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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심리학 | 진짜 치유란?

September 19, 2026 by 신일 문 Leave a Comment

들어가는 글

상처가 사라져야만 우리는 치유된 것일까?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제목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어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한번 깊이 상처받은 사람이 정말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까요?

감사는 실제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까요?

기도했는데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을 때도 신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죽음이 언젠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지금과 다르게 살아야 할까요?

Part 1에서는 류시화와 여러 시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 질문들을 삶과 시의 언어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번 Part 2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그 아름다운 생각들은 실제 인간의 마음에서도 가능한 것일까요?

수 존슨의 애착 연구, 크리스틴 네프의 자기연민, 조지 보난노의 슬픔과 회복탄력성 연구, 로버트 에먼스의 감사 연구, 케네스 파가먼트의 종교와 영적 대처 연구, 그리고 어빈 얄롬의 죽음과 삶의 의미에 대한 실존적 관점을 통해 같은 질문들을 다시 살펴봅니다.

하지만 이번 대화의 목적은 시를 과학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시가 너무 아름답게 말하고 있다면 심리학이 반박합니다.

심리학이 인간을 너무 간단하게 설명하려 한다면 삶이 다시 질문합니다.

“그런데 실제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힐링’**이라는 말도 다시 생각해봅니다.

힐링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일까요?

과거를 잊는 것일까요?

슬픔이 사라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상처가 있어도 삶 전체가 상처만은 아니게 되는 것일까요?

이번 대화는 상처에서 시작해 슬픔으로,

슬픔에서 감사와 현재로,

현재에서 신과 의미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과 삶으로 이동합니다.

그 끝에서 남는 질문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삶이 완전해진 뒤에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불완전한 이 삶을 지금 사랑할 것인가?


Table of Contents
들어가는 글
Topic 1: 상처받은 사람은 정말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Topic 2: 슬픔은 정말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Topic 3: 왜 우리는 가진 것보다 잃어버린 것을 더 크게 보는가?
Topic 4: 고통 속에서 신을 찾는 것은 인간에게 무엇을 하는가?
Topic 5: 죽음을 의식하면 정말 더 잘 살게 되는가?
마지막 글

Topic 1: 상처받은 사람은 정말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비가 막 그친 늦은 오후였다.

호숫가의 오래된 집 창문에는 아직 빗방울이 남아 있었다.

창밖의 나무들은 젖어 있었고, 구름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호수 위에 길게 퍼지고 있었다.

방 안에는 오래된 가족사진 몇 장과 책들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는 창가에 서 있었고,

누군가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전문가들이 모여 있었지만 회의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진행자가 창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진행자:
Part 1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상처는 예언자가 아니라 기억이다.”

저는 그 말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 생각해보니 조금 의심이 생겼습니다.

수 존슨이 진행자를 바라보았다.

진행자:
정말 그렇습니까?

상처는 정말 기억일 뿐입니까?

한번 크게 배신당한 사람에게는 그 기억이 다음 사랑까지 바꿔버리지 않습니까?

수 존슨:
그럴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깊이 의지했던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단순히

“그때 나쁜 일이 있었다”

라는 기억으로만 남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경험이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남길 수 있습니다.

“가까워지면 위험하다.”

“필요할 때 사람은 떠난다.”

“내가 가장 약할 때 믿었던 사람도 나를 버릴 수 있다.”

진행자:
그러면 결국 상처는 예언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수 존슨:
아니요.

하지만 예언자처럼 느껴질 수는 있습니다.

그 차이가 중요합니다.

진행자가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진행자: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배우자에게 오랫동안 거짓말을 당했습니다.

혹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몇 년 뒤 새로운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메시지 답장이 두 시간 늦으면 갑자기 불안해집니다.

“누구랑 있지?”

“왜 답이 없지?”

“나한테 거짓말하는 것 아닐까?”

머리로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마음은 믿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수 존슨:
우리의 애착 체계는 가까운 관계에서 안전을 찾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관계에서 안전이 크게 무너지면,

마음은 비슷한 위험을 더 빨리 감지하려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보호하려는 겁니다.

“지난번에는 몰랐기 때문에 다쳤다.”

“이번에는 먼저 알아차리자.”

진행자:
그러니까 의심도 나를 보호하려는 행동일 수 있다?

수 존슨:
그렇습니다.

문제는 과거에 유용했던 경보가

현재에는 너무 민감하게 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류시화:
화재가 없는데도 경보기가 울리는 것처럼요?

수 존슨:
좋은 비유입니다.

경보기가 고장 났다고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번 큰 불을 경험했다면 더 민감해질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경보가 울린다고 해서

매번 실제로 불이 난 것은 아닙니다.

진행자가 잠시 생각했다.

진행자:
그렇다면 이런 말은 어떻습니까?

“나는 이제 누구도 믿지 않겠다.”

저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을 비난하기 어렵습니다.

한번 크게 당해보면 오히려 현명한 결론처럼 느껴질 수도 있잖아요.

크리스틴 네프:
그 사람에게 먼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이 왜 생겼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일 수 있습니다.

“정말 많이 아팠구나.”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구나.”

그렇게 인정하는 것부터요.

진행자:
하지만 결국 다시 믿어야 치유되는 것 아닙니까?

크리스틴 네프:
왜 그것을 즉시 목표로 정해야 할까요?

진행자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틴 네프:
상처받은 사람에게

“다시 믿어야 해.”

“다시 사랑해야 해.”

“마음을 열어야 해.”

라고 너무 빨리 말하면,

또 하나의 숙제를 주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아픕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는 왜 아직도 사람을 못 믿지?”

라고 자신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진행자: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은 뒤에

자기 자신까지 공격한다.

크리스틴 네프:
네.

“내가 바보였어.”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어.”

“왜 아직도 그 사람 때문에 힘들어?”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빨리 회복하지 못해?”

최초의 상처 위에 두 번째 상처가 생길 수 있습니다.

류시화가 조용히 말했다.

류시화:
그러면 치유의 첫 단계는

다시 사랑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크리스틴 네프:
그럴 수 있습니다.

어쩌면 먼저 필요한 것은,

상처받았을 때 나까지 나의 적이 되지 않는 것.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진행자가 그 문장을 메모했다.

진행자:
그런데 자기연민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런 반론도 있습니다.

“계속 자신을 이해해주기만 하면 어떻게 변합니까?”

“내가 상처받았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크리스틴 네프:
자기연민은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괜찮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친절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배신당한 경험 때문에 새로운 연인의 휴대전화를 몰래 확인했다고 합시다.

그 행동을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상처받았으니까 휴대전화를 봐도 돼.”

이것은 자기연민과 다릅니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불안했으면 이런 행동을 했을까. 하지만 상대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관계의 방식이 아니다.”

두 문장을 동시에 말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아픔을 이해하는 것과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다르다.

크리스틴 네프:
그렇습니다.

수 존슨이 말을 이었다.

수 존슨:
그리고 새로운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불안을 숨기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답장을 늦게 하면 제가 불안해질 때가 있어요. 당신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 때문에 그런 반응이 올라옵니다.”

그런 대화가 가능하고,

상대방이 그것을 조롱하거나 이용하지 않고,

반응해줄 수 있다면,

새로운 경험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여기서 제가 조금 냉소적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열었다가 또 배신당하면요?

수 존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진행자:
두 번째 사람도 거짓말하면요?

“용기를 내서 다시 믿으세요.”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또 당하면 누가 책임집니까?

수 존슨:
아무도 미래의 관계가 절대 안전하다고 약속할 수 없습니다.

진행자:
그게 문제입니다.

수 존슨:
맞습니다.

친밀한 관계에는 위험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중요하게 만드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목표는

“다시는 상처받지 않는 관계”

를 만드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 관계를 완전히 보장할 방법은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안전한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

문제가 생겼을 때 말하는 능력,

경계를 세우는 능력,

그리고 필요하다면 떠나는 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류시화:
그러니까 다시 순진해지는 것은 아니군요.

수 존슨:
그렇습니다.

오라이아 마운틴 드리머:
저는 그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때때로 “마음을 열라”는 말을 너무 낭만적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눈을 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눈을 뜨고 사랑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진행자:
눈을 뜨고 사랑한다.

오라이아:
네.

그 사람이 내 경계를 존중하는가?

내가 “싫다”고 말했을 때 멈추는가?

실수했을 때 책임을 지는가?

내 약점을 나중에 공격하는 데 사용하는가?

아니면 보호하는가?

말과 행동이 반복해서 일치하는가?

그것을 보는 것은 냉소가 아닙니다.

지혜일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상처받기 전의 순진함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군요.

오라이아:
저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순진하지 않으면서도 냉소적이지 않은 것.

류시화가 그 문장을 천천히 반복했다.

류시화:
순진하지 않으면서도 냉소적이지 않은 것.

그 사이에 사랑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진행자가 물었다.

진행자:
그러면 경계선과 벽의 차이를 이야기해보죠.

Part 1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경계선은 말합니다.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벽은 말합니다.
“아무도 오지 마세요.”

그런데 실제로 상처받은 사람에게는

둘 다 똑같이 느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오라이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 이미지를 더 붙이고 싶어요.

경계선에는 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을 누가,

언제,

얼마나 열 수 있는지는

당신이 결정합니다.

벽에는 문이 없습니다.

진행자:
하지만 문을 닫아두는 기간이 아주 길 수도 있습니까?

오라이아:
물론이죠.

누군가가 준비되지 않았는데

“이제 충분히 지났으니 문을 열어야 합니다.”

라고 밖에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크리스틴 네프:
그리고 문을 닫고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때로는 회복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리는 것은 포기가 아닙니다.

진행자가 류시화를 바라보았다.

진행자:
그런데 이 책 제목은 굉장히 과감합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반대처럼 느껴집니다.

상처를 기억해야 하고,

위험 신호도 봐야 하고,

경계선도 세워야 하고,

천천히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합니까?

류시화가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류시화:
어쩌면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상처받지 않은”

이라는 부분에만 집중했던 것은 아닐까요?

진행자:
그러면 어디를 봐야 합니까?

류시화:
저는 오히려

“것처럼”

이라는 부분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진행자가 고개를 들었다.

류시화:
상처가 없었다고 거짓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지우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순진해지라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이런 뜻으로 읽어볼 수도 있습니다.

상처받았다는 사실에게 앞으로의 삶 전체를 결정할 권한까지 주지는 말라.

진행자:
상처는 기억이지만,

미래의 판결문은 아니다.

류시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수 존슨이 덧붙였다.

수 존슨: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반응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 영향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관계에서는 새로운 경험도 생길 수 있습니다.

“내가 두려움을 말했는데 이 사람은 떠나지 않았다.”

“내가 경계를 세웠는데 이 사람은 존중했다.”

“갈등이 생겼는데 우리는 다시 연결될 수 있었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사람은 조금씩 다른 가능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새로운 사람이 과거를 지워주는 것은 아니군요.

수 존슨:
아닙니다.

새로운 사람에게 그 책임을 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관계 안에서

과거와 다른 경험을 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새로운 사람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답장이 늦었다.

표정이 조금 차갑다.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나를 싫어하게 됐다.”

“다른 사람이 생겼다.”

“곧 떠날 것이다.”

그 감정은 너무 진짜입니다.

그런데 그 감정을 믿지 말라는 겁니까?

크리스틴 네프:
감정을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불안하다면 그 불안은 진짜입니다.

두렵다면 그 두려움도 진짜입니다.

하지만

감정이 진짜라는 것과, 감정이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진행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자:
“나는 버림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와

“나는 버림받고 있다.”

는 다르다.

크리스틴 네프:
바로 그 차이입니다.

류시화가 말했다.

류시화:
Part 1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처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상처는 기억입니다.

지금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문장이 조금 더 정확하게 들립니다.

상처는 미래를 예측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예측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닙니다.

진행자:
좋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어려운 질문을 하겠습니다.

용서해야 합니까?

방 안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진행자:
저는 이 말을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용서하세요.”

그런데 상대방이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자기가 피해자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까지 용서해야 제가 치유되는 겁니까?

오라이아가 먼저 말했다.

오라이아:
저는 치유의 조건으로 용서를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진행자:
그럼 용서하지 않아도 됩니까?

오라이아:
누군가에게

“당신이 치유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상처받은 사람에게 또 하나의 책임을 떠넘길 수도 있습니다.

크리스틴 네프:
때로는 용서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그 일은 정말 잘못된 일이었다.”

라고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상처를 축소하지 않는 것.

크리스틴 네프:
네.

자기연민은

“별일 아니었어.”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일은 정말 아팠다.”

라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용서, 신뢰, 화해는 전부 다른 겁니까?

수 존슨: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누군가를 용서했다고 느끼더라도

그 사람을 다시 신뢰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뢰가 어느 정도 회복되더라도

반드시 이전 관계로 돌아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이 남아 있다고 해서

함께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행자가 메모장에 네 단어를 적었다.

용서.

신뢰.

화해.

사랑.

그리고 그 사이에 선을 그었다.

진행자:
우리는 이 네 가지를 너무 쉽게 하나로 묶는군요.

오라이아:
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분리될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이런 문장도 가능합니까?

진행자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미워하며 내 삶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시 당신을 믿지는 않겠습니다.”

오라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이아:
네.

그것도 치유의 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잠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창문에 맺혀 있던 빗방울 하나가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렸다.

진행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행자: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다시 누군가를 믿고,

마음을 열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크리스틴 네프: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진행자:
먼저 상처받은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필요하면 문을 닫아두는 것.

그러면서도 그 문을 영원히 없애야 한다고 미리 결정하지 않는 것.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을 과거의 사람과 똑같다고 자동으로 판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위험 신호는 제대로 보는 것.

수 존슨:
그것은 꽤 성숙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그러면 이런 말도 가능할까요?

어제의 사람이 나에게 한 일을, 오늘의 사람의 죄로 만들지 않는 것.

류시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류시화:
네.

하지만 거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어제의 일을 잊을 필요는 없습니다.

진행자가 미소를 지었다.

진행자:
이제 조금 이해가 됩니다.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은

정말 상처받지 않은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군요.

류시화: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살아왔으니까요.

진행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제목을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오늘 대화가 끝난 지금,

이 문장을 어떻게 바꾸어 묻고 싶습니까?

류시화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사랑할 수 있는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리고 다시 말했다.

“상처받은 나를 데리고도, 그래도 사랑할 수 있는가?”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진행자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는 완전히 그쳤다.

하지만 나무와 땅은 아직 젖어 있었다.

진행자:
비가 그쳤다고 땅이 바로 마르는 것은 아니군요.

류시화:
그렇습니다.

진행자:
그래도 비는 그쳤고.

류시화:
네.

진행자: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걸을 수 있다.

수 존슨이 조용히 말했다.

수 존슨:
자기 속도로요.

진행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주 다른 질문을 꺼냈다.

진행자: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상처를 준 사람도,

새롭게 만날 사람도,

모두 살아 있다고 가정했습니다.

그래서 경계를 세울 수도 있고,

다시 대화할 수도 있고,

새로운 경험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이 이미 죽었다면요?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들을 사람이 없다면.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용서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한 번만 더 안아볼 수도 없다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어디로 갑니까?

그리고 그 슬픔은

언제까지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조지 보난노가 처음으로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창밖의 빛은 이제 저녁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이 방 안에 놓였다.

슬픔은 정말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Topic 2: 슬픔은 정말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창밖의 빛은 조금씩 저녁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비는 완전히 그쳤지만 나무와 땅은 아직 젖어 있었다.

호수 위에는 얇은 안개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조금 전 진행자가 던진 질문이 방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이 이미 죽었다면.

다시 이야기할 수도 없고,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한 번만 더 안아볼 수도 없다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어디로 갈까?

그리고 그 슬픔은 언제까지 가지고 있어도 되는 걸까?

조지 보난노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진행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진행자:
이번에는 아주 직접적으로 묻겠습니다.

슬픔에는 정상적인 기간이 있습니까?

조지 보난노:
사람들이 상실에 반응하는 방식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합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과정을,

같은 순서로,

같은 속도로 지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진행자:
그런데 우리는 자꾸 시간표를 만들지 않습니까?

처음 몇 달은 이해해줍니다.

1년쯤 지나면 조금씩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제는 앞으로 가야지.”

“이제는 놓아줘야지.”

“아직도 그렇게 힘들어?”

조지 보난노:
그런 말에는 흔히 하나의 가정이 들어 있습니다.

정상적인 회복에는 하나의 경로가 있다는 가정입니다.

하지만 실제 인간의 반응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상실 이후에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일상을 유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 크게 흔들렸다가 점차 회복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랜 기간 깊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괜찮아 보이다가 나중에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첫 번째 오해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배우자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몇 주 뒤 직장으로 돌아갔습니다.

친구를 만나 웃기도 합니다.

몇 달 뒤 여행도 갑니다.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생각보다 괜찮네.”

그리고 조금 더 잔인하게는,

“배우자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그 판단은 잘못된 겁니까?

조지 보난노:
슬픔의 외적인 표현이나 지속 시간만으로 사랑의 깊이를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감정을 경험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일상 기능을 비교적 빨리 회복한다고 해서

상실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류시화가 말했다.

류시화:
우리는 왜 사랑의 깊이를 고통의 길이로 측정하려 할까요?

진행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류시화:
“오래 아프면 많이 사랑한 것이다.”

“빨리 웃으면 덜 사랑한 것이다.”

이 공식은 얼핏 아름답게 들립니다.

하지만 정말 사랑을 그렇게 측정할 수 있을까요?

진행자:
Part 1에서도

“슬픔의 크기는 사랑의 크기다”

라는 표현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그 말을 좋아합니다.

류시화:
저도 이해합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잃는 것이 아픈 것은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아름다운 문장이 언제나 정확한 심리학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문장도 잘못 사용되면 사람을 가둘 수 있습니다.

진행자:
어떻게요?

류시화:
어느 날 웃었는데 갑자기 죄책감이 듭니다.

“내가 어떻게 웃을 수 있지?”

여행을 갔다가 행복한 순간이 찾아옵니다.

“내가 이래도 되나?”

새로운 사람에게 마음이 움직입니다.

“이건 배신 아닐까?”

그러면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계속 아파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가 생깁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떠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 계속 슬퍼하는 것만은 아니다.

류시화:
그렇습니다.

크리스틴 네프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크리스틴 네프:
그리고 여기서 자기비판이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늘 나는 너무 많이 웃었어.”

“벌써 괜찮아지면 안 되는데.”

“나는 나쁜 배우자였나 봐.”

상실 자체로 이미 아픈데,

행복해진 자신까지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진행자:
이상하네요.

슬퍼해도 고통스럽고,

행복해져도 죄책감을 느낀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크리스틴 네프:
그래서 두 감정이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워하면서 웃을 수 있습니다.

슬퍼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습니다.

떠난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살아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는 잠시 생각했다.

진행자:
그러면 반대편 질문을 하겠습니다.

5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배우자의 사진을 보면 웁니다.

결혼기념일에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노래를 들으면 무너집니다.

그 사람은 회복하지 못한 겁니까?

조지 보난노가 천천히 대답했다.

조지 보난노:
눈물이 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렇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전체적인 삶을 보는 것입니다.

슬픔이 존재한다는 것과

삶 전체가 멈춰 있다는 것은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행자가 그 말을 되풀이했다.

슬픔이 남아 있다는 것과 삶이 멈춰 있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조지 보난노:
그렇습니다.

사람은 일할 수도 있고,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특정한 순간에는 여전히 깊이 슬퍼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기일에 우는 것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조지 보난노:
그렇습니다.

슬픔은 반드시 직선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류시화:
파도처럼 올 수도 있겠군요.

조지 보난노:
그 비유를 사용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처음에는 파도가 너무 크고 자주 올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방식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특정한 날,

냄새,

노래,

장소가 다시 강한 감정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자동으로 실패라고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겠네요.

“아직도 슬퍼?”

크리스틴 네프:
그 질문에서 “아직도”라는 단어가 특히 아플 수 있습니다.

진행자:
왜요?

크리스틴 네프:
“정상이라면 이제 끝났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류시화가 말했다.

류시화:
사랑에는 종료일을 정하지 않으면서,

왜 슬픔에는 종료일을 정하려 할까요?

잠시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진행자가 물었다.

진행자:
그런데 여기서 저는 조금 더 어려운 경우를 묻고 싶습니다.

슬픔이 정말 삶을 멈추게 한다면요?

몇 년이 지나도 사람을 만나지 않고,

일도 할 수 없고,

하루 대부분을 침대에서 보내고,

살고 싶다는 마음까지 거의 없어졌다면.

그때도

“당신만의 슬픔 방식이니까 괜찮습니다”

라고 말해야 합니까?

조지 보난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조지 보난노:
아닙니다.

다양한 슬픔의 형태를 존중한다는 것과

심각한 고통을 방치하는 것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상실 이후 장기간 매우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도움과 지원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니까

“슬픔에는 시간표가 없다”

라는 말도 너무 단순하게 사용하면 안 된다.

조지 보난노:
맞습니다.

목표는 모든 반응을 정상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마다 다른 경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기능하고 있고,

얼마나 고통받고 있으며,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보는 것입니다.

크리스틴 네프:
그리고 도움을 받는 것이

“슬픔에 실패했다”

는 뜻도 아닙니다.

진행자:
좋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관계는 끝나는 겁니까?

조지 보난노가 진행자를 바라보았다.

진행자: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배우자가 죽은 뒤에도 말을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진 앞에서 이야기합니다.

“오늘 이런 일이 있었어.”

“우리 딸이 결혼했어.”

“당신이 있었으면 좋아했을 텐데.”

그건 놓지 못하는 겁니까?

류시화가 먼저 대답했다.

류시화: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관계의 형태는 바뀝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 삶에 남긴 흔적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행자:
하지만 실제로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류시화:
그렇습니다.

그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은 실제입니다.

그 사람과 예전처럼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의 관계는 물리적인 존재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지요.

진행자가 조용히 듣고 있었다.

류시화: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아버지가 했던 말을 기억하며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배우자가 좋아했던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친구에게서 배운 친절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없지만,

그 관계가 나에게 남긴 것들은 계속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놓아준다”는 말도 다시 생각해봐야겠네요.

류시화: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부터 물어야겠지요.

사람을?

사랑을?

기억을?

고통을?

함께 살았던 삶을?

그것들을 모두 한꺼번에 놓는 것이 가능할까요?

조지 보난노:
상실에 적응한다는 것을

고인을 잊는 것과 동일하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기억을 가지고도 현재의 삶에 다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가 물었다.

진행자:
그렇다면 새로운 사랑은요?

배우자가 죽은 뒤 몇 년이 지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것은 이전 배우자를 배신하는 겁니까?

수 존슨:
인간의 애착은 한 사람을 사랑했다고 해서

이후 모든 관계가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사랑이 이전 사랑을 삭제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행자: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그렇게 느껴질 수 있겠죠.

수 존슨:
물론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관계에는 새로운 사람뿐 아니라

떠난 사람의 기억도 어느 정도 함께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것을 무조건 경쟁 관계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류시화가 말했다.

류시화:
사랑은 언제나 이전 사랑을 지우면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요?

한 아이를 사랑한다고 다른 아이를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니듯,

인간의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관계의 흔적을 품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진행자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호수 위의 빛이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진행자:
그렇다면 치유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늘 계속 그 질문으로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슬픔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기억을 지우는 것도 아니고.

죽은 사람을 잊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지는 겁니까?

헤르만 헤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시적으로 답했을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지 보난노가 잠시 생각했다.

조지 보난노:
저는 치유라는 단어를 하나의 고정된 상태로 정의하는 데 조심스럽습니다.

사람들의 적응 방식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상실 이후에도 삶의 다른 영역들이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류시화가 그 말을 이어받았다.

류시화:
Part 1에서 우리는 방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슬픔이 방 전체를 차지합니다.

아침에도 슬픔.

점심에도 슬픔.

밤에도 슬픔.

그런데 어느 날 방에 다른 것이 하나 들어옵니다.

친구와 마신 차.

또 어느 날에는 음악.

또 어느 날에는 웃음.

또 어느 날에는 여행.

새로운 사람.

일.

아침빛.

슬픔은 여전히 방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방이 조금씩 커집니다.

진행자가 말했다.

슬픔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더 커지는 것.

류시화:
네.

진행자:
저는 그 문장이 좋습니다.

그런데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조심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이 슬픔 때문에 성장해야 한다는 뜻처럼 들릴 수도 있으니까요.

류시화: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은 반드시 우리를 성장시키지 않습니다.

어떤 고통은 그냥 고통입니다.

어떤 상실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진행자:
그러면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는 말은요?

류시화:
저는 그 말을 다른 사람의 고통 앞에서 쉽게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진행자:
“이 일을 겪었기 때문에 당신은 더 강한 사람이 될 겁니다.”

크리스틴 네프:
그것도 그 사람에게 또 하나의 의무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고통에서 성장까지 해야 하니까요.

진행자:
그러면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됩니까?

류시화가 웃었다.

류시화:
왜 슬픔까지 숙제로 만들어야 합니까?

진행자가 잠시 웃었다.

류시화:
어떤 사람은 고통 이후에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돕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소중한 변화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Topic 1에서 했던 구분과 비슷하군요.

“상처는 선물이다”가 아니라,

“상처 이후에 내가 무엇을 만들어갈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류시화: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두 문장을 구분하고 싶습니다.

“이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고통 이후에 내가 의미를 만들어갈 수도 있다.”

둘은 아주 다릅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밖에서는 저녁 새 한 마리의 소리가 들렸다.

진행자가 물었다.

진행자:
그렇다면 시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시를 모은 책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야기대로라면

시는 죽은 사람을 돌려줄 수도 없고,

상실을 없앨 수도 없고,

슬픔을 치료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가 정말 치유할 수 있습니까?

류시화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류시화:
시가 죽은 사람을 돌려보낼 수는 없습니다.

과거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눈물을 멈추게 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시가 모든 것을 치유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진행자:
그렇다면요?

류시화:
하지만 어떤 밤에 혼자 울고 있는 사람이

한 편의 시를 읽다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아, 나만 이런 것이 아니구나.”

진행자가 조용해졌다.

류시화:
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도 이별했습니다.

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전혀 다른 언어를 쓰던 사람도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사람이 남긴 몇 줄의 문장을 읽다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통은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진행자:
고독의 모양이 달라진다.

류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은 그대로일 수 있지만, 고독의 모양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크리스틴 네프:
그것은 자기연민에서 말하는 공통된 인간성의 감각과도 흥미롭게 연결됩니다.

고통받을 때 우리는 쉽게 생각합니다.

“왜 나만 이래?”

“다른 사람들은 잘 사는데 왜 나만?”

하지만 인간의 고통이 나만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 경험의 일부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고립감이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시와 심리학이 잠깐 만나는 지점이네요.

류시화:
아마 그렇겠지요.

같은 것을 말한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같은 인간을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진행자:
마지막으로 아주 개인적인 질문을 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먼저 죽는다면,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슬퍼했으면 좋겠습니까?

방 안에 작은 웃음이 생겼다.

진행자:
이상한 질문이지만 진지합니다.

한 달?

1년?

5년?

평생?

언제까지 슬퍼해야

“나를 충분히 사랑했다”

고 제가 만족할 수 있을까요?

조지 보난노가 미소를 지었다.

조지 보난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진행자는 잠시 생각했다.

진행자:
솔직히...

오래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잊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가끔 생각해줬으면 좋겠고,

사진도 봐줬으면 좋겠고,

제가 했던 바보 같은 이야기도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여행도 갔으면 좋겠고.

맛있는 것도 먹고.

사랑할 사람이 생기면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크리스틴 네프:
그렇다면 왜 떠난 사람도 당신에게 같은 것을 원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기 어려울까요?

진행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류시화가 말했다.

류시화: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가장 깊은 방법이

계속 아파하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과 함께 살며 배운 사랑을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것도

기억의 한 방식일 수 있습니다.

진행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진행자:
그러면 치유를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슬픔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있어도 삶 전체가 슬픔만은 아니게 되는 것.

류시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진행자:
그리고 행복해져도 됩니까?

조지 보난노:
네.

진행자:
웃어도 되고?

크리스틴 네프:
네.

진행자:
다시 사랑해도 되고?

수 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 존슨:
그럴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렇다고 떠난 사람을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 침묵 자체가 대답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진행자는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사진 속에는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렸다.

부모는 건강해 보였다.

누군가는 카메라를 보지도 않았다.

특별한 날처럼 보이지 않았다.

진행자가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말했다.

진행자:
이상합니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때는

아무도 이 순간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피곤했고,

아이들은 시끄러웠고,

누군가는 빨리 밥을 먹고 일어나고 싶었겠죠.

그런데 지금 보면...

이게 행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버트 에먼스가 사진을 바라보았다.

진행자가 그에게 물었다.

진행자:
왜 우리는 이런 것을 그때는 보지 못합니까?

왜 잃고 나서야

“그때가 행복했구나”

라고 말하는 걸까요?

창밖은 이제 완전히 저녁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이 조용히 시작되었다.

왜 우리는 가진 것보다 잃어버린 것을 더 크게 보는가?

Topic 3: 왜 우리는 가진 것보다 잃어버린 것을 더 크게 보는가?

식탁 위에는 오래된 가족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에는 가족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누군가는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카메라를 보지도 않았다.

아이 앞에는 먹다 남긴 음식이 있었고,

식탁 한쪽에는 치우지 않은 그릇이 쌓여 있었다.

특별한 날처럼 보이지 않았다.

생일도 아니었다.

크리스마스도 아니었다.

누군가 졸업한 날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평범한 저녁이었다.

진행자가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말했다.

진행자:
이 사진을 찍었을 때는 아무도

“지금 우리는 행복하다”

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이런 생각을 했겠죠.

“아이들이 너무 시끄럽다.”

“설거지는 누가 하지?”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빨리 먹고 쉬고 싶다.”

그런데 지금 보면...

진행자가 잠시 말을 멈췄다.

진행자:
이게 행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버트 에먼스가 사진을 바라보았다.

진행자:
왜 우리는 이런 것을 그때는 보지 못합니까?

로버트 에먼스:
인간은 자신에게 반복해서 주어지는 것에 익숙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특별했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의 일부가 됩니다.

좋은 집.

건강.

가족.

친구.

매일 마시는 커피.

누군가가 아침마다 건네는 인사.

처음에는 감사했던 것들이 점점 배경으로 물러납니다.

진행자:
그러니까 행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져서 안 보이게 되는 겁니까?

로버트 에먼스: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류시화가 사진을 들어 올렸다.

류시화: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지요.

매일 보는 얼굴.

매일 듣는 목소리.

매일 걷는 길.

그것들은 사라지고 나서 갑자기 선명해질 때가 있습니다.

진행자:
그게 참 불공평하게 느껴집니다.

있을 때는 모르고,

없어진 뒤에야 안다.

그럼 인간은 행복을 제대로 느끼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겁니까?

로버트 에먼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익숙해지는 능력 자체는 인간에게 필요합니다.

매 순간 모든 것을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강하게 느낀다면

일상생활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니까 익숙해지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로버트 에먼스:
그렇습니다.

문제는 익숙함이 가치 없음으로 바뀌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진행자가 사진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진행자:
건강도 그렇습니다.

아플 때는

“건강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다”

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건강해지면 몇 달 뒤에는

또 다른 불만이 생깁니다.

돈.

직장.

집.

누가 나보다 잘 사는지.

류시화:
없는 것은 크게 보이고,

있는 것은 배경이 됩니다.

진행자:
왜요?

로버트 에먼스:
우리의 주의는 부족한 것과 문제에 쉽게 끌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생존에 유용할 수 있습니다.

이미 안전한 것보다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현대의 삶에서는

그 경향이 계속해서

“아직 부족하다”

는 감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래서 우리는 계속 다음 것을 기다리는 겁니까?

돈이 조금 더 생기면.

좋은 집으로 옮기면.

아이들이 크면.

은퇴하면.

일이 덜 바빠지면.

그때 행복하겠다고.

류시화:
Part 1에서 우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종종 미래에 집을 짓고, 현재에는 임시로 삽니다.

진행자가 웃었다.

진행자:
그 문장은 아픕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그런 적이 많습니다.

현재는 준비 기간이고,

진짜 인생은 조금 뒤에 시작될 것처럼.

로버트 에먼스:
그런데 “조금 뒤”에 도착하면

인간은 새로운 기준에 다시 적응할 수 있습니다.

원했던 것을 얻어도

그것이 다시 일상이 됩니다.

그리고 또 다음 것을 찾습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감사가 그 문제를 해결합니까?

로버트 에먼스가 미소를 지었다.

로버트 에먼스:
“해결한다”는 말에는 조심하고 싶습니다.

진행자:
당신은 감사 연구로 유명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조금 공격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감사 일기를 쓰면 행복해집니까?

매일 밤

“오늘 감사한 것 세 가지”

를 적으면 되는 겁니까?

로버트 에먼스: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감사에 의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웰빙의 일부 측면과 연결될 수 있다는 연구는 있습니다.

하지만 감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치료제가 아닙니다.

진행자:
그러면 감사는 무엇입니까?

로버트 에먼스:
한 가지 방식으로 말하면,

내 삶에 존재하는 좋은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이 전적으로 나 혼자 만든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진행자:
전적으로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로버트 에먼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친구가 어려울 때 전화했습니다.

부모가 나를 도왔습니다.

낯선 사람이 문을 잡아주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을 다른 사람과 세계로부터 받으며 살아갑니다.

감사는 그것을 알아보는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류시화가 말했다.

류시화:
그러니까 감사는

“내 삶은 완벽하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군요.

로버트 에먼스:
그렇습니다.

진행자:
바로 그 부분을 묻고 싶었습니다.

감사라는 말을 저는 좋아하지만,

때로는 정말 싫어질 때도 있습니다.

방 안의 사람들이 진행자를 바라보았다.

진행자: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너무 쉽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건강한 것에 감사하세요.”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도 가족이 있잖아요.”

배우자가 죽었습니다.

“그래도 자녀들이 있잖아요.”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래도 다른 아이가 있잖아요.”

진행자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진행자:
그건 감사입니까?

아니면 고통을 조용히 하라는 말입니까?

로버트 에먼스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로버트 에먼스:
감사가 고통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크리스틴 네프: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에게

“당신은 감사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이 실제로 느끼는 감정 위에 또 하나의 판단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나는 슬퍼하면 안 된다.”

“나는 화내면 안 된다.”

“나는 가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나쁜 사람이다.”

진행자:
그러면 또 두 번째 상처가 생기는군요.

크리스틴 네프:
그렇습니다.

류시화가 천천히 말했다.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것이 아직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진행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류시화:
두 문장은 동시에 참일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정말 힘들다.”

그리고

“그래도 오늘 나에게 따뜻하게 전화해준 사람이 있었다.”

두 번째 문장이 첫 번째 문장을 지우지 않습니다.

로버트 에먼스:
바로 그것이 중요한 구분입니다.

감사가 현실의 부정적인 부분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진행자:
그러면 감사는

“나쁜 것을 보지 않는 것”

이 아니라

“나쁜 것만 보지 않는 것”

에 더 가깝습니까?

로버트 에먼스가 잠시 생각했다.

로버트 에먼스: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진행자는 메모장에 적었다.

감사는 나쁜 것을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만 보지 않는 것.

잠시 후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진행자:
하지만 여기에도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에게

“작은 것에 감사하세요.”

학대받는 사람에게

“그래도 배우자의 좋은 점을 생각하세요.”

불공정한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직장이 있는 것에 감사하세요.”

이런 식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크리스틴 네프: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감사가 현실의 문제를 바꾸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류시화:
감사는 불의에 침묵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진행자:
그러니까 감사와 체념은 다르다.

류시화:
네.

상황을 바꾸려고 하면서도

현재 존재하는 좋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행자는 오래된 가족사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진행자:
그런데 제가 이 사진을 아름답게 보는 이유가 정말 감사 때문일까요?

아니면 과거를 미화하고 있는 걸까요?

로버트 에먼스가 미소를 지었다.

진행자:
솔직히 이 저녁도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아이들은 싸웠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짜증을 냈을 수도 있고,

돈 걱정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으로 보면

완벽한 가족처럼 느껴집니다.

류시화:
기억은 사진과도 다릅니다.

우리는 과거 전체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장면을 선택하고,

그 장면에 현재의 감정을 다시 입힐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제가 그리워하는 과거는 실제 과거와 다를 수도 있다.

류시화:
그럴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게 왜 중요합니까?

류시화: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 자체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과거를 이용해 현재를 벌줄 때입니다.

진행자가 고개를 들었다.

류시화:
“그때는 행복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때의 당신도 걱정했고,

불평했고,

외로웠을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저는

과거의 하이라이트와

오늘의 평범한 하루를 비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류시화:
더 심하게는,

과거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과 오늘의 가장 피곤한 오후를 비교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가 웃었다.

진행자:
그건 오늘이 이길 수 없는 경기네요.

류시화:
그렇습니다.

로버트 에먼스가 사진을 가리켰다.

로버트 에먼스:
그리고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이 사진 속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젠가 이 순간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지금 같은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진행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진행자:
무슨 뜻입니까?

로버트 에먼스:
지금 당신에게 너무 익숙해서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들 가운데

20년 뒤 가장 그리워할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진행자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진행자:
그 질문은 조금 무섭습니다.

류시화:
왜 무섭습니까?

진행자:
갑자기 모든 것이 사라질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부모님.

배우자.

아이들.

친구들.

건강.

집.

심지어 제가 매일 걷는 길까지.

크리스틴 네프:
그렇다면 여기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현재를 소중히 여기기 위해

항상 상실을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행자:
맞습니다.

“이 사람이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까 오늘 사랑해라.”

그렇게 살면 오히려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류시화:
현재를 사랑하기 위해

매일 죽음을 위협처럼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행자:
그럼 어떻게 합니까?

류시화가 사진을 내려놓았다.

류시화:
가끔 깨어나는 것 아닐까요?

진행자:
가끔?

류시화:
네.

항상 모든 순간에 감사하고,

항상 현재에 집중하고,

항상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것도 또 하나의 완벽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크리스틴 네프가 웃었다.

크리스틴 네프:
“나는 오늘 충분히 감사하지 못했다.”

라는 새로운 자기비판이 생길 수도 있겠네요.

진행자:
그러네요.

감사까지 잘해야 하는 숙제가 된다.

류시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항상 깨어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평생 잠들어 있지는 않는 것.

진행자는 그 문장을 잠시 바라보듯 듣고 있었다.

진행자:
그럼 한번 해보죠.

지금 이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거창한 것은 말하지 마세요.

성공도,

업적도,

철학도 말고.

지금 여러분의 삶에 있지만

언젠가 사라진 뒤

아주 많이 그리워할 것 같은 평범한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침묵이 길었다.

크리스틴 네프:
누군가와 아무 목적 없이 마시는 차.

수 존슨: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방에 있다는 사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집 안 어딘가에 있다는 것.

진행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 대답이 예상보다 깊게 들어온 듯했다.

로버트 에먼스: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조지 보난노:
평범한 식사.

특별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그 식탁 자체가 기억나는 순간들.

류시화는 조금 늦게 말했다.

류시화:
아직 작별하지 않은 사람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진행자는 식탁 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진행자:
아직 작별하지 않은 사람들...

한참 뒤 진행자가 말했다.

진행자:
그러면 우리가 잃고 나서 깨닫는 것을

조금이라도 일찍 배울 방법이 있을까요?

류시화:
완벽하게는 어렵겠지요.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계속 익숙해질 테니까요.

하지만 가끔 멈출 수는 있습니다.

진행자:
그리고 무엇을 합니까?

류시화: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를 해보는 겁니다.

“지금 내 삶에 있지만, 언젠가 사라진 뒤 내가 그리워할 것은 무엇인가?”

진행자는 다시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진 속 과거가 아니라

방 안의 현재를 둘러보았다.

따뜻한 차.

젖은 나무 냄새.

창밖의 호수.

사람들의 얼굴.

저녁이 되어가는 빛.

진행자:
그러면 감사는

행복하다고 스스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로버트 에먼스:
어쩌면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다시 보는 연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진행자:
그리고 없는 것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로버트 에먼스:
그렇습니다.

진행자:
아픈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크리스틴 네프:
네.

진행자:
그렇다면 Part 1에서 했던 말로 돌아가도 될 것 같습니다.

잃고 나서 배운 것을, 아직 잃지 않은 것에게 사용하는 것.

류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류시화:
그것이면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진행자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다시 표정이 진지해졌다.

진행자: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처.

슬픔.

감사.

기억.

그런데 정말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이 모든 말이 무너질 때가 있잖아요.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진행자:
아이를 잃었습니다.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평생 함께할 줄 알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기도했는데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때 인간은

“감사해야지”

라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질문이 나옵니다.

진행자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호수 위로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진행자:
“왜?”

“왜 나에게?”

“왜 이 사람에게?”

그리고 믿는 사람이라면 결국...

왜 신은 이것을 허락했습니까?

케네스 파가먼트가 조용히 진행자를 바라보았다.

진행자가 물었다.

진행자:
인간은 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신을 찾습니까?

그리고 더 어려운 질문입니다.

신앙은 정말 사람을 치유합니까?

아니면 때로는

사람을 더 아프게 만들기도 합니까?

방 안의 불이 켜졌다.

창밖은 거의 어두워져 있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이 시작되었다.

고통 속에서 신을 찾는 것은 인간에게 무엇을 하는가?

Topic 4: 고통 속에서 신을 찾는 것은 인간에게 무엇을 하는가?

방 안의 불이 켜졌다.

창밖의 호수는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수면 위에 남아 있던 빛도 사라지고,

창문에는 방 안 사람들의 모습만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오래된 가족사진은 여전히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진행자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사진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진행자:
Part 1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더 불편하게 묻고 싶습니다.

사람은 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신을 찾습니까?

케네스 파가먼트가 진행자를 바라보았다.

케네스 파가먼트:
고통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흔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행자: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요?

케네스 파가먼트:
우리는 의식하든 하지 않든

삶에 대해 어떤 기본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세상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일이 돌아올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내일도 있을 것이다.

내 몸은 계속 작동할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어느 정도 결과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여기에 또 다른 믿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신은 나를 돌본다.

기도에는 의미가 있다.

내 삶에는 목적이 있다.

진행자:
그런데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케네스 파가먼트:
사건 하나만 무너지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을 이해하던 세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진행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자:
그러니까 사람이

“왜?”

라고 묻는 것은 단순히 사건의 원인을 묻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케네스 파가먼트:
그렇습니다.

때로는 이런 질문일 수 있습니다.

“내가 믿었던 세계는 어디로 갔는가?”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진행자:
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종교를 거의 생각하지 않던 사람도

병원에서는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리면 기도하고.

자녀가 아프면 기도하고.

죽음이 가까워지면 신을 찾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케네스 파가먼트:
종교와 영성은 인간에게 의미,

관계,

정체성,

희망,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다루는 방식 등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그런 자원이 더 중요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신앙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좋은 겁니까?

파가먼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케네스 파가먼트:
그렇게 단순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진행자:
왜요?

케네스 파가먼트:
종교와 영성은 사람을 지탱하는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와 관련된 갈등 자체가

또 하나의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예를 들면요?

케네스 파가먼트:
“신이 나를 버린 것 같다.”

“왜 신은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는가?”

“내가 벌을 받고 있는 것인가?”

“내 믿음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내가 신에게 화가 난다면 나는 나쁜 신자인가?”

이런 질문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진행자가 마지막 질문에서 멈췄다.

진행자:
그 질문을 해보죠.

신에게 화를 내도 됩니까?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진행자가 계속했다.

진행자: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몇 달 동안 배우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매일 기도했습니다.

교회 사람들도 기도했습니다.

가족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배우자는 죽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뒤 그 사람이 말합니다.

“나는 신에게 화가 납니다.”

그럼 믿음이 약한 겁니까?

케네스 파가먼트:
그런 반응 자체가 종교적 또는 영적 갈등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분노,

혼란,

버림받았다는 느낌,

의심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종교 공동체에서는 때때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신에게 화내면 안 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하세요.”

“감사하세요.”

크리스틴 네프:
그러면 슬픔 위에 또 하나의 판단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진행자:
또 두 번째 상처군요.

크리스틴 네프:
네.

“배우자가 죽어서 슬프다.”

거기에

“나는 신에게 화가 났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다.”

라는 고통이 더해질 수 있습니다.

류시화가 말했다.

류시화:
Part 1에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신에게 화가 난다는 것은

어쩌면 아직 신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화도 관계의 한 형태라는 겁니까?

류시화:
적어도 무관심과는 다를 수 있겠지요.

“왜 나를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라는 말 속에는

“당신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라는 문장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가 잠시 생각했다.

진행자:
그러면

“왜?”

라고 외치는 것도 기도가 될 수 있습니까?

류시화는 미소를 지었다.

류시화: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아주 경건한 기도는 아니네요.

류시화:
진실한 기도가 반드시 아름다운 문장일 필요가 있을까요?

방 안에 작은 웃음이 흘렀다.

진행자: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반대편에서 질문하겠습니다.

신앙이 실제로 사람을 더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까?

케네스 파가먼트:
그럴 수 있습니다.

종교적 믿음이나 해석이 죄책감,

두려움,

버림받았다는 감각,

공동체와의 갈등과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예를 들어

“내가 죄를 지어서 아이가 아픈 것이다.”

같은 생각입니까?

케네스 파가먼트:
그런 해석이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건 굉장히 잔인하네요.

크리스틴 네프:
특히 이미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게 된다면 그렇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종교 안에서는

“고난에는 뜻이 있다”

라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류시화가 진행자를 바라보았다.

진행자:
저는 그 말을 완전히 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그 말에서 힘을 얻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케네스 파가먼트:
그 점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신앙 안에서

“이 경험에도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라고 믿고,

그 믿음에서 힘을 얻는다면

그 사람의 의미 체계를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행자:
하지만 다른 사람이 말하면?

케네스 파가먼트:
그것은 매우 다르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진행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자:
예를 들어 장례식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에게 제가 가서

“걱정하지 마세요. 신에게는 계획이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진행자:
저는 위로하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 말이 상처가 될 수 있습니까?

크리스틴 네프:
그 사람의 고통을 너무 빨리 설명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류시화:
그리고 설명이 때로는 슬퍼할 공간을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설명이 슬픔을 빼앗는다?

류시화:
“다 이유가 있으니 받아들이세요.”

라는 말이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처럼 들릴 수도 있으니까요.

진행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진행자:
생각해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는 것을 오래 보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크리스틴 네프:
그럴 수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을 위해 설명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 사람의 고통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견디기 어려워서 설명을 서두를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진행자:
그건 조금 아픈 지적이네요.

“신에게는 계획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제가 침묵을 견디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류시화:
때로는 그렇겠지요.

항상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진행자:
그럼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아들을 잃은 친구 앞에 앉아 있습니다.

저도 이유를 모릅니다.

그 사람도 모릅니다.

신이 왜 허락했는지도 모릅니다.

무슨 말을 합니까?

류시화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짧게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 있을게.”

아무도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진행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행자:
Part 1에서도 그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케네스 파가먼트:
모든 영적 대처가 설명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관계,

공동체,

기도,

의식,

함께 있어주는 것 역시 중요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때로는 신학적 정답보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더 필요한가요?

류시화:
고통의 어떤 순간에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진행자가 물었다.

진행자:
그러면 이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고통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합니까?

어빈 얄롬이 처음으로 조금 자세를 바꾸었다.

하지만 아직 말하지 않았다.

파가먼트가 먼저 대답했다.

케네스 파가먼트:
사람들은 고통 이후 의미를 찾거나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고통에 우리가 발견해야 할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제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행자: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 죽음에

“이유가 있었다”

고 반드시 말해야 합니까?

류시화가 고개를 저었다.

류시화:
저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의미가 없습니까?

류시화:
그것도 제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진행자가 조금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진행자:
그럼 아무 답도 없잖아요.

류시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가 류시화를 바라보았다.

류시화:
우리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 두려워하는 것 아닐까요?

방 안에 긴 침묵이 흘렀다.

류시화:
저는 두 문장을 구분하고 싶습니다.

“이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고통 이후에 나는 어떤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진행자:
Topic 2에서도 나왔던 구분이군요.

류시화:
네.

첫 번째 문장은 고통 자체를 설명하려 합니다.

두 번째 문장은

이미 일어난 고통 이후에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묻습니다.

어빈 얄롬: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는 인간의 선택이 들어갑니다.

모두가 얄롬을 바라보았다.

진행자:
조금 더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어빈 얄롬:
우리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질병.

상실.

죽음.

타인의 선택.

우리는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는

다른 종류의 질문입니다.

진행자:
그런데 이것도 위험하지 않습니까?

“고통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꿔라.”

또 하나의 숙제처럼 들립니다.

어빈 얄롬:
그렇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고통을 성장으로 바꿔야 한다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크리스틴 네프:
어떤 날은 의미를 만드는 것보다

그냥 하루를 버티는 것이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그 문장이 좋습니다.

오늘은 의미를 찾지 않아도 된다.

크리스틴 네프:
네.

살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날도 있습니다.

진행자가 파가먼트를 바라보았다.

진행자:
이번에는 종교 공동체에 대해 묻겠습니다.

교회나 성당, 사찰 같은 공동체는

사람이 어려울 때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음식도 가져다주고,

함께 기도하고,

병원에 와주고,

장례식에서 함께 있어줍니다.

그런데 같은 공동체가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까?

케네스 파가먼트:
물론입니다.

종교 공동체는 강력한 사회적 지지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판단,

배제,

갈등,

죄책감의 원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예를 들어?

케네스 파가먼트:
누군가 의심을 표현했는데

“믿음이 부족하다”

고 판단받을 수 있습니다.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전문적인 도움 대신

“기도만 더 하라”

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공동체의 기대와 개인의 경험이 충돌할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종교 자체가 좋다, 나쁘다라고 말할 수 없는 거군요.

케네스 파가먼트:
그렇게 단순화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종교와 영성이

그 사람의 삶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진행자가 물었다.

진행자:
그럼 믿지 않는 사람은요?

오늘 대화가 신앙을 가진 사람만을 위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고통 속에서 무엇을 붙잡습니까?

어빈 얄롬이 대답했다.

어빈 얄롬:
의미가 반드시 종교에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관계.

사랑.

창조.

일.

자녀.

친구.

예술.

진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

자신보다 더 큰 어떤 목적.

사람은 여러 곳에서 의미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신앙이 없는 사람의 삶도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다.

어빈 얄롬:
물론입니다.

류시화가 덧붙였다.

류시화:
그리고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사랑하는가?”

“왜 잃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진행자:
그렇다고 모든 종교가 같은 말을 한다는 뜻은 아니죠?

류시화:
아닙니다.

그 차이를 지워서는 안 됩니다.

신에 대한 이해도 다르고,

인간에 대한 이해도 다르고,

구원과 죽음 이후에 대한 가르침도 다릅니다.

그 차이는 존중해야 합니다.

케네스 파가먼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이 궁극적인 문제들과 씨름한다는 공통점을 볼 수는 있습니다.

류시화가 말했다.

같은 답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같은 질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는 잠시 그 문장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진행자:
그러면 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종교 안에 있습니까?

삶 속에 있습니까?

류시화가 웃었다.

류시화:
저에게 그 질문의 정답을 요구하지 마세요.

방 안에 웃음이 흘렀다.

진행자:
Part 1에서는 시인들에게 물었으니

이번에는 심리학자에게 묻겠습니다.

파가먼트 박사님.

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파가먼트도 웃었다.

케네스 파가먼트:
그것은 심리학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진행자:
드디어 심리학이 모른다고 말하는군요.

케네스 파가먼트:
아주 중요한 “모른다”입니다.

심리학은 사람들이 신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신앙이 사람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종교적 대처가 고통과 웰빙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연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이 존재하는가,

신의 본질이 무엇인가,

죽음 이후 무엇이 있는가를

심리학 실험으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진행자:
그 구분이 굉장히 중요하네요.

케네스 파가먼트:
네.

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 질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과학의 실패가 아닙니다.

범위의 문제입니다.

류시화가 말했다.

류시화:
그리고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는 신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시는 질문을 살아 있게 만들 수 있을 뿐입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결국 신에 대한 답을 하나도 얻지 못했네요.

류시화:
그렇습니까?

진행자가 생각했다.

진행자:
적어도 이것은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신에게 화가 났다고 해서

반드시 믿음이 끝난 것은 아니다.

고통에 이유를 붙이지 않아도 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너무 빨리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믿지 않는 사람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진행자가 잠시 멈췄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 있을게.”

그 말이 답보다 더 필요할 수도 있다.

류시화:
네.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호수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창문에는 방 안 사람들의 얼굴만 비쳤다.

진행자가 그 얼굴들을 바라보다 말했다.

진행자: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계속 의미를 찾습니다.

상처의 의미.

슬픔의 의미.

감사의 의미.

신의 의미.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내 삶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런데...

진행자는 어빈 얄롬을 바라보았다.

진행자:
답을 찾다가 인생이 끝나버리면 어떡합니까?

얄롬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진행자:
저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으니까 나중에.

아직 돈이 부족하니까 나중에.

아직 준비가 안 됐으니까 나중에.

아직 두려우니까 나중에.

아직 신에 대한 답을 모르니까 나중에.

그렇게 계속 기다립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의사가 말합니다.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1년입니다.”

진행자는 잠시 침묵했다.

진행자:
그 순간,

우리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질문들은 어떻게 바뀝니까?

얄롬이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어빈 얄롬:
아마 먼저 이런 질문을 해야겠지요.

당신은 왜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무한한 것처럼 살고 있었습니까?

방 안이 조용해졌다.

밤은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이 시작되었다.

죽음을 의식하면 정말 더 잘 살게 되는가?

Topic 5: 죽음을 의식하면 정말 더 잘 살게 되는가?

밤은 깊어져 있었다.

창밖의 호수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유리창에는 방 안의 불빛과 사람들의 얼굴만 희미하게 비쳤다.

누군가는 차를 다시 따랐고,

누군가는 오래된 가족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진행자는 어빈 얄롬이 조금 전 던진 질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은 왜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무한한 것처럼 살고 있었습니까?

한참 뒤 진행자가 입을 열었다.

진행자:
그 질문은 조금 불공평합니다.

얄롬이 웃었다.

어빈 얄롬:
왜 그렇습니까?

진행자:
우리는 죽는다는 것을 압니다.

저도 압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나는 죽는다.”

라고 생각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어빈 얄롬:
맞습니다.

진행자:
매일 죽음을 생각하면 오히려 미칠 것 같습니다.

차를 운전하면서

“언젠가 죽는다.”

아침을 먹으면서

“이것이 마지막 식사가 될 수도 있다.”

배우자가 집을 나가면서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렇게 살면 현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계속 불안해지는 것 아닙니까?

어빈 얄롬:
죽음을 의식하는 것과

죽음에 사로잡히는 것은 다릅니다.

진행자:
어떻게 다릅니까?

어빈 얄롬: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 죽음을 잊는 능력도 필요합니다.

내일이 있을 것이라고 어느 정도 믿어야

나무를 심을 수 있고,

아이를 키울 수 있고,

책을 쓸 수 있고,

몇 년 뒤를 계획할 수도 있습니다.

류시화가 말했다.

류시화:
그러니까 죽음을 잊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군요.

어빈 얄롬:
그렇습니다.

문제는 죽음을 완전히 잊은 채

시간이 무한한 것처럼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진행자:
그러면 어느 정도 기억하고,

어느 정도 잊어야 한다?

어빈 얄롬:
어쩌면 인간은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진행자가 잠시 생각했다.

진행자:
그럼 구체적으로 해보죠.

제가 오늘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가 말합니다.

“남은 시간이 약 1년입니다.”

제가 제일 먼저 무엇을 바꿀 것 같습니까?

어빈 얄롬:
제가 대답하기보다 당신이 대답해보시죠.

진행자가 웃었다.

진행자:
또 저한테 돌리시는군요.

어빈 얄롬:
당신의 삶이니까요.

진행자는 잠시 침묵했다.

진행자:
아마 일을 조금 덜 할 것 같습니다.

가족에게 더 자주 전화할 것 같고.

보고 싶은 사람을 보러 갈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화가 나 있던 사람에게...

진행자가 잠시 멈췄다.

진행자:
글쎄요.

용서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라이아가 웃었다.

오라이아 마운틴 드리머:
그것도 정직한 대답이네요.

진행자:
하지만 적어도 남은 시간을

그 사람을 미워하는 데 그렇게 많이 쓰고 싶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류시화:
그것은 용서와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군요.

진행자:
네.

Topic 1에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미워하는 데 내 남은 시간을 쓰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돌아가지는 않겠습니다.”

오라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이아:
죽음이 경계선을 없애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진행자:
그것도 중요하네요.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모두와 화해하세요.”

그것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오라이아:
그렇습니다.

안전하지 않은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좋은 죽음을 준비하는 조건은 아닙니다.

진행자가 계속 말했다.

진행자:
그리고 아마...

사랑한다고 더 많이 말할 것 같습니다.

보고 싶다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크리스틴 네프:
왜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진행자가 웃었다.

진행자: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방 안에 작은 웃음이 흘렀다.

그러나 곧 다시 조용해졌다.

진행자:
왜일까요?

아마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다음 주에 전화하면 되고.

다음 달에 만나면 되고.

내년에 여행하면 되고.

언젠가 미안하다고 하면 되고.

류시화가 말했다.

류시화:
“언젠가”라는 말은 참 이상합니다.

진행자:
왜요?

류시화:
달력에는 그런 날짜가 없으니까요.

진행자가 웃었다.

류시화:
월요일도 있고,

화요일도 있고,

9월 19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라는 날짜는 없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을 거기에 많이 예약해두는군요.

류시화:
그렇습니다.

어빈 얄롬이 말했다.

어빈 얄롬:
죽음을 의식하는 것은

그 “언젠가”를 의심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여기서 조심하고 싶습니다.

이런 대화를 하면 보통 결론이 똑같아집니다.

“인생은 짧다.”

“꿈을 좇아라.”

“직장을 그만둬라.”

“세계여행을 떠나라.”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라.”

저는 그 결론으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어빈 얄롬:
저도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왜요?

어빈 얄롬:
죽음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삶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류시화가 미소를 지었다.

류시화: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
반대요?

류시화:
Topic 3에서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했습니까?

오래된 가족사진.

평범한 저녁 식사.

누군가 다른 방에 있다는 사실.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

아무 목적 없이 함께 마시는 차.

진행자가 사진을 바라보았다.

류시화:
우리가 나중에 가장 그리워하는 것이

항상 가장 특별했던 날은 아니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특별하게 살아라”

가 아니라...

류시화:

평범한 삶을 너무 하찮게 여기지 말라.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진행자:
그렇다면 버킷리스트는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100가지.

좋은 생각 아닙니까?

어빈 얄롬:
물론 즐거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또 다른 성과표가 될 때입니다.

진행자:
죽는 것까지 잘해야 한다?

어빈 얄롬: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아직 37개밖에 못 했다.”

“다른 사람들은 더 많은 나라를 여행했다.”

“내 인생은 충분히 특별하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성찰조차

비교와 성취의 문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크리스틴 네프:
그리고 마지막에는 또 자기비판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인생도 제대로 살지 못했어.”

진행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진행자:
그 말은 무섭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자기 인생에 점수를 매기는 것.

류시화:
누가 그 점수를 매깁니까?

진행자:
아마 자기 자신이겠죠.

류시화:
그리고 무엇을 기준으로요?

방문한 나라의 수?

번 돈?

쓴 책?

성공한 자녀?

받은 박수?

진행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빈 얄롬: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더 많은 것을 하라는 명령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오히려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를 다시 보게 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죽음이 말하는 것은

“서둘러라”

가 아닐 수도 있다.

어빈 얄롬:
그렇습니다.

류시화가 말했다.

어쩌면 죽음은 “서둘러라”보다
“우선순위를 잘못 정하지 마라”라고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진행자는 그 문장을 메모했다.

진행자:
그럼 후회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사람들은 흔히

“후회 없는 삶을 살아라”

라고 말합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어빈 얄롬이 고개를 조금 저었다.

어빈 얄롬:
완전히 후회가 없는 삶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을 합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가능성을 포기합니다.

실수도 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하지 못한 일도 생깁니다.

상처를 주기도 하고,

기회를 놓치기도 합니다.

진행자:
그러면 죽기 전에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지 못해도 실패한 인생은 아니다.

어빈 얄롬:
물론입니다.

크리스틴 네프:
오히려 자신의 과거를 지금의 지혜만으로 심판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진행자:
그게 무슨 뜻입니까?

크리스틴 네프:
60세의 내가

30세의 나를 보면서 말합니다.

“왜 그때 그런 선택을 했지?”

하지만 30세의 나는

60세의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때 가진 경험,

두려움,

정보,

환경 속에서 선택했습니다.

류시화가 말했다.

류시화:
우리는 과거의 자신에게

현재의 답안지를 들고 가서 채점할 때가 있습니다.

진행자가 웃었다.

진행자:
그것도 불공평한 시험이네요.

류시화:
그렇습니다.

과거를 책임지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잘못했다면 인정하고,

가능하면 사과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꿔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생 다시 재판한다고 해서

과거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다시 이 문장으로 돌아가는군요.

잃고 나서 배운 것을, 아직 잃지 않은 것에게 사용하는 것.

류시화:
네.

후회도 그렇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예를 들면?

류시화:
부모님과 충분히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면,

그 후회를 가지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 전화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어렸을 때 너무 일만 했던 것을 후회한다면,

지금 그 자녀의 이야기를 더 오래 들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된다면,

아직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과거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배운 것을 현재로 가져온다.

류시화:
그렇습니다.

진행자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밤이었다.

하지만 아주 먼 수평선 한쪽의 검은색이 조금 옅어져 있었다.

진행자:
그런데 우리가 계속

“현재를 살아라”

라고 말하고 있잖아요.

저는 그것도 조금 의심하고 싶습니다.

미래를 준비하지 말라는 겁니까?

저축도 하지 말고?

계획도 세우지 말고?

아이들 대학도 생각하지 말고?

노후도 준비하지 말고?

어빈 얄롬:
그런 뜻은 아닙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현재의 삶의 일부입니다.

류시화: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내일이 올 것처럼 계획하고,
영원히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

진행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자:
그 균형이 좋네요.

잠시 후 진행자가 모든 사람을 둘러보았다.

진행자:
오늘 우리가 어디서 시작했는지 기억하십니까?

Topic 1.

상처였습니다.

수 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자:
우리는 물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다시 사랑할 수 있는가?

그리고 알게 됐습니다.

상처를 지워야 다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잊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진행자는 크리스틴 네프를 바라보았다.

진행자:
그리고 상처받은 뒤

나까지 나의 적이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크리스틴 네프:
네.

진행자:
Topic 2에서는 슬픔을 이야기했습니다.

조지 보난노를 바라보았다.

진행자:
슬픔에는 하나의 정상적인 시간표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빨리 웃는다고 사랑이 얕은 것도 아니고,

오래 슬퍼한다고 약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조지 보난노:
그렇습니다.

진행자:
그리고 이런 문장을 얻었습니다.

슬픔이 남아 있다는 것과 삶이 멈춰 있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진행자는 식탁 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진행자:
Topic 3에서는 감사와 현재를 이야기했습니다.

없는 것만 바라보다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잃고 나서야 알아보는 인간에 대해서요.

그리고...

잃고 나서 배운 것을, 아직 잃지 않은 것에게 사용한다.

이번에는 파가먼트를 바라보았다.

진행자:
Topic 4에서는 신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신이 어디에 있는지 답하지 못했습니다.

신이 왜 고통을 허락하는지도 답하지 못했습니다.

케네스 파가먼트:
네.

진행자:
그런데 답을 모르는 것도 하나의 정직한 대답일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 있을게.”

라는 말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도요.

마지막으로 얄롬을 바라보았다.

진행자:
그리고 지금 우리는 죽음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상처,

슬픔,

감사,

신,

죽음.

처음에는 전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의 질문처럼 느껴집니다.

어빈 얄롬:
어떤 질문입니까?

진행자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삶이 완전해질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진행자가 계속했다.

진행자:
상처가 다 나으면 사랑하겠다.

슬픔이 끝나면 행복하겠다.

돈이 충분해지면 살겠다.

아이들이 크면 내 삶을 시작하겠다.

신에 대한 답을 찾으면 평안해지겠다.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면 자유롭게 살겠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완전히 해결되는 날이 정말 옵니까?

어빈 얄롬:
아마 많은 것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을 것입니다.

진행자:
그러면 우리는 언제 삽니까?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의 수평선이 아주 조금 밝아지고 있었다.

류시화가 천천히 말했다.

류시화:
오늘이지요.

진행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류시화:
답을 다 얻은 뒤가 아니라.

상처가 모두 사라진 뒤가 아니라.

슬픔이 끝난 뒤가 아니라.

완벽한 사람이 된 뒤가 아니라.

오늘입니다.

진행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책의 제목을 천천히 읽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웃었다.

진행자:
Part 1을 시작했을 때는 이 제목이 조금 잔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으니까요.

류시화:
지금은 어떻게 들립니까?

진행자는 생각했다.

진행자:
이제는 이렇게 들립니다.

상처를 잊으라는 말이 아니라.

상처가 없었다고 거짓말하라는 것도 아니라.

다시 순진해지라는 것도 아니라.

상처받았다는 사실에게
앞으로의 삶 전체를 결정할 권한까지 주지는 말라.

류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자:
그러면 우리가 Part 1에서 바꿨던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사랑할 수 있는가?”

아니요.

그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진행자가 천천히 말했다.

“상처받은 나를 데리고도, 그래도 사랑할 수 있는가?”

수 존슨이 말했다.

수 존슨:
그것이 더 인간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슬픔도 데리고?

조지 보난노:
그럴 수 있습니다.

진행자:
후회도 데리고?

크리스틴 네프:
네.

진행자:
신에 대한 의심도?

케네스 파가먼트:
그 질문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행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어빈 얄롬이 미소를 지었다.

어빈 얄롬:
인간이라면 아마 어느 정도는요.

진행자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두웠다.

하지만 이제 분명히 새벽이 오고 있었다.

진행자:
그러면 치유란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누구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방 안 전체에 질문을 던졌다.

잠시 후 류시화가 말했다.

치유란 상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진행자가 조용히 되풀이했다.

진행자:
상처와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

류시화가 계속했다.

상처가 있어도 삶 전체가 상처만은 아니게 되는 것.

슬픔이 있어도 삶 전체가 슬픔만은 아니게 되는 것.

의심이 있어도 삶 전체가 의심만은 아니게 되는 것.

두려움이 있어도 삶 전체가 두려움만은 아니게 되는 것.

그리고 잠시 후,

Part 1부터 계속 따라왔던 문장을 마지막으로 말했다.

슬픔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더 커지는 것.

창밖으로 첫 새벽빛이 호수 위에 닿기 시작했다.

어둠은 아직 남아 있었다.

나무도,

호수도,

젖은 땅도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풍경은 달라져 있었다.

어둠 속에 빛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진행자가 말했다.

진행자: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찾고 있던 이미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유된 삶에는 어둠이 없는 것이 아니라...

류시화가 말을 이었다.

류시화: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것.

긴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아무도 그 침묵을 채우려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진행자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전문가들에게가 아니었다.

독자에게였다.

당신이 치유되었다고 말하기 위해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상처입니까?

슬픔입니까?

후회입니까?

두려움입니까?

신에 대한 질문입니까?

과거입니까?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을 남겼다.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당신의 삶이 더 커질 수 있다면 어떨까요?

호수 위로 아침빛이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열었다.

밤새 내린 비 냄새와 차가운 아침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진행자는 마지막으로 아주 조용히 말했다.

삶이 완전해진 뒤에 사랑할 것입니까?

아니면 불완전한 이 삶을 지금 사랑할 것입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은 대답을 듣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각자가 살아가면서 대답해야 할 질문이었다.

마지막 글

치유란 상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크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 대화를 시작할 때 우리는 치유를 하나의 도착점처럼 생각했습니다.

상처가 없어지고,

슬픔이 끝나고,

과거를 놓아주고,

신에 대한 답을 얻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극복하면

그때 비로소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다섯 번의 대화를 지나면서 조금 다른 그림이 나타났습니다.

사랑의 상처는 미래의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가 미래의 모든 관계에 대한 판결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상처는 기억일 수 있지만, 미래의 운명은 아닙니다.

슬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빨리 웃는다고 사랑이 얕았던 것도 아니고,

오래 슬퍼한다고 약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슬픔을 얼마나 빨리 없애느냐가 아니라,

슬픔과 함께 삶이 다시 움직일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슬픔이 남아 있다는 것과 삶이 멈춰 있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감사에 대해서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감사는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좋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좋은 것이 아직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는 것.

그리고 잃은 것을 그리워하면서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잃고 나서 배운 것을, 아직 잃지 않은 것에게 사용한다.

신과 의미에 대한 대화에서는 가장 어려운 사실을 만났습니다.

어떤 질문에는 우리가 원하는 답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설명을 서두르는 대신,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 있을게.”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한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바라보았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무조건 서두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더 많은 목표를 이루고,

더 특별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정말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가?

우리가 나중에 가장 그리워할 것은 거대한 성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함께 먹던 저녁.

다른 방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평범한 전화 한 통.

아직 작별하지 않은 사람들.

그렇다면 치유는 상처 이전의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미 사랑했고,

이미 상처받았고,

이미 잃었고,

이미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란 상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Part 1과 Part 2를 관통하는 한 문장으로 돌아갑니다.

슬픔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더 커지는 것.

어둠이 사라져야 아침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새벽에는 아직 어둠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인간의 삶도 그와 비슷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이 치유되었다고 말하기 위해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당신의 삶이 더 커질 수 있다면 어떨까요?

Short Bios:

류시화 | 시인·작가·번역가

한국의 시인이자 작가, 번역가입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을 통해 여러 시대와 문화의 시를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연구자가 아니라, 심리학이 놓칠 수 있는 인간 경험의 언어를 계속 질문하는 역할을 합니다.

수 존슨 | 애착과 사랑

임상심리학자이자 정서중심치료(EFT)의 주요 개발자입니다. 가까운 관계에서 애착, 정서적 안전감, 관계의 상처와 회복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왔습니다.

크리스틴 네프 | 자기연민

심리학자이자 자기연민 연구의 대표적인 연구자입니다. 고통과 실패의 순간에 자신을 공격하는 대신 자기친절, 공통된 인간성, 마음챙김을 통해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을 연구해왔습니다.

조지 보난노 | 슬픔과 회복탄력성

심리학자이자 상실, 외상, 슬픔과 회복탄력성을 연구해온 학자입니다. 인간이 상실 이후 반드시 하나의 동일한 회복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연구해왔습니다.

로버트 에먼스 | 감사와 행복

심리학자이자 감사 연구로 널리 알려진 연구자입니다. 감사가 인간의 웰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연구하면서, 감사가 단순한 긍정적 사고와 어떻게 다른지도 탐구해왔습니다.

케네스 파가먼트 | 종교와 영적 대처

심리학자로서 종교, 영성, 스트레스와 대처를 오랫동안 연구했습니다. 신앙이 인간에게 힘이 되는 경우뿐 아니라 신에 대한 분노, 의심, 종교적 갈등이 인간의 고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연구해왔습니다.

어빈 얄롬 | 죽음과 삶의 의미

정신과 의사이자 실존심리치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죽음, 자유, 고립, 의미와 같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를 탐구해왔습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죽음을 공포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지를 되묻는 역할을 합니다.

진행자 | 평범한 현대인

전문가가 아닙니다.

사랑했고,

상처받았고,

사람을 잃었고,

후회했고,

신에게 질문했고,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한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에게 계속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론은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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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문학, 심리학 Tagged With: 가상 대화, 감사, 류시화, 사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삶의 의미, 상실, 상처, 슬픔, 신앙, 심리학, 애도, 애착, 영성, 자기연민, 죽음, 치유, 행복, 현재를 살다, 힐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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