐하면 그 사람은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기 고통이 이해받기를 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다시 사랑해.”

라고 말하기 전에,

“그때 정말 아팠겠구나.”

라고 말해주는 것이 먼저일 수 있습니다.

루미:
마음은 명령으로 열리지 않습니다.

햇빛이 꽃에게

“지금 당장 피어라.”

라고 소리치지 않는 것처럼요.

진행자:
그렇다면 기다려도 되는군요.

루미:
물론입니다.

하지만 기다림과 포기는 다릅니다.

진행자:
어떻게 다릅니까?

루미: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포기한 사람은 벽만 남겨둡니다.

진행자는 잠시 웃었다.

진행자:
그 말을 들으니 이런 이미지가 떠오르네요.

상처받은 뒤에 필요한 것은 벽이 아니라,

문이 있는 경계선일 수도 있겠네요.

오라이아:
좋은 표현입니다.

경계선은 말합니다.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벽은 말합니다.

“아무도 오지 마세요.”

둘은 아주 다릅니다.

진행자:
그리고 문을 언제 열지는 내가 결정한다.

오라이아:
맞아요.

그 문을 열지 않을 권리도 당신에게 있습니다.

누군가가 밖에서

“이제 충분히 시간이 지났잖아.”

라고 말한다고 해서 열 필요는 없습니다.

진행자:
여기서 저는 아주 현실적인 질문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용서해야 합니까?

카비르가 웃었다.

카비르:
누구를요?

진행자:
나를 상처 입힌 사람을요.

카비르:
왜 용서하려 합니까?

진행자:
그래야 제가 자유로워질 것 같아서요.

카비르:
그렇다면 자유를 위해 용서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상대방이 다시 당신의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진행자:
용서와 화해는 다르다.

카비르:
그렇습니다.

진행자:
용서와 신뢰도 다르고.

오라이아:
그렇죠.

진행자:
사랑과 함께 사는 것도 다르고.

헤세:
그렇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이런 것도 가능하겠네요.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미워하며 내 인생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시 당신을 믿지는 않겠습니다.”

류시화:
가능합니다.

어쩌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가장 정직한 용서일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그 말을 들으니 조금 편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주 사랑을 너무 하나로 묶는 것 같거든요.

사랑하면 용서해야 하고,

용서하면 다시 믿어야 하고,

믿으면 다시 가까워져야 하고.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류시화:
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삶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해가 거의 지고 있었다.

강물 위의 붉은빛도 조금씩 어두워졌다.

진행자는 책을 다시 바라보았다.

진행자:
이제 제목이 처음과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처음에는

“상처를 잊고 다시 사랑하라.”

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류시화:
어떻게 들립니까?

진행자는 잠시 생각했다.

진행자:
이렇게요.

“당신을 상처 입힌 과거에게, 앞으로 누구를 사랑할 것인지까지 결정하게 하지 마세요.”

류시화가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었다.

메리 올리버:
저는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어요.

오늘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을, 어제 당신을 떠난 사람의 얼굴로만 보지 마세요.

진행자:
그건 어렵습니다.

메리 올리버:
네.

하지만 오늘을 보는 일은 원래 어렵습니다.

우리는 늘 어제를 통해 오늘을 보고 있으니까요.

헤세:
그리고 어쩌면 사랑은

과거를 버리는 일이 아니라,

과거가 있는 자신으로도 새로운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일일 겁니다.

진행자:
그러면 오늘의 첫 질문,

“상처받은 뒤에도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루미가 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루미:
저라면 “그렇다”라고 너무 빨리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이렇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다시는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요,
아니면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요?

진행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비르가 그 침묵을 깨지 않았다.

헤세도 말하지 않았다.

잠시 후 류시화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류시화:
저도 질문을 조금 바꾸고 싶습니다.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사랑할 수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나를 데리고도, 그래도 사랑할 수 있는가?

아마 그게 더 정직한 질문일 겁니다.

진행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자:
그러면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제목은

상처를 지우라는 말이 아니군요.

상처받기 전의 나로 돌아가라는 말도 아니고.

류시화: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진행자:
그렇죠.

우리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갈 수는 있다.

상처를 가지고.

기억을 가지고.

조금 더 조심스럽게.

어쩌면 조금 더 현명하게.

그리고 아직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문을 완전히 벽으로 만들지는 않으면서.

강 건너편에서 마지막 햇빛이 사라졌다.

진행자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진행자:
그런데 사랑의 상처보다 더 어려운 것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면요?

다시 연락할 수도 없고,

화해할 수도 없고,

한 번만 더 안아볼 수도 없다면.

그 사람을 잃은 슬픔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슬픔도 언젠가는 사라져야 하는 걸까요?

류시화가 강물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이야기는 바로 그 침묵에서 시작될 것 같았다.

Topic 2: 슬픔은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일까?

saranghara

강 위에는 이제 저녁빛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붉게 빛나던 물은 짙은 남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흔들렸다.

아무도 바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Topic 1의 마지막 질문이 아직 그들 사이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했던 사람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면.

다시 전화할 수도 없고,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한 번만 더 안아볼 수도 없다면.

그 사람을 잃은 슬픔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한참 뒤 진행자가 입을 열었다.

진행자:
우리는 조금 전에 상처받은 뒤에도 다시 사랑할 수 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그 이야기에는 미래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도 있고,

조금씩 다시 마음을 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다르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아무리 치유되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류시화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자: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부터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슬픔을 극복해야지.”

“앞으로 나아가야지.”

“이제는 놓아줘야지.”

그런데...

정말 슬픔은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까?

류시화:
‘극복’이라는 말은 참 흥미롭습니다.

무언가를 넘어간다는 뜻이니까요.

산을 넘듯이.

장애물을 넘듯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어떤 슬픔은 그렇게 뒤에 두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행자:
그러면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뜻인가요?

류시화:
어쩌면요.

하지만 “평생 가지고 산다”는 말이

“평생 똑같이 아프다”는 뜻은 아닙니다.

메리 올리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메리 올리버:
자연을 보면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 많아요.

나무가 벼락을 맞으면 흉터가 남기도 합니다.

가지가 부러진 자리도 그대로 남습니다.

하지만 그 나무가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그 흉터 옆에서 새로운 잎이 나기도 합니다.

진행자:
Topic 1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상처가 있는데도 새 잎이 난다고.

메리 올리버:
네.

슬픔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슬픔이 없어져야만 새로운 기쁨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행자:
하지만 여기서 저는 조금 어려운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에도 행복해져도 되는 겁니까?

이 질문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남편을 잃은 사람이 다시 웃을 때.

아내를 잃은 사람이 여행을 갈 때.

아이를 잃은 부모가 어느 날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내가 이렇게 웃어도 되나?”

오라이아가 천천히 말했다.

오라이아 마운틴 드리머:
그 질문 뒤에는 아주 깊은 두려움이 있을 수 있어요.

진행자:
어떤 두려움입니까?

오라이아:
내가 다시 행복해지면,

그 사람을 덜 사랑했다는 뜻이 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살아가면,

그 사람을 두고 가는 것은 아닐까.

내가 다시 사랑하면,

이전의 사랑을 배신하는 것은 아닐까.

진행자:
맞습니다.

특히 주변 사람들은

“이제 행복해져도 돼.”

라고 말하지만,

정작 본인은

“내가 행복해지면 그 사람이 정말 사라지는 것 같다”

고 느낄 수도 있겠네요.

헤르만 헤세:
그러나 기억하는 것과 고통받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두 가지를 묶어버립니다.

“내가 계속 아파해야 그 사람을 계속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진행자는 잠시 생각했다.

진행자:
만약 제가 먼저 죽는다고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평생 저 때문에 괴로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헤세:
그렇지요.

진행자:
오히려 살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웃었으면 좋겠고.

여행도 가고.

좋은 음식도 먹고.

가능하다면 다시 누군가를 사랑해도 좋고.

오라이아: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자신에게는 그 허락을 주지 못할까요?

진행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루미가 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루미:
사랑은 사람이 떠났다고 끝나는 것이 아닐 수도

Topic 3: 우리는 왜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이 행복이었다는 걸 알게 될까?

saranghara

진행자의 휴대전화 화면에는 여전히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생일도 아니고,

크리스마스도 아니고,

누군가의 졸업식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저녁이었다.

아이들은 어렸고,

부모는 아직 건강했고,

식탁 위에는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이 놓여 있었다.

사진 한쪽에는 누군가 마시다 만 컵이 있었고,

아이 하나는 카메라를 보지도 않고 있었다.

진행자는 한동안 사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진행자:
이 사진을 찍었던 날이 기억납니다.

아주 조금요.

아마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피곤했을 겁니다.

아이들은 시끄러웠을 것이고,

누군가는 숙제를 안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반찬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겠죠.

저는 아마 속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좀 조용히 밥 먹을 수 없나?”

메리 올리버가 미소를 지었다.

진행자:
그런데 지금은...

이 사진 속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접시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 웃는 소리.

심지어 그때는 귀찮았던 소리까지요.

왜 그때는 몰랐을까요?

그 순간이 행복이었다는 것을.

메리 올리버:
어쩌면 그 순간에는 그것이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진행자:
가까이 있어서요?

메리 올리버:
네.

매일 보는 것은 잘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매일 듣는 소리는 배경이 되고,

매일 만나는 얼굴은 너무 익숙해지고,

매일 걷는 길은 더 이상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것이 사라지면,

우리는 처음으로 그것을 자세히 봅니다.

진행자:
사라지고 나서야 본다.

조금 슬픈 이야기네요.

메리 올리버:
그래서 살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보는 법을 배우는 일

인지도 몰라요.

류시화가 사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류시화:
그날 누군가 당신에게

“지금 행복합니까?”

라고 물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진행자는 웃었다.

진행자: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행복이고 뭐고, 너무 피곤합니다.”

모두 웃었다.

진행자:
정말 그랬을 것 같아요.

그때는 늘 다음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일.

돈.

아이들 학교.

집.

건강.

해야 할 일.

다음 주.

다음 달.

내년.

행복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헤르만 헤세:
그렇다면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행복을 알아차릴 여유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군요.

진행자가 잠시 멈췄다.

진행자:
그 차이가 꽤 크네요.

카비르:
인간에게는 이상한 습관이 있습니다.

없는 것은 아주 크게 보이고,

있는 것은 아주 작게 봅니다.

진행자:
왜 그런 걸까요?

카비르:
아마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족한 것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필요했겠지요.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아야 하고,

위험이 있으면 피해야 하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능력이 삶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항상 이렇게 살게 됩니다.

“아직 부족하다.”

“아직 아니다.”

“조금만 더.”

진행자:
그건 정말 익숙한 말입니다.

조금만 더 돈을 벌면.

조금만 더 성공하면.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집이 조금 더 좋아지면.

일이 조금만 덜 바빠지면.

그때 행복해지겠다고 생각하죠.

헤세:
그리고 그때가 오면요?

진행자:
또 다른 “조금만 더”가 생기죠.

헤세가 웃었다.

헤세:
그러면 행복은 언제나 현재보다 한 정거장 뒤에 있겠군요.

진행자:
그렇네요.

도착하면 또 다음 역으로 가버리고.

루미가 조용히 말했다.

루미:
인간은 종종 미래에 집을 짓고,

현재에는 임시로 삽니다.

진행자:
미래에 집을 짓고 현재에는 임시로 산다...

루미:
“진짜 삶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학교가 끝나면.

좋은 직장을 얻으면.

결혼하면.

아이를 낳으면.

아이들이 크면.

은퇴하면.

그러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모든 것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우리는 늙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헤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라고 있습니다.

부모는 늙어가고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니까 준비 기간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이 사실은...

루미:
삶이었던 것이지요.

진행자는 다시 사진을 보았다.

진행자:
그러면 이 사진 속 저녁도

제가 더 좋은 미래를 만들려고 열심히 일하던 시절의

“중간 과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자체가 인생의 본편이었던 거군요.

류시화: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인생에 언젠가 시작 종이 울릴 것처럼 살아갑니다.

“자, 이제부터 당신의 진짜 인생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런 종은 울리지 않습니다.

진행자:
그럼 평범한 화요일도 본편입니까?

류시화:
어쩌면 특히 평범한 화요일이 그렇겠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행자가 갑자기 웃었다.

진행자:
그런데 여기에는 반대쪽 문제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과거를 너무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이 사진을 보면 저는

“그때가 참 좋았지.”

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때의 저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겁니다.

돈 걱정도 있었고,

부부싸움도 했을 것이고,

아이들 때문에 화도 냈겠죠.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헤르만 헤세:
아주 중요한 지적입니다.

기억은 기록이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를 그대로 저장해두었다가 꺼내 보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자신이 과거를 다시 바라봅니다.

진행자:
그러면

“옛날이 더 행복했다”

는 것도 항상 사실은 아닐 수 있겠네요.

헤세:
그렇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과거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과 오늘의 가장 피곤한 오후

를 비교합니다.

그것은 공정한 비교가 아니지요.

메리 올리버:
그리고 과거만 아름답게 바라보다 보면,

오늘도 언젠가 과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놓칠 수 있어요.

진행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메리 올리버:
십 년 뒤의 당신이

오늘의 사진을 보고

“그때가 좋았는데”

라고 말할 수도 있잖아요.

진행자:
그렇네요.

지금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오늘을.

메리 올리버:
네.

그래서 질문은

“과거가 정말 더 좋았는가?”

만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도 훗날 그리워할 무언가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행자는 천천히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진행자:
그 질문은 조금 무섭습니다.

오라이아 마운틴 드리머:
왜요?

진행자:
주변을 보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없어질 것들이요.

사람들.

집.

건강.

제가 매일 걷는 길.

전화하면 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

오라이아:
그렇다고 매일

“이 사람이 내일 죽을 수도 있어.”

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할까요?

진행자:
그것도 건강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라이아:
맞아요.

현재를 소중히 여기기 위해

현재를 잃을까 봐 계속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현재를 사는 또 다른 방법이 아니라,

현재를 불안 속에서 보내는 방법이 될 수 있으니까요.

진행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순간에 감사하세요.”

이 말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잖아요.

아침부터 아이들이 싸우고,

차는 막히고,

직장에서는 문제가 생기고,

몸은 아프고,

은행 계좌에는 돈이 부족한데,

“모든 것에 감사하세요.”

라고 하면 오히려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카비르가 크게 웃었다.

카비르:
그렇다면 화를 내십시오.

진행자:
그래도 됩니까?

카비르:
왜 안 됩니까?

감사는 현실을 부정하는 주문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으면 문제라고 말해야 합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합니다.

부당한 것은 바꾸려고 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세요.”

라고 말하면서 불의를 그대로 두는 것은 영성이 아니라 회피일 수도 있습니다.

류시화:
감사와 고통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힘들다.”

그리고

“그래도 이것은 소중하다.”

두 문장이 동시에 참일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니까 감사는

“모든 것이 좋다”

는 말이 아니군요.

류시화:
그렇습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좋지는 않지만, 좋은 것이 아직 존재한다.”

는 것을 보는 일에 더 가깝겠지요.

메리 올리버:
그리고 그것을 매 순간 할 필요도 없어요.

진행자:
그 말이 마음에 듭니다.

메리 올리버:
우리는 인간이지 수행 기계가 아니니까요.

매 순간 감사하고,

매 순간 현재에 집중하고,

매 순간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한다면,

그것도 또 하나의 부담이 됩니다.

가끔이면 충분할 수도 있어요.

걷다가 한번 멈추는 것.

아이의 얼굴을 조금 오래 보는 것.

커피 냄새를 맡는 것.

전화를 끊기 전에

“사랑해”

라고 한 번 말하는 것.

창밖의 나무를 보는 것.

그 정도로도 삶은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진행자:
가끔 깨어나는 것.

메리 올리버:
네.

항상 깨어 있을 필요는 없어요.

다만 평생 잠들어 있지는 않는 것.

강 위로 작은 새 한 마리가 낮게 날아갔다.

진행자는 그 모습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진행자:
저는 가끔 과거의 제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왜 그때 더 잘하지 못했을까.

왜 부모님께 더 자주 전화하지 않았을까.

왜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일을 조금 덜 하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사소한 것 때문에 화를 냈을까.

지금 알게 된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헤르만 헤세:
하지만 그때의 당신은 지금의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진행자: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후회가 됩니다.

헤르만 헤세:
후회는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지금 얻은 지혜로 과거의 자신을 재판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당신이 지금 알고 있는 것은

그때의 삶을 지나왔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진행자:
그러면 과거의 저를 용서해야 할까요?

헤르만 헤세:
그보다 먼저 이해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 사람도 피곤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무언가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실수했습니다.

모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당신처럼요.

류시화:
그리고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후회를 사용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진행자:
어떤 방법입니까?

류시화가 천천히 말했다.

잃고 나서 배운 것을, 아직 잃지 않은 것에게 사용하는 것.

진행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류시화가 계속했다.

류시화:
아버지에게 더 자주 전화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면,

아직 살아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함께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면,

지금의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친구를 잃고 나서 우정의 소중함을 알았다면,

아직 곁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할 수 있습니다.

후회가 과거로만 향하면 우리를 괴롭힙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후회를 현재로 돌릴 수 있습니다.

진행자:

잃고 나서 배운 것을, 아직 잃지 않은 것에게 사용한다.

그건 Topic 1에서 이야기했던 것과도 연결되는군요.

상처가 미래를 결정하게 하지 않는 것.

류시화:
그렇습니다.

삶의 한 부분에서 얻은 깨달음은

다른 부분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오라이아:
그러면 지금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진행자:
무엇을요?

오라이아:
아주 간단한 질문입니다.

여기 있는 모두에게 묻고 싶어요.

“지금 내 삶에 있지만, 언젠가 사라진 뒤 내가 그리워할 것은 무엇인가?”

잠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이번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각자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침묵이었다.

잠시 뒤 진행자가 말했다.

진행자:
저는...

평범한 전화가 떠오릅니다.

가족에게서 오는 전화요.

바쁠 때는

“나중에 전화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전화.

언젠가는 그 전화가 오지 않을 수도 있겠죠.

메리 올리버가 말했다.

메리 올리버:
저라면 아침빛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매일 오기 때문에 우리가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헤르만 헤세:
저는 걸을 수 있다는 것.

인간은 걷지 못하게 되었을 때

걷는 일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 알게 되기도 하니까요.

오라이아:
저는 누군가와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

카비르:
저는 숨.

진행자가 웃었다.

진행자:
항상 가장 근본적인 걸 고르시는군요.

카비르:
무료라서 사람들이 무시하지요.

모두 웃었다.

류시화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진행자:
류시화 선생님은요?

류시화:
저는...

아직 작별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진행자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류시화:
우리는 이미 떠난 사람을 오래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아직 떠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만큼 오래 바라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언제나 있을 것처럼 생각하니까요.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루미가 말했다.

루미:
인간은 이상한 존재입니다.

사라진 것은 영원히 바라보고,

곁에 있는 것은 쉽게 지나칩니다.

진행자:
그러면 현재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명상을 하는 것입니까?

휴대전화를 내려놓는 것입니까?

일을 덜 하는 것입니까?

루미: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더 단순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때때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 나는 지금 내 삶 속에 있구나.”

진행자는 그 말을 되풀이했다.

진행자:
나는 지금 내 삶 속에 있다.

루미:
네.

“진짜 삶은 나중에 시작될 것이다.”

가 아니라.

지금.

이 사람들과.

이 몸으로.

이 문제들과.

이 불완전한 상황 속에서.

진행자:
그러면 행복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평범할 수도 있겠네요.

메리 올리버:
아주 자주 그렇습니다.

행복은 항상 큰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아요.

때로는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고,

차 안에서 노래를 듣고 있고,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있고,

누군가에게서

“집에 잘 도착했어?”

라는 메시지로 오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거예요.

진행자:
그러다가 사라지고 나면 이름을 붙이는군요.

“그때가 행복했구나.”

메리 올리버:
네.

그래서 오늘 이름을 붙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진행자는 오래된 가족사진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화면을 껐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큰 나무.

강.

저녁 공기.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았다.

그는 작게 웃었다.

진행자:
아...

류시화:
왜 그러십니까?

진행자: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내 삶 속에 있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문장이었다.

잠시 후 진행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행자:
그런데 이상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을 생각하면,

인생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큰 고통이 오면 다시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병에 걸리고,

아무 이유 없이 나쁜 일이 일어나면

“현재를 소중히 여기자”는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때 인간은 더 큰 질문을 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은 결국 이렇게 묻습니다.

“신이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카비르가 강 건너 어둠을 바라보았다.

루미는 눈을 감았다.

류시화는 아무 말 없이 그 질문을 들었다.

진행자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진행자:
신은 종교 안에 있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 상처와 사랑,

슬픔과 기쁨,

평범한 식탁과 죽음,

이 모든 삶 속에 있는 걸까요?

이번에는 아무도 서둘러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다음 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Topic 4: 신은 종교 안에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 있는가?

saranghara

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강 건너편의 불빛이 물 위에서 길게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 또렷하게 보이던 나무들의 윤곽도 점점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진행자가 말했다.

진행자:
조금 전 저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병에 걸리고,

아무 이유 없이 나쁜 일이 일어날 때,

인간은 왜 결국

“왜?”

라고 묻게 되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 질문 끝에서

신을 찾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주 오래된 질문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루미가 미소를 지었다.

루미:
아주 작은 질문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모두가 웃었다.

진행자:
오늘 밤 안에 끝낼 수 있을까요?

카비르:
수천 년 동안 끝나지 않았으니 오늘도 어려울 겁니다.

다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진행자의 표정은 곧 진지해졌다.

진행자:
저는 정말 궁금합니다.

사람들은 신을 찾기 위해 교회에 갑니다.

성당에 갑니다.

사원에 갑니다.

모스크에 갑니다.

경전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명상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산에서 신을 느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에.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다가.

어떤 사람은 죽어가는 부모의 손을 잡으면서.

그렇다면 신은 종교 안에 있는 겁니까?

아니면 삶 자체 안에 있는 겁니까?

카비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카비르:
인간은 자꾸 신에게 주소를 만들어주려고 합니다.

진행자:
주소요?

카비르:
“신은 여기 계신다.”

“저기에는 계시지 않는다.”

“우리 방식으로 불러야 들으신다.”

“우리 언어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 건물 안에 들어와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신이 정말 신이라면,

인간이 만든 벽보다 작을까요?

진행자:
그러면 종교는 필요 없다는 뜻입니까?

카비르: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창문이 있다고 해서 하늘이 창문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는 창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창문을 하늘이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진행자:
흥미로운 비유네요.

종교는 창문일 수 있지만 신 자체는 아니다.

카비르: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루미:
하지만 창문도 소중합니다.

인간은 무한한 것을 직접 바라보기 어려우니까요.

기도.

예배.

시.

음악.

의식.

공동체.

그런 것들은 우리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해줄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종교는 신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신을 바라보게 하는 언어가 될 수도 있겠군요.

루미:
그렇습니다.

문제는 언어를 진실 전체라고 생각할 때 생길 수 있겠지요.

진행자는 잠시 생각했다.

진행자:
그런데 저는 신에 관한 질문이 평화로운 순간보다 고통 속에서 훨씬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이 생기면

“왜 나에게 이런 좋은 일이 생겼습니까?”

라고 밤새 울면서 묻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병에 걸리면 묻습니다.

“왜 우리 아이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묻습니다.

“왜 데려가셨습니까?”

기도했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면 묻습니다.

“왜 제 기도를 듣지 않으셨습니까?”

왜 인간은 고통 속에서 신을 더 찾는 걸까요?

헤르만 헤세가 말했다.

헤르만 헤세:
아마 고통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리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삶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살면 좋은 일이 생긴다.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생긴다.

가족을 사랑하면 가족은 안전할 것이다.

기도하면 보호받을 것이다.

그러다가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순간 문제는 단순히

“슬프다”

가 아닙니다.

내가 믿고 있던 세상의 구조 자체가 흔들립니다.

진행자:
그러니까 고통이 단순히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이해하던 방식까지 깨뜨리는군요.

헤세: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새로운 이야기를 찾습니다.

“이 일이 왜 일어났는가?”

“나는 이제 누구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모든 것에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질문이 신으로 이어집니다.

진행자:
하지만 바로 거기서 위험한 말들이 나오기도 하지 않습니까?

류시화가 진행자를 바라보았다.

진행자:
예를 들어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누군가 말합니다.

“하나님에게는 계획이 있습니다.”

혹은

“이 일에도 다 뜻이 있을 겁니다.”

또는

“신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주십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위로하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정말 그 말을 해도 되는 걸까요?

오라이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라이아 마운틴 드리머:
저라면 매우 조심할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신앙 안에서

“나는 이것에도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라고 말하는 것과,

밖에 있는 사람이

“당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데는 신의 이유가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다르니까요.

진행자:
왜 다릅니까?

오라이아:
두 번째 말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또 하나의 짐을 줄 수 있어요.

“내가 이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

“내가 신에게 화가 나는 것은 나쁜 신앙인가?”

“왜 나는 아직 감사하지 못하지?”

슬픔 위에 죄책감이 하나 더 올라가는 겁니다.

류시화:
Topic 2에서 우리가 이야기했지요.

“이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

라고 다른 사람이 선언하는 것과,

언젠가 내가

“이 고통 이후에 어떤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라고 묻는 것은 다릅니다.

신앙에서도 비슷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에 너무 빨리 신의 뜻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때로는 신을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류시화:
네.

사랑하는 사람이 울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해줄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돌려줄 수도 없고,

병을 없애줄 수도 없고,

과거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 무력감이 너무 괴롭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빨리 무언가를 말합니다.

“다 이유가 있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신에게 계획이 있어.”

어쩌면 그 말은 상대방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행자:
그러면 어떤 말을 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잃고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어?”

라고 묻는다면요.

저도 모르는데요.

류시화:
모른다고 말하면 안 됩니까?

진행자:
그것만으로 충분합니까?

류시화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 있을게.”

진행자는 그 말을 되풀이했다.

진행자: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 있을게.

류시화:
어쩌면 어떤 순간에는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기도와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루미가 조용히 말했다.

루미:
사람들은 기도를 종종 답을 얻는 방법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도는 반드시 답을 얻기 위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답이 없는 곳에서 떠나지 않는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답이 없는데도 계속 거기에 있는 것.

루미:
네.

사랑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옆에 있습니다.

어쩌면 신을 찾는 일에도 그런 면이 있을지 모릅니다.

진행자가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진행자:
그러면 신에게 화를 내도 됩니까?

잠시 조용해졌다.

진행자:
이건 진짜 궁금합니다.

기도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삶이 무너졌습니다.

그때

“신이 있다면 왜 이것을 허락했습니까?”

라고 화를 내는 것.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까?

카비르가 먼저 말했다.

카비르: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화를 냅니까?

진행자가 멈칫했다.

진행자:
보통은 아니죠.

카비르:
화는 때때로 관계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기대했다.”

“나는 당신을 믿었다.”

“그래서 화가 난다.”

무관심과 분노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루미:
신에게 질문하는 것이 반드시 신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질문을 가지고 신에게 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왜?”

라고 묻는 것도 기도가 될 수 있습니까?

루미:
왜 안 되겠습니까?

진짜 마음이 그 말밖에 할 수 없다면,

거짓된 감사보다 진실한 “왜?”가 더 정직할 수도 있습니다.

오라이아:
하지만 여기서도 한 가지 조심하고 싶어요.

어떤 사람은 고통 이후에 신앙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에게

“당신은 사실 아직 신을 찾고 있는 거야.”

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진행자:
왜요?

오라이아:
그 사람의 경험을 우리가 대신 정의하는 것이니까요.

어떤 사람은 정말 더 이상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르겠다고 말할 수도 있고요.

어떤 사람은 종교 없이도 깊은 의미와 사랑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 역시 존중해야 합니다.

진행자:
그러면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서 의미를 찾습니까?

헤세가 대답했다.

헤르만 헤세:
인간이 의미를 찾는 곳은 매우 다양합니다.

가족.

사랑.

예술.

자연.

진실.

우정.

다른 사람을 돕는 것.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신일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간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메리 올리버:
어떤 사람은 숲을 걷다가 자신보다 훨씬 큰 무언가를 느낄 수도 있어요.

그것을 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자연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생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이름이 같지 않아도

그 경이로움 자체는 진짜일 수 있어요.

진행자:
그렇다면 모든 종교가 결국 같은 말을 한다는 뜻입니까?

카비르가 고개를 저었다.

카비르:
그렇게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들은 실제로 서로 다른 주장을 합니다.

신에 대해서도 다르고,

인간에 대해서도 다르고,

구원에 대해서도 다르고,

죽음 이후에 대해서도 다릅니다.

그 차이를 없애버리는 것도 존중은 아닙니다.

진행자:
그런데도 서로 대화할 수 있다?

카비르:
물론입니다.

같은 답을 가져야 대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류시화가 말했다.

류시화:
이 시집에는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에서 온 목소리들이 함께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같은 신을 설명하거나

같은 철학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진행자:
어디입니까?

류시화:
질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사랑하는가.

왜 잃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죽음은 무엇인가.

신은 있는가.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들은 국경을 아주 쉽게 넘어갑니다.

진행자: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답을 가지고 있어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류시화:

같은 질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는 그 문장을 천천히 반복했다.

진행자:
같은 답이 아니라 같은 질문.

강 건너편의 불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메리 올리버가 어두워진 나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메리 올리버:
저는 한 가지가 궁금해요.

우리는 신을 너무 멀리에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진행자:
무슨 뜻입니까?

메리 올리버:
아주 거대한 답.

우주의 목적.

죽음의 의미.

고통의 이유.

그런 것만 찾다 보면,

바로 앞에 있는 것을 놓칠 수도 있어요.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는 것.

아픈 사람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

혼자 우는 사람 옆에 앉는 것.

아침에 새가 우는 것.

다시 해가 뜨는 것.

저는 그것들이 신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의미를 찾는 동안

삶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진행자:
그러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신은 종교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삶 속에 있습니까?

루미가 웃었다.

루미:
왜 둘 중 하나여야 합니까?

진행자:
둘 다일 수도 있다?

루미:
어쩌면요.

어쩌면 인간은 너무 자주

“여기인가, 저기인가?”

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은 집 안에 있습니까?

당신의 기억 속에 있습니까?

당신이 하는 행동 속에 있습니까?

당신의 사랑 속에 있습니까?

하나만 골라야 합니까?

카비르: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신을 찾는다는 이유로

바로 앞의 인간을 지나치지는 마십시오.

진행자:
그건 무슨 뜻입니까?

카비르:
배고픈 사람이 앞에 있는데

신을 찾으러 산으로만 간다면,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이 옆에 있는데

거룩한 말을 하느라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에 대해 아주 많은 말을 하면서

사람에게 잔인하다면,

그 신앙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진행자는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말했다.

진행자:
그런데 저는 또 반대쪽 위험도 있는 것 같습니다.

평생 의미를 찾기만 하는 것.

책을 읽고,

종교를 공부하고,

철학을 공부하고,

“나는 누구인가?”

“왜 태어났는가?”

“신은 무엇인가?”

계속 묻는데...

정작 살지는 않는 것.

헤세가 미소를 지었다.

헤르만 헤세:
아주 흔한 함정이지요.

삶의 의미를 찾다가

삶 자체를 놓치는 것.

진행자:
답을 찾은 다음에 살겠다는 거죠.

헤르만 헤세: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완전히 알게 되면 살겠다.”

“내 목적을 찾으면 살겠다.”

“신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면 살겠다.”

하지만 그 답을 기다리는 오늘도

이미 당신의 삶입니다.

진행자가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췄다.

Topic 3에서 나왔던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진행자:

“나는 지금 내 삶 속에 있구나.”

헤르만 헤세:
그렇습니다.

답을 찾고 있는 동안에도요.

류시화:
어쩌면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본다는 것은

답이 있는 부분만 삶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믿음도 있습니다.

의심도 있습니다.

기도도 있습니다.

침묵도 있습니다.

감사도 있고,

분노도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신이 아주 가까이 느껴지고,

어떤 날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삶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완벽한 신앙도 기다릴 필요가 없겠네요.

류시화:
완벽한 신앙뿐이겠습니까?

완벽한 치유.

완벽한 이해.

완벽한 용서.

완벽한 준비.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완벽하게 만든 뒤에

살려고 합니다.

진행자가 웃었다.

진행자:
그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조금 불편해졌습니다.

류시화:
왜요?

진행자:
저도 그런 것 같아서요.

“조금만 더 준비되면.”

“조금만 더 안정되면.”

“이 문제가 해결되면.”

“돈이 충분하면.”

“시간이 생기면.”

“마음이 편해지면.”

그때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라이아:
그리고 그때가 오나요?

진행자는 웃었다.

진행자:
별로 안 오는 것 같습니다.

루미가 물었다.

루미: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요?

진행자:
물론입니다.

루미:
당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오늘 알게 된다면,

그 기다림 중에서 무엇을 그만두겠습니까?

진행자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강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위로 멀리 도시의 빛만 흔들리고 있었다.

진행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말입니까?

루미:
예를 들어,

1년.

진행자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은 조금 전까지의 철학적인 질문들과 달랐다.

갑자기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 되어버렸다.

1년.

365일.

그 숫자를 생각하는 순간,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들의 크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았다.

진행자가 천천히 말했다.

진행자:
아마...

몇 가지는 내일부터 다르게 할 것 같습니다.

류시화가 그를 바라보았다.

류시화: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것이어야겠군요.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바꿀 일을, 우리는 왜 오늘 바꾸지 않는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질문이 밤공기 속에 오래 남았다.

Topic 5: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나는 내일부터 무엇을 바꿀까?

saranghara


밤이 완전히 내려앉았다.

강 건너편의 불빛만 물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도 이제 희미했다.

조금 전 루미가 던진 질문이 아직 아무도 대답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당신의 삶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무엇을 바꾸겠습니까?

그리고 류시화가 그 질문을 한 걸음 더 밀어붙였다.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바꿀 일을, 우리는 왜 오늘 바꾸지 않는가?

진행자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진행자: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불편한 질문입니다.

류시화:
왜 그렇습니까?

진행자:
답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일을 조금 덜 할 겁니다.

가족에게 더 자주 전화할 것이고요.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갈 겁니다.

오랫동안 미안했던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 때문에 화내는 시간을 줄일 것 같습니다.

루미:
왜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진행자가 웃었다.

진행자:
그게 바로 불편한 부분입니다.

헤르만 헤세:
우리는 대부분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정확히는,

시간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제로는 믿지 않습니다.

진행자:
저도 죽는다는 것은 압니다.

헤세:
머리로는요.

하지만 내일 아침이 당연히 올 것처럼 계획하지 않습니까?

다음 달.

내년.

5년 뒤.

10년 뒤.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은 미래를 계획해야 합니다.

문제는 미래를 준비하는 것과

현재의 삶을 계속 연기하는 것이

아주 비슷하게 보일 때가 있다는 겁니다.

진행자:
그 차이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헤세:
예를 들어,

“가족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미래를 준비하느라

가족과 함께하는 현재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한번 물어볼 필요가 있겠지요.

우리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가?

진행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자:
우리는 정말 많이 말합니다.

“언젠가.”

언젠가 여행 가자.

언젠가 같이 밥 먹자.

언젠가 부모님 찾아뵙자.

언젠가 운동하자.

언젠가 책을 쓰자.

언젠가 조금 천천히 살자.

언젠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자.

카비르:
“언젠가”는 아주 편리한 나라입니다.

진행자:
나라요?

카비르:
모든 꿈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곳에서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진행자:
왜요?

카비르:
시작하지 않으니까요.

모두가 웃었다.

카비르:
아직 피지 않은 꽃은 시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피지도 않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기다려야 할 때도 있잖아요.

돈이 없을 수도 있고,

아이를 돌봐야 할 수도 있고,

몸이 아플 수도 있고,

직장을 당장 그만둘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오늘 당장 꿈을 좇으세요.”

라고 말하는 것도 너무 단순하지 않습니까?

류시화:
물론입니다.

오늘 모든 것을 바꾸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직장을 그만두라는 것도 아니고,

책임을 버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기다리는 것이 사랑이고 책임입니다.

다만 질문은 이것입니다.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살아가고 있는가?

메리 올리버:
삶은 큰 결정을 할 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까요.

여행을 떠나는 날만 삶이 아닙니다.

직장을 그만두는 날만 삶이 아닙니다.

꿈을 이루는 날만 삶이 아닙니다.

평범한 화요일도 삶입니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시간.

누군가를 차로 데려다주는 시간.

저녁을 만드는 시간.

강아지와 걷는 시간.

창문을 여는 시간.

그것들도 우리가 받은 시간이에요.

진행자:
그러면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버킷리스트를 만드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군요.

메리 올리버:
그럴 수 있습니다.

죽기 전에 100곳을 여행하는 것도 멋진 일이에요.

하지만 100곳을 여행하면서도

한 번도 옆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라이아가 말했다.

오라이아:
그리고 죽음을 의식하는 것에도 위험이 있어요.

진행자:
어떤 위험입니까?

오라이아:
“시간이 얼마 없어.”

“빨리 살아야 해.”

“더 많이 해야 해.”

“더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해.”

그러다 보면 죽음이 우리에게 또 하나의 성과 압박이 될 수 있습니다.

진행자:
죽기 전까지도 생산적이어야 하는군요.

오라이아:
그렇죠.

“완벽하게 살아야 한다.”

라는 새로운 숙제가 생기는 겁니다.

헤세:
어쩌면 죽음이 가르치는 것은

“서둘러라”

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행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헤세:
오히려

“우선순위를 잘못 정하지 마라.”

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진행자는 그 문장을 마음속에서 몇 번 반복했다.

진행자:
우선순위를 잘못 정하지 마라.

그렇다면 제가 1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알게 된다면...

아마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

덜 중요한 일을 덜 할 것 같습니다.

류시화:
그것도 큰 변화겠지요.

진행자:
비교하는 시간을 줄이고.

사소한 자존심 때문에 사람을 밀어내는 것도 줄이고.

제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쓰는 시간도 줄이고.

오라이아:
그리고 어떤 말은 조금 빨리 할 수도 있겠지요.

진행자:
어떤 말이요?

오라이아:
사랑해.

보고 싶어.

외로워.

도와줘.

미안해.

고마워.

진행자가 웃었다.

진행자:
짧은 말들이네요.

오라이아: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짧은 말을 몇 년씩 미룹니다.

루미가 말했다.

루미: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때로는 살아 있는 동안 사랑하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거절당할까 봐.

상처받을까 봐.

자존심이 상할까 봐.

그래서 사랑을 미룹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우리 대신 결정을 내립니다.

진행자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진행자:
Topic 1로 다시 돌아오는군요.

상처받지 않으려고 마음을 닫는 것.

루미:
그렇습니다.

진행자:
하지만 만약 시간이 정말 얼마 없다면,

그 벽이 갑자기 너무 비싸 보일 수도 있겠네요.

오라이아: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진행자:
아, 그 부분은 중요합니다.

오라이아:
당신을 계속 해치는 사람에게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이유로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Topic 1에서 말했듯이,

용서와 화해는 다르고,

사랑과 재결합도 다릅니다.

때로는 남은 시간을 지키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이런 말도 가능하겠네요.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미워하는 데 내 남은 시간을 쓰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돌아가지는 않겠습니다.”

오라이아:
네.

그것도 자유일 수 있습니다.

진행자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행자:
한 가지 더 묻고 싶습니다.

죽음을 자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정말 좋은 일입니까?

저는 매일 아침

“오늘 죽을 수도 있다.”

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금 피곤할 것 같습니다.

카비르가 웃었다.

카비르:
저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진행자:
다행이네요.

카비르: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하루 종일 장례식장에 앉아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헤세:
어느 정도 죽음을 잊는 것은 살아가는 데 필요합니다.

내일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나무를 심고,

아이를 키우고,

계획을 세우고,

책을 씁니다.

문제는 죽음을 너무 완전히 잊어

시간이 무한하다고 착각할 때입니다.

류시화:
어쩌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내일이 올 것처럼 계획하고,
영원히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

진행자:
그 균형이 쉽지는 않겠네요.

류시화: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쉽지 않습니다.

잠시 뒤 진행자가 물었다.

진행자: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번 연결해보고 싶습니다.

Topic 1에서는 상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Topic 2에서는 슬픔.

Topic 3에서는 현재와 평범한 행복.

Topic 4에서는 신과 의미.

그리고 지금은 죽음과 시간입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주제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류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류시화:
그래서 저는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본다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진행자:
다시 그 무늬로 돌아오는군요.

류시화:
네.

한 사람의 삶을 멀리서 바라본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안에는 밝은 실이 있습니다.

사랑.

웃음.

아이의 탄생.

우정.

성공.

평범한 저녁 식사.

그리고 어두운 실도 있습니다.

상처.

배신.

질병.

후회.

이별.

죽음.

신에 대한 의심.

이루지 못한 꿈.

진행자:
그런데 Topic 2에서 말씀하셨듯이,

어두운 실이 아름답기 때문에 필요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류시화:
그렇습니다.

고통을 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상처는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어떤 죽음은 너무 빨랐습니다.

어떤 일은 부당했습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게 된 어두운 실 하나를 보고

“내 삶 전체가 어둡다.”

라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메리 올리버:
밝은 실도 아직 있으니까요.

오늘 아침.

누군가의 목소리.

따뜻한 음식.

걷는 다리.

창밖의 나무.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

진행자:
그리고 우리가 자주 너무 평범해서 보지 못하는 것들.

메리 올리버:
네.

진행자:
그러면 처음 책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처음 시작했을 때 저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상처를 잊어라.”

“과거를 놓아라.”

“다시 사랑해라.”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류시화가 기다렸다.

진행자:
어쩌면 이 말은

상처받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사랑했던 사람을 잃은 일도 없던 일이 되지 않습니다.

후회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신에 대한 질문도 모두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죽음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해결될 때까지

삶을 기다릴 필요도 없는 것 아닙니까?

류시화:
바로 그 질문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생각합니다.

상처가 다 나으면 사랑하겠다.

슬픔이 사라지면 다시 살겠다.

불안이 없어지면 시작하겠다.

신에 대한 답을 찾으면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돈이 충분해지면 가족과 시간을 보내겠다.

완벽하게 준비되면 꿈을 시작하겠다.

하지만...

그날이 오지 않는다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류시화가 계속 말했다.

류시화:
상처가 없어지는 날을 기다리지 않고도

삶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슬픔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도

웃을 수 있습니다.

모든 질문의 답을 몰라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제목을 이렇게 읽어도 될까요?

“상처받았다는 사실이 앞으로의 삶 전체를 결정하게 하지 말라.”

류시화:
저는 그렇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루미:
그리고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상처를 버리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받은 자신을 데리고 사랑하는 겁니다.

헤세:
슬픔을 끝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있는 삶도 살아가는 것.

메리 올리버:
특별한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오늘도 바라보는 것.

카비르:
모든 답을 얻은 뒤에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가진 채 걷는 것.

오라이아:
그리고 완벽하게 준비된 뒤에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있을 때 말하는 것.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

보고 싶어.

진행자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진행자:
그러면 제가 처음에 물었던 질문,

“나는 제대로 살아왔을까?”

그 질문에도 완벽한 답은 없겠네요.

류시화:
없을지도 모릅니다.

진행자:
실수도 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도 줬고.

너무 늦게 깨달은 것도 있고.

놓친 시간도 있고.

하지 못한 말도 있고.

류시화:
그렇습니다.

진행자:
그렇다고 남은 삶까지 후회로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류시화:
그렇습니다.

진행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진행자:
그러면 과거를 바꿀 수 없는 사람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류시화가 대답했다.

류시화:
오늘입니다.

아주 짧은 대답이었다.

진행자:
오늘.

류시화:
네.

어제 하지 못한 사랑을

오늘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습니다.

잃고 나서 배운 것을

아직 잃지 않은 사람에게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 미뤄둔 말을

오늘 한마디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거창하게 바꾸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저녁 누군가의 얼굴을 조금 오래 보는 것.

그것도 삶을 바꾸는 일일 수 있습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누구도 그 침묵을 깨려고 하지 않았다.

멀리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메리 올리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별 하나가 보였다.

진행자도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행자:
이상하네요.

오늘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오히려 살아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해졌습니다.

루미가 웃었다.

루미:
죽음은 때때로 삶을 빼앗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삶을 보이게도 합니다.

진행자는 마지막으로 류시화를 바라보았다.

진행자: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을 오늘 대화가 끝나는 지금,

한 번만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류시화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잠시 멈췄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상처받은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서.

진행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류시화:
상처받지 않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답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상처받은 나도,

슬퍼하는 나도,

아직 답을 모르는 나도 데리고

오늘이라는 삶을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면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진행자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이 대화를 읽고 있는 사람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당신이 “언젠가” 시작하려고 생각하는 삶 가운데, 오늘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조금 더 조용히,

한 가지 질문을 덧붙였다.

삶이 완전해진 뒤에 사랑할 것입니까?
아니면 불완전한 이 삶을 지금 사랑할 것입니까?

강은 어둠 속에서도 계속 흐르고 있었다.

아무도 그 강에게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그날 밤만큼은,

흐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해 보였다.

마지막 글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본다는 것

처음 대화를 시작했을 때 우리의 질문은 사랑이었습니다.

상처받은 뒤에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다섯 번의 대화를 지나면서 질문은 점점 커졌습니다.

우리는 상처를 이야기했고,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이야기했습니다.

지나고 나서야 행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평범한 저녁을 이야기했습니다.

기도해도 답이 오지 않을 때의 신을 이야기했고,

마지막에는 죽음을 바라보며 우리가 왜 삶을 계속 “언젠가”로 미루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질문은 결국 하나의 이미지로 모였습니다.

삶이라는 하나의 무늬.

우리의 삶에는 밝은 실이 있습니다.

사랑.

웃음.

가족.

우정.

성공.

따뜻한 식사.

평범한 전화 한 통.

그리고 어두운 실도 있습니다.

상처.

배신.

후회.

질병.

이별.

슬픔.

의심.

죽음.

어두운 실이 아름답기 때문에 필요했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고통은 차라리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어떤 상처에는 아무런 아름다움도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두운 실 하나가 존재한다고 해서 천 전체가 어두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이번 대화에서 발견한 치유의 또 다른 의미였습니다.

슬픔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더 커지는 것.

떠난 사람을 잊지 않아도 다시 웃을 수 있습니다.

과거를 바꾸지 못해도 오늘 누군가를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신에 대한 모든 답을 찾지 못해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도 다시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제목은 이제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상처를 잊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상처받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말도 아닙니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상처받은 것을 앞으로의 삶 전체의 운명으로 만들지 마라.

상처받은 나를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슬퍼하는 나를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직 답을 모르는 나를 완성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모든 나를 데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삶이 시작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크면.

돈이 충분해지면.

은퇴하면.

상처가 나으면.

슬픔이 사라지면.

모든 답을 찾으면.

그때부터 살겠다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우리는 이미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오늘도 이미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대화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남깁니다.

당신이 “언젠가” 소중히 여기려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오늘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Short Bios:

류시화

한국의 시인, 작가, 번역가이자 여러 시대와 문화의 시를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해온 인물입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을 통해 사랑과 상처뿐 아니라 슬픔, 삶, 신, 죽음, 존재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의 흐름 안에 모았습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보는 시선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루미

13세기 페르시아 문화권의 신비주의 시인입니다. 사랑, 상실, 신, 인간 영혼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목소리로 오늘날까지 널리 읽힙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사랑을 상처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이 있어도 삶을 향해 마음을 여는 가능성으로 바라봅니다.

카비르

15세기 인도의 신비주의 시인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종교적 형식과 구분을 넘어 인간이 직접 진실과 신성을 만나는 문제를 노래했습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종교, 신, 삶, 죽음에 관한 질문에 날카롭고 때로는 유머러스한 시선을 더합니다.

메리 올리버

미국의 시인으로 자연과 일상의 작은 순간을 통해 삶, 경이, 죽음, 주의 깊게 살아가는 태도를 탐구했습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보지 못하는 평범한 행복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헤르만 헤세

독일계 스위스 작가이자 시인입니다. 인간의 내면, 자기 발견, 영적 탐색과 개인이 자기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깊이 탐구했습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상처와 후회, 과거의 자신, 삶을 미루는 인간의 심리를 바라봅니다.

오라이아 마운틴 드리머

진실한 관계와 인간의 내면적 삶에 관한 글로 알려진 작가입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사랑을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으로 미화하지 않고, 경계선, 정직함, 용서와 화해의 차이를 강조합니다.

진행자

특별한 철학자도 시인도 아닌 평범한 현대인입니다. 사랑했고, 상처받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으며, 이루어진 꿈과 이루지 못한 꿈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에게 묻기 시작합니다.

“나는 정말 제대로 살아온 걸까?”

그의 질문은 결국 우리 자신의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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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가상 대화, 문학, 철학 Tagged With: 가상 대화, 감사, 류시화, 마음의 상처, 믿음, 사랑, 사랑과 이별,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삶의 의미, 상실, 상처, 슬픔, 신, 영성, 인생, 죽음, 지금을 살다, 치유, 행복,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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