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박경리의 『토지』는 오래전 한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집을 잃은 사람은 집만 잃는 것일까요.
한 세대가 겪은 상처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으로 남을까요.
역사책에 이름 한 줄 남지 않은 사람들의 삶은 정말 역사 밖에 있었던 것일까요.
땅은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재산일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살아온 시간을 품고 있는 장소일까요.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인간은 어떻게 다시 다음 날을 시작할까요.
앞선 두 개의 대화에서 『토지』의 인물들과 전문가들은 땅, 복수, 한, 기억, 역사, 사랑, 치유 그리고 생명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Part 3에서는 그 질문들을 오늘의 한국으로 옮깁니다.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
한 가족 안에 남겨진 식민지 시대의 기억.
수십 년 동안 노동자들에게 밥을 해 온 조선소 식당.
개발을 앞둔 시골의 마지막 논.
그리고 하루아침에 삶의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사람.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하나의 질문이 흐릅니다.
인간은 잃어버린 것을 모두 되찾은 뒤에야 다시 살아갈 수 있는가.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돌아오지 않는 것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과거의 집도, 사라진 마을도, 지나간 시대도 그대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때때로 그 자리에서 다시 무언가를 시작합니다.
집에 사람을 초대하고,
아이에게 기억은 남기되 미움까지 물려주지 않고,
이름 없던 사람들의 얼굴을 벽에 올리고,
오래된 논에 새로운 모를 심고,
누군가에게 한 그릇의 밥을 건넵니다.
이 다섯 이야기는 거대한 영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음 날을 만들어 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Story 1: 아버지의 집을 되찾은 날

김도현은 계약서 마지막 장에 서명한 뒤에도 한동안 펜을 놓지 못했다.
부동산 중개인이 환하게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이 집은 고객님 겁니다.”
그 말이었다.
스무 해 넘게 기다린 말.
어릴 때부터 마음속에서 수백 번 상상했던 말.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도 듣고 싶었고,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더 듣고 싶었던 말.
이제 이 집은 당신 것입니다.
그런데 도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기쁨도 없었다.
안도도 없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분명 같은 주소였다.
같은 동.
같은 층.
같은 방향.
그런데 창밖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릴 때 놀던 작은 놀이터 자리에는 유리 외벽의 고층 건물이 올라가 있었다.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며 내려다보던 낡은 상가는 사라졌다.
베란다 옆 화분을 놓았던 자리는 확장 공사로 벽이 되어 있었다.
도현은 천천히 손을 뻗어 벽을 만졌다.
그 벽 너머 어딘가에,
예전에는 아버지의 방이 있었다.
도현이 열네 살이던 해였다.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졌다.
처음에는 부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평소보다 더 자주 설거지를 했고, 아버지는 밤늦게까지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낯선 남자들이 집에 찾아왔다.
벨을 길게 눌렀다.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는 불을 끄고 아이들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했다.
도현은 그때 처음 알았다.
집이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어느 비 오는 오후, 아버지는 가족을 거실에 불러 앉혔다.
“이사를 가야겠다.”
그 말 한마디였다.
도현은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왜?”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고개를 숙였다.
여동생 수진은 울기 시작했다.
도현은 울지 않았다.
대신 화가 났다.
아버지에게.
사업에.
문을 두드리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집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이사하던 날, 그는 자기 방 문틀에 새겨 둔 키 표시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초등학교 3학년.
5학년.
중학교 1학년.
연필 자국 옆에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삿짐센터 직원이 말했다.
“학생, 이제 가야지.”
도현은 문틀에서 손을 떼었다.
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다시 올 거야.
그날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사 뒤에도 가끔 그 집 이야기를 했다.
술을 조금 마신 밤이면 더 자주 했다.
“거기 베란다 기억나냐?”
“너희 엄마가 처음 에어컨 사자고 난리쳤던 것도 그 집이었지.”
“수진이가 거실에서 자전거 타다가 장식장 깨먹은 것도.”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는 늘 비슷한 말을 했다.
“언젠가 다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다시 그 집에 살지 못했다.
사업 실패 이후 그는 작은 일을 전전했다.
돈이 조금 모이면 또 무언가를 시작했다.
잘되지 않았다.
점점 말수가 줄었다.
그리고 쉰일곱 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이 끝난 날 밤, 도현은 혼자 차 안에 앉아 있었다.
휴대전화로 그 아파트 시세를 검색했다.
가격을 본 뒤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그때 마음속으로 말했다.
아버지, 내가 살게요.
그 순간부터 집은 집이 아니었다.
목표가 되었다.
도현은 열심히 일했다.
남들보다 먼저 출근했다.
늦게 퇴근했다.
회사에서 기회가 생기면 잡았다.
직장을 옮겼다.
연봉이 올랐다.
스톡옵션을 받았다.
투자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마흔두 살에 이혼했을 때도 그는 일을 쉬지 않았다.
전처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있었다.
“당신은 항상 어딘가로 돌아가려고만 해.”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도현은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 가고 있다고.
더 높은 직책.
더 많은 돈.
더 좋은 차.
그리고 언젠가 그 집.
그런데 지금,
마흔여섯 살의 그는 마침내 그 집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며칠 뒤, 수진이 왔다.
“진짜 샀네.”
현관에 들어온 여동생은 신발을 벗지도 않고 잠시 주변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놀랄 줄 알았다.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기 기억나지?”
수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잘 모르겠어.”
도현은 웃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몇 년을 살았는데.”
“구조가 다 바뀌었잖아.”
“그래도 여기야.”
“주소는 그렇지.”
도현의 표정이 굳었다.
“주소는 그렇다니?”
수진은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오빠, 아빠 방 어디 있었어?”
도현이 벽을 가리켰다.
“저쪽.”
“엄마 화장대는?”
“안방.”
“내가 장식장 깬 곳은?”
도현은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수진이 조용히 말했다.
“없잖아.”
“그래도 같은 집이야.”
수진이 오빠를 바라보았다.
“오빠는 정말 이 집이 그리웠어?”
도현은 짜증이 났다.
“그럼 내가 왜 샀겠어?”
“모르겠어.”
“아빠가 얼마나 다시 오고 싶어 했는지 너도 알잖아.”
“알아.”
“그런데?”
수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말했다.
“오빠는 이 집을 그리워한 게 아니야.”
도현의 얼굴이 굳었다.
“뭔 소리야?”
수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빠 사업 망하기 전의 우리를 그리워한 거야.”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진은 계속했다.
“아빠가 아직 아빠 같았던 때.”
“엄마가 늘 걱정하지 않았던 때.”
“오빠가 돈 생각 안 하던 때.”
도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해.”
“오빠.”
“그만하라고.”
수진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신발을 다시 신었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돌아보며 말했다.
“집을 산 건 잘했어.”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근데 여기서 다시 살아야 해.”
문이 닫혔다.
그날 밤 도현은 불을 모두 끄고 거실에 앉았다.
아파트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가구는 거의 없었다.
이사도 아직 하지 않았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았다.
예전에 아버지 방이 있었던 곳이었다.
도현은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기침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신문 넘기는 소리.
야구 중계.
어머니가 거실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
수진이 웃는 소리.
열네 살의 자신이 방문을 세게 닫는 소리.
눈을 뜨자 아무것도 없었다.
흰 벽뿐이었다.
도현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버지 사진을 찾았다.
장례식 전에 찍힌 마지막 사진이 아니었다.
오래된 사진.
그 집 거실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아버지는 젊었다.
머리숱도 많았다.
엄마는 웃고 있었다.
수진은 초등학생이었다.
그리고 도현 자신은 아버지 옆에서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 밖으로 말했다.
“아버지.”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
그는 다시 말했다.
“아버지, 샀어요.”
잠시 기다렸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도현의 목이 막혔다.
“진짜 샀어요.”
이번에는 웃음 같은 것이 조금 섞였다.
“아버지가 다시 오고 싶어 했던 집.”
그는 벽을 바라보았다.
“샀어요.”
긴 침묵.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없네요.”
그 순간 무언가가 무너졌다.
도현은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동안 울지 않았던 모든 날이 한꺼번에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버지 장례식에서도 제대로 울지 않았다.
사업이 무너졌을 때도.
집을 떠날 때도.
이혼할 때도.
늘 다음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마지막 목표까지 이루고 나니,
숨을 곳이 없었다.
그는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인정했다.
그가 되찾으려 했던 것은 이 집이 아니었다.
이 집을 잃기 전의 세상 전체였다.
그 세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몇 주 동안 도현은 아파트에 거의 가지 않았다.
팔아 버릴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상했다.
스무 해 넘게 원한 것을 얻자마자 다시 버리는 것 같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 수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 해?”
“집.”
“어느 집?”
도현은 잠시 웃었다.
“그 집.”
수진도 조금 웃었다.
“애들이 서울 가고 싶대.”
“그래?”
“응.”
침묵.
도현이 먼저 말했다.
“그럼 와.”
“어디로?”
“여기로.”
수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은 괜히 말을 덧붙였다.
“밥이나 먹게.”
“오빠가 해?”
“시키지.”
수진이 웃었다.
“그건 인정.”
그날 저녁, 아파트에는 처음으로 사람 냄새가 났다.
배달 음식 상자가 식탁 위에 쌓였다.
수진의 남편이 맥주를 열었다.
아이들은 방을 뛰어다녔다.
도현은 처음에는 신경이 쓰였다.
새 바닥에 발자국이 생겼다.
소파 위에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그러다가 조카가 주스를 엎었다.
빨간 액체가 바닥을 따라 번졌다.
도현이 벌떡 일어났다.
“야!”
아이가 얼어붙었다.
수진도 순간 조용해졌다.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바닥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상하게 아버지가 떠올랐다.
수진이 장식장을 깨던 날.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다.
그날 밤엔 또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도현은 천천히 앉았다.
“휴지 가져와.”
조카가 겁먹은 얼굴로 휴지를 가져왔다.
도현은 아이와 같이 바닥을 닦았다.
“삼촌 화났어?”
도현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조금.”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도현은 웃었다.
“근데 괜찮아.”
아이는 다시 뛰어갔다.
수진이 맞은편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다.
저녁이 끝나갈 무렵, 도현은 작은 액자를 꺼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이었다.
수진이 물었다.
“거기 둘 거야?”
도현은 한참 고민하다가 책장 한쪽에 놓았다.
가운데가 아니었다.
특별히 조명을 비추지도 않았다.
아이들 사진 옆.
수진 가족이 여행 가서 찍은 사진 옆.
어머니 생일 사진 옆.
여러 사진 가운데 하나였다.
수진이 사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빠 좋아하겠다.”
도현은 사진을 보았다.
“모르지.”
“왜?”
도현이 웃었다.
“아빠 생각보다 까다로웠잖아.”
둘은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수진 가족이 돌아간 뒤,
도현은 혼자 거실에 남았다.
바닥 한쪽에는 아직 희미하게 주스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지웠을 것이다.
그날은 그냥 두었다.
창밖에는 새로운 건물들의 불빛이 보였다.
어린 시절의 풍경은 없었다.
아버지도 없었다.
그때의 가족도 없었다.
그는 다시는 열네 살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처음 이 집을 샀던 날보다 오늘이 더 집처럼 느껴졌다.
도현은 베란다 문을 조금 열었다.
밤공기가 들어왔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해 온 문장을 떠올렸다.
집을 되찾았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집은 되찾는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사람이 다시 만들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도현은 불을 끄려다 책장 위의 사진을 한 번 보았다.
“아버지.”
그리고 이번에는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
그는 불을 껐다.
아버지의 집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그곳에는 다시 한 가족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Topic 2: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인간은 치유되는가

평사리의 햇빛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아까까지 들판 위에 남아 있던 안개는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탁자 주위에는 첫 번째 대화가 남긴 질문이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상처도 치유되는가.
펄 벅이 먼저 입을 열었다.
펄 S. 벅:
“서희는 결국 빼앗긴 땅을 되찾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순간을 승리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요?”
이승윤이 잠시 생각했다.
이승윤:
“승리라고 부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회복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죠.”
주디스 허먼:
“그 두 단어를 분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현백:
“승리와 회복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주디스 허먼:
“네.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과 마음이 치유되는 것은 같은 사건이 아닙니다.”
펄 벅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펄 S. 벅:
“하지만 정의가 없으면 치유도 어렵지 않습니까?”
주디스 허먼:
“그럴 수 있습니다. 빼앗긴 것을 돌려받는 일, 잘못을 인정받는 일, 책임을 묻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그것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지는 못합니다.”
마리안느 허시:
“특히 죽은 사람이 있다면요.”
허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 허먼:
“그렇죠.”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이승윤이 『토지』를 펼쳤다.
이승윤:
“서희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그녀는 조준구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오랫동안 살아갑니다. 그 목표가 그녀를 버티게 한 것도 사실입니다.”
폴 리쾨르:
“목표가 삶의 방향을 제공한 셈이군요.”
이승윤: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질문이 생깁니다.”
그가 책을 덮었다.
“목표를 이루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펄 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펄 S. 벅:
“복수를 위해 살아온 사람이 복수를 끝낸 뒤에 마주하는 공허함.”
주디스 허먼:
“혹은 회복을 복수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 온 사람이, 두 가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정현백:
“서희에게 조준구는 단순히 미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가족의 몰락과 빼앗긴 땅, 어린 시절의 상실이 하나로 묶여 있었죠.”
마리안느 허시:
“그러면 조준구를 이긴다고 해서 그 모든 상실을 이기는 것은 아니군요.”
이승윤:
“바로 그 문제입니다.”
펄 벅이 조금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펄 S. 벅:
“제가 서희에게 직접 물을 수 있다면,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가장 되찾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리쾨르가 말했다.
폴 리쾨르:
“그리고 아마 서희 자신도 처음부터 그 답을 알지는 못했을 겁니다.”
주디스 허먼:
“사람은 종종 하나의 구체적인 목표에 상실 전체를 걸어 둡니다. 집, 돈, 재판의 승리, 가해자의 처벌.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인간의 마음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잃었을 수 있습니다.”
펄 S. 벅:
“어떤 것들 말입니까?”
허먼은 천천히 답했다.
주디스 허먼:
“안전하다는 감각. 세상이 어느 정도 믿을 만하다는 감각. 가족은 계속 곁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 미래에 대한 자연스러운 기대.”
마리안느 허시가 말을 이었다.
마리안느 허시:
“그리고 가족의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요.”
정현백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정현백:
“서희가 잃은 것은 집 한 채가 아니었으니까요.”
펄 벅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펄 S. 벅:
“그렇다면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겠군요.”
그녀가 또렷하게 말했다.
“정의를 되찾는 것과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왜 다른가?”
주디스 허먼이 바로 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말했다.
주디스 허먼:
“정의는 바깥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폴 리쾨르:
“바깥에서?”
주디스 허먼:
“재산이 반환됩니다. 판결이 내려집니다. 가해자가 처벌받습니다. 사회가 잘못을 인정합니다. 이런 변화는 실제이고 중요합니다.”
그녀가 손을 가슴 가까이에 놓았다.
“하지만 상처는 안쪽에도 남아 있습니다.”
펄 S. 벅:
“그러면 바깥의 정의와 안쪽의 회복이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겁니까?”
주디스 허먼:
“그렇습니다. 때로는 아주 다른 속도로.”
이승윤:
“서희가 땅을 되찾았다고 해서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모두 조용해졌다.
펄 벅이 아주 낮게 말했다.
펄 S. 벅:
“그날 밤에도 죽은 사람들은 죽어 있었겠군요.”
이승윤:
“네.”
잠시 뒤 그가 덧붙였다.
“그날 밤에도 죽은 사람들은 죽어 있었습니다.”
그 말은 이상할 만큼 단순했고, 그래서 더 무거웠다.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그렇다고 해서 땅을 되찾은 일이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디스 허먼: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현백:
“그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마음의 평화가 더 중요하니 재산이나 정의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펄 S. 벅:
“그렇군요.”
정현백:
“빼앗긴 것은 돌려받아야 합니다. 잘못은 잘못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폴 리쾨르:
“정의는 과거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시간 자체를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요.”
마리안느 허시:
“시간이 바로 핵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펄 S. 벅:
“어떤 의미에서요?”
마리안느 허시:
“서희가 빼앗긴 순간과 되찾은 순간 사이에는 수많은 해가 있습니다. 그 사이에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가족도 달라졌고요.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어 같은 장소에 다시 서는 겁니다.”
리쾨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폴 리쾨르:
“그렇다면 회복은 ‘이전으로 돌아감’이 아니라 ‘이후를 살아갈 수 있게 됨’에 더 가까울 수 있겠군요.”
허먼이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주디스 허먼:
“저도 그렇게 보고 싶습니다.”
펄 벅이 잠시 침묵한 뒤 물었다.
펄 S. 벅:
“두 번째 질문입니다. 복수는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요?”
정현백이 한숨처럼 웃었다.
정현백:
“아주 오래된 질문이군요.”
폴 리쾨르: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주디스 허먼:
“복수하고 싶은 마음 자체를 쉽게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펄 벅이 눈썹을 올렸다.
펄 S. 벅:
“왜 그렇습니까?”
주디스 허먼: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분노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이 일이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분노 속에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분노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주디스 허먼:
“내 삶 전체가 가해자와의 관계 속에 붙잡혀 있느냐는 겁니다.”
리쾨르가 천천히 말했다.
폴 리쾨르:
“미워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 사람에게 묶여 있을 수 있다는 말이군요.”
주디스 허먼:
“그렇습니다.”
이승윤이 서희와 조준구의 관계를 떠올리듯 말했다.
이승윤:
“서희가 조준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당신은 땅을 빼앗았다고 생각했겠죠. 나는 세상을 빼앗겼습니다.”
펄 벅의 눈빛이 달라졌다.
펄 S. 벅:
“그 차이가 크군요.”
이승윤:
“조준구에게는 재산이었을 수 있습니다. 서희에게는 세계였습니다.”
정현백:
“그러니 서희에게 그를 이긴다는 것은 단순한 경쟁의 승리가 아니었겠죠.”
이승윤:
“네. 하지만 그를 이긴 뒤에도 그가 빼앗아 간 세계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때 서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허먼이 말했다.
주디스 허먼:
“바로 거기서 회복의 다른 단계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펄 S. 벅:
“다른 단계?”
주디스 허먼:
“가해자를 중심으로 살지 않는 것.”
리쾨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폴 리쾨르:
“용서하라는 말입니까?”
허먼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주디스 허먼:
“아닙니다.”
방 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주디스 허먼:
“회복과 용서를 같은 것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정현백:
“그 점은 아주 중요하군요.”
주디스 허먼:
“피해자가 반드시 용서해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문제 자체를 더 이상 자기 삶의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펄 벅이 말했다.
펄 S. 벅:
“그러면 용서하지 않고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겁니까?”
주디스 허먼:
“그럴 수 있습니다.”
이승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승윤:
“서희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잠시 침묵.
그리고 그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제 당신 때문에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무도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마리안느 허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리안느 허시:
“그 문장은 용서보다 더 강할 수도 있겠네요.”
폴 리쾨르:
“관계를 끊는 선언이니까요.”
주디스 허먼:
“정확히는 가해자가 더 이상 내 삶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선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정현백: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죠?”
주디스 허먼:
“아닙니다.”
마리안느 허시:
“기억을 지우는 것도 아니고요.”
주디스 허먼:
“그렇습니다.”
리쾨르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폴 리쾨르:
“그러면 우리가 찾는 말은 ‘잊음’이 아니라 ‘거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펄 S. 벅:
“과거와의 거리?”
폴 리쾨르: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과거가 현재의 모든 선택을 대신하지 못하게 하는 거리.”
허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 허먼:
“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
“과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더 이상 내 미래의 모든 문장을 대신 쓰지 못하게 하는 것.”
펄 벅이 그 문장을 반복했다.
펄 S. 벅:
“내 미래의 모든 문장을 대신 쓰지 못하게 한다.”
바람이 창문을 스쳤다.
멀리서 새 한 마리가 논 위로 낮게 날아갔다.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상처가 사회의 상처와 연결되어 있다면요.”
마리안느 허시:
“가족의 기억으로 남기도 하고요.”
정현백:
“그렇죠. 식민지 경험, 전쟁, 이산, 계급의 상처 같은 것은 한 사람의 마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펄 S. 벅:
“다음 세대에게 넘어간다는 뜻입니까?”
마리안느 허시:
“때로는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때로는 침묵으로 넘어갑니다.”
폴 리쾨르:
“침묵으로도?”
마리안느 허시:
“네. 가족이 어떤 일을 전혀 말하지 않아도 아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정한 이름을 피하고, 특정한 장소에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누군가의 사진이 서랍 안에 숨겨져 있다면요.”
주디스 허먼:
“상처는 말로만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승윤:
“그렇다면 서희 한 사람의 상처를 넘어, 『토지』 전체에 퍼져 있는 감정으로 가야겠군요.”
펄 벅이 그를 바라보았다.
펄 S. 벅:
“어떤 감정입니까?”
이승윤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펄 벅이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치유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허먼이 손을 모았다.
주디스 허먼:
“상처가 없었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현백:
“잊는 것도 아니고.”
마리안느 허시:
“역사를 없애는 것도 아니고.”
폴 리쾨르:
“과거와 화해했다는 아름다운 결론을 반드시 얻는 것도 아니겠군요.”
주디스 허먼:
“네. 저는 오히려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돌아오는 것을 중요하게 봅니다.”
펄 S. 벅:
“선택?”
주디스 허먼:
“과거 때문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에서 내가 무엇을 할지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
이승윤:
“그렇다면 서희에게 회복은 조준구를 이기는 순간보다, 조준구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게 되는 순간에 가까울 수도 있겠군요.”
허먼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 허먼: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펄 벅이 말했다.
펄 S. 벅:
“『대지』에서도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룽은 오랫동안 땅이 모든 문제의 답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땅을 많이 가져도 가족의 균열까지 막지는 못합니다.”
정현백:
“소유는 안전을 줄 수 있지만, 모든 관계를 구해 주지는 못하죠.”
펄 S. 벅: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작품이 아주 다른 문화와 역사를 다루면서도 비슷한 질문을 한다고 느낍니다.”
폴 리쾨르:
“무엇을 가졌는가보다, 그것을 통해 무엇을 되찾고 싶어 하는가.”
펄 S. 벅:
“네.”
마리안느 허시가 조용히 말했다.
마리안느 허시:
“그런데 서희가 조준구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합시다.”
주디스 허먼:
“네.”
마리안느 허시:
“그렇다면 그 분노와 기억은 어디로 갑니까?”
아무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정현백:
“사라지지는 않겠죠.”
폴 리쾨르:
“기억은 형태를 바꿀 수는 있어도, 단순히 삭제되지는 않으니까요.”
이승윤:
“아마 그 지점에서 한국어의 한이라는 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펄 벅이 고개를 들었다.
펄 S. 벅:
“한.”
이승윤:
“네.”
그는 창밖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되찾아도 남아 있는 것.”
잠시 뒤 정현백이 말했다.
“잊지 못해서 남아 있는 것만도 아니고요.”
마리안느 허시가 물었다.
“그렇다면 한은 상처입니까? 기억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무엇입니까?”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펄 벅이 『토지』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다음 대화의 제목처럼 한 단어를 말했다.
“한.”
그 한 단어가 다음 질문을 열었다.
Topic 3 한은 기억인가, 상처인가, 정체성인가

평사리의 햇빛은 이제 들판 전체에 내려앉아 있었다.
아침 안개는 거의 사라졌지만, 여섯 사람의 대화에는 다른 종류의 안개가 남아 있었다.
조금 전 마리안느 허시는 물었다.
“그렇다면 한은 상처입니까? 기억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무엇입니까?”
펄 벅은 『토지』 위에 손을 올린 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펄 S. 벅:
“제가 한이라는 말을 완전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승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윤:
“그 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펄 S. 벅:
“슬픔이라고 번역하면 부족하고, 원한이라고 해도 부족하고, 비애라고 해도 부족하겠죠?”
이승윤:
“네. 그리고 한을 하나의 감정으로만 정의하려 할수록 오히려 멀어질 수 있습니다.”
주디스 허먼:
“저는 특히 한을 곧바로 트라우마와 같은 것으로 부르는 데 조심하고 싶습니다.”
펄 S. 벅:
“둘은 다릅니까?”
주디스 허먼:
“겹치는 부분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특정한 심리적 경험과 반응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입니다. 한은 훨씬 더 넓은 역사적, 문화적, 관계적 의미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현백:
“한에는 개인의 고통만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식민지 경험, 전쟁, 가난, 계급, 가족, 여성의 삶, 이루지 못한 사랑, 억울함, 기다림, 떠나지 못한 마음. 그런 것들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쌓이기도 합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렇다면 한은 한 사람이 혼자 만들어 낸 감정이라고만 보기는 어렵겠군요.”
이승윤:
“그렇습니다. 어떤 한은 한 사람의 생애보다 오래 남기도 하니까요.”
펄 벅이 물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질문입니다. 한은 개인의 상처입니까, 역사가 개인 안에 남은 흔적입니까?”
정현백이 먼저 대답했다.
정현백:
“둘 중 하나로 고르기 어렵습니다.”
폴 리쾨르:
“왜 그렇습니까?”
정현백:
“역사는 언제나 추상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식민지가 되었다는 문장은 역사책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 역사적 사건은 실제 사람의 집을 잃게 하고, 가족을 흩어지게 하고,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고, 어떤 여성을 평생 기다리게 합니다.”
마리안느 허시:
“큰 역사가 개인의 몸과 가족 안으로 들어오는군요.”
정현백:
“그렇죠.”
이승윤:
“『토지』가 강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역사를 사건 목록으로 보여 주지 않습니다. 역사가 한 사람의 결혼에 들어오고, 밥상에 들어오고, 사랑에 들어오고, 땅에 들어옵니다.”
펄 S. 벅:
“그 점에서는 『대지』와도 닮았습니다.”
이승윤:
“어떤 점에서요?”
펄 S. 벅:
“전쟁이나 기근이 왕룽에게는 정치적 사건으로 먼저 오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사라지고, 가족이 굶고, 땅을 떠나야 하는 경험으로 옵니다.”
정현백:
“맞습니다. 역사란 많은 사람에게 그렇게 옵니다.”
주디스 허먼:
“그리고 그런 경험은 사건이 끝났다고 해서 바로 끝나지 않습니다.”
폴 리쾨르:
“사건은 끝나도 그 사건이 만든 시간은 계속된다는 뜻입니까?”
주디스 허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안느 허시가 조용히 말했다.
마리안느 허시:
“저는 여기서 세대의 문제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펄 S. 벅:
“다음 세대 말입니까?”
마리안느 허시:
“네. 어떤 사람은 직접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시기를 살지도 않았습니다. 가족이 쫓겨나는 장면을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건들이 자기 삶 안에 깊이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정현백:
“가족 이야기 때문입니까?”
마리안느 허시:
“이야기뿐만은 아닙니다.”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진. 침묵. 반복되는 이야기. 말하지 않는 이름. 가족이 특정한 장소를 피하는 방식. 어떤 질문을 했을 때 갑자기 어른들의 얼굴이 굳어지는 순간.”
폴 리쾨르:
“말하지 않은 것도 기억이 될 수 있다는 말이군요.”
마리안느 허시:
“그렇습니다.”
주디스 허먼:
“아이들은 가족의 감정적 분위기를 배우기도 합니다. 정확한 사건을 몰라도요.”
펄 S. 벅:
“그러면 다음 세대는 자기 것이 아닌 기억을 가지고 살 수도 있습니까?”
마리안느 허시:
“정확히 같은 기억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전 세대의 경험이 이미지와 이야기와 감정을 통해 이후 세대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는 있습니다.”
이승윤:
“한도 그런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허시는 잠시 생각했다.
마리안느 허시:
“저는 한이라는 개념 전체를 제 연구 용어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가족의 고통이 다음 세대의 삶을 구성하는 방식은 분명 존재합니다.”
펄 벅이 책상 위에 놓인 두 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펄 S. 벅:
“그렇다면 기억을 이어 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까?”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폴 리쾨르:
“기억에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부정의가 있었을 때, 잊지 않는 것은 중요합니다.”
정현백:
“그렇지만 기억이 어떤 형태로 전달되는지도 중요하겠죠.”
펄 S. 벅:
“무슨 뜻입니까?”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아이에게 ‘이 일이 있었다’고 가르치는 것과 ‘그러니 너도 저 사람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마리안느 허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느 허시:
“바로 그 차이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기억하는 것과 미워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다릅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펄 벅이 그 말을 다시 되뇌었다.
펄 S. 벅:
“기억하는 것과 미워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폴 리쾨르가 손을 모았다.
폴 리쾨르: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을 해 봅시다.”
“우리는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과거에게 미래를 맡기지 않을 수 있는가?”
주디스 허먼이 말했다.
주디스 허먼:
“가능해야 합니다.”
펄 S. 벅:
“가능해야 한다?”
주디스 허먼:
“그렇지 않으면 피해를 입은 세대뿐 아니라 그 다음 세대까지 계속 가해자의 영향 아래 살게 됩니다.”
마리안느 허시:
“하지만 ‘이제 미래를 살아라’라는 말이 기억을 버리라는 압력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정현백:
“한국 역사에서는 특히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펄 S. 벅:
“왜 그렇습니까?”
정현백:
“상처를 말하는 사람에게 너무 빨리 ‘이제 잊자’고 하면, 그것은 화해가 아니라 침묵을 요구하는 말이 될 수 있으니까요.”
폴 리쾨르:
“그렇다면 기억과 해방을 반대말로 만들어서는 안 되겠군요.”
마리안느 허시:
“네.”
주디스 허먼:
“기억하면서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승윤:
“『토지』의 인물들에게도 그런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펄 S. 벅:
“어떤 차이입니까?”
이승윤:
“상처를 품고 사는 것과, 상처에 붙잡혀 사는 것.”
그가 한 번 더 또렷하게 말했다.
“품고 사는 것과 붙잡혀 사는 것은 다릅니다.”
펄 벅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했다.
펄 S. 벅:
“그 차이를 실제 삶에서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주디스 허먼:
“쉽지 않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기억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붙잡혀 있다고 할 수는 없겠죠.”
주디스 허먼:
“그렇습니다. 자주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병적인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억이 현재의 삶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입니다.”
폴 리쾨르:
“현재를 대신 살아 버리는가.”
주디스 허먼:
“네.”
정현백:
“그리고 다음 세대의 선택까지 대신하려 하는가.”
마리안느 허시:
“그것도 중요합니다.”
펄 벅이 말했다.
펄 S. 벅:
“그렇다면 이런 표현은 어떨까요.”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억하되, 거기서 살지는 않는 것.”
마리안느 허시가 미소를 지었다.
마리안느 허시:
“좋은 표현입니다.”
폴 리쾨르:
“과거를 지우지 않지만, 과거를 현재의 주소로 만들지도 않는다는 뜻이군요.”
잠시 후 이승윤이 말했다.
이승윤:
“하지만 한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빠지기 쉬운 다른 위험도 있습니다.”
펄 S. 벅:
“어떤 위험입니까?”
이승윤:
“한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이 강해졌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겁니다.”
주디스 허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주디스 허먼:
“그 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정현백:
“저도 동의합니다.”
펄 S. 벅:
“왜 위험합니까?”
주디스 허먼:
“고통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고통 자체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쉽습니다.”
정현백:
“식민지 지배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강해졌다고 말한다면, 어느 순간 식민지 지배가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전쟁도 마찬가지겠군요.”
정현백:
“그렇습니다.”
주디스 허먼:
“어떤 사람은 고통 속에서 새로운 힘을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어떤 사람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성장의 도구처럼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방 안이 오래 조용했다.
펄 벅이 천천히 말했다.
펄 S. 벅:
“그러면 한이 사람을 살게 했다는 말도 조심해야겠군요.”
이승윤:
“네.”
펄 S. 벅:
“하지만 『토지』의 인물들은 그렇게 많은 것을 견디고도 계속 살아갑니다.”
이승윤:
“그렇기 때문에 질문을 바꾸는 편이 좋습니다.”
펄 S. 벅:
“어떻게요?”
이승윤은 창밖의 논을 바라보았다.
이승윤:
“한이 사람을 살게 한 것이 아니라…”
잠시 말을 멈췄다.
“한을 가지고도 살아가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허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 허먼:
“그 차이는 큽니다.”
마리안느 허시:
“고통에게 공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니까요.”
정현백:
“그리고 살아남지 못한 사람을 약한 사람으로 만들지도 않고요.”
펄 벅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세 번째 질문을 꺼냈다.
“한이 정체성의 일부라면,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배신하는 것일까?”
폴 리쾨르가 먼저 말했다.
폴 리쾨르:
“사람은 자기 과거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펄 S. 벅:
“조금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폴 리쾨르:
“나는 내가 겪은 일들로 구성되지만, 그 일들의 합계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계속 이야기되고 수정됩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렇다면 가족에게 물려받은 기억도 나의 일부일 수 있지만, 나의 전부는 아니겠군요.”
폴 리쾨르:
“그렇습니다.”
정현백:
“그런데 역사적 기억을 내려놓는다는 표현은 조금 조심하고 싶습니다.”
펄 S. 벅:
“왜요?”
정현백:
“무엇을 내려놓는 것인지 분명해야 하니까요. 사실을 내려놓는 것인지, 책임을 내려놓는 것인지, 미움을 내려놓는 것인지 서로 다릅니다.”
주디스 허먼:
“아주 중요한 구별입니다.”
마리안느 허시:
“기억을 보존하면서도, 그 기억이 요구하는 감정까지 그대로 물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승윤:
“결국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넘길 것인가의 문제가 되겠군요.”
펄 벅이 말했다.
펄 S. 벅:
“그렇다면 부모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이것은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다.”
“잊지 말아라.”
“하지만 네가 누구를 사랑할지, 누구와 친구가 될지, 네 미래를 어떻게 만들지는 네가 선택해라.”
마리안느 허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느 허시:
“그것이 가능하다면 기억은 짐만이 아니라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폴 리쾨르: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의 관계.”
정현백:
“과거와 미래 사이의 관계.”
주디스 허먼:
“다만 그 관계가 명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승윤이 말했다.
이승윤:
“『토지』의 언어로 말하면 이런 문장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우리의 한을 아이의 운명으로 만들지 않는 것.”
아무도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멀리서 누군가가 논두렁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바구니를 든 나이 든 여자였다.
조금 뒤 다른 여자가 집 앞에서 빨래를 널었다.
누군가는 아기를 업고 있었다.
정현백이 창밖을 바라보다 말했다.
정현백:
“한에 대해 이야기하면 한 가지 문제가 더 생깁니다.”
펄 S. 벅:
“어떤 문제입니까?”
정현백:
“누가 그 한을 실제로 살아 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펄 S. 벅:
“누가?”
정현백은 창밖을 가리켰다.
정현백:
“역사책에 이름이 남은 사람들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마리안느 허시가 말했다.
마리안느 허시:
“오히려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았겠죠.”
정현백:
“남자들이 전쟁과 정치와 독립운동으로 기록될 때,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밥을 하고, 아픈 사람을 돌보고, 기다리고, 가족을 이어 간 사람들은 무엇으로 기록되었을까요?”
펄 S. 벅:
“생활.”
정현백:
“그렇죠.”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전쟁은 역사라고 부르면서, 사람을 먹이고 살린 일은 왜 생활이라고만 불렀을까요?”
펄 벅의 시선이 창밖의 여성에게 머물렀다.
그녀는 자신의 소설 속 오란을 떠올리는 듯했다.
펄 S. 벅:
“그 질문은 제가 오랫동안 생각해 온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승윤이 말했다.
이승윤:
“『토지』에도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정현백:
“그렇다면 다음에는 그 사람들을 봐야겠군요.”
펄 S. 벅:
“역사에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들.”
정현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대화의 문을 여는 듯 물었다.
“역사는 정말 누가 만들었을까요?”
Story 4: 마지막 논

Story 4: 마지막 논
강태준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구두 끝을 내려다봤다.
진흙이 묻어 있었다.
서울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다.
주차장도, 사무실도, 호텔도, 분양 현장도 대부분 바닥이 반듯했다.
하지만 하림군의 이 마을은 달랐다.
좁은 길.
낮은 집.
오래된 담장.
그리고 길 끝까지 이어진 논.
태준은 수행 직원에게 말했다.
“차를 좀 더 안쪽에 댈 수 없었어?”
직원이 난처하게 웃었다.
“대표님, 여기부터는 농로라서요.”
태준은 한숨을 쉬었다.
“됐어.”
그는 서류가방을 들고 논두렁을 따라 걸었다.
멀리 한 노인이 허리를 굽힌 채 잡초를 뽑고 있었다.
최병수.
여든두 살.
하림군 신평리의 마지막 미매입 농지 소유자.
태준의 회사는 이미 주변 토지 대부분을 샀다.
고급 실버타운.
소형 병원.
상가.
주거단지.
산책로.
농촌 체험공간.
프로젝트 전체 규모는 수천억 원이었다.
문제는 병수의 논 하나였다.
개발 계획의 한가운데.
태준은 서류가방을 열었다.
오늘 제시할 금액은 25억 원이었다.
기존 감정가보다 훨씬 높았다.
태준은 확신했다.
이번에는 끝날 것이다.
병수는 태준이 가까이 올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태준이 먼저 말했다.
“어르신.”
병수가 허리를 폈다.
“왔소?”
“네.”
“또 땅 사러?”
태준이 웃었다.
“그렇죠.”
병수는 장갑 낀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지난번에 안 판다고 했는데.”
“조건을 조금 더 좋게 가져왔습니다.”
태준은 서류를 꺼냈다.
“25억입니다.”
병수는 서류를 보지도 않았다.
“안 팝니다.”
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한번 보시죠.”
“안 봐도 돼.”
“감정가보다 훨씬 높습니다.”
“알아.”
“자녀분들도 서울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농사 이어받을 사람도 없고요.”
병수는 태준을 바라봤다.
“그래서?”
태준이 조금 답답한 듯 말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셔야죠.”
병수가 웃었다.
“현실.”
“네.”
“서울 사람들은 꼭 그 말 좋아하더라.”
태준은 입술을 다물었다.
병수는 다시 논을 바라봤다.
“당신은 계속 값만 묻네.”
태준이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병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한 번도 안 묻고.”
태준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감상적인 협상에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경계했다.
토지는 토지다.
등기부가 있고,
감정가가 있고,
용도지역이 있고,
개발 가능성이 있다.
그는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그렇게 돈을 벌었다.
태준은 말했다.
“어르신, 추억이 중요한 건 압니다.”
병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알아?”
“네.”
“뭘 아는데?”
태준은 잠시 말이 막혔다.
병수가 말했다.
“당신 아버지는 농사 지었소?”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태준이 멈췄다.
“…지었습니다.”
병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은 알겠네.”
태준의 얼굴이 굳었다.
“그 얘기랑 이 논은 관계없습니다.”
병수는 다시 웃었다.
“사람들은 관계없는 얘기라고 할 때 제일 관계있는 얘기를 하지.”
태준의 할아버지는 소작농이었다.
태준은 그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때 부모는 농촌 출신이라는 것을 거의 자랑하지 않았다.
가난했다.
정말 가난했다.
태준의 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시로 나왔다.
공장에서 일했다.
밤에는 공부했다.
태준이 어릴 때 아버지는 자주 말했다.
“너는 흙 묻히고 살지 마라.”
태준은 그 말을 기억했다.
흙은 가난이었다.
흙은 젖은 양말이었다.
흙은 굽은 허리였다.
흙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고도 남는 것이 없던 할아버지였다.
태준은 흙에서 멀어지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했다.
서울로 갔다.
부동산 개발회사에 들어갔다.
도시를 바꾸는 일을 배웠다.
낡은 건물을 허물고,
땅의 가치를 올리고,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일.
그는 자신이 과거에서 멀리 왔다고 믿었다.
병수가 말했다.
“한번 걸어봅시다.”
“어디를요?”
“논.”
태준이 자기 구두를 봤다.
병수가 피식 웃었다.
“그 신발 벗어도 되고.”
태준은 벗지 않았다.
둘은 논두렁을 따라 걸었다.
병수가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뭐가 있습니까?”
“아버지가 쓰러진 데.”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수는 조금 더 걸었다.
“저쪽은 큰물 났던 해에 마을 사람들이 밤새 둑 막은 자리.”
다시 몇 걸음.
“거기는 우리 큰애 돌잔치 했던 데.”
태준이 웃었다.
“논에서 돌잔치를요?”
“집에 사람 다 못 들어왔어.”
조금 더 갔다.
병수의 걸음이 느려졌다.
“저기 둑 밑에는…”
그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태준이 기다렸다.
병수가 말했다.
“우리 둘째 묻었다.”
태준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이요?”
병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난 지 며칠 못 살았어.”
바람이 논 위를 지나갔다.
병수는 한동안 그곳을 보았다.
“그땐 병원도 멀었지.”
태준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병수는 계속 걸었다.
“여기는 내가 장가오고 첫 벼 벤 데.”
“저기는 아내랑 대판 싸운 데.”
“저 끝은 아들이 서울 간다고 처음 말한 자리.”
태준이 물었다.
“이 논에서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습니까?”
병수가 태준을 봤다.
“사람이 오래 살면 어디든 일이 많아.”
“그래도…”
병수는 말했다.
“당신 눈에는 평수겠지.”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 눈에는 시간이고.”
태준은 며칠 뒤 서울로 돌아갔다.
회의실에는 개발도면이 펼쳐져 있었다.
팀장이 말했다.
“대표님, 그 필지만 들어오면 전체 동선이 완성됩니다.”
“알아.”
“법적으로는 수용 절차 검토도 가능합니다.”
태준은 도면을 바라봤다.
논 한가운데 빨간색으로 표시된 작은 구역.
병수의 땅.
팀장이 계속 말했다.
“사실 농지로 계속 유지할 이유도 없습니다. 생산성도 낮고요.”
태준은 말했다.
“그건 맞아.”
“자녀들도 농사 안 짓고.”
“알아.”
“주민들 다 찬성입니다.”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팀장이 물었다.
“대표님?”
태준은 도면을 접었다.
“조금 더 보자.”
며칠 뒤 병수의 아들 재현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병수는 마당에 앉아 있었다.
재현이 화를 냈다.
“아버지, 25억이에요.”
병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25억.”
“알아.”
“그 돈이면 아버지 편하게 살 수 있어요.”
“나 지금 불편하냐?”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럼 무슨 얘긴데.”
재현은 한숨을 쉬었다.
“제가 농사 이어받을 것도 아니고, 누나도 안 와요.”
병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현이 말했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누가 이 논 지어요?”
병수의 얼굴이 굳었다.
“말 조심해.”
“틀린 말 아니잖아요.”
“내 죽는 얘기 하지 마.”
“그럼 제가 거짓말해요?”
병수는 화를 내려다 멈췄다.
재현은 계속했다.
“아버지가 지키고 싶어 하는 거 알아요.”
“근데 지키기만 하면 뭐 해요?”
병수가 아들을 바라봤다.
“사람이 없는데.”
그 말은 오래 남았다.
그날 밤 병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논을 지키는 것이 자기 삶의 마지막 의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지켰고,
자기가 지켰고,
아내와 아이들의 시간이 들어 있었다.
팔아 버리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재현의 말이 맞기도 했다.
자기가 죽으면?
아들이 농사짓지 않는다.
손자도 농촌에 관심 없다.
논을 그대로 둔다고 기억이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사라진 뒤 잡초만 자랄 수도 있다.
병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지키는 것과 살게 하는 것은 같은가.
태준은 다시 마을을 찾았다.
이번에는 양복이 아니었다.
편한 바지.
운동화.
병수가 말했다.
“구두는 버렸소?”
태준이 웃었다.
“살렸습니다.”
둘은 마루에 앉았다.
태준이 먼저 말했다.
“어르신 말이 맞았습니다.”
병수는 그를 봤다.
“뭐가.”
“제가 값만 물었습니다.”
병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태준이 계속했다.
“근데 저도 하나 말하고 싶습니다.”
“말해 봐.”
“추억만으로 마을이 살아남지는 않습니다.”
병수의 얼굴이 굳었다.
태준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 병원 멀죠.”
“멀지.”
“젊은 사람 거의 없고.”
“없지.”
“빈집 늘고.”
병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농사만으로 먹고살기 어렵고.”
“그것도 알아.”
태준은 말했다.
“저는 이 마을을 다 부수러 온 게 아닙니다.”
병수가 비웃었다.
“개발업자가 하는 말이네.”
“알아요.”
태준도 웃었다.
“그래도 사실입니다.”
태준은 새로운 도면을 펼쳤다.
병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요?”
“계획 바꿔 봤습니다.”
기존 개발 면적 일부가 줄어 있었다.
병수의 논 전체를 없애는 대신, 한 구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기는 뭐요?”
“공동 농지.”
병수가 태준을 봤다.
“누가 농사짓는데.”
“마을하고 학교가 같이 운영하면 어떨까 합니다.”
“애들이 농사를 짓는다고?”
“농업 체험만 하자는 게 아닙니다.”
태준이 말했다.
“계절별로 실제 작물 키우고, 지역 어르신들이 알려주고.”
“병원하고 주거단지 들어오는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게 하고.”
“농산물은 지역 식당이나 복지시설에서 쓰고요.”
병수는 한동안 도면을 봤다.
“장난 같네.”
태준이 웃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돈이 되나?”
“큰돈은 안 됩니다.”
“개발업자가 돈 안 되는 걸 해?”
태준이 병수를 바라봤다.
“이 부분 때문에 전체 사업이 더 오래 갈 수도 있습니다.”
병수는 코웃음을 쳤다.
“말은 잘하네.”
태준은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뭔데.”
“어르신이 처음 몇 년은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병수가 태준을 봤다.
“나를 부려먹겠다고?”
“네.”
병수가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협상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병수는 면적을 더 남기라고 했다.
태준은 너무 많다고 했다.
병수는 오래된 물길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태준은 도로 때문에 어렵다고 했다.
둘은 몇 번이나 싸웠다.
병수는 태준을 “땅장사”라고 불렀다.
태준은 병수를 “고집쟁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어느 날 병수가 말했다.
“저 돌담은 남겨.”
“왜요?”
“우리 아버지가 쌓았어.”
태준은 도면에 표시했다.
또 어느 날 태준이 말했다.
“여기엔 작은 진료소가 꼭 들어가야 합니다.”
병수가 물었다.
“왜.”
태준이 말했다.
“어르신 둘째 같은 일이 다시는 없게.”
병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건 해.”
몇 달 뒤 개발 계획이 확정됐다.
마을 사람 모두가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더 개발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아예 개발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병수도 완전히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태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둘은 한 가지는 알았다.
누군가 전부 이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을은 과거 그대로 보존될 수도 없었다.
첫 공동 논의 모내기 날.
초등학생 스무 명이 장화를 신고 줄지어 서 있었다.
병수는 소리쳤다.
“그렇게 잡으면 다 죽어!”
아이 하나가 물었다.
“뭐가 죽어요?”
“벼가 죽지!”
“다시 심으면 되잖아요.”
병수는 입을 벌린 채 아이를 봤다.
“요즘 애들은…”
멀리서 태준이 웃었다.
병수가 소리쳤다.
“거기 웃는 사람!”
태준이 손을 들었다.
“저요?”
“당신도 들어와.”
“저는 오늘 행사만…”
“논 만들어 놨으면 들어와.”
사람들이 웃었다.
태준은 어쩔 수 없이 장화를 신었다.
처음 몇 걸음은 괜찮았다.
그러다 발이 진흙에 깊이 빠졌다.
태준이 중심을 잃었다.
한쪽 손을 땅에 짚었다.
아이들이 일제히 웃었다.
“아저씨 넘어졌다!”
태준이 민망한 얼굴로 일어났다.
옷에 진흙이 묻었다.
병수는 옆에서 웃고 있었다.
“서울 사람도 흙 묻네.”
태준이 말했다.
“오늘만입니다.”
병수가 작은 모를 한 줌 내밀었다.
“잡아.”
태준이 받았다.
병수가 말했다.
“너무 깊이 꽂지 마.”
“왜요?”
“숨 막혀.”
“벼도요?”
병수가 그를 봤다.
“살아 있는 건 다 그래.”
태준은 웃지 않았다.
그 말을 잠시 생각했다.
아이들이 모를 심기 시작했다.
줄은 삐뚤었다.
어떤 모는 넘어졌다.
병수는 처음에는 계속 잔소리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만두었다.
그냥 바라봤다.
자신이 수십 년 동안 걸어 온 논 위에 아이들이 있었다.
자기 손자도 아닌 아이들.
자기 가족도 아닌 사람들.
그런데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병수의 아들 재현도 멀리 서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논 안으로 들어왔다.
병수가 말했다.
“너는 왜 들어와.”
재현이 웃었다.
“누가 지을 거냐며.”
병수가 아들을 바라봤다.
재현이 말했다.
“평생은 못 해도 오늘은 할게요.”
병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모 한 줌을 건넸다.
태준은 잠시 논 가장자리로 나왔다.
운동화 대신 장화가 진흙투성이였다.
멀리 공사 현장이 보였다.
새로운 진료소의 골조가 올라가고 있었다.
반대편에는 오래된 돌담이 남아 있었다.
그 사이에 논이 있었다.
완전히 옛날도 아니었다.
완전히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태준은 갑자기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너는 흙 묻히고 살지 마라.”
아버지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제도 알았다.
가난했으니까.
힘들었으니까.
아들이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그 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태준은 성공하기 위해 흙에서 떠났다.
그것도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흙에서 떠났다고 해서,
자신의 과거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병수가 옆으로 왔다.
“뭐 봐?”
태준이 말했다.
“그냥요.”
병수가 공사 현장을 봤다.
“많이 변하겠네.”
“네.”
“싫다.”
태준이 웃었다.
“솔직하시네요.”
“근데…”
병수는 아이들이 모를 심는 모습을 봤다.
“저건 좀 괜찮네.”
태준이 말했다.
“그 정도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병수는 태준에게 물었다.
“땅이 누구 거라고 생각해?”
태준이 웃었다.
“그 질문 또 하시게요?”
“대답해 봐.”
태준은 잠시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등기부상 소유자라고 말했을 것이다.
법적으로는 그게 맞았다.
그런데 지금은 대답이 잘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병수가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태준이 그를 봤다.
“어르신도요?”
“응.”
병수는 논을 바라봤다.
“예전에는 내 땅인 줄 알았어.”
“그다음엔 아버지 땅이라고 생각했고.”
“또 어떤 날은 자식들한테 물려줄 땅이라고 생각했지.”
잠시 멈췄다.
“근데 다 지나가더라고.”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수가 말했다.
“사람이 땅을 갖는 게 아니라, 잠깐 맡고 있는 건지도 몰라.”
태준은 논을 바라봤다.
“그럼 누구한테 돌려줍니까?”
병수가 아이들을 가리켰다.
“저런 놈들한테.”
태준이 웃었다.
“저 애들 농사 안 지을 수도 있어요.”
“그럼 안 짓겠지.”
“그럼 이 논은요?”
병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고.”
해가 조금 기울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논 밖으로 나갔다.
장화에서 진흙이 떨어졌다.
누군가는 피곤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재미있다고 했다.
한 아이가 병수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이거 언제 쌀 돼요?”
병수가 말했다.
“가을.”
“그때 저희 또 와요?”
병수는 잠시 생각했다.
“와.”
“진짜요?”
“안 오면 내가 학교 찾아간다.”
아이들이 웃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떠난 뒤,
병수와 태준만 잠시 논가에 남았다.
병수는 작은 모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남은 것이었다.
그가 태준에게 건넸다.
“이거.”
“왜요?”
“남았잖아.”
태준이 받았다.
뿌리에 진흙이 묻어 있었다.
작고 약해 보였다.
태준이 물었다.
“어디 심습니까?”
병수가 논 한쪽을 가리켰다.
“빈 데 있잖아.”
태준은 다시 논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넘어지지 않았다.
진흙 속에 손을 넣었다.
모를 세웠다.
너무 깊지 않게.
손을 떼자 작은 모가 바람에 흔들렸다.
뒤에는 오래된 돌담이 있었다.
그 너머로 새 진료소 공사가 보였다.
병수의 오래된 논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새로운 마을이
한 시야 안에 함께 있었다.
태준은 그 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땅은 그대로 남지 않았다.
사람도 그대로 남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어떤 것은 바뀌었고,
어떤 것은 남았고,
어떤 것은 다음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병수가 뒤에서 소리쳤다.
“뭘 그렇게 봐!”
태준이 돌아봤다.
“다 했습니다.”
“그럼 나와.”
태준은 논 밖으로 걸어 나왔다.
마지막 모는 뒤에서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Story 5 그래도 아침은 왔다

새벽 3시 17분.
한미정은 발밑이 차가워서 잠에서 깼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발가락 사이로 차가운 것이 스며들었다.
눈을 뜨고 손을 뻗어 침대 옆 스탠드를 켰다.
바닥에 물이 있었다.
얕았다.
발목도 되지 않았다.
미정은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 부엌 쪽에서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쿵.
그리고 또 한 번.
쾅.
그제야 미정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뭐야…”
방문을 열었다.
복도 바닥을 따라 흙탕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미정은 바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재난문자가 여러 개 와 있었다.
하천 범람 위험. 저지대 주민 즉시 대피.
그녀는 창문으로 달려갔다.
비가 세상을 지워 버릴 것처럼 내리고 있었다.
집 앞 골목은 이미 강처럼 변해 있었다.
미정은 숨을 들이켰다.
“안 돼.”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녀는 거실로 뛰어갔다.
벽장 아래 서랍을 열었다.
서류.
통장.
현금 조금.
남편의 사진.
그 순간 냉장고가 기울었다.
미정은 놀라 뒤로 물러났다.
물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대피하세요!”
“지금 바로 나오세요!”
미정은 남편 사진첩을 들었다.
표지가 낡은 갈색 앨범이었다.
남편이 죽은 뒤 한 번도 버리지 못했던 것.
결혼식.
신혼여행.
아이 없이 둘이 살았던 첫 집.
식당을 열던 날.
남편이 앞치마를 두르고 우스운 표정을 짓던 사진.
그 사진첩을 가슴에 안았다.
현관문을 열려고 했는데 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물이 밀어붙이고 있었다.
밖에서 구조대원이 다시 소리쳤다.
“아주머니! 빨리 나오셔야 합니다!”
미정은 문을 힘껏 밀었다.
겨우 틈이 열렸다.
구조대원이 팔을 잡았다.
“손에 든 거 놓으세요!”
미정은 앨범을 더 세게 안았다.
“이건 안 돼요.”
“위험합니다!”
“이건…”
그 순간 물살이 문 안으로 세게 밀려왔다.
미정의 몸이 휘청했다.
구조대원이 그녀를 끌어냈다.
앨범이 손에서 빠졌다.
“안 돼!”
갈색 앨범이 물 위로 떠올랐다.
몇 장이 벌어졌다.
사진들이 물에 젖었다.
미정이 손을 뻗었다.
구조대원이 소리쳤다.
“안 됩니다!”
“저거…”
“사람이 먼저예요!”
미정은 물속을 끌려가면서 앨범을 바라봤다.
그것은 골목 아래로 떠내려갔다.
남편의 얼굴도 함께 사라졌다.
대피소는 초등학교 체육관이었다.
새벽 네 시가 넘었지만 불이 환했다.
젖은 사람들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울었다.
누군가는 전화만 계속 걸었다.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바닥을 바라봤다.
미정은 체육관 벽에 기대앉았다.
누가 담요를 줬다.
누가 따뜻한 물도 줬다.
“괜찮으세요?”
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설명하기도 싫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하나둘 피해 상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미정의 집은 1층이었다.
식당도 바로 옆 건물 1층이었다.
둘 다 물에 잠겼다.
냉장고.
식탁.
주방기구.
식재료.
가구.
장부.
통장 사본.
남편 물건.
사진.
모두.
누군가 미정에게 말했다.
“그래도 몸은 괜찮아서 다행이에요.”
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사람만 살아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죠.”
미정은 고개를 끄덕이는 척했다.
속으로는 한마디만 떠올랐다.
그래서 뭐.
살아 있다고 해서 집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살아 있다고 해서 남편 사진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살아 있다고 해서 18년 동안 운영한 식당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뭐.
미정의 남편은 6년 전에 죽었다.
암이었다.
마지막 8개월 동안 그는 식당에 거의 나오지 못했다.
그래도 상태가 좋은 날이면 오후 늦게 잠깐 들렀다.
“장사 잘돼?”
미정이 말했다.
“당신 없으니까 더 잘돼.”
남편은 웃었다.
“그럼 내가 진작 빠질걸.”
그가 죽은 뒤에도 미정은 식당을 계속했다.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했다.
“혼자서도 잘하시네요.”
미정은 그 말을 싫어했다.
잘한 적이 없었다.
그냥 아침에 문을 열었다.
쌀을 씻었다.
국을 끓였다.
손님이 오면 밥을 줬다.
저녁이 되면 문을 닫았다.
다음 날 또 했다.
그게 6년이었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식당은 남아 있었다.
집도 남아 있었다.
주방도 남아 있었다.
컵도 남아 있었다.
그래서 미정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둘째 날 아침.
대피소에서 한 노인이 계속 기침했다.
미정은 처음엔 신경 쓰지 않았다.
자기도 힘들었다.
모두 힘들었다.
그런데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노인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정은 물병을 하나 들었다.
“아버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물 좀 드세요.”
노인은 손을 내밀었다.
손이 떨렸다.
미정은 병뚜껑을 열어 줬다.
노인은 두 모금 마셨다.
“고마워요.”
“천천히 드세요.”
그게 끝이었다.
미정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몇 분 뒤 자원봉사자가 다가왔다.
“혹시 식당 하신다고 들었는데 맞으세요?”
미정은 고개를 들었다.
“했죠.”
“혹시 죽 끓이는 것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미정은 사람을 바라봤다.
“지금요?”
“아이들이 아침을 거의 못 먹어서요.”
미정은 어이가 없었다.
자기 집도 없어졌다.
식당도 없어졌다.
남편 사진도 없어졌다.
그런데 죽을 끓여 달라고 했다.
“다른 사람 없어요?”
“있긴 한데…”
자원봉사자가 난처하게 웃었다.
“큰 솥을 다뤄 본 분이 별로 없어서요.”
미정은 거절하려 했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체육관 한쪽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종이컵에 든 과자를 먹고 있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젖은 옷을 말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정은 한숨을 쉬었다.
“쌀 어디 있어요?”
처음에는 스무 명분이었다.
미정은 큰 솥을 보자마자 불부터 낮췄다.
“이렇게 세게 끓이면 바닥 눌어붙어요.”
젊은 자원봉사자가 물었다.
“물 더 넣을까요?”
“조금.”
“이 정도?”
“너무 많아.”
미정은 직접 국자를 잡았다.
쌀알이 퍼지는 것을 보았다.
소금 간을 했다.
참기름을 조금 넣었다.
“김 있으면 잘라요.”
첫 번째 죽이 나왔다.
아이들이 먹었다.
한 아이가 말했다.
“맛있다.”
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에는 쉰 명분이었다.
점심에는 백 명이 넘었다.
저녁에는 다른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들어왔다.
미정은 계속 솥 앞에 있었다.
누가 말했다.
“사장님, 좀 쉬세요.”
미정은 말했다.
“이거 끝나고.”
“아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럼 말을 듣지 마.”
셋째 날 오후,
트럭 한 대가 대피소 앞에 멈췄다.
문이 열리고 커다란 솥이 내려왔다.
그 뒤에서 60대 후반의 여자가 소리쳤다.
“그렇게 끓이면 백 명 못 먹여!”
미정이 돌아봤다.
“뭐라고요?”
여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솥 작은 걸 두 개 돌리면 불만 많이 먹어.”
“누구세요?”
“오명숙.”
미정은 모르는 이름이었다.
명숙이 앞치마를 묶었다.
“조선소 식당에서 37년 밥했어.”
미정이 국자를 놓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서요?”
명숙이 미정을 보더니 웃었다.
“성질 있네.”
“아주머니도 만만치 않네요.”
명숙이 큰 솥을 손으로 두드렸다.
“비켜 봐.”
미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요?”
“그렇게 끓이면 백 명 못 먹여. 비켜 봐.”
주변 자원봉사자들이 두 여자를 번갈아 봤다.
잠시 뒤 미정이 국자를 내밀었다.
“그럼 해 보세요.”
명숙은 받았다.
“쌀 더 불려 놨어?”
“저쪽에.”
“몇 포대?”
“세 포대.”
명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됐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170명분을 만들었다.
서로 계속 싸우면서.
“간 세요.”
“안 세.”
“짜요.”
“당신 집이 싱겁게 먹는 거야.”
“당근 그렇게 크게 썰면 애들이 안 먹어요.”
“먹어.”
“안 먹는다니까.”
결국 아이들은 먹었다.
며칠이 지나자 대피소에 낯익지 않은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
중학교 역사 교사 박준호는 아이들을 모아 임시 수업을 시작했다.
“학교는 며칠 못 갈 수도 있으니까 여기서 조금씩 하자.”
아이들이 불평했다.
“재난 났는데 공부도 해요?”
준호가 웃었다.
“그러게.”
그래도 칠판을 세웠다.
서울에서 온 남매가 그릇과 컵을 한가득 가져왔다.
오빠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그가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버지 고향이 여기 근처라서요.”
미정은 그를 잘 몰랐다.
“거기 두세요.”
그 남자가 상자 속 그릇을 보다가 웃었다.
“이번엔 깨져도 괜찮은 것들입니다.”
미정은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에는 건설회사 차량들이 들어왔다.
접이식 테이블.
합판.
작업등.
장갑.
정리용 컨테이너.
차에서 내린 남자가 직원들에게 말했다.
“진료소 쪽 길 먼저 열어 주세요.”
누군가 그를 강태준 대표라고 불렀다.
미정에게는 이름이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왔다.
사람들이 뭔가를 했다.
그리고 또 갔다.
그것뿐이었다.
일주일째 되던 날,
물이 조금 빠졌다.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가 물건을 정리해도 된다는 안내가 나왔다.
미정은 처음에 가지 않으려 했다.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장화를 신고 골목으로 갔다.
자기 집 앞에서 멈췄다.
문짝 한쪽이 떨어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냄새부터 달랐다.
흙.
썩은 나무.
하수 냄새.
젖은 벽지.
냉장고는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서랍은 모두 열려 있었다.
그릇은 깨졌다.
장롱 안 옷들은 진흙에 젖어 있었다.
미정은 한 걸음씩 안으로 들어갔다.
사진첩을 찾았다.
없었다.
남편의 셔츠가 한 장 나왔다.
진흙으로 갈색이 되어 있었다.
미정은 들어 올렸다.
천이 무거웠다.
다시 내려놓았다.
식당으로 갔다.
간판 일부가 떨어져 있었다.
미정네 백반
‘미정네’의 ‘정’ 글자가 사라졌다.
미정은 한동안 그것을 봤다.
식당 안은 더 심했다.
의자가 뒤집혀 있었다.
밥솥은 망가졌다.
냉동고는 열려 있었다.
반찬통이 바닥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미정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생전에 늘 쓰던 작은 선반이 무너져 있었다.
거기에는 그의 컵이 있었다.
흰색 찻잔.
파란 꽃이 하나 그려진 싸구려 컵.
남편은 이상하게 그 컵만 썼다.
미정이 여러 번 새 컵을 사 줬다.
“이거 버려.”
남편은 늘 말했다.
“아직 멀쩡한데 왜 버려.”
미정은 진흙 속을 손으로 뒤졌다.
손끝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컵 손잡이였다.
그녀는 꺼냈다.
컵은 두 조각으로 깨져 있었다.
한쪽에는 파란 꽃의 반쪽이 남아 있었다.
미정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처음에는 울지 않았다.
두 조각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주방 밖에서 사람들이 무언가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망치 소리.
삽 소리.
누군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
미정은 컵을 바라봤다.
남편이 아침마다 그 컵에 보리차를 마셨다.
손님이 없으면 계산대에 앉아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암 진단을 받은 날도 그 컵을 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식당에 나온 날에도.
그런데 이제 두 조각이었다.
미정이 손가락으로 파란 꽃을 만졌다.
그리고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리가 없었다.
어깨만 떨렸다.
그러다 숨이 막히듯 울었다.
“왜…”
누구에게 묻는 말인지도 몰랐다.
“왜 이것까지…”
남편은 이미 죽었다.
그건 알고 있었다.
사진도 사람은 아니다.
컵도 사람은 아니다.
식당도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이 떠난 뒤에는
그 사람이 만졌던 것들이
사람의 자리를 조금씩 대신한다.
컵 하나.
셔츠 하나.
의자 하나.
사진 한 장.
그것들이 사라지면
사람을 또 한 번 잃는 것 같았다.
미정은 바닥에 앉아 오래 울었다.
그날 저녁 대피소로 돌아왔을 때 명숙이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숙이 그녀 손에 든 비닐봉지를 봤다.
“뭐야?”
“컵.”
“컵?”
미정은 봉지를 열지 않았다.
명숙은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말했다.
“죽 좀 봐.”
미정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못 해요.”
“그래.”
명숙은 바로 돌아섰다.
미정은 조금 놀랐다.
“왜 안 잡아요?”
명숙이 말했다.
“싫다는데 왜 잡아.”
그리고 몇 걸음 가다가 덧붙였다.
“내일 하면 되지.”
미정은 그 말을 듣고 한참 서 있었다.
내일.
그 말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다음 날 아침,
미정은 다시 주방 텐트로 갔다.
명숙이 말했다.
“왔네.”
“네.”
그게 전부였다.
아무도 어제 왜 안 왔는지 묻지 않았다.
미정은 쌀을 씻었다.
물을 맞췄다.
파를 썰었다.
죽을 끓였다.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가 아니었다.
상처가 나아서도 아니었다.
그냥 죽을 끓일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피해 복구가 시작되면서 대피소 사람들은 조금씩 줄었다.
일부는 친척 집으로 갔다.
일부는 임시주택으로 옮겼다.
미정은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체육관에 남았다.
어느 날 군청 직원이 말했다.
“식당 건물은 철거해야 할 가능성이 큽니다.”
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난지원금하고 소상공인 지원 신청 도와드릴게요.”
“네.”
“다시 장사하실 계획 있으세요?”
미정은 대답하지 못했다.
직원이 다시 물었다.
“사장님?”
“모르겠어요.”
정말 몰랐다.
누군가 같으면 말했다.
다시 시작해야지.
남편도 그걸 원할 거야.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하지만 미정은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뭘 원했을지는 이제 알 수 없었다.
자기도 뭘 원하는지 몰랐다.
그저 모르겠다고 했다.
며칠 뒤,
건설회사에서 임시 조립식 건물을 하나 지원했다.
원래는 복구 작업자들이 쉴 공간으로 쓰려던 것이었다.
주민들은 그중 한 칸을 공동 식당으로 쓰기로 했다.
명숙이 미정을 쳐다봤다.
“할 거지?”
미정이 물었다.
“뭘요?”
“밥.”
“왜 제가 해요?”
“잘하니까.”
“아주머니가 더 잘하잖아요.”
“난 집에 갈 거야.”
“언제요?”
“내일.”
미정이 놀랐다.
“벌써요?”
“조선소도 사람이 밥 먹어야 돼.”
미정은 피식 웃었다.
명숙이 말했다.
“여기 계속 있을 사람은 당신이잖아.”
미정은 조립식 건물을 바라봤다.
작았다.
예전 식당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간판도 없었다.
냉장고 하나.
가스레인지 두 개.
중고 식탁 네 개.
“이걸 식당이라고 해요?”
명숙이 말했다.
“밥 나오면 식당이지.”
명숙이 떠나는 날,
두 사람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미정이 봉투 하나를 건넸다.
“뭐야?”
“김치.”
“내가 김치가 없겠어?”
“그럼 놓고 가요.”
명숙이 받았다.
“짜게 했지?”
“아주머니 입에는 딱 맞을 거예요.”
명숙이 웃었다.
차에 타기 전 미정에게 말했다.
“죽 끓일 때 불 너무 세게 하지 마.”
미정이 대꾸했다.
“누가 누구한테.”
명숙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떠났다.
임시 식당은 며칠 뒤 문을 열었다.
정식 영업은 아니었다.
복구 작업자와 마을 사람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첫날 23명이 왔다.
둘째 날 31명.
일주일 뒤에는 50명이 넘었다.
사람들은 돈을 조금씩 놓고 갔다.
누군가는 채소를 가져왔다.
누군가는 쌀을 줬다.
누군가는 생선을 들고 왔다.
미정은 장부를 새로 만들었다.
첫 페이지를 오래 바라봤다.
예전 장부가 떠올랐다.
18년 동안 숫자가 쌓여 있었다.
외상값.
식재료비.
매출.
남편이 잘못 적어 놓은 숫자.
그 모든 것이 없어졌다.
미정은 새 장부 첫 줄에 날짜를 적었다.
그리고 메뉴를 적었다.
된장찌개. 고등어구이. 계란말이.
그게 시작이었다.
어느 오후,
박준호가 아이들과 식당으로 왔다.
“오늘 수업 끝났습니다.”
미정이 말했다.
“수업하면 밥 더 먹어요?”
준호가 웃었다.
“아마도요.”
민재와 유토도 함께 있었다.
두 아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반찬을 놓고 싸웠다.
“그거 내 거야.”
“같이 먹는 거야.”
미정이 말했다.
“싸우면 둘 다 안 줘.”
아이들은 조용해졌다.
잠시 뒤 다시 웃었다.
미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아주 조금이었다.
서울에서 그릇을 가져왔던 김도현도 다시 왔다.
이번에는 여동생 가족과 함께였다.
조카가 그릇을 들다가 떨어뜨렸다.
쨍.
모두가 멈췄다.
도현이 아이를 바라봤다.
미정도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가 얼굴이 하얘졌다.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아.”
미정이 빗자루를 가져왔다.
“안 다쳤으면 됐어요.”
도현은 미정을 바라봤다.
“그렇죠.”
둘은 깨진 그릇을 함께 치웠다.
미정은 잠시 자기 비닐봉지 안의 깨진 컵을 생각했다.
모든 깨진 것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것은 버려도 된다.
어떤 것은 버릴 수 없다.
그리고 어떤 것은 고치지 않아도 곁에 둘 수 있다.
미정은 남편의 컵을 붙이지 않았다.
접착제를 사려다가 그만뒀다.
두 조각을 작은 선반 위에 나란히 놓았다.
누군가 물었다.
“깨진 컵을 왜 두세요?”
미정은 말했다.
“그냥.”
“붙이면 되잖아요.”
“안 붙일 거예요.”
“왜요?”
미정은 잠시 생각했다.
“깨졌으니까.”
상대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미정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깨진 것을 깨지지 않은 것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컵은 깨졌다.
남편은 죽었다.
집은 떠내려갔다.
식당은 무너졌다.
그 사실들은 그대로 있었다.
그렇다고 두 조각을 버릴 필요도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미정은 임시 식당 뒤편 흙바닥에 작은 모종 몇 개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고추 모종이었다.
누가 가져다 놓은지 몰랐다.
종이컵에 흙을 담아 키운 어린 모종.
줄기가 가늘었다.
잎이 네다섯 장.
미정은 하나를 들어 올렸다.
강태준이 지나가다 물었다.
“그거 심으시게요?”
미정이 말했다.
“그럴까 봐요.”
태준은 주변을 봤다.
“근데 여기 임시 부지라 언제 정리할지 아직 모릅니다.”
“알아요.”
“몇 달 뒤 옮길 수도 있어요.”
미정은 고추 모종을 바라봤다.
“그렇겠죠.”
태준이 물었다.
“그럼 왜 심으세요?”
미정은 잠시 생각했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냥 고추를 왜 심느냐고 묻는 말이었다.
그래서 미정도 그냥 대답했다.
“몰라요.”
그녀는 무릎을 굽혔다.
손으로 작은 구멍을 팠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도 오늘은 심어야 하니까.”
태준은 더 묻지 않았다.
미정은 모종을 흙 속에 세웠다.
손으로 흙을 모아 뿌리 주변을 눌렀다.
물을 조금 부었다.
잎이 흔들렸다.
그 옆에 두 번째 모종을 심었다.
그리고 세 번째.
식당 안에서는 사람들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
아이 웃음소리.
누군가 커피를 찾는 소리.
준호가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
공사 차량이 움직이는 소리.
멀리서는 아직 무너진 집을 철거하는 소리도 들렸다.
모든 것이 끝난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둘 다 동시에 있었다.
미정은 고개를 들어 마을을 바라봤다.
아직 진흙이 남아 있었다.
벽에는 물이 올라왔던 자국이 선명했다.
어떤 집은 비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진은 사라졌다.
남편의 앨범도 찾지 못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가운데가 아팠다.
그녀는 남편을 잊지 않았다.
잊고 싶지도 않았다.
홍수를 감사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 일이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이다.
그게 진실이었다.
하지만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녀는 여기 있었다.
미정은 손에 묻은 흙을 털었다.
임시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 아이가 말했다.
“아줌마, 계란 더 주세요.”
미정이 말했다.
“하나 먹었잖아.”
“배고파요.”
“두 개 먹으면 점심 못 먹어.”
“먹을 수 있어요.”
미정이 계란말이 한 조각을 더 줬다.
“이게 마지막.”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사장님, 국 좀 더요.”
미정이 국자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 멈췄다.
사장님.
오랜만에 들은 말 같았다.
미정은 아무 말 없이 국을 퍼 줬다.
그날 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
미정은 식당 불을 끄기 전에 선반을 바라봤다.
깨진 컵 두 조각이 나란히 있었다.
그 옆에는 남편의 사진이 없었다.
사진은 없었다.
그녀는 잠시 서 있었다.
“당신.”
말이 저절로 나왔다.
대답은 없었다.
“오늘 고추 심었어.”
미정은 조금 웃었다.
“당신 있었으면 또 뭐라 했겠지.”
남편이 뭐라고 했을지 떠올랐다.
거기다 심으면 햇빛이 부족해.
아니면,
고추는 간격 더 띄워야지.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미정이 혼잣말을 했다.
“알았어. 내일 옮길게.”
그리고 잠시 침묵했다.
“아니.”
“그냥 둘래.”
그녀는 컵 조각 하나를 손끝으로 살짝 만졌다.
불을 껐다.
새벽 5시 40분.
미정은 다음 날에도 일어났다.
누가 깨운 것은 아니었다.
알람이 울렸다.
잠시 천장을 봤다.
몸이 무거웠다.
일어나기 싫었다.
그냥 계속 누워 있고 싶었다.
그런데 6시 반이면 복구 작업자 몇 명이 온다고 했다.
미정은 천천히 일어났다.
세수했다.
머리를 묶었다.
앞치마를 입었다.
식당 문을 열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들어왔다.
밖에는 어제 심은 고추 모종이 있었다.
밤사이 쓰러지지 않았다.
잎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미정은 한참 바라봤다.
기적은 아니었다.
답도 아니었다.
희망이라고 부르기에도 아직 너무 작았다.
그저 고추 한 포기였다.
살아 있었다.
미정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쌀을 씻었다.
솥에 물을 넣었다.
가스 불을 켰다.
불이 붙었다.
파란 불꽃이 올라왔다.
그 순간 동쪽 산 너머에서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조금.
그러다 천천히 마을 전체를 비췄다.
무너진 집도.
진흙 자국도.
임시 식당도.
고추 모종도.
그리고 미정도.
그녀는 창문을 열었다.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첫 손님이었다.
미정은 밥솥 뚜껑을 열었다.
따뜻한 김이 얼굴로 올라왔다.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집도 돌아오지 않았다.
예전 식당도 돌아오지 않았다.
미정은 왜 살아야 하는지 아직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면 설명하지 못한 채 오래 살아갈지도 몰랐다.
그런데 아침은 이미 와 있었다.
누군가는 곧 배가 고플 것이다.
누군가는 밥을 먹어야 했다.
미정은 국자를 들었다.
그리고 첫 그릇에 국을 담았다.
밖에서는 작은 고추 모종이 아침 햇빛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아침은 왔다.
마지막 글

『토지』에서 시작된 질문은 결국 아주 가까운 곳으로 돌아옵니다.
사람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은 뒤에야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끝내 돌아오지 않습니다. 사람도, 집도, 지나간 시간도, 한때 우리가 알고 있던 가족의 모습도 그대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아프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삶은 다른 방식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누군가는 오래 잃어버렸던 집을 되찾지만, 그 집 안에 예전의 가족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누군가는 할머니의 아픈 기억을 물려받지만, 그 기억과 함께 미움까지 다음 세대에 넘길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누군가는 수십 년 동안 사람들에게 밥을 했지만 역사책에는 이름이 없었고, 또 누군가는 평생 지켜 온 논이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가족과 마을의 시간이 쌓인 자리였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잃은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희망이 갑자기 생기지도 않습니다. 슬픔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다만 누군가에게 물을 건네고, 죽을 끓이고, 밥을 퍼 주고, 작은 고추 모종 하나를 흙에 심습니다.
그 작은 행동은 거대한 해답이 아닙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거대한 해답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 밥을 짓는 것,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아이에게 한 조각 더 내어 주는 것, 오래된 기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다음 세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것, 그런 아주 작은 행동들이 사람을 다음 날까지 데려갑니다.
상처가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고통은 없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빼앗기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고, 죽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고, 헤어지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없앨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조금 달라집니다.
그 상처를 안고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기억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
내가 받은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건넬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멈출 것인가.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다음 사람에게 넘길 것인가.
그리고 오늘,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조금 더 살아 있게 할 것인가.
어쩌면 『토지』가 끝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왜 살아야 하는가”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보다 더 작고, 더 일상적이고, 더 어려운 질문일 수 있습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오늘 나는 누구를 조금 더 살아 있게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말보다 먼저 행동으로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밥 한 그릇.
따뜻한 물 한 병.
기억해야 할 이름 하나.
다시 심은 모 한 포기.
작은 고추 모종 하나.
그렇게 사람은 모든 것을 이해한 뒤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서로를 붙잡으며 다음 날을 만들어 갑니다.
김도현
「아버지의 집을 되찾은 날」
46세의 서울 IT 기업 임원.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잃은 집을 되찾는 일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집을 다시 산 뒤 자신이 진짜 찾고 있던 것은 건물이 아니라 잃어버리기 전의 가족과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박준호
「할머니가 미워하던 나라」
39세의 중학교 역사 교사. 식민지 시대의 상처를 겪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역사적 진실을 지키려는 마음과 다음 세대에게 미움을 물려주지 않는 일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시 생각한다.
오명숙
「역사책에 없던 여자」
67세. 조선소 식당에서 37년 동안 일한 조리원. 강하고 직설적이며 사람들의 식습관과 사정을 놀라울 만큼 잘 기억한다. 자신이 영웅으로 기록되는 것보다 함께 사람들을 살렸던 이름 없는 사람들의 존재가 기록되기를 원한다.
강태준
「마지막 논」
51세의 부동산 개발회사 대표. 농촌 빈곤에서 벗어난 가족의 후손으로, 흙에서 멀어지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마지막 논을 둘러싼 협상 속에서 땅을 가격이 아니라 시간과 관계로 보기 시작한다.
최병수
「마지막 논」
82세 농부. 평생 한 논을 지켜 왔다. 그곳에는 가족의 삶과 죽음, 사랑, 갈등, 마을의 기억이 겹쳐 있다. 하지만 땅을 그대로 남기는 것만이 진정한 보존인지 스스로 묻게 된다.
한미정
「그래도 아침은 왔다」
54세의 작은 식당 주인.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남편의 흔적과 집, 식당, 생활의 기반을 잃는다. 삶의 의미를 곧바로 찾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물을 건네고 죽을 끓이고 작은 것을 심는 행동 속에서 다음 날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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