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망월리에는 정부 기록보다 오래 기억하는 집이 있었다.
그 집 부엌 한가운데에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검은 돌이 놓여 있었고, 누군가 진실을 삼킬 때마다 놋숟가락이 떨렸다. 금이 간 흰 그릇에는 죽은 사람의 밥이 담겼으며, 이름을 잃은 사람들은 족보가 아니라 천으로 만든 이름보 위에 검은 점으로 남았다.
강이문이 한여름의 눈을 따라 망월리에 도착한 뒤, 그의 가족은 해방과 전쟁, 피난과 분단, 도시화와 언론의 시대를 지나왔다. 사람들은 집을 떠났고, 이름을 바꾸었으며, 기록에서 사라졌다. 어떤 이는 죽어서 돌아왔고, 어떤 이는 구두만 먼저 보냈으며, 어떤 이는 가족이 자신을 기억하기도 전에 그 기억을 거부해야 했다.
이 집에서 과거는 끝난 일이 아니었다.
과거는 편지가 되어 쓰이기 전에 도착했고, 사진 속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을 세웠으며, 텔레비전이 잘라낸 다음 장면을 벽과 거울에 다시 보여 주었다. 그러나 검은 돌이 지키는 것은 아름다운 가족 전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배신과 비겁함, 버림받은 딸들, 이름 없이 죽은 피난민들, 그리고 용서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책임이었다.
강준호가 여러 이름을 버리고 마침내 자기 이름으로 죽기까지, 가족은 기억이 누구의 소유인지 배워야 했다.
기억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끝까지 이름을 찾았다는 사실은, 죽은 사람을 완전히 외롭게 두지 않았다.
이것은 한 가족의 백 년에 가까운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역사가 국가와 전쟁과 승자의 이름을 적는 동안, 한 집은 밥그릇과 구두와 숟가락과 빈칸으로 다른 역사를 남겼다.
그리고 그 집은 마지막에 한 가지를 이해한다.
가족의 이야기는 가족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잠시 맡아 두었다가, 아직 오지 않은 사람에게 넘겨줄 뿐이다.
제1장: 여름눈을 따라온 남자

망월리에 눈이 내린 것은 유월 초하루였다.
보리 이삭은 누렇게 익어 가고 있었고, 개울가에서는 아이들이 바지를 걷어 올린 채 피라미를 쫓고 있었다. 해는 아침부터 뜨거웠다. 장독대의 뚜껑은 손을 대기 어려울 만큼 달아올랐고, 산비탈의 소나무들은 마른 송진 냄새를 풍겼다.
그런데 정오가 가까워졌을 때, 북쪽 산마루 위로 흰 것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버들씨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다음에는 재라고 했다. 산 너머에서 불이 났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흰 조각 하나가 우물가에 있던 오씨 할머니의 손등에 내려앉아 녹자, 사람들은 그제야 그것이 눈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씨 할머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하늘도 철이 없구나. 눈 올 때를 잊었네.”
마을 사람들은 웃지 않았다. 유월에 눈이 내리면 나라에 큰일이 생긴다거나, 왕이 병들었다거나, 산신이 노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지난해 역병으로 죽은 이들이 산을 넘어 돌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오씨 할머니만은 장독 뚜껑을 덮으며 말했다.
“산 사람이 먹을 장이나 지켜라. 죽은 사람은 자기 길을 잘 찾는다.”
망월리는 지도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마을이었다. 산 세 겹을 넘어야 했고, 비가 많이 오면 동쪽 길이 끊겼다. 서쪽으로 흐르던 강은 여름이면 물이 불어났다가 가을이 되면 어느 구간에서 땅속으로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강물이 땅 밑을 돌아 겨울에 다시 나온다고 믿었다.
그날 눈은 마을 전체에 내리지 않았다.
북쪽 산의 좁은 능선을 따라 한 줄로 내렸다. 마치 누군가 하늘에서 흰 천을 길게 늘어뜨린 것 같았다.
그 눈길을 따라 한 남자가 내려왔다.
남자는 서른을 조금 넘긴 것처럼 보였으나, 걷는 모습은 오십 먹은 사람처럼 무거웠다. 한쪽 어깨에는 헝겊으로 감싼 긴 보따리를 메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나무 상자를 들고 있었다. 옷에는 진흙과 마른 피가 묻어 있었다. 짚신은 한쪽 끈이 끊어진 채였다.
그가 마을 어귀에 도착했을 때 눈은 그의 머리와 어깨에만 쌓여 있었다.
아이들이 가장 먼저 그를 보았다.
“눈사람이다.”
“사람인데.”
“사람이 눈을 데리고 왔다.”
남자는 아이들을 지나 우물가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물 한 바가지를 떠서 마셨다.
오씨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서 왔소?”
남자는 물바가지를 내려놓았다.
“남쪽에서 왔습니다.”
“남쪽도 넓지.”
“산 아래에서 왔습니다.”
“산 아래도 넓고.”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살던 곳에서 왔습니다.”
오씨 할머니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오래 산 사람은 대답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질문을 거듭해 보아야 거짓말만 늘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름은?”
“강이문입니다.”
“성을 빼면?”
“이문입니다.”
“성을 빼도 같은 이름이면 기억하기는 쉽겠네.”
그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를 강이문이라 불렀다.
아무도 그것이 그의 진짜 이름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강이문은 사흘 동안 마을 서쪽의 빈 외양간에서 잤다. 누구에게도 일을 달라고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시키는 일은 거절하지 않았다. 무너진 돌담을 쌓고, 지붕의 썩은 이엉을 갈고, 장작을 패고, 비가 오기 전에 논둑을 다졌다.
그는 힘이 셌으나 일하는 속도는 느렸다. 돌 하나를 옮길 때마다 마치 그 돌이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해 두려는 사람처럼 한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넷째 날, 마을 어른들이 그를 느티나무 아래로 불렀다.
“얼마나 머물 생각인가?”
이문은 말했다.
“눈이 멈출 때까지요.”
마을 사람들은 산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았고, 들에는 여름 햇빛이 가득했다. 그러나 북쪽 능선 위에는 여전히 가느다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안 멈추면?”
“여기 살겠습니다.”
“눈이 내일 멈추면?”
이문은 잠시 침묵했다.
“내일 생각하겠습니다.”
오씨 할머니가 말했다.
“저런 사람은 대개 오래 산다. 내일 생각하겠다는 사람은 내일도 남아 있거든.”
마을 사람들 가운데 백연화라는 여자가 있었다.
연화는 스물여섯이었고, 부모와 남편을 모두 역병으로 잃은 뒤 혼자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장례식에서 노래를 잘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화는 자신이 노래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오래 기억할 뿐이라고 했다.
그녀는 농사철에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밭에서 일했고, 겨울이면 아이들에게 옛 노래를 가르쳤다. 마을에 누가 죽으면 상여 앞에서 노래를 불렀고, 누가 태어나면 백일상 곁에서 낮은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렀다.
연화는 이문에게 처음부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낯선 사람이 마을에 들어오면 여자들이 먼저 궁금해하고 남자들이 나중에 경계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어느 쪽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문이 외양간 지붕을 고치다가 떨어졌을 때, 연화는 약초를 들고 찾아갔다.
“뼈는 안 부러졌어요?”
“괜찮습니다.”
“괜찮은 사람은 숨을 그렇게 쉬지 않아요.”
이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화는 그의 옆구리에 약초를 붙였다. 옷을 걷어 올리자 오래된 흉터가 보였다. 칼에 베인 것처럼 길게 난 상처였고, 그 아래에는 불에 덴 자국이 있었다.
“전쟁을 겪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전쟁 하나쯤은 겪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흉년은 겪었어도 전쟁은 겪지 않았어요.”
“그럼 다행입니다.”
연화는 그가 대답을 피할 때마다 목소리가 더 공손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저녁, 이문은 연화의 집 앞에 쪼갠 장작을 한 단 놓고 갔다.
연화는 다음 날 장작 절반을 외양간 앞에 돌려놓았다.
그 뒤로 둘 사이에는 이상한 교환이 시작되었다. 이문이 지붕의 기와를 고쳐 주면 연화는 보리밥을 가져왔다. 연화가 그의 torn 짚신을 새 끈으로 묶어 주면 이문은 우물의 깨진 두레박을 고쳤다.
마을 사람들은 둘이 말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있는 것을 보고 혼인 이야기를 꺼냈다.
오씨 할머니는 말했다.
“말 많은 부부도 못 살고, 말 없는 부부도 못 산다. 저 둘은 필요한 말만 하니 오래 살겠구나.”
연화는 그 말을 듣고도 대꾸하지 않았다.
이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북쪽 능선의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이문은 마을 끝 강가에 집을 짓기로 했다.
그곳은 예전부터 사람들이 집터로 쓰지 않던 자리였다. 봄이면 물이 차오르고, 겨울이면 땅이 갈라졌다. 무엇보다 땅 한가운데 검은 돌이 반쯤 드러나 있었다.
돌은 소 한 마리만 했고, 한낮에도 차가웠다.
이문은 돌을 캐내려 했다. 삽날이 세 번 부러졌다. 마을 장정들이 밧줄을 걸어 끌어 보았으나 돌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씨 할머니가 지팡이로 돌을 두드렸다.
“내가 어릴 때도 있었어.”
“그전에도 있었겠지요.”
연화가 물었다.
“왜 아무도 여기 집을 안 지었어요?”
오씨 할머니는 대답했다.
“돌이 듣거든.”
장정들이 웃었다.
“귀가 어디 있다고요?”
“너희 입보다 깊은 데 있겠지.”
오씨 할머니는 돌에 손을 얹었다.
“거짓말은 안 들어. 사람은 거짓말을 쉽게 하니까. 이 돌은 하려다 삼킨 말을 듣는다.”
이문은 검은 돌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럼 조용한 집이 되겠네요.”
“아니. 말 안 하는 사람이 많은 집이 되지.”
연화가 그를 쳐다보았다.
이문은 돌을 캐내는 대신 그 위에 집을 짓기로 했다.
첫 기둥을 세우던 날, 북쪽 능선에 내리던 눈이 갑자기 멈췄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좋은 징조라고도 했고, 더 나쁜 징조라고도 했다. 오씨 할머니는 둘 다 아니라고 말했다.
“눈도 갈 데를 찾은 거지.”
집을 짓는 동안 이문은 한 번도 자신의 보따리와 나무 상자를 열지 않았다. 그는 그것들을 외양간 구석에 두었다가 새집의 가장 안쪽 방으로 옮겼다.
연화는 묻지 않았다.
그러나 묻지 않는 것이 궁금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가을이 왔고, 두 사람은 혼례를 올렸다.
혼례는 크지 않았다. 연화는 새 옷 대신 어머니가 입었던 치마를 입었고, 이문은 마을에서 빌린 도포를 입었다. 오씨 할머니는 술잔을 채우면서 이문에게 말했다.
“신랑 옷보다 주인 얼굴이 더 빌린 것 같구나.”
사람들이 웃었다.
이문도 웃었지만, 연화는 그 웃음이 얼굴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을 보았다.
첫날밤, 새집 안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지붕에는 구멍이 없었다. 밖에는 별이 보였다. 그런데 가장 안쪽 방 천장에서 흰 눈이 조용히 떨어졌다.
연화가 손을 내밀었다.
눈은 손바닥에 닿기 전에 방향을 바꾸었다.
눈은 이문의 몸에도, 연화의 이불에도 내려앉지 않았다. 방 한쪽에 놓인 긴 보따리와 나무 상자 위에만 쌓였다.
이문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연화가 말했다.
“이제 열어야겠네요.”
“내일 열겠습니다.”
“눈은 오늘 왔어요.”
“오늘은 혼례날입니다.”
“그래서요?”
이문은 상자를 보았다.
“좋은 날에는 좋은 이야기만 해야 합니다.”
연화는 대답했다.
“좋은 날에 나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나쁜 날에 더 나쁜 이야기가 돼요.”
이문은 상자 쪽으로 가지 않았다.
연화는 촛불을 들고 상자 앞에 앉았다.
“내가 열까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당신이 열어요.”
이문은 오래 침묵했다.
그 순간 부엌 쪽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났다.
돌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두 사람은 함께 부엌으로 갔다. 검은 돌의 드러난 부분에 머리카락처럼 가는 금이 생겨 있었다.
연화는 금에 손을 대었다.
“무슨 말을 하려다 안 했어요?”
“아무 말도.”
“그러니까 들은 거겠지요.”
이문은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마침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낡은 족보 한 권이 있었다. 여러 장이 찢겨 있었고, 남은 이름들 위에는 먹물이 덧칠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흰 밥그릇 하나가 있었다.
그릇은 정확히 반으로 갈라질 듯 깊게 금이 가 있었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연화는 밥그릇을 들어 보았다.
“누구 것이에요?”
이문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부엌에서 다시 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연화는 밥그릇을 내려놓았다.
“오늘 다 말하지 않아도 돼요.”
이문의 눈이 처음으로 그녀를 바로 보았다.
연화가 말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고는 하지 마세요.”
이문은 고개를 숙였다.
“가족이 있었습니다.”
밖에서는 매미가 울고 있었다. 한여름도 아닌데 마지막 남은 매미 한 마리가 밤새 울었다.
“어디에요?”
“남쪽에.”
“살아 있어요?”
“모릅니다.”
“왜 떠났어요?”
이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돌은 이번에는 갈라지지 않았다.
연화는 그 침묵이 대답보다 더 정확하다는 것을 알았다.
“버렸군요.”
이문은 말했다.
“살아남으려 했습니다.”
“혼자?”
“그때는 혼자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문은 한참 뒤에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연화는 금이 간 밥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그릇을 씻고, 말린 뒤, 찬장 가장 아래 칸에 놓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은 그쳤다.
하지만 나무 상자 위에는 녹지 않은 눈이 한 줌 남아 있었다.
그날부터 이문은 마을 사람이 되었다.
그는 논을 빌려 농사를 지었고, 집 둘레에 돌담을 쌓았다. 연화는 마당에 들깨와 봉숭아를 심었다. 이듬해에는 첫아들이 태어났다.
아이는 밤마다 울었다.
이문이 안으면 더 크게 울었고, 연화가 노래를 부르면 잠잠해졌다. 오씨 할머니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비가 데려온 눈을 다 녹이려나 보다.”
백일이 되던 날, 마을 사람들은 새집에 모였다.
보리떡과 삶은 달걀이 놓였고, 작은 그릇에는 흰쌀밥이 담겼다. 쌀이 귀한 때였지만 이문은 아이의 백일상을 위해 산 너머 장터에서 쌀을 구해 왔다.
연화는 상 한쪽 끝에 빈 자리를 남겼다.
그 자리에 금이 간 흰 밥그릇을 놓았다.
이문이 물었다.
“왜 그걸 꺼냈어요?”
“누군가의 것이잖아요.”
“여기 올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당신이 정할 일이 아니에요.”
이문은 사람들 앞에서 더 말하지 않았다.
오씨 할머니가 금 간 그릇을 보더니 밥을 한 숟갈 담았다.
“빈 그릇은 빈 사람을 부른다.”
이문이 그릇을 치우려 하자 연화가 손목을 잡았다.
그 순간 집 안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어떤 사람은 산신이 왔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지붕에 서리가 끼었다고 했다.
그러나 눈은 부엌 안에만 내렸다.
아이에게는 닿지 않았다.
연화에게도 닿지 않았다.
이문의 어깨에도 내려앉지 않았다.
눈은 금이 간 밥그릇 안으로만 떨어졌다.
그릇은 곧 흰 눈으로 가득 찼다.
오씨 할머니가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이상하네.”
“뭐가요?”
“눈이 녹지 않아.”
이문은 밥그릇 앞에 앉았다.
그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울고 있는지 확인하려 했으나, 연화가 문 앞을 막았다.
“밥부터 드세요.”
사람들은 마당으로 나가 보리떡을 먹기 시작했다.
연화는 이문 옆에 앉았다.
“그 사람들 이름을 기억해요?”
이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엌 아래의 돌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금이 새로 생기지 않았다.
대신 처음 생긴 금이 조금 더 깊어졌다.
이문이 마침내 말했다.
“기억합니다.”
“전부?”
“기억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더 선명해집니다.”
연화는 그릇 속 눈을 바라보았다.
“그럼 언젠가는 말해요.”
“당신에게?”
“나에게든 아이에게든. 아니면 돌에게라도.”
밖에서는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오씨 할머니가 떡을 너무 크게 잘랐다고 누군가 불평했고, 오씨 할머니는 작게 먹고 싶으면 이빨로 줄이라고 대꾸했다.
아이의 울음이 그쳤다.
이문은 빈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연화에게도, 아이에게도, 돌에게도 아직 말하지 못했다.
자신이 버리고 온 사람들의 이름을.
하지만 그날 이후 강씨 집안의 식탁에는 언제나 그릇 하나가 더 놓였다.
누구의 것인지 아무도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망월리 사람들은 그 그릇을 죽은 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그 그릇이 놓였을 때, 죽은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제2장: 검은 돌 위에 세운 집

강씨 집안의 밥상에는 늘 그릇이 하나 더 놓였다.
처음에는 백연화가 놓았다.
그다음에는 며느리들이 이유도 모른 채 놓았다.
아이들은 그것을 귀신 그릇이라고 불렀고, 어른들은 그런 말을 하면 밤에 발목을 잡힌다고 꾸짖었다. 그러나 누가 그 그릇의 주인인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강이문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망월리에 온 지 삼십 년이 지나도록 남쪽에 두고 온 가족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검은 돌의 금은 그동안 일곱 개로 늘었다.
집도 커졌다.
처음에는 방 두 칸과 부엌뿐이었으나, 아들이 태어나고 딸이 태어나고 며느리가 들어오면서 사랑채가 생기고 곳간이 생기고 마구간이 생겼다. 대문 옆에는 감나무가 자랐고, 뒤뜰에는 장독이 스무 개가 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그 집을 강씨 큰집이라 불렀다.
그러나 연화는 말했다.
“집이 커진다고 사람이 커지는 건 아니에요.”
이문이 물었다.
“누가 사람이 작다고 했소?”
“작다는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더 걱정이지.”
이문은 그 말의 뜻을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버릇은 오래 살았고, 아들들에게도 물려갔다.
큰아들 강무진은 아버지를 닮아 말이 적었다.
둘째 강무석은 어머니를 닮아 질문이 많았다.
무진은 새벽이면 가장 먼저 일어나 논으로 갔다. 소가 아프면 밤을 새워 곁을 지켰고, 마을에 흉년이 들면 곳간 문을 열었다. 누구도 부탁하지 않은 일까지 맡았고, 누구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바라지 않았다.
무석은 책을 좋아했다.
그는 장터에서 낡은 문집과 지도 조각을 사 왔고,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늘 궁금해했다. 마을 어른들은 글을 많이 읽으면 사람이 뜬다고 했고, 무석은 땅에 너무 오래 붙어 있으면 뿌리가 썩는다고 대꾸했다.
형제는 어릴 때에는 잘 지냈다.
무진은 동생에게 소 타는 법을 가르쳤고, 무석은 형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무진은 자기 밥을 덜어 동생에게 주었고, 무석은 벌을 받으면 형 대신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둘 다 자라면서 자신이 형을 위해 희생했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진은 생각했다.
내가 집에 남았기 때문에 저 아이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무석은 생각했다.
내가 글을 배웠기 때문에 언젠가 이 집을 살릴 수 있다.
서로에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둘 다 자신만이 옳았다.
그해 봄, 마을에 새 현감이 부임했다.
그는 부임한 지 보름 만에 곡식을 더 걷겠다고 했다. 지난해 홍수로 다리가 무너졌고, 관아 지붕을 고쳐야 하며, 나라의 일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나라의 일이 어렵다는 말은 언제나 백성의 창고를 먼저 열었다.
마을 사람들은 강씨 큰집에 모였다.
“올해는 보리도 덜 났는데 뭘 더 내라는 거요?”
“관아 지붕이 무너졌으면 현감이 자기 집 기와를 뜯어야지.”
“그 말을 직접 가서 하시오.”
“내가 왜?”
“방금 그렇게 말했잖소.”
“여기서 말한 거지.”
사람들은 누구를 대표로 보낼지 두고 한참 싸웠다.
결국 무진이 나서기로 했다.
그는 집과 논이 많은 사람이 먼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감과 잘 이야기하면 마을 전체의 부담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무석은 반대했다.
“형이 가면 저쪽은 우리가 겁먹었다고 생각할 거야.”
“안 가면 더 많이 가져갈 거다.”
“주면 또 가져가.”
“안 주면 군졸을 보내겠지.”
“그럼 다 같이 버텨야지.”
무진은 동생을 보았다.
“너는 버틴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형은 참는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고.”
부엌에서 숟가락 하나가 떨렸다.
처음에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두 번째 숟가락이 떨렸고, 이어 세 번째와 네 번째 숟가락이 달그락거렸다.
연화가 부엌에서 나왔다.
“무슨 말 하려다 말았니?”
무진과 무석은 동시에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부엌의 모든 숟가락이 한꺼번에 떨렸다.
마당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오씨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무슨 말을 했을지 알 것 같았다.
연화는 숟가락을 하나씩 다시 놓았다.
“말할 거면 말하고, 안 할 거면 국이나 먹어라. 숟가락들이 너희보다 더 솔직하다.”
그날부터 강씨 집안 사람들은 어려운 이야기를 할 때 나무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숟가락이 떨리는 소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젓가락으로는 국을 먹을 수 없었다.
무진은 현감을 만나러 갔다.
그는 강씨 집안에서 쌀 열 섬을 내는 대신, 가난한 집들에게는 세금을 줄여 달라고 청했다.
현감은 웃으며 말했다.
“강씨 집안이 마을을 먹여 살리는군.”
무진은 그 말이 칭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쌀 열 섬을 약속했다.
돌아오는 길에 무진은 자신이 마을을 지켰다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절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머지 절반은 강씨 집안이 관아와 손잡았다고 생각했다.
무석은 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를 주기로 했어?”
“열 섬.”
“우리 쌀을?”
“마을 사람들 몫을 줄였다.”
“형이 무슨 권리로 우리 쌀을 약속해?”
“우리 집이 제일 많으니까.”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우리한테 오겠지.”
“이번 겨울을 넘겨야 다음 겨울도 있다.”
“형은 늘 다음 겨울을 핑계로 오늘을 팔아.”
그 말이 끝나자 부엌의 숟가락들이 떨렸다.
무진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말을 삼켰어?”
무석이 물었다.
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석은 웃었다.
“형도 돌이 무섭구나.”
무진은 동생의 멱살을 잡았다.
연화가 두 사람 사이에 섰다.
“싸울 거면 밖에서 싸워라. 부엌 바닥까지 깨뜨릴 셈이냐?”
무진은 손을 놓았다.
무석은 옷깃을 정리했다.
그날 밤 두 형제는 따로 잤다.
검은 돌에는 여덟 번째 금이 생겼다.
여름이 오자 세금으로 가져갈 곡식을 재기 위해 관아 사람들이 마을에 왔다.
그들은 강씨 큰집의 곳간을 가장 먼저 열었다.
곡식 자루가 마당에 쌓였다.
무진은 하나씩 수를 세었다.
무석은 멀리 서서 보고 있었다.
한 군졸이 말했다.
“이 정도면 강씨 집은 걱정 없겠소.”
무석이 대꾸했다.
“걱정이 곡식 자루로 보이면 당신 눈은 참 편하겠소.”
군졸이 얼굴을 찌푸렸다.
무진이 동생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
무석은 더 크게 말했다.
“형은 왜 늘 저들 앞에서는 조용하래?”
무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을 닫아.”
“왜? 내가 틀린 말을 했어?”
“네 말 때문에 다른 사람이 맞는다.”
무석은 그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 숟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무석은 자신이 하려던 말을 끝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 말이 형에게 오래 남았다는 것이었다.
가을이 되자 연화는 흰 무명 보자기를 꺼냈다.
그녀는 지난봄 역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수놓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자의 이름을 천에 새기면 귀신이 집을 찾아온다고 걱정했다.
연화는 말했다.
“이름을 안 쓰면 산 사람이 더 쉽게 잊어요.”
“잊어야 사는 거 아니오?”
“잊을 건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건 기억해야지요.”
“그걸 누가 정하오?”
연화는 바늘에 실을 꿰며 말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우리가 정하고, 죽고 나면 잘못 정했다는 걸 알겠지요.”
처음에는 여섯 명의 이름뿐이었다.
그해 겨울이 끝날 때에는 열세 명이 되었다.
연화는 죽은 사람뿐 아니라 행방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도 수놓았다.
누군가 그것을 보고 물었다.
“죽지도 않았는데 왜 이름을 넣소?”
“모르니까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이름을 어디에 두려고?”
연화는 말했다.
“그래서 가운데 두는 거예요.”
보자기 한가운데에는 강이문의 이름이 있었다.
연화는 그 이름을 수놓은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 펼쳐 둔 보자기 위에 검은 실로 이름이 생겨 있었다.
강이문.
글씨는 연화의 수와 닮았지만, 그녀보다 훨씬 서툴렀다.
이문은 이름을 보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신이 했소?”
“안 했어요.”
“그럼 누가 했소?”
“돌이 바느질도 할 줄 아는지는 모르겠네요.”
이문은 웃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보자기를 태우려 했다.
연화가 막았다.
“죽은 사람 이름도 아닌데 왜 무서워해요?”
“내 이름이 왜 거기 있소?”
“당신에게 묻는 게 낫겠지요.”
“나는 살아 있소.”
“살아 있다고 다 돌아온 사람은 아니에요.”
이문은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부엌의 숟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이문은 그날 아무 말도 삼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아니면 너무 많아서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해 겨울, 이문은 병이 들었다.
처음에는 기침뿐이었다. 다음에는 열이 났고, 나중에는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무진은 의원을 데려왔고, 무석은 산 너머 장터에서 약을 구해 왔다.
형제는 아버지 곁에서 교대로 밤을 지켰다.
이문은 열에 들떠 오래전 사람들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이 너무 흐려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연화만은 몇 개의 이름을 들었다.
그녀는 그것을 보자기 가장자리에 수놓았다.
무석이 물었다.
“누구 이름이에요?”
연화는 대답했다.
“네 아버지가 오래전에 떠나온 사람들.”
무진은 어머니를 보았다.
“왜 이제야 말해요?”
“내 이야기가 아니니까.”
“아버지가 죽으면 영영 못 듣잖아요.”
연화는 실을 당겼다.
“살아 있을 때 말하지 않은 사람이 죽기 직전이라고 갑자기 진실해지는 건 아니야.”
무석은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버지가 집을 세운 사람이 아니라, 어떤 집에서 도망쳐 온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무진은 다른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버린 집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을 지킨 것일지도 모른다고.
두 형제는 같은 사실을 듣고 서로 다른 아버지를 만들었다.
사흘 뒤, 이문은 잠에서 깨어났다.
열은 내렸지만 목소리는 약했다.
그는 무진과 무석을 불렀다.
“집을 지켜라.”
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석은 물었다.
“어떤 집이요?”
이문은 동생을 보았다.
“이 집.”
“다른 집은요?”
무진이 말했다.
“지금 그걸 물을 때냐?”
무석은 아버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문은 입을 열었다.
검은 돌 아래에서 낮은 울림이 났다.
숟가락 하나가 떨렸다.
이문은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눈을 감았다.
그날 밤, 그는 죽었다.
연화는 이름보 가운데 있던 강이문의 이름에 흰 실로 테두리를 둘렀다.
무석이 물었다.
“왜 지우지 않아요?”
“죽기 전에도 여기 있었고, 죽은 뒤에도 여기 있으니까.”
“이 보자기는 죽은 사람 명단 아니에요?”
“처음부터 아니었어.”
“그럼 뭐예요?”
연화는 오래 생각한 뒤 말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자리.”
이문의 장례를 치른 뒤 무진은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그는 더 일찍 일어났고, 더 적게 말했고, 더 많은 일을 맡았다.
무석은 점점 집 안에서 숨이 막힌다고 느꼈다.
아버지가 남긴 말은 형에게는 명령이 되었고, 동생에게는 족쇄가 되었다.
집을 지켜라.
무진은 그 말이 땅과 조상을 지키라는 뜻이라고 믿었다.
무석은 그것이 도망치지 말라는 뜻이라고 들었다.
두 사람은 어느 날 저녁 부엌에서 다시 다투었다.
“나는 산을 넘어갈 거야.”
무석이 말했다.
무진은 국을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장터에?”
“더 멀리.”
“얼마나?”
“모르겠어.”
“언제 돌아와?”
“그것도 모르겠어.”
무진은 동생을 보았다.
“그럼 떠나는 게 아니라 버리는 거다.”
무석의 얼굴이 굳었다.
“누굴?”
“집을. 어머니를. 나를.”
“형은 남아 있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해?”
“적어도 도망은 아니지.”
무석은 웃었다.
“아버지도 그런 말을 했겠지. 새집을 지으면서.”
부엌의 숟가락들이 한꺼번에 떨렸다.
무진은 일어섰다.
“아버지를 모욕하지 마라.”
“난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그럼 누구 이야기야?”
무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숟가락이 더 크게 떨렸다.
연화가 문턱에 서 있었다.
“끝까지 말해라.”
무석은 형을 바라보았다.
그가 하려던 말은 이것이었다.
형도 떠나고 싶었잖아.
나보다 더.
하지만 무석은 말하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나는 여기서 형처럼 늙고 싶지 않아.”
무진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하려던 말은 이것이었다.
네가 떠날 수 있도록 내가 남아 있었어.
하지만 무진도 말하지 않았다.
검은 돌이 크게 갈라졌다.
부엌 바닥이 흔들렸고, 장독 뚜껑들이 달그락거렸다. 벽에 걸린 숟가락들이 한꺼번에 떨어졌다.
연화는 두 아들을 보았다.
“이제 됐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돌은 들었는데, 서로는 못 들었구나.”
그날 밤, 무석은 짐을 쌌다.
옷 두 벌과 책 몇 권, 말린 보리떡을 보자기에 넣었다.
연화는 그가 떠나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무석은 그것이 섭섭했다.
“어머니는 나를 잡지 않아요?”
“잡으면 남을 거니?”
무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 왜 잡아.”
“서운하지 않아요?”
연화는 아들의 옷깃을 바로잡았다.
“서운한 마음으로 사람 발목을 묶으면 둘 다 넘어져.”
“형은 나를 배신자라고 할 거예요.”
“너도 형을 겁쟁이라고 생각하잖니.”
무석은 고개를 숙였다.
연화는 이름보를 꺼냈다.
“네 이름은 아직 안 쓸 거다.”
“왜요?”
“네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까지는.”
“그럼 모르게 되면요?”
“가운데쯤 놓겠지.”
무석은 웃으려 했지만 웃지 못했다.
대문을 나서기 전, 그는 부엌으로 갔다.
검은 돌의 깊어진 금을 손으로 만졌다.
돌은 차가웠다.
무석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돌아올 거다.”
돌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말했다.
“정말로.”
숟가락도 떨리지 않았다.
그 말이 거짓말이어서가 아니었다.
무석 자신도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새벽이 오기 전, 그는 집을 떠났다.
연화는 대문 밖에 금이 간 흰 그릇을 놓았다.
그 안에 따뜻한 밥을 담고, 장아찌 두 조각을 올렸다.
무진은 어머니에게 물었다.
“왜 저 사람 밥을 차려요?”
연화는 말했다.
“저 사람?”
무진은 입을 다물었다.
“네 동생 이름을 벌써 잊었니?”
“떠난 사람이에요.”
“떠난 사람도 배고프다.”
“돌아오지 않으면요?”
연화는 그릇 옆에 숟가락을 놓았다.
“밥이 식겠지.”
아침이 되었을 때 밥은 사라져 있었다.
숟가락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무석이 먹었는지, 지나가던 사람이 먹었는지, 들짐승이 먹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무진은 동생이 먹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연화는 먹었다고 믿었다.
그날부터 형은 동생이 자신을 버렸다고 말했고, 동생은 먼 곳에서 형이 자신을 내쫓았다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사실의 절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둘 다 오래도록 자신이 옳다고 믿을 수 있었다.
몇 해 뒤, 무석의 이름은 집안 족보에서 사라졌다.
누가 지웠는지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보에는 강무석이라는 세 글자가 가장 짙은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 이름 아래에는 작은 빈칸이 남아 있었다.
연화는 거기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돌아온 날을 적기 위해 남겨 둔 자리라고도 했고,
돌아오지 않은 이유를 적기 위해 남겨 둔 자리라고도 했다.
연화 자신도 어느 쪽인지 끝내 말하지 않았다.
제3장: 죽은 남자와 혼인한 여자

강무석이 집을 떠난 뒤, 백연화는 대문 밖에 놓아 둔 금 간 밥그릇을 사흘 동안 치우지 않았다.
첫날에는 밥이 사라졌다.
둘째 날에는 밥 위에 솔잎 하나가 놓여 있었다.
셋째 날에는 아무것도 줄지 않았고, 밥은 그대로 굳었다.
강무진은 그릇을 치우려 했다.
“이제 안 돌아와요.”
연화가 말했다.
“사흘 만에 사람 인생을 다 아느냐?”
“가겠다고 했잖아요.”
“가는 것과 돌아오지 않는 건 다른 말이다.”
무진은 그릇을 들었다.
밑바닥에 금이 더 깊어져 있었다.
그는 밥을 뒤뜰에 묻고 그릇을 씻었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감추려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그릇은 다시 밥상 끝에 놓여 있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연화도 묻지 않았다.
그 뒤로 세월은 사람보다 빨리 집을 늙게 했다.
연화는 흰머리가 늘었고, 무진은 아버지보다 더 말이 적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다시 자식을 낳았다.
강씨 집안은 커졌다.
집 안에는 서로를 닮은 얼굴이 많아졌고, 서로를 닮지 않으려는 성격도 많아졌다.
그중 강연옥은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고들 했다.
연옥은 무진의 손녀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글자를 빨리 익혔다. 남자아이들이 천자문을 외울 때 옆에서 듣고 있다가, 어느 날 훈장보다 먼저 다음 구절을 말했다.
훈장은 화를 냈다.
“여자가 왜 남의 글을 훔쳐 듣느냐?”
연옥이 물었다.
“들은 글도 훔친 겁니까?”
훈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부터 연옥은 사랑방 밖에 앉아 글을 배웠다.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문이 얇아 소리는 잘 들렸다.
겨울이면 문풍지에 입김이 얼었고, 여름이면 모기가 발목을 물었다. 그래도 연옥은 빠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아이가 글을 너무 많이 알면 팔자가 세진다고 했다.
연옥은 말했다.
“팔자가 글자보다 약하면 진작 부러졌겠지요.”
백연화는 그 말을 듣고 오래 웃었다.
그때 연화는 이미 여든을 넘겼다.
아이들은 그녀가 죽지 않는다고 믿었다. 마을 사람들은 검은 돌 위에서 오래 살면 사람이 죽는 법을 잊는다고 말했다.
연화는 말했다.
“죽는 법은 안 잊었다. 다만 순서가 안 왔을 뿐이다.”
연옥은 증조할머니 곁에서 이름보를 정리했다.
보자기에는 죽은 사람과 사라진 사람,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과 돌아왔지만 예전과 같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연옥은 물었다.
“왜 이 사람은 가운데 있고, 이 사람은 가장자리에 있어요?”
연화는 말했다.
“가운데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사람들 자리다.”
“가장자리는요?”
“살아 있어도 우리 삶에서 밀려난 사람들.”
“돌아온 사람은요?”
“돌아와도 제자리를 못 찾는 사람이 있지.”
연옥은 이름보를 펼쳐 보았다.
그 한가운데에는 강무석이라는 이름이 짙은 실로 남아 있었다.
그 아래의 빈칸은 아직 비어 있었다.
“이 사람은 누구예요?”
“네 작은할아버지.”
“어디 갔어요?”
“멀리.”
“왜 안 돌아와요?”
연화는 바늘 끝을 바라보았다.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하나가 아니란다.”
연옥은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연화가 대답하지 않을 때는 질문이 틀린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옥이 열아홉이 되던 해, 혼담이 들어왔다.
신랑 될 사람은 산 너머 큰 고을의 장씨 집안 아들이었다. 이름은 장도윤이었다.
도윤은 스물넷이었고, 글을 잘 읽었으며,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큰 병이 없고, 술을 지나치게 마시지 않으며, 이미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아이도 없다는 말이 함께 전해졌다.
마을 사람들은 좋은 혼처라고 했다.
연옥은 물었다.
“그 사람은 저를 본 적이 있습니까?”
중매쟁이가 말했다.
“혼인하면 평생 보게 될 텐데 뭘 미리 보니?”
“그 사람도 그렇게 말했어요?”
“남자는 얼굴보다 집안을 보는 법이지.”
연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집안끼리 혼인하면 되겠네요.”
중매쟁이는 연옥의 어머니에게 속삭였다.
“말이 좀 많구먼.”
연옥의 어머니는 말했다.
“적게 하라고 해도 남은 말이 입 밖으로 나옵니다.”
혼담은 진행되었다.
연옥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가 찬성한 것도 아니었다.
그 시대에는 여자의 침묵이 대개 동의로 기록되었다.
혼례 날짜가 정해진 뒤, 장도윤이 망월리에 한 번 왔다.
두 사람은 대문 안과 밖에 서서 짧게 인사를 나누었다. 중간에는 양가 어른들이 있었다.
도윤은 얼굴이 희고 마른 남자였다. 말할 때마다 기침을 한 번씩 참았다.
그가 물었다.
“글을 읽는다고 들었습니다.”
“조금 읽습니다.”
“무슨 글을 좋아합니까?”
연옥은 그 질문이 의외라 잠시 생각했다.
“사람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는 글을 좋아합니다.”
도윤은 웃었다.
“그런 글은 드물지요.”
“그래서 좋아합니다.”
두 사람은 그 이상 말하지 못했다.
돌아가기 전, 도윤은 연옥에게 작은 붓 한 자루를 건넸다.
“좋은 붓은 아닙니다.”
연옥은 말했다.
“좋은 사람이 주면 좋은 붓이 됩니까?”
도윤은 잠시 당황하다가 웃었다.
“그건 혼인 뒤에 판단해 주십시오.”
그것이 두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혼례를 열흘 앞두고 장도윤이 죽었다.
열병이었다.
소식은 새벽에 도착했다.
장씨 집안의 하인이 대문 밖에서 세 번 절한 뒤 말했다.
“도련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연옥의 어머니는 주저앉았다.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진은 이미 죽었고, 집안의 큰어른은 연옥의 큰아버지였다. 그는 장씨 집안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는 사랑방 문을 닫았다.
그날 저녁, 양가 어른들이 모였다.
장씨 집안은 혼례를 예정대로 치르자고 했다.
죽은 아들과 연옥의 혼례를 올리고, 연옥이 며느리로 들어와 제사를 모시면 양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연옥의 아버지는 반대했다.
“산 사람을 죽은 사람에게 묶을 수는 없습니다.”
장씨 집안 어른이 말했다.
“이미 약속한 혼인입니다.”
“혼인은 두 사람이 하는 겁니다.”
“집안과 집안이 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내 딸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우리 아들도 열흘 전까지는 살아 있었습니다.”
말은 정중했지만, 방 안의 공기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연옥은 문밖에서 듣고 있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물었다.
“제가 그 집으로 가야 합니까?”
사람들은 여자가 직접 말한 것을 불편해했다.
장씨 집안 어른이 말했다.
“도리를 지키면 양가 모두 편안할 것이다.”
연옥은 물었다.
“죽은 사람도 편안해집니까?”
“그렇다고 믿는다.”
“그 사람에게 물어보셨습니까?”
아버지가 연옥을 불렀다.
“그만해라.”
연옥은 입을 다물었다.
부엌에서 숟가락 하나가 가볍게 떨렸다.
사람들은 서로를 보았다.
듣는 돌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산 너머까지 퍼져 있었다.
장씨 집안 사람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연옥이 말했다.
“저는 혼례를 치르겠습니다.”
어머니가 숨을 삼켰다.
“연옥아.”
“하지만 장씨 집안으로 가지는 않겠습니다.”
장씨 어른이 얼굴을 굳혔다.
“그게 무슨 혼인이냐?”
“살아 있을 때도 한 번밖에 못 본 사람입니다. 죽었다고 갑자기 그 집 사람이 되는 건 더 이상합니다.”
“그럼 왜 혼례는 하겠다는 것이냐?”
연옥은 대답했다.
“그 사람이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무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연옥 자신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모든 사람이 죽은 남자의 뜻을 대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혼례는 예정된 날에 치러졌다.
신랑 자리에는 위패와 도윤이 쓰던 갓이 놓였다.
그 앞에는 놋숟가락 하나가 놓였다.
장씨 집안에서 가져온 숟가락이었다.
연옥은 붉은 치마와 초록 저고리를 입었다. 얼굴에는 연지와 곤지를 찍었다.
마을 여자들은 그녀가 불쌍하다고 속삭였다.
어떤 사람은 팔자가 사납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전생의 빚이라고 했다.
연옥은 가만히 서 있었다.
신랑 없는 혼례는 이상할 만큼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신랑이 넘어질 일도 없고, 술을 흘릴 일도 없고, 어른들 앞에서 말을 잘못할 일도 없었다.
오직 술잔만이 신랑 자리 앞에서 저절로 기울었다.
술이 바닥에 조금 흘렀다.
사람들은 바람 때문이라고 했다.
그날 밤, 연옥은 강씨 큰집의 가장 안쪽 방에서 혼자 잤다.
장씨 집안으로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켰기 때문이다.
놋숟가락은 작은 상 위에 놓여 있었다.
한밤중이 되었을 때, 누군가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옥은 눈을 떴다.
방 한가운데에 장도윤이 앉아 있었다.
혼례 전 보았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흰 도포를 입었고, 머리에는 갓을 쓰지 않았다.
연옥은 놀랐지만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당신입니까?”
도윤이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죽었습니까?”
“그것도 그런 것 같습니다.”
연옥은 몸을 일으켰다.
“왜 왔어요?”
도윤은 방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
“강씨 집입니다.”
“그럼 장씨 집이 아니군요.”
“제가 안 갔습니다.”
도윤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지나갔다.
연옥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저와 혼인하기 싫었습니까?”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엌에서 숟가락들이 떨렸다.
도윤은 놀라며 방문 쪽을 보았다.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 집 돌이 들은 겁니다.”
“돌이 무엇을요?”
“당신이 하려다 말한 것.”
도윤은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죽은 사람 말도 듣습니까?”
“산 사람보다 솔직하면 안 듣겠지요.”
도윤은 잠시 웃었다.
“싫었습니다.”
연옥도 웃었다.
“다행이네요. 저도 그랬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마주 앉아 있었다.
혼인한 첫날밤에 서로 혼인하기 싫었다고 고백한 부부는 망월리에서 그들이 처음이었다.
아마 마지막도 아니었을 것이다.
도윤은 매년 혼례 기일에 돌아왔다.
처음에는 한밤중에 나타났고, 해 뜨기 전에 사라졌다.
그는 방 안에서는 보였지만 문턱을 넘으면 사라졌다. 연옥이 마당으로 나오라고 하면,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몸이 안개처럼 흐려졌다.
“죽어서도 남의 집 문턱을 못 넘는군요.”
연옥이 말했다.
도윤은 대꾸했다.
“산 사람일 때도 아버지 허락 없이는 대문을 잘 못 넘었습니다.”
둘은 해마다 조금씩 더 많은 말을 나누었다.
도윤은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땅을 관리하라고 했고, 형이 일찍 죽어 집안의 기대가 모두 그에게로 왔다.
연옥은 글을 배우고 싶었으나 사랑방 안에 한 번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도윤은 물었다.
“왜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열면 쫓겨났을 테니까요.”
“쫓겨나도 다시 들어가면 되지 않았습니까?”
연옥은 그를 보았다.
“살아 있을 때 그런 용기가 있었습니까?”
도윤은 웃음을 거두었다.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뒤에는 쉽게 말하지 마세요.”
두 사람은 부부라기보다 매년 한 번 만나는 오래된 친구에 가까워졌다.
도윤은 연옥에게 장씨 집안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연옥은 그가 죽은 뒤 장씨 집안이 어떻게 변했는지 전해 주었다.
도윤의 아버지는 연옥을 데려가기 위해 몇 차례 사람을 보냈다. 연옥은 가지 않았다.
장씨 집안은 그녀를 며느리라고 불렀고, 강씨 집안은 딸이라고 불렀다.
망월리 사람들은 과부라고 불렀다.
연옥은 어느 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편과 살아 본 적도 없는데 무슨 과부입니까?”
사람들은 죽은 남자가 매년 찾아온다는 소문을 들은 뒤에는 더 혼란스러워했다.
“그럼 부부로 산 거 아니냐?”
연옥이 말했다.
“일 년에 하룻밤 대화하면 부부입니까?”
한 여자가 대꾸했다.
“우리 영감보다는 많이 말하네.”
그 말에 사람들은 웃었다.
연옥도 웃었다.
도윤이 세 번째로 돌아온 해, 마을에 두 사람이 같은 날 도착했다.
한 사람은 서쪽에서 온 무당이었다.
이름은 월선이었다.
그녀는 붉은 치마 위에 남색 저고리를 입었고, 허리에는 방울을 달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강씨 큰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집에 죽은 신랑이 산다.”
다른 사람은 동쪽에서 온 전도자였다.
그는 최요한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는 작은 성경책을 들고 다녔고, 세상의 죽은 자는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이 그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우물가에서 처음 만났다.
월선이 물었다.
“어디 가시오?”
“사람들에게 참된 길을 전하러 갑니다.”
“나도 그런데.”
“당신의 길은 거짓된 영의 길입니다.”
월선은 최요한의 성경책을 보았다.
“그 작은 책에 길이 다 들어 있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럼 하나님도 글씨가 작구먼.”
두 사람은 강씨 집까지 서로를 따라왔다.
연옥은 둘 다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나 연화가 말했다.
“들어오라 해라. 서로 다른 답을 가진 사람은 같은 밥상에 앉혀 봐야 한다.”
그날 저녁, 연옥과 연화, 월선, 최요한이 함께 밥을 먹었다.
도윤의 놋숟가락도 상 끝에 놓여 있었다.
해가 지자 도윤이 방 안에 나타났다.
최요한은 기도를 시작했다.
월선은 방울을 꺼냈다.
도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저분들은 누구입니까?”
연옥이 말했다.
“한 분은 당신이 악한 영이라고 하고, 한 분은 한이 남은 혼이라고 해요.”
도윤은 말했다.
“둘 다 아닌 것 같습니다.”
월선이 물었다.
“그럼 왜 왔느냐?”
“제 숟가락이 여기 있어서요.”
연옥이 놋숟가락을 들어 보였다.
“이것 때문에?”
“어머니가 제가 제일 아끼던 것이라고 했을 겁니다.”
“정말 아꼈습니까?”
“아닙니다. 손잡이가 너무 짧아서 싫어했습니다.”
연화가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최요한은 웃지 않으려 했으나 입가가 움직였다.
월선은 숟가락을 살펴보았다.
“죽은 자는 물건에 붙기도 하지.”
도윤이 말했다.
“붙은 게 아니라 누가 가져갔는지 궁금했습니다.”
최요한은 성경책을 펴며 말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도윤이 물었다.
“그럼 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최요한은 대답하지 못했다.
월선은 방울을 흔들었다.
“원한이 있느냐?”
“조금은 있습니다.”
“누구에게?”
도윤은 생각했다.
“아버지에게도 있고, 병에도 있고, 혼인을 정한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는 연옥을 보았다.
“이분에게는 없습니다.”
연옥이 말했다.
“다행이네요. 저는 당신 제사상을 차릴 생각이 없었거든요.”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다행입니다. 저는 생전에 마른 조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최요한이 말했다.
“죽은 이를 두고 농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연화가 밥을 뜨며 말했다.
“죽은 사람이 직접 농담하는데 누가 말리겠소?”
식사가 끝난 뒤 논쟁은 더 심해졌다.
최요한은 죽은 자가 돌아온다면 구원과 심판의 질서가 무너진다고 했다.
월선은 조상이 돌아오지 않는 집이야말로 위험하다고 했다.
도윤은 자신이 조상으로 대접받기에는 너무 젊게 죽었다고 말했다.
연옥은 세 사람의 말을 듣다가 물었다.
“누가 살아 있는 여자가 원하는 건 물어봅니까?”
방 안이 조용해졌다.
월선은 방울을 내려놓았다.
최요한은 성경책을 덮었다.
도윤은 연옥을 보았다.
연화만 밥을 계속 먹었다.
“나는 이미 물어봤다.”
연옥이 말했다.
“언제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했을 때.”
“그때 아무 말도 안 했잖아요.”
“안 말린 것도 대답이다.”
부엌의 숟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연옥은 그날 처음으로 증조할머니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연화는 연옥이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날 밤, 도윤이 사라진 뒤 월선과 최요한은 서로 다른 결론을 내렸다.
월선은 도윤이 해로운 혼이 아니라고 했다.
최요한은 자신이 본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연옥은 둘에게 물었다.
“그럼 내년에도 와야 합니까?”
월선은 말했다.
“필요 없을 것 같다.”
최요한도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의견이 같았다.
연화가 말했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 둘을 화해시켰으니 쓸모없는 방문은 아니었구먼.”
그해 겨울, 연화는 이름보를 연옥에게 맡겼다.
“이제 네가 이어라.”
연옥은 놀랐다.
“왜 저예요?”
“죽은 사람 말을 너무 믿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으니까.”
연옥은 보자기를 펼쳤다.
가장 오래된 실은 색이 바래 있었고, 새로 수놓은 이름은 선명했다.
한쪽 가장자리에 실을 풀었다 다시 꿰맨 흔적이 있었다.
연옥이 물었다.
“여기는 왜 뜯었어요?”
연화는 오래 침묵했다.
“내가 한 게 아니다.”
연옥은 천을 빛에 비추었다.
뜯긴 자리에 남은 바늘구멍들이 이름의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강연옥.
연옥은 손을 멈췄다.
“제 이름이에요.”
연화가 말했다.
“네 이름보다 먼저 있던 이름이다.”
그리고 마침내 강이문이 망월리에 오기 전 남쪽에 두고 온 가족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주었다.
그에게는 아내와 어린 딸이 있었다.
딸의 이름은 연옥이었다.
역병과 굶주림과 군사들의 약탈이 겹쳤던 해, 이문은 가족을 피난 행렬에 남겨 둔 채 혼자 산길로 달아났다.
그는 나중에 돌아가려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았다.
망월리에 정착한 뒤 태어난 손녀에게 그 딸의 이름을 다시 붙였다.
“왜 제게 그 이름을 줬어요?”
“네 할아버지가 지었다.”
“그 딸을 기억하려고?”
연화는 말했다.
“기억하려고였는지, 대신 살게 하려고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연옥은 이름보에서 뜯겨 나간 글자의 흔적을 만졌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몸보다 먼저 태어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은 죽었어요?”
“모른다.”
“살아 있었다면요?”
“너와 같은 이름으로 다른 삶을 살았겠지.”
연옥은 불쾌했다.
슬프기보다 먼저 화가 났다.
“왜 아무도 제게 말하지 않았어요?”
“아이에게 이름을 주면서 죄까지 설명하는 어른은 드물다.”
“그럼 저는 그 사람 대신 살아야 합니까?”
연화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렇게 바랐을 수도 있잖아요.”
“죽은 사람의 바람이 산 사람의 명령이 되는 순간, 집은 무덤이 된다.”
연옥은 이름보를 접었다.
그날부터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다르게 쓰기 시작했다.
글자는 같았지만, 붓을 움직이는 순서를 바꾸었다. 마지막 획을 길게 끌지 않고 짧게 멈췄다.
아무도 차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연옥만 알았다.
이름은 물려받았지만, 획의 끝은 자신이 정했다.
다음 해 혼례 기일이 돌아왔을 때, 도윤은 평소보다 늦게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스물넷의 얼굴이었지만, 연옥은 눈가에 전에는 없던 주름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죽은 사람도 늙습니까?”
도윤은 자기 얼굴을 만졌다.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늙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 아닙니까?”
연옥은 그를 노려보았다.
“죽었다고 눈치까지 없어졌습니까?”
“살아 있을 때도 없었습니다.”
도윤은 웃었다.
연옥도 웃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연옥은 자신의 이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도윤은 듣고 난 뒤 말했다.
“그럼 우리 둘 다 남의 뜻으로 이름과 혼인을 받았군요.”
“당신 이름은 원래 당신 것이었잖아요.”
“아버지가 지었습니다.”
“그건 다 그렇지요.”
“그럼 이름은 처음부터 누구 것도 아닌가 봅니다.”
연옥은 생각했다.
“아니요. 살아가면서 자기 것이 되는 거겠지요.”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해 뜨기 전에 일어나 문턱 앞에 섰다.
“나가 보려고 합니다.”
“해마다 사라지잖아요.”
“사라지는 것과 나가는 건 다르지요.”
그는 한 발을 내디뎠다.
몸이 흐려졌다.
연옥은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도윤은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떠나는군요.”
그리고 사라졌다.
놋숟가락이 바닥에 떨어졌다.
연옥은 그것을 주워 상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 해에는 도윤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다음 해에도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이 풀렸다고 했고, 최요한은 마침내 영혼이 제 길을 찾았다고 했으며, 월선은 죽은 자도 오래 머물면 산 사람에게 정이 들어 떠나기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연옥은 누구의 설명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문턱을 넘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몇 해 뒤, 백연화가 죽었다.
연화는 아흔을 넘겼고, 마지막 날까지 자기 밥은 스스로 먹었다.
죽기 전날, 그녀는 연옥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아직 오니?”
“이제 안 와요.”
“섭섭하냐?”
연옥은 잠시 생각했다.
“조금요.”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건 괜찮다.”
연화는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
“다만 따라가지는 마라.”
연옥은 웃었다.
“갈 길도 모릅니다.”
“그러면 더 좋고.”
연화가 죽은 뒤, 연옥은 그녀의 이름을 이름보에 수놓았다.
가운데도 가장자리도 아니었다.
연옥은 천의 맨 아래에 새 줄을 만들었다.
그곳은 처음 생긴 자리였다.
죽었으나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죽고 나서도 떠날 줄 아는 사람을 위한 자리였다.
연옥은 혼례복을 꺼내 마당에서 태웠다.
붉은 치마와 초록 저고리는 불길 속에서 빠르게 검어졌다.
사람들은 죽은 남편과의 인연을 끊는 의식이라고 생각했다.
연옥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불이 꺼진 뒤, 재 속에서 놋숟가락이 발견되었다.
손잡이도 휘지 않았고, 검게 그을리지도 않았다.
그날부터 강씨 집안 사람들은 그 숟가락이 따뜻해지면 먼 곳에 있는 가족이 아직 살아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연옥은 숟가락을 손에 쥐고도 누구의 생사를 묻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알게 되었다.
살아 있는 것과 돌아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며,
돌아오지 않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제4장: 세 번 이름이 바뀐 마을

망월리가 처음 이름을 잃은 날, 마을 사람들은 그것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관아에서 내려온 아전은 새 나무패를 대문에 걸며 말했다.
“이제부터 이곳은 청수리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에도 모두 망월리라고 불렀다.
사흘 뒤, 다른 관리가 와서 나무패를 떼어 냈다.
“잘못 내려온 이름이오. 이곳은 월천동으로 정정되었소.”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이 되자 아이들은 망월리 강가에서 놀았고, 여자들은 망월리 장독대에서 된장을 퍼냈으며, 남자들은 망월리 술집에서 청수리와 월천동 중 어느 이름이 더 촌스러운지 다투었다.
한 달 뒤, 세 번째 관리가 나타났다.
그는 앞선 두 사람이 모두 틀렸다고 말했다.
“행정 구역이 다시 조정되었소. 이제부터는 북산면 제칠리요.”
장터 어귀에서 국밥집을 하던 박씨는 간판을 세 번 바꾼 뒤 붓을 내려놓았다.
새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여기가 거기입니다.
사람들은 그 집을 더 잘 찾게 되었다.
이름이 세 번 바뀐 해, 강씨 집안의 기록을 맡게 된 사람은 강무현이었다.
무현은 강무진의 둘째 아들이었다.
형보다 몸이 약했고, 동생들보다 말이 빨랐다. 어려서부터 논보다 종이를 좋아했고, 소 울음보다 붓 긁는 소리를 편안하게 여겼다.
사람들은 그가 집안일을 피하려고 글을 배운다고 했다.
무현은 말했다.
“곡식도 기록이 없으면 남의 것이 됩니다.”
그 말은 맞았다.
그래서 집안은 그를 관아의 말단 서리로 보냈다.
무현은 기록을 정리하는 일을 잘했다.
누가 어느 밭을 경작하는지, 어느 집에 아들이 몇 명인지, 누가 세금을 냈고 누가 미뤘는지, 어느 무덤이 어느 산줄기에 있는지 적었다.
그는 글씨가 단정했고, 숫자를 틀리지 않았으며, 윗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알아서 골랐다.
그 재능은 집안을 지키는 데 유용했다.
또한 집안을 해치는 데에도 유용했다.
새 행정 체계가 들어오자 모든 마을의 호적과 토지 문서를 다시 작성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기존 기록은 낡고 부정확하다는 이유였다.
무현은 밤낮으로 명부를 베꼈다.
문제는 새 양식에 모든 사람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자 이름은 줄여 쓰거나 아예 쓰지 않았다.
어릴 때 죽은 아이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처리되었다.
산으로 달아난 사람은 사망자로 적기도 했고, 죽은 사람이 세금을 내는 사람으로 남기도 했다.
한 사람이 두 이름을 가진 경우 하나를 지워야 했다.
한 이름을 두 사람이 쓰는 경우에는 더 세금을 잘 낼 쪽에 이름을 남겼다.
무현은 처음에는 그런 일들을 실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그것이 제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죽은 최노인이 세금 독촉장을 받았다.
그의 아들이 관아로 찾아와 말했다.
“아버지는 삼 년 전에 죽었습니다.”
아전이 명부를 들여다보았다.
“기록에는 살아 있소.”
“무덤도 있습니다.”
“무덤은 기록이 아니오.”
“그럼 제가 죽었다고 증명할까요?”
“본인이 와야지.”
“죽은 사람이 어떻게 옵니까?”
“그건 이쪽 일이 아니오.”
같은 날, 살아 있는 이씨가 사망자로 처리되어 소유권을 잃었다.
그가 관아에 와서 항의하자 관리가 말했다.
“당신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 민원을 낼 수 없소.”
이씨는 자기 팔을 꼬집으며 말했다.
“아프면 산 사람 아닙니까?”
“그건 의관에게 물어보시오.”
망월리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며칠 뒤에는 웃기 시작했다.
죽은 최노인에게 세금을 걷으러 온 군졸이 무덤 앞에 고지서를 놓고 갔고, 살아 있는 이씨는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이용해 빚쟁이를 피했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록에서 지워진 사람들은 거울에 비치지 않기 시작했다.
처음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은 김씨 집 며느리였다.
그녀는 아침에 머리를 빗으려다 거울 속에 빈 방만 있는 것을 보았다.
빗은 움직였고, 머리카락도 흔들렸지만 얼굴과 몸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가족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모두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거울만 보지 못했다.
그날 오후, 그녀의 이름이 새 호적에서 빠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이름 아래 ‘처’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녀의 본명은 없었다.
그 뒤로 이름이 지워진 사람들은 하나둘 거울에서 사라졌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사진에서도 흐려졌다.
물에 비친 얼굴은 잠시 나타났다가 물결이 일면 가장 먼저 없어졌다.
사람들은 관아 앞에 몰려갔다.
“이름을 다시 써 주시오.”
관리들은 대답했다.
“법에는 거울 이야기가 없소.”
무현은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자신이 베끼는 글자가 사람보다 더 무거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몰래 몇몇 이름을 다시 넣었다.
그날 밤, 거울 속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는 아니었다.
어떤 이름은 이미 너무 여러 번 지워져 어느 줄에 넣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본래 이름 대신 남편 이름이나 아버지 이름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들이 거울에 돌아왔을 때 얼굴은 보였으나, 입이 움직여도 목소리가 거울 속에서는 따라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반쪽 귀환이라고 불렀다.
강씨 집안에도 지워야 할 이름이 하나 있었다.
강도한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강무현의 사촌이었다.
도한은 새 권력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어울렸고, 밤이면 산길로 사라졌다. 관아에서는 그를 불온한 자로 보았다.
어느 날 관리가 무현을 불렀다.
“네 집안에 문제 있는 사람이 있더군.”
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름을 호적에서 빼면 집안 토지는 그대로 인정해 주겠소.”
“빼지 않으면요?”
“집안 전체를 다시 조사해야겠지.”
그 말은 협박이었고, 동시에 선택처럼 들렸다.
무현은 집으로 돌아왔다.
큰어른들은 사랑방에 모였다.
누군가는 도한을 숨겨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이미 집안을 떠난 사람이니 끊어 내야 한다고 했다.
한 사람을 위해 모두의 땅을 잃을 수는 없다는 말이 나왔다.
연옥은 이름보를 들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미 마흔을 넘겼고, 이제 집안에서 가장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현이 말했다.
“이름 하나를 빼면 집을 지킬 수 있습니다.”
연옥이 물었다.
“이름을 빼면 사람도 없어지나요?”
“사람은 남아 있겠지요.”
“거울에서는?”
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엌의 숟가락 하나가 떨렸다.
연옥은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어요?”
무현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럴 때까지 돌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이럴 때라서 하지요.”
큰어른이 끼어들었다.
“집안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연옥은 말했다.
“집안 전체에 그 사람은 안 들어갑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무현은 결국 강도한의 이름을 지웠다.
붓끝이 종이 위를 지나는 데는 한순간이었다.
먹물이 마르는 데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날 밤, 도한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산에서 며칠을 숨어 지냈다고 했다.
연옥은 그를 부엌으로 데려가 거울 앞에 세웠다.
거울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한은 한동안 빈 거울을 보았다.
“내가 안 보입니까?”
연옥은 말했다.
“나는 보여요.”
“거울은?”
“못 봐요.”
도한은 웃으려 했다.
“거울이 겁이 많군.”
그러나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그는 무현을 찾았다.
“네가 했냐?”
무현은 대답했다.
“집안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나는 집안이 아니었나?”
“너 하나 때문에 모두가 위험해졌다.”
“그럼 나를 지운 게 아니라 너희를 남긴 거구나.”
“그렇게 말하면 쉬워지냐?”
“적어도 정확해지지.”
부엌에서 숟가락들이 떨렸다.
도한은 거울 앞에 다시 섰다.
“내 얼굴이 없어도 나는 나냐?”
연옥이 말했다.
“그건 거울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도한은 그날 밤 집을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 이름보를 펼쳐 자기 이름을 찾았다.
연옥은 이미 가장자리에 그의 이름을 수놓아 두었다.
도한이 물었다.
“왜 가운데가 아니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 자리가 아니니까.”
“그럼 가장자리는?”
“살아 있지만 우리 삶에서 밀려난 사람들.”
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밀려난 게 아니라 밀어낸 거겠지.”
연옥은 부정하지 않았다.
“돌아오면 자리를 옮길게요.”
“돌아와도 거울이 나를 모르면?”
연옥은 말했다.
“사람이 먼저 알아보면 됩니다.”
도한은 떠났다.
그 뒤로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몇 해 동안 무현은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다고 믿었다.
집안의 땅은 지켜졌다.
곳간은 채워졌고, 아이들은 굶지 않았다.
그러나 강씨 집안의 거울에는 가끔 낯선 빈자리가 나타났다.
가족들이 모두 서 있어도 한 사람 들어갈 만큼 공간이 비었다.
무현은 거울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사진사가 망월리에 왔다.
그는 커다란 나무 상자와 검은 천을 가지고 다녔다. 빛을 붙잡아 사람의 얼굴을 종이 위에 남길 수 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오래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더 의심했다.
“얼굴 하나 남기는데 왜 숨도 제대로 쉬면 안 되오?”
사진사는 말했다.
“움직이면 흐려집니다.”
박씨 국밥집 주인이 물었다.
“사람이 원래 흐린 얼굴이면요?”
“더 흐려지겠지요.”
사람들은 웃었다.
강씨 집안은 새 시대에 맞는 집안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가족사진을 찍기로 했다.
사랑채 앞마당에 의자를 놓고 사람들이 줄을 섰다.
가운데에는 집안의 큰어른이 앉았다.
남자들은 뒤에 섰고, 여자들은 옆과 바닥에 앉았다.
아이들은 움직이지 말라는 말을 세 번 들었다.
한 아이는 재채기를 참다가 울었다.
사진사는 검은 천 아래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사람 수를 셌다.
“열한 명입니다.”
무현이 말했다.
“열한 명 맞소.”
사진사는 다시 천 아래로 들어갔다.
“이상하군.”
“뭐가요?”
“사진판에는 열두 명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세었다.
열한 명이었다.
사진사는 다시 보았다.
열두 명이었다.
그는 아이 하나가 움직였다고 생각하고 자리를 바꾸었다.
다시 찍었다.
또 열두 명이었다.
세 번째에는 모두 숨도 거의 쉬지 않았다.
사진사는 판을 확인하고 얼굴이 굳었다.
“한 분이 더 계십니다.”
연옥이 물었다.
“어디에요?”
사진사는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가족들 사이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젊은 얼굴이었다.
옷차림은 오래전 것이었고, 머리 모양도 그 시대와 맞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연옥만은 이름보에서 뜯겨 나간 바늘구멍의 모양을 떠올렸다.
강연옥.
강이문이 남쪽에 버리고 온 딸.
자신보다 먼저 그 이름을 가졌던 여자.
연옥은 사진 속 여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여자의 얼굴은 자신과 닮지 않았다.
그러나 눈빛은 이상할 만큼 익숙했다.
사진사가 말했다.
“다시 찍을까요?”
집안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는 흉한 징조라고 했고, 누군가는 사진판이 상했다고 했다.
연옥은 말했다.
“그냥 두세요.”
“누군지 아십니까?”
연옥은 대답했다.
“우리 집은 늘 한 명쯤 더 있습니다.”
사진사는 더 묻지 않았다.
그 사진은 강씨 집안의 첫 가족사진이 되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낯선 여자를 무서워했다.
나중에는 사진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포함해 수를 셌다.
아이들은 그녀를 먼 친척이라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무현만은 사진 속 여자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도한의 빈 거울이 떠올랐다.
기록에 없는 사람은 사진에 나타났고,
기록에서 지운 사람은 사진에서 사라졌다.
몇 달 뒤, 새 관청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망월리라는 이름은 공식 지도에서 완전히 삭제되었다.
청수리도, 월천동도 아니었다.
북산면 제칠리라는 숫자만 남았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망월리라고 불렀다.
그러나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길을 찾지 못했다.
편지는 돌아왔고, 세금 고지서는 엉뚱한 집에 도착했으며, 군졸들은 다른 마을을 망월리로 착각했다.
마을이 이름을 잃자 사람들은 이상하게 더 자주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망월리 물맛은 변했어.”
“망월리 달은 올해도 크네.”
“망월리 사람은 어디 가도 티가 나.”
어느 늦가을 밤, 하늘에 유난히 큰 달이 떴다.
달빛은 새 관청 건물 위에만 희게 쏟아졌다.
망월리의 모든 개가 그 건물을 향해 짖기 시작했다.
한 마리도 빠지지 않았다.
관리들은 돌을 던져 개들을 쫓으려 했다.
개들은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밤새도록 짖었다.
다음 날 아침, 관청 대문에 걸린 나무패가 갈라져 있었다.
북산면 제칠리라고 적힌 글자 가운데 ‘칠’ 자만 떨어져 나갔다.
사람들은 그것을 누가 했는지 몰랐다.
연옥은 개들이 했다고 말했다.
무현은 바람 때문이라고 했다.
부엌의 숟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 무현이 혼자 거울 앞에 섰을 때 그의 얼굴은 절반만 비쳤다.
왼쪽 눈과 입은 보였고, 오른쪽 얼굴은 빈 방이었다.
무현은 손을 들어 보았다.
거울 속 손은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얼굴의 절반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거울을 천으로 덮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름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강도한의 이름은 여전히 가장자리에 있었다.
그 아래에는 연옥이 작은 글씨로 한 줄을 더 수놓아 두었다.
사람을 지운 기록은 남아도,
기록을 지운 사람은 온전히 남지 못한다.
무현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자신이 절반만 비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검은 돌에는 그날 밤 또 하나의 금이 생겼다.
제5장: 거꾸로 흐른 해방의 강

강씨 집안에서 멸치 항아리를 건드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독대 맨 끝에 놓인 작은 항아리였고, 뚜껑을 열면 짠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봄에는 삭은 멸치 냄새가 났고, 여름에는 파리가 달라붙었으며, 겨울에는 표면에 하얀 소금 결정이 생겼다.
아이들은 그 항아리를 싫어했다.
남자들은 더 싫어했다.
그러므로 비밀을 숨기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강연옥의 며느리 윤서진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서진은 멸치 아래에 기름종이로 싼 종이 뭉치를 숨겼다. 이름과 날짜, 연락 장소가 적힌 쪽지들이었다. 산 너머 사람들에게 쌀을 보낸 기록도 있었고, 밤에 붙일 격문도 있었고, 잡혀간 사람들의 명단도 있었다.
며느리가 장독을 맡는 것은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며느리가 밤마다 멸치 항아리를 열어 보는 것도 음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서진은 가끔 웃었다.
나라의 운명이 멸치 냄새를 풍기며 숨어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그러나 웃을 때마다 곧 주변을 살폈다.
그 시대에는 오래 웃는 사람도 의심을 받았다.
망월리는 공식 지도에서 여전히 북산면 제칠리로 남아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이름을 쓰지 않았다.
새 권력은 마을에 새 학교와 새 표지판과 새 규칙을 들여왔다. 아이들은 집에서 쓰지 않는 언어를 배웠고, 어른들은 자신의 이름을 다른 방식으로 적어야 했다.
관청에서는 창씨를 하라고 했다.
강씨 집안 어른들은 사랑방에 모였다.
어떤 이는 거부해야 한다고 했고, 어떤 이는 겉으로만 따르자고 했다.
누군가는 이름은 소리일 뿐이라고 말했다.
연옥은 이름보를 펼쳐 놓고 말했다.
“소리뿐이라면 왜 저들이 바꾸라고 하겠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강씨 집안은 공식 서류에서 다른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집 안에서는 여전히 강씨였다.
그러나 아이들 중 일부는 학교에서 새 성을 더 자주 불렸다.
어린아이들은 어느 이름에 대답해야 할지 헷갈렸다.
한 아이가 연옥에게 물었다.
“증조할머니, 제 진짜 이름은 어느 거예요?”
연옥은 말했다.
“네가 돌아보는 이름.”
“둘 다 부르면 돌아봐요.”
“그럼 둘 다 아직 네 것이구나.”
“나중에 하나만 남으면요?”
연옥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네가 정하면 된다.”
서진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은 강준서였고, 작은아들은 강준호였다.
두 살 차이였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쌍둥이처럼 여겼다. 얼굴이 닮았고 키도 비슷했으며, 어릴 때에는 한 사람이 맞으면 다른 사람이 울었다.
둘은 함께 강에서 물고기를 잡았고, 함께 산에서 밤을 주웠고, 함께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다.
그러나 스무 살이 넘으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갔다.
준서는 질서를 믿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려면 관청과 충돌하지 말아야 하며, 겉으로 따르면서 안으로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준호는 기다림을 믿지 않았다.
그는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잡혀가고 이름이 바뀌고 땅이 빼앗긴다고 말했다. 누군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서진은 두 아들 모두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둘 모두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말하지 않았다.
준서는 어머니가 음식을 아껴 산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생각했다.
준호는 어머니가 관청 눈을 피해 편지를 전달한다고 짐작했다.
둘 다 절반만 알았다.
그래서 둘 다 어머니를 자기 편이라고 믿었다.
어느 봄밤, 준호가 늦게 돌아왔다.
옷자락에는 진흙이 묻어 있었고, 손등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서진은 부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니?”
“친구를 만나고 왔어요.”
숟가락 하나가 떨렸다.
준호는 부엌 벽을 바라보았다.
“이 집 숟가락들은 참 할 일이 없네요.”
서진은 물을 데웠다.
“친구가 피도 빌려 줬니?”
준호는 손을 뒤로 숨겼다.
“넘어졌어요.”
두 번째 숟가락이 떨렸다.
서진은 한숨을 쉬었다.
“돌도 늙었는데 너희 거짓말 듣느라 못 쉬는구나.”
그녀는 아들의 손을 씻겼다.
상처는 칼끝에 스친 듯 길었다.
“잡힐 뻔했니?”
준호는 침묵했다.
“사람을 다치게 했니?”
“아니요.”
숟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서진은 처음으로 안도했다.
“그럼 누가 널 다치게 했니?”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네 피가 내 손에 묻는데 왜 중요하지 않니?”
준호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나아요.”
서진은 손에서 피 묻은 물을 털었다.
“자식들이 하는 가장 어리석은 말이 그거다.”
“뭐가요?”
“어머니는 몰라도 된다는 말.”
그날 밤, 서진은 멸치 항아리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준호가 전달해야 할 새 연락처를 적은 쪽지가 있었다.
그녀는 잠시 바라보다 다시 넣었다.
아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면, 준호는 더 깊이 들어갈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혼자라고 생각하며 더 위험한 일을 할지도 몰랐다.
서진은 어느 쪽이 자식을 지키는 길인지 알 수 없었다.
검은 돌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돌은 선택하지 않은 말만 들었다.
선택할 수 없는 마음은 듣지 못했다.
며칠 뒤, 준서가 관청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곡물 배급과 주민 명부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의심했다.
어떤 사람은 강씨 집안이 결국 권력 편에 섰다고 했다.
준호는 형에게 물었다.
“왜 거기 들어갔어?”
준서는 말했다.
“안에서 알아야 밖을 지킬 수 있어.”
“저들이 하는 말을 대신 적어 주는 게 지키는 거야?”
“누가 잡혀갈지 미리 알 수 있다.”
“그래서 알려 줄 거야?”
“알릴 수 있는 건 알리겠지.”
“알릴 수 없는 건?”
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숟가락이 떨렸다.
준호는 비웃었다.
“역시.”
준서의 얼굴이 굳었다.
“넌 밖에서 큰소리치는 게 다라고 생각하지.”
“형은 안에서 고개 숙이는 게 지혜라고 생각하고.”
서진이 밥상을 내려놓았다.
“국 식는다.”
준호가 말했다.
“어머니는 이게 밥 먹을 일로 보여요?”
“싸움도 먹고 해야 오래 한다.”
준서는 숟가락을 들었다.
준호는 들지 않았다.
서진은 두 아들의 밥그릇을 바라보았다.
같은 크기였고, 같은 밥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의 그릇이 더 가볍다고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날부터 준서는 관청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보았다.
누가 감시 대상인지, 어느 집이 수색을 받을지, 누가 산으로 도망쳤는지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밤마다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외웠다.
종이를 가지고 나오면 잡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면 서진에게 무심한 듯 말했다.
“김씨 집은 내일 장독을 정리하는 게 좋겠어요.”
“왜?”
“관청 사람들이 장맛을 궁금해한답니다.”
서진은 알아들었다.
그날 밤 김씨 집에 소식이 전해졌다.
어떤 날에는 말했다.
“박씨 아들은 산에 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다음 날 군졸들이 산길을 지켰다.
준서는 자신이 사람들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번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어떤 이름은 너무 늦게 보았다.
어떤 집은 미리 경고할 방법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경고를 받고도 도망치지 않았다.
그들이 잡혀갈 때마다 준서는 자신이 명부를 작성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직접 잡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름이 적힌 줄은 그의 손을 지나갔다.
어느 날, 준호의 이름이 명부에 나타났다.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준서는 손끝이 차가워졌다.
옆에 있던 상관이 말했다.
“아는 자인가?”
준서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같은 마을 사람입니다.”
“가족은 아니고?”
준서는 아주 잠깐 망설였다.
“아닙니다.”
검은 돌은 멀리 집 아래에서 크게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서진뿐이었다.
그녀는 장독대 앞에 앉아 있다가 항아리 뚜껑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날 밤 준서는 집으로 돌아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진은 그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누구 이름을 봤니?”
준서는 놀랐다.
“무슨 말이에요?”
숟가락들이 떨렸다.
서진이 말했다.
“너희 형제는 어릴 때부터 숨길 때 눈이 똑같아진다.”
준서는 준호를 찾았다.
준호는 집에 없었다.
“어디 갔어요?”
“너한테 묻고 싶구나.”
준서는 방으로 들어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서진이 문을 막았다.
“무슨 일이냐?”
“준호를 산으로 보내야 해요.”
“왜?”
“내일 새벽에 잡으러 옵니다.”
서진은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가 알렸니?”
“아니요.”
“명부에 있었구나.”
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지금 말하니?”
“지금 알았으니까요.”
숟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서진은 그제야 큰아들이 자신에게 숨긴 일이 배신이 아니라 위험한 보호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준호는 한밤중에 돌아왔다.
준서는 그를 붙잡고 말했다.
“지금 떠나.”
“왜?”
“내일 잡으러 온다.”
준호는 형을 의심스럽게 보았다.
“어떻게 알아?”
“내가 봤어.”
“어디서?”
“관청 명부에서.”
준호는 한 걸음 물러났다.
“내 이름을 네가 적었어?”
“내가 적은 게 아니야.”
“그럼 지웠어?”
준서는 침묵했다.
“왜 안 지웠어?”
“내가 지우면 바로 들킨다.”
“형은 늘 못 하는 이유가 있네.”
준서가 동생의 멱살을 잡았다.
“지금 나랑 싸울 때가 아니야.”
“난 네가 정말 누구 편인지 알아야겠어.”
“살고 나서 물어.”
“저들 밑에서 살아남는 게 사는 거야?”
준서는 손을 놓았다.
“넌 죽는 걸 너무 쉽게 말한다.”
“형은 사는 걸 너무 싸게 만든다.”
서진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왔다.
“둘 다 입 다물어.”
형제는 어머니를 보았다.
서진은 멸치 항아리에서 기름종이 뭉치를 꺼냈다.
준서와 준호는 동시에 굳었다.
“어머니가 이걸 왜 가지고 있어요?”
서진은 준호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그것은 그가 며칠 뒤 전달하기로 한 연락망의 원본이었다.
준호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서진은 준서에게 다른 종이를 보여 주었다.
관청 내부에서 빠져나온 수색 일정이었다.
“이건 어디서 났어요?”
“너희 둘만 나라 걱정하는 줄 알았니?”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서진은 종이를 다시 쌌다.
“준서는 안에서 사람 이름을 보고, 준호는 밖에서 사람을 옮긴다. 나는 부엌에서 둘 다 먹인다.”
준호가 물었다.
“왜 우리한테 말 안 했어요?”
“말했으면 너희가 내 말을 들었겠니?”
준서가 말했다.
“위험합니다.”
서진은 웃었다.
“그 말은 내가 너희를 낳을 때 이미 들었다.”
그날 밤, 준호는 산으로 떠났다.
준서는 관청으로 돌아갔다.
한 사람은 도망자의 길로 갔고, 한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척해야 하는 자리로 돌아갔다.
서진은 대문 앞에 서서 두 방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 아들이 더 용감한지 판단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두려워했고,
두 사람 모두 자기 방식으로 두려움을 견디고 있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전쟁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매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쌀이 줄었고, 젊은이들이 사라졌으며,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늘 승리를 말했다.
승리라는 말이 커질수록 마을의 장례는 많아졌다.
망월리 사람들은 국가가 이기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기 집이 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준서는 관청에서 더 높은 일을 맡게 되었다.
그는 승진을 거절하지 않았다.
높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명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새 권력의 사람이 되었다고 수군거렸다.
준호는 산속 조직과 함께 움직였다.
가끔 한밤중에 집에 왔다.
서진은 묻지 않고 밥을 차렸다.
준호는 형이 있는 날에는 오지 않았다.
준서는 동생이 온 흔적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
밥솥의 쌀이 줄었고, 젖은 짚신 자국이 부엌에 남아 있었으며, 멸치 항아리 뚜껑이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보았다.
그러나 한 번도 어머니에게 묻지 않았다.
그 집에서는 침묵이 오랫동안 비겁함과 배려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느 겨울밤, 군졸들이 강씨 집을 수색하러 왔다.
준서는 함께 오지 않았다.
상관은 그를 다른 마을로 보냈다.
군졸들은 방과 곳간과 장독대를 뒤졌다.
서진은 장독대 앞에 앉아 있었다.
한 군졸이 멸치 항아리의 뚜껑을 열었다.
비린내가 올라왔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 안에는 뭐가 있나?”
“멸치요.”
“그 아래에는?”
서진이 말했다.
“더 오래된 멸치요.”
군졸은 막대기로 휘저었다.
멸치 사이에 감춰 둔 기름종이가 막대기 끝에 거의 닿았다.
그 순간 집 안에서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서진의 막내딸이 낳은 아이였다.
아기는 평소에도 크게 울었지만 그날은 지붕이 들릴 만큼 울었다.
군졸이 놀라 막대기를 떨어뜨렸다.
서진은 말했다.
“멸치 냄새를 맡으면 저럽니다.”
“아기가?”
“아버지를 닮았지요.”
군졸들은 웃었다.
그들은 항아리를 더 뒤지지 않았다.
수색이 끝난 뒤, 서진은 아기를 안았다.
“네가 오늘 나라를 구했다.”
아기는 울음을 멈추고 그녀의 옷에 침을 흘렸다.
연옥은 옆에서 말했다.
“나라를 구한 사람치고 예의가 없구나.”
그해 봄, 연옥이 죽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이름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서진에게 보자기를 건네며 말했다.
“이름은 쓰되, 설명은 함부로 쓰지 마라.”
“왜요?”
“사람이 한 일을 한 줄로 적으면 그 한 줄이 그 사람보다 오래 산다.”
“그럼 아무것도 쓰지 말까요?”
“아니. 쓰되, 네가 틀릴 수 있다는 자리를 남겨 둬라.”
연옥이 죽은 뒤 서진은 이름보의 맨 아래에 그녀의 이름을 수놓았다.
그 옆에는 작은 빈칸을 남겼다.
그것은 연옥이 옳았던 일을 적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틀렸을지도 모르는 일을 남겨 두기 위한 자리였다.
몇 해 뒤, 여름 한복판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관청에서는 헛소문을 퍼뜨리면 잡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장터의 상인들은 물건을 감추기 시작했고, 군인들은 문서를 태웠으며, 밤이면 트럭 소리가 잦아졌다.
준서는 집에 돌아오는 날이 줄었다.
준호에게서는 몇 달째 소식이 없었다.
서진은 매일 저녁 두 사람의 밥그릇을 놓았다.
한 그릇은 밥을 가득 담았고,
다른 한 그릇은 절반만 담았다.
어느 것이 누구 것인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1945년 여름,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었고, 논에는 벼가 무릎 높이까지 자랐다.
정오가 가까워졌을 때 장터 쪽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뛰어오며 소리쳤다.
“끝났대!”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왔다.
“뭐가?”
“전쟁이!”
“누가 이겼어?”
그 질문에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겼다는 말보다 끝났다는 말에 먼저 울었다.
어떤 이는 만세를 불렀고, 어떤 이는 땅에 주저앉았다. 어떤 이는 잡혀간 자식이 돌아올 거라고 믿었고, 어떤 이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학교에 걸려 있던 깃발이 내려갔다.
관청의 간판도 뜯겼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원래대로 불러 보았다.
오래 사용하지 않은 이름은 입안에서 낯설었다.
한 노인이 자기 이름을 세 번 말하고 울었다.
그 순간 망월리의 강물이 멈췄다.
아이들이 가장 먼저 보았다.
물 위에 떠 있던 나뭇잎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잠시 뒤, 나뭇잎은 상류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물이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강가로 몰려갔다.
물고기들이 물살을 거슬러 가는 것이 아니라, 물 전체가 산을 향해 올라갔다.
강바닥에 묻혀 있던 돌들이 드러났고, 오래전에 떠내려간 나무그릇 하나가 물 위로 올라왔다.
연옥이 젊었을 때 사용하던 그릇이었다.
서진은 그것을 알아보았다.
강물은 해 질 때까지 거꾸로 흘렀다.
사람들은 나라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서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아들을 기다렸다.
준서는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왔다.
관청 제복을 벗어 보자기에 싸 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보며 침묵했다.
누군가는 배신자라고 생각했고, 누군가는 그가 사람들을 살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준서는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끝났어요.”
서진이 물었다.
“너는?”
준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 밤 준호도 돌아왔다.
그는 수염이 자라 있었고, 한쪽 다리를 절었다. 산에서 함께 있던 사람들 중 절반이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형제는 마당에서 마주 보았다.
몇 년 만이었다.
준호는 형의 제복 보따리를 보았다.
준서는 동생 허리의 칼자국을 보았다.
둘 다 먼저 웃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서진은 말했다.
“들어와라. 밥 식는다.”
해방의 날 저녁, 강씨 집안의 식탁에는 오랜만에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축하해야 하는지, 애도해야 하는지, 서로를 용서해야 하는지, 먼저 따져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서진은 준서와 준호 앞에 밥그릇을 놓았다.
두 그릇은 겉모양이 같았다.
준서는 뚜껑을 열었다.
밥이 절반만 들어 있었다.
준호의 그릇에는 흰쌀밥이 가득했다.
준서의 얼굴이 굳었다.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숟가락 하나가 떨렸다.
서진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그릇을 바꾸었다.
준호 앞에는 절반짜리 밥이 놓였고, 준서 앞에는 가득 찬 밥이 놓였다.
형제는 어머니를 보았다.
“왜 바꿔요?”
준호가 물었다.
서진이 말했다.
“둘 다 자기 밥이 적다고 생각하잖아.”
준서는 입을 다물었다.
준호가 말했다.
“저는 그런 말 안 했어요.”
모든 숟가락이 떨렸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은 안 했지.”
그녀는 다시 그릇을 바꾸었다.
처음처럼 준서에게 절반을, 준호에게 가득 찬 밥을 놓았다.
그다음 두 그릇의 밥을 큰 양푼에 모두 쏟았다.
밥을 골고루 섞은 뒤 다시 나누었다.
“이제 됐습니까?”
준서가 물었다.
“아니.”
서진은 금이 간 흰 밥그릇을 가져왔다.
그 안에도 밥을 담았다.
“이건 누구 거예요?”
준호가 물었다.
“못 돌아온 사람들.”
준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한 그릇으로는 모자라지.”
서진은 빈 그릇을 더 가져왔다.
한 개, 두 개, 세 개.
식탁에는 사람이 앉을 자리보다 그릇이 많아졌다.
준호는 산에서 죽은 동료들의 이름을 말했다.
준서는 명부에서 보았으나 구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을 말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번갈아 말했다.
나중에는 누가 누구의 이름을 말하는지 구분되지 않았다.
검은 돌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날만큼은 삼킨 말보다 꺼낸 말이 더 많았다.
식사가 끝날 무렵, 막내아이가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리나라가 된 거예요?”
어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구도 확실히 대답할 수 없었다.
준호가 말했다.
“그렇지.”
준서는 말했다.
“아직은 모르겠다.”
숟가락이 떨리지 않았다.
둘 다 진심이었다.
아이는 밥을 한 숟갈 더 먹었다.
“그럼 밥 먹고 정하면 되겠네요.”
서진은 웃었다.
“그래. 나라 일도 배고플 때 정하면 틀리기 쉽다.”
밖에서는 강물이 여전히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물은 천천히 멈췄다.
그리고 자정이 지나자 다시 원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다음 날, 강가에는 낯선 물건들이 남아 있었다.
오래된 짚신 한 짝,
글씨가 지워진 나무패,
아이의 나무 팽이,
녹슨 숟가락,
이름 없는 작은 위패.
사람들은 자기 것이라 생각되는 물건을 가져갔다.
남은 것들은 강씨 집으로 옮겨졌다.
서진은 그것들을 이름보 옆에 놓았다.
“왜 다 가져와요?”
준호가 물었다.
“주인이 찾아올 수도 있잖니.”
준서가 말했다.
“아무도 안 오면요?”
서진은 대답했다.
“그럼 우리가 잊지 않으면 되지.”
해방 뒤의 세상은 사람들이 기대한 것처럼 곧바로 밝아지지 않았다.
새 깃발이 걸렸고, 새 사람들이 관청에 들어갔으며, 어제까지 같은 편이던 사람들이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누가 나라를 위해 싸웠는지,
누가 살아남기 위해 고개를 숙였는지,
누가 권력을 도왔는지,
누가 권력을 속였는지를 두고 말이 달라졌다.
준호는 산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함께 새 조직을 만들었다.
준서는 관청 기록을 정리하는 일을 계속 맡았다.
이번에는 새 정부를 위한 명부였다.
준호는 형에게 말했다.
“또 명부야?”
준서는 대답했다.
“이름을 아무나 쓰게 둘 수는 없잖아.”
“지난번에도 그렇게 시작했겠지.”
준서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네가 해.”
“나는 사람을 종이에 가두는 일은 싫어.”
“종이에 없으면 땅도 배급도 못 받는다.”
“종이에 있으면 잡혀가기도 하지.”
두 사람은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서진은 그들을 보며 말했다.
“해방됐다고 사람 버릇까지 풀리는 건 아니구나.”
며칠 뒤, 이름보에 새 글자가 나타났다.
강준서와 강준호의 이름 사이였다.
누가 수놓았는지 모르는 회색 실로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같은 문을 나온 형제도
서로 다른 나라로 돌아갈 수 있다.
서진은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그 아래에 작은 빈칸을 남겼다.
언젠가 두 형제가 같은 식탁으로 다시 돌아온 날을 적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빈칸이 채워지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제6장: 피난길에 가져갈 수 없었던 것들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소식은 장마가 오기 전에 망월리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장터에서 떠도는 말뿐이었다.
북쪽에서 군대가 내려온다느니, 이미 큰 도시가 함락되었다느니, 며칠이면 끝난다느니 하는 말이 사람마다 달랐다.
누군가는 라디오에서 들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역에서 돌아온 사촌에게 들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직접 본 사람에게 들은 사람의 장인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서진은 말했다.
“말이 사람을 세 번 건너면 전쟁도 하루 만에 끝난다.”
그러나 며칠 뒤 피난민들이 망월리에 들어왔다.
신발이 없는 아이들이 있었고, 솥을 등에 진 여자들이 있었으며, 소 한 마리를 끌고 수백 리를 걸어온 노인도 있었다.
그들은 서울이 무너졌다고 했다.
군대가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어제까지 자기 집이던 곳에 오늘은 다른 깃발이 걸렸다고 했다.
망월리 사람들은 그제야 창고를 열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강씨 집안에서는 무엇을 가져갈지를 두고 가장 먼저 싸움이 났다.
준호는 말했다.
“쌀부터 옮겨야 해.”
준서는 말했다.
“족보와 토지 문서를 먼저 챙겨야 한다.”
서진은 두 아들을 번갈아 보았다.
“배고플 때 족보를 삶아 먹을 거냐?”
준서가 말했다.
“문서가 없으면 돌아와도 우리 땅이 아닙니다.”
준호가 대꾸했다.
“살아 돌아와야 땅도 찾지.”
“땅이 없으면 어떻게 사는데?”
“목숨이 없으면 더 어렵지.”
부엌의 숟가락들이 떨렸다.
서진은 한숨을 쉬었다.
“전쟁은 아직 마을에도 안 왔는데 너희는 벌써 서로를 이기려고 하는구나.”
강씨 집안에는 이제 세 세대가 함께 살고 있었다.
서진의 두 아들 부부와 손자들, 결혼하지 않은 딸, 먼 친척 한 가족까지 한 지붕 아래 있었다.
누가 누구의 아이인지 모를 만큼 아이들이 많았고, 누가 누구의 잘못을 아직 기억하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어른들이 많았다.
집은 커졌지만 방은 늘 부족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부족한 방보다 부족한 믿음을 먼저 나누어 가져야 했다.
준호는 남쪽으로 피난해야 한다고 했다.
준서는 아직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다.
도로는 이미 군인과 피난민으로 막혔고, 어디까지 가야 안전한지도 알 수 없었다.
“며칠만 기다리자.”
준서가 말했다.
준호는 화를 냈다.
“당신은 늘 기다리자고 해.”
“이번에는 이유가 있다.”
“지난번에도 이유가 있었지.”
두 사람은 해방 뒤에도 여러 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서로 다른 나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이름보의 문장은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다.
준호는 좌익 조직과 가까워졌고, 준서는 새 행정 체계에서 일했다.
준호는 형이 권력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준서는 동생이 분노를 사상으로 착각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집으로 돌아오면 같은 밥상에 앉았다.
서진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랬다.
그녀는 밥을 차리며 말했다.
“나라가 둘로 갈려도 국그릇까지 둘로 가를 수는 없다.”
전쟁이 시작된 지 일주일째 되던 날, 마을 남쪽 길로 군인들이 지나갔다.
그들이 어느 편인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군복은 흙투성이였고 얼굴은 모두 지쳐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문을 닫았다.
개들도 짖지 않았다.
군인 하나가 강씨 집 문을 두드렸다.
“물을 주시오.”
서진은 물동이를 들고 나갔다.
준서는 막으려 했다.
“누군지 모르잖아요.”
서진이 말했다.
“목마른 사람인 건 알지.”
그녀는 군인들에게 물을 주었다.
한 병사는 너무 급하게 마시다 기침했다.
서진은 등을 두드려 주었다.
병사는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였다.
그는 물동이를 돌려주며 말했다.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서진은 대꾸했다.
“그럼 살아서 가라.”
군인들은 곧 떠났다.
다음 날, 반대편 군대가 마을로 들어왔다.
그들도 물을 달라고 했다.
준호가 서진을 보았다.
서진은 같은 물동이를 들고 나갔다.
“어제도 줬잖아요.”
준호가 낮게 말했다.
“물은 편을 안 가른다.”
“사람은 갈라요.”
“그래서 물이라도 안 갈라야지.”
그날 이후 강씨 집 우물에는 어느 쪽 군인도 물을 마셨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자비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위험한 중립이라고 했다.
서진은 말했다.
“우물한테 물어봐라. 자기가 누구 편인지.”
우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뒤부터 물맛이 조금 짜졌다.
전쟁이 가까워질수록 강씨 집 밥상에는 사람이 늘었다.
피난 가다 가족을 잃은 아이가 들어왔고, 다친 군인이 하룻밤을 묵었으며, 산에서 내려온 노인이 사흘을 머물렀다.
서진은 이름을 물었다.
누군가는 대답했고, 누군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밥은 주었다.
“이름도 모르는데 왜 재워 줘요?”
며느리가 물었다.
서진이 말했다.
“잠든 사람은 이름을 안 불러도 잔다.”
그녀는 이름을 들은 사람은 이름보 가장자리에 적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한때 이 집에서 밥을 먹었다는 사실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이름을 말하지 않은 사람은 작은 점으로 표시했다.
점은 날마다 늘어났다.
그해 여름, 이름보에는 사람 이름보다 점이 더 많아졌다.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결정은 갑자기 내려졌다.
새벽에 북쪽 산에서 포성이 들렸다.
처음에는 천둥처럼 멀었다.
해가 뜨자 창문이 떨릴 만큼 가까워졌다.
마을 이장이 골목을 뛰어다녔다.
“오늘 안에 떠나시오!”
사람들은 준비해 둔 짐을 꺼냈다.
준호는 쌀가마니를 마당으로 끌어냈다.
준서는 족보와 토지 문서, 이름보를 상자에 담았다.
며느리들은 이불과 아이 옷을 묶었다.
누군가는 솥을 가져가야 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솥은 무거우니 놋그릇만 챙기자고 했다.
아이들은 닭을 데려가겠다고 울었다.
노인은 장독을 묻어야 한다고 했다.
준호가 소리쳤다.
“장독을 어떻게 다 묻어요?”
노인이 대답했다.
“다 못 묻으니까 하나라도 묻는 거지.”
서진은 집 안을 천천히 돌았다.
가져갈 수 있는 것보다 두고 가야 할 것이 더 많았다.
아버지가 만든 장롱,
연옥이 글을 쓰던 작은 책상,
도윤의 놋숟가락,
강물이 거꾸로 흐른 날 떠내려온 나무팽이,
죽은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위패,
검은 돌 위에 세운 부엌.
사람들은 계속 그녀를 불렀다.
“어머니, 빨리요.”
“이걸 가져갑니까?”
“쌀을 몇 말 더 실을까요?”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찬장 맨 아래에서 금이 간 흰 밥그릇을 꺼냈다.
준서가 말했다.
“그것까지 가져가게요?”
“이게 제일 가볍다.”
“깨질 수 있어요.”
“이미 깨졌는데 아직 있잖니.”
준호는 멸치 항아리로 갔다.
그 아래에는 이제 비밀 문서가 없었다.
해방 뒤 대부분 태웠고, 남은 것은 이름 없는 편지 몇 장뿐이었다.
준호는 항아리를 들려 했다.
너무 무거웠다.
서진이 물었다.
“멸치를 다 가져가려고?”
“아래에 뭐가 남았을지 모르잖아요.”
“네가 넣었니?”
“아니요.”
“그럼 내가 기억한다.”
서진은 항아리에서 기름종이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오래전 준호가 산으로 떠날 때 받은 연락 쪽지가 있었다.
그녀는 쪽지를 아들에게 건넸다.
“이제 필요 없지?”
준호는 종이를 보았다.
“왜 아직 가지고 있었어요?”
“버릴 때를 몰라서.”
“지금은 알아요?”
서진은 말했다.
“전쟁이 다시 났으니 모르게 됐다.”
그녀는 쪽지를 접어 이름보 안에 넣었다.
준서는 그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위험한 종이입니다.”
준호가 비웃었다.
“당신 문서는 안전하고?”
준서가 토지 문서 상자를 내려놓았다.
“이건 집안 재산을 지키는 거야.”
“저건 사람들을 지킨 기록이고.”
“저 종이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
“당신 종이 때문에 사람을 쫓아낼 수도 있지.”
서진이 두 사람 사이에 섰다.
“둘 다 가져가라.”
형제가 동시에 말했다.
“뭘요?”
“쌀도, 족보도.”
“다 못 가져갑니다.”
“그러니까 나눠 들어.”
준호는 쌀가마니를 등에 졌다.
준서는 문서 상자를 들었다.
십 리도 가지 못해 둘 다 힘들어졌다.
산길에 들어서자 쌀가마니는 어깨를 눌렀고, 상자는 손바닥을 찢었다.
준호는 형의 상자를 보았다.
준서는 동생의 가마니를 보았다.
서로 먼저 바꾸자고 말하지 않았다.
서진이 뒤에서 말했다.
“둘 다 바꿔 들어라.”
준호가 말했다.
“괜찮아요.”
준서도 말했다.
“저도 괜찮습니다.”
두 사람의 짐에서 동시에 낮은 소리가 났다.
문서 상자 안의 놋숟가락이 떨렸고, 쌀가마니 속 곡식이 파도처럼 움직였다.
서진은 멈춰 섰다.
“짐까지 너희 거짓말을 듣는구나.”
결국 형제는 짐을 바꾸었다.
준서는 쌀가마니를 졌고, 준호는 문서 상자를 들었다.
준호가 몇 걸음 걷다가 말했다.
“이게 왜 이렇게 무거워?”
준서는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쌀보다 가볍다며.”
“종이는 원래 가벼운 거 아니야?”
“사람 이름이 많이 들면 무거워진다.”
준호는 처음으로 형을 보며 웃었다.
준서도 잠깐 웃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둘이 함께 웃은 것은 처음이었다.
피난 행렬은 남쪽 길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소달구지와 손수레, 등에 업힌 아이와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한길을 함께 갔다.
누군가는 집 열쇠를 목에 걸고 있었고, 누군가는 마당 흙을 보자기에 싸 왔다.
한 여자는 장롱 서랍 하나만 들고 왔다.
사람들이 왜 서랍만 가져왔냐고 묻자 그녀는 말했다.
“장롱은 무거워서.”
서랍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내려놓지 않았다.
강씨 집 아이 하나는 닭을 품에 안고 걸었다.
닭은 하루 종일 얌전했다.
밤이 되자 아이가 잠들었고, 닭은 달아났다.
아이는 다음 날 아침 울었다.
서진이 말했다.
“닭도 피난 갈 곳을 정했겠지.”
“우리랑 가기 싫었던 거예요?”
“닭한테 물어봐야지.”
아이는 한참 뒤에 말했다.
“잡아먹힐까 봐 갔나 봐요.”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현명하구나.”
피난 첫날 밤, 사람들은 폐가와 길가에서 잠을 잤다.
밥을 지을 솥은 있었지만 물이 부족했다.
서진은 가져온 쌀을 조금씩 나누었다.
준호는 불을 피웠고, 준서는 아이들 수를 세었다.
“열넷입니다.”
며느리가 말했다.
“열다섯 아니에요?”
다시 세었다.
열다섯이었다.
잠시 뒤 다시 세자 열넷이었다.
아이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준호가 횃불을 들고 길을 거슬러 갔다.
한참 뒤 그는 아이를 업고 돌아왔다.
아이는 버려진 집 부엌에 앉아 있었다.
“왜 거기 있었어?”
서진이 물었다.
아이가 울며 말했다.
“할머니가 밥 먹고 가라고 했어요.”
“무슨 할머니?”
아이는 뒤를 가리켰다.
폐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엌 아궁이에는 불씨가 남아 있었고, 작은 밥그릇 하나에 따뜻한 보리밥이 담겨 있었다.
서진은 그 집 문턱에 절을 했다.
“누구든 고맙습니다.”
준서는 말했다.
“사람이 방금 떠난 것 아닐까요?”
준호가 물었다.
“왜 아이만 남겨 두고?”
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밤 금이 간 흰 그릇이 따뜻해졌다.
서진은 그것을 품에 안고 잤다.
다음 날 아침, 그릇 안에는 보리밥 한 숟갈이 들어 있었다.
누가 넣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피난길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가진 물건을 하나씩 버렸다.
처음에는 무거운 물건을 버렸다.
솥뚜껑, 여분의 이불, 농기구, 책.
다음에는 아깝지만 없어도 살 수 있는 물건을 버렸다.
사진, 놋그릇, 새 옷, 장난감.
마지막에는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버렸다.
집 열쇠,
혼례 때 받은 비녀,
죽은 아이의 신발,
조상의 위패.
버린 사람들은 물건을 길가에 놓고 한동안 서 있었다.
준서는 토지 문서 상자를 끝까지 들었다.
준호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집이 불타면 종이가 무슨 소용이야?”
“집이 남을 수도 있어.”
“우리가 못 돌아갈 수도 있고.”
“그래도 누군가는 돌아가겠지.”
“누가?”
준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진이 말했다.
“그 누군가를 위해 드는 거다.”
준호는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흘째 되는 날, 강을 건너야 했다.
다리는 폭격으로 무너져 있었고, 사람들은 작은 나룻배에 나누어 타야 했다.
사공은 짐을 줄이라고 했다.
“사람부터 타야 하오.”
준서는 상자를 놓지 않았다.
“이것도 꼭 가야 합니다.”
사공은 말했다.
“종이가 물에 빠지면 사람이 건져야 하오. 사람 빠지면 종이가 건집니까?”
뒤에서는 군인들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아이들이 울었고, 사람들은 밀쳤다.
준호가 형의 상자를 빼앗았다.
“내가 들게.”
“무슨 소리야?”
준호는 상자를 열었다.
족보와 토지 문서, 이름보, 놋숟가락, 오래된 쪽지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토지 문서를 꺼냈다.
준서가 손목을 잡았다.
“뭐 하는 거야?”
“다 못 가져가.”
“그건 안 돼.”
“사람부터 타야 한다잖아.”
“그 문서가 없으면—”
준호는 종이를 반으로 찢으려 했다.
준서가 주먹으로 그를 쳤다.
형제가 강가에서 뒤엉켰다.
사람들은 말리려 했으나 서진이 먼저 다가갔다.
그녀는 상자에서 쌀 한 줌을 꺼냈다.
어느 틈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준서가 메었던 가마니에서 흘러든 곡식이었다.
서진은 한 손에는 쌀을, 다른 손에는 토지 문서를 들었다.
“이건 오늘 먹을 거다.”
그녀가 쌀을 들며 말했다.
“이건 돌아간 뒤 살 곳을 찾을 때 쓸 거고.”
문서를 들었다.
“둘 다 필요하다.”
준호가 말했다.
“그러니까 다 가져갈 수 없잖아요.”
“다 가져가려니까 그렇지.”
서진은 토지 문서의 중요한 부분만 뜯어 냈다.
땅의 위치와 집안 이름이 적힌 몇 장이었다.
나머지는 강물에 놓았다.
준서가 소리쳤다.
“어머니!”
종이는 물 위에 퍼졌다.
먹물이 흐려지고 글자가 번졌다.
서진은 말했다.
“땅이 우리를 기억하면 이만하면 된다.”
준서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땅이 어떻게 기억해요?”
서진은 대답했다.
“사람보다 오래 있으니까.”
준호는 상자를 다시 닫았다.
이번에는 형제 모두 말이 없었다.
배에 오른 뒤, 준서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젖은 문서가 떠내려가는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날 밤, 이름보의 빈 공간에 희미한 산과 강의 선이 나타났다.
정확한 지도는 아니었다.
길은 중간에 끊겼고, 강은 두 갈래로 나뉘었으며, 망월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작은 검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준서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이건 지도가 아닙니다.”
서진이 말했다.
“돌아가는 사람에게만 지도겠지.”
전쟁은 피난길을 계속 바꾸었다.
남쪽으로 가던 사람들이 다시 북쪽으로 돌아왔고, 안전하다고 들은 마을이 다음 날 불탔다.
어제 아군이던 군인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고, 어제 적군이 지나간 길로 오늘은 피난민이 걸었다.
준호는 어느 날 밤 가족을 떠났다.
그는 아는 사람들과 함께 남아 다친 사람들을 옮기겠다고 했다.
준서가 막았다.
“또 가려고?”
“사람들이 뒤에 남았어.”
“우리도 사람이다.”
“형이 있잖아.”
“그 말 하지 마.”
준호는 형을 보았다.
“무슨 말?”
“네가 떠나도 내가 남는다는 말.”
부엌도 돌도 없는 들판이었다.
숟가락은 보따리 안에 있었다.
그런데도 아주 작은 떨림이 났다.
준호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준서는 그 말을 예상하지 못했다.
“뭐가?”
“늘 형이 남을 거라고 생각한 거.”
준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도 네가 늘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형제는 그날 처음으로 서로에게 완전한 문장을 말했다.
그러나 전쟁은 고백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준호는 새벽에 떠났다.
그는 사흘 뒤 돌아오겠다고 했다.
사흘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서진은 매일 그의 밥그릇을 놓았다.
피난 중에도 그랬다.
천막 아래에서도,
빈 교실에서도,
산속 굴에서도,
누군가의 헛간에서도,
준호의 밥그릇은 늘 한 자리 차지했다.
며느리가 말했다.
“쌀이 부족합니다.”
서진이 대답했다.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계속 담아요?”
“조금만 담는다.”
“그래도 못 먹는 밥이잖아요.”
“못 먹는지 아직 모르지.”
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이 되면 준호의 밥을 먹지 않고 남겨 두었다.
아침이면 밥이 사라져 있는 날도 있었고, 그대로 굳어 있는 날도 있었다.
누가 먹었는지 알 수 없었다.
쥐일 수도 있었고,
굶주린 아이일 수도 있었고,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었다.
서진은 구분하지 않았다.
“배고픈 사람이 먹었으면 됐다.”
몇 달 뒤, 가족은 남쪽의 작은 피난민 마을에 머물게 되었다.
천막과 판잣집이 논 가장자리에 늘어섰다.
사람들은 고향 이름으로 골목을 불렀다.
평양골,
개성길,
서울마당,
함흥고개.
강씨 가족이 사는 줄은 망월리라고 불렸다.
망월리에서 온 사람은 강씨 가족뿐이었지만, 이름은 한 골목 전체를 차지했다.
서진은 말했다.
“마을이 사람을 따라왔구나.”
준서는 작은 판자에 ‘망월리’라고 써서 천막 앞에 걸었다.
글씨를 쓰는 동안 그의 손이 떨렸다.
그는 관청에서 수많은 이름을 적었지만, 그날 처음으로 마을 이름을 자기 집처럼 썼다.
피난민 마을에서는 매일 사람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김복순 아시는 분!”
“전주에서 온 박영태!”
“다섯 살 여자아이, 왼쪽 눈 아래 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차역과 시장, 배급소 벽에 이름을 붙였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이 바람에 흔들렸다.
서진은 이름보를 꺼냈다.
그녀는 준호의 이름을 가운데로 옮겼다.
준서가 보았다.
“왜 옮겨요?”
“이제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살아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왜 가운데예요?”
“가운데는 죽은 사람 자리가 아니야.”
“그럼요?”
“모르는 사람 자리다.”
준서는 이름을 가장자리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손을 대지 않았다.
그날 밤 놋숟가락이 따뜻해졌다.
가족들은 모두 준호가 살아 있다고 믿었다.
숟가락은 새벽까지 따뜻했다.
다음 날, 전쟁터에서 온 부상병 하나가 피난민 마을에 들어왔다.
그는 강준호를 안다고 했다.
“살아 있습니까?”
준서가 물었다.
병사는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언제요?”
“두 달 전입니다.”
“어디서?”
그는 정확한 지명을 말하지 못했다.
전선이 여러 번 바뀌었고, 마을은 불탔으며, 길 이름도 사라졌다고 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서진이 물었다.
병사는 말했다.
“다친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남았습니다.”
준서는 눈을 감았다.
그 말은 너무 준호다웠다.
그래서 더 믿기 어려웠다.
“죽는 걸 봤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살아 있습니다.”
준서가 말했다.
병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숟가락도 떨리지 않았다.
누구도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서진은 준호의 밥그릇을 평소보다 가득 채웠다.
준서가 말했다.
“못 먹을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다.”
“쌀을 아껴야 해요.”
“그것도 안다.”
“그럼 왜—”
서진은 아들을 보았다.
“오늘은 네가 먹어라.”
준서는 놀랐다.
“준호 밥을요?”
“네가 그 아이 몫까지 기다리고 있잖니.”
준서는 그릇 앞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먹으면 제가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밥 한 그릇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안 먹으면요?”
“너도 배고프겠지.”
서진은 준호의 밥을 절반 덜어 금이 간 흰 그릇에 담았다.
나머지는 준서 앞에 놓았다.
“기다림도 먹고 해야 오래 한다.”
준서는 천천히 밥을 먹었다.
눈물이 밥 위에 떨어졌다.
그는 닦지 않았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준호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망월리는 여전히 멀리 있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준서는 동생의 밥을 모두 남겨 두지는 않았다.
절반은 기다리는 사람의 몫으로 두고,
절반은 기다리느라 살아 있어야 하는 사람이 먹었다.
몇 해 뒤 휴전 소식이 들렸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났다고도 했고, 멈췄을 뿐이라고도 했다.
망월리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준서는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서진은 함께 가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 늙었고, 다리가 약해졌다.
떠나는 아들에게 금이 간 흰 그릇과 이름보를 건넸다.
준서가 말했다.
“둘 다 가져가요?”
“집에 먼저 돌아가는 사람이 가져가야지.”
“집이 없으면요?”
“돌은 있을 거다.”
“돌도 없어졌으면요?”
서진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우리가 서 있는 데가 집이지.”
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기 전날 밤, 서진은 천막 밖에 밥상을 차렸다.
준서의 밥그릇,
준호의 밥그릇,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금 간 그릇,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빈 그릇.
네 개를 놓았다.
준서가 물었다.
“왜 네 개예요?”
서진은 말했다.
“돌아갈 사람, 돌아오지 못한 사람, 이미 죽은 사람, 아직 누군지 모르는 사람.”
“어머니 것은요?”
서진은 웃었다.
“나는 밥솥째 먹을란다.”
준서도 웃었다.
그날 밤에는 숟가락이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모두가 할 말을 다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떤 말은 아직 하지 않아도 함께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준서는 망월리를 향해 떠났다.
피난민 마을 사람들은 그가 마치 자기 고향까지 대신 찾아가는 것처럼 배웅했다.
누군가는 집 열쇠를 맡겼고,
누군가는 흙 한 줌을 달라고 했으며,
누군가는 자기 마을이 남아 있는지도 봐 달라고 했다.
준서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약속은 전쟁 중에 너무 많이 부서졌다.
그는 다만 이름을 적었다.
사람 이름과 마을 이름,
떠나온 날짜와 마지막으로 본 집의 모양,
우물 위치와 오래된 나무의 종류.
이름보에는 더 이상 자리가 부족했다.
준서는 천을 한 폭 덧대었다.
새 천과 오래된 천은 색이 달랐다.
바느질 자국도 선명했다.
그러나 그는 감추려 하지 않았다.
가족의 기억은 처음부터 한 장의 온전한 천이 아니었다.
찢어지고,
덧대고,
잘못 수놓은 이름을 풀어 다시 놓으며 이어진 것이었다.
준서는 피난민 마을의 마지막 골목을 지나며 뒤를 돌아보았다.
‘망월리’라고 적힌 판자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서진이 손을 들었다.
준서는 어머니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주 멀리,
검은 돌이 있는 방향에서 낮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돌이 말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집이 사람을 부르는 소리였다.
제7장: 돌아온 남자를 알아보지 못한 집

강준서가 망월리로 돌아온 것은 전쟁이 멈춘 뒤 두 번째 봄이었다.
피난민 마을을 떠날 때 사람들은 그에게 열세 개의 집 열쇠와 일곱 개의 마을 이름, 그리고 돌아가면 꼭 확인해 달라는 부탁 스물한 가지를 맡겼다.
어떤 사람은 우물이 아직 있는지 봐 달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감나무가 살아 있는지만 알아봐 달라고 했다.
어떤 노인은 자기 집 뒤에 묻은 장독을 파서 된장이 남았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준서는 말했다.
“집이 없어도 장독은 남을 수 있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집이 없으면 된장도 남의 것이지.”
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맡긴 열쇠들은 작은 자루에 넣었다.
열쇠마다 모양이 달랐고, 녹슨 정도도 달랐다. 어떤 열쇠는 너무 커서 성문을 열 것 같았고, 어떤 것은 아이 장난감처럼 작았다.
그러나 돌아가서 맞는 문을 찾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전쟁은 자물쇠보다 집을 먼저 바꾸었다.
준서는 북쪽으로 올라가는 동안 수없이 검문을 받았다.
이름을 물었고,
고향을 물었고,
어느 편이었는지 물었다.
그는 강준서라고 대답했다.
망월리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 관리들은 서류를 뒤적였다.
“망월리라는 곳은 없는데.”
“북산면 제칠리로 적혀 있을 겁니다.”
“제칠리도 없어졌소.”
“그럼 월천동으로 찾아보십시오.”
“그 이름도 없소.”
“청수리는요?”
관리들은 준서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고향 이름이 왜 그렇게 많소?”
준서는 말했다.
“우리가 바꾼 게 아닙니다.”
“기록에는 하나만 있어야 하오.”
“기록이 세 번 바꿨습니다.”
“그럼 마지막 이름이 진짜겠지.”
준서는 잠시 생각했다.
“마지막 이름이 먼저 없어졌습니다.”
관리들은 그를 오래 붙잡아 두었다.
고향이 너무 많은 사람은 고향이 없는 사람보다 더 수상했다.
그는 피난민 마을에서 가져온 판자를 보여 주었다.
망월리.
검은 먹으로 쓴 세 글자가 바람과 비에 씻겨 흐려져 있었다.
한 관리가 물었다.
“이것이 증명인가?”
“아닙니다.”
“그럼 왜 가져왔소?”
준서는 말했다.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관리는 웃었다.
“그건 행정 서류가 아니오.”
준서는 판자를 다시 보자기에 넣었다.
“그래서 아직 남아 있는 겁니다.”
망월리로 가는 마지막 고갯길에는 길이 없었다.
폭격으로 산비탈이 무너졌고, 전쟁 중 놓인 참호에 빗물이 고여 있었다. 예전 길을 따라가면 막다른 곳에 닿았고, 새로 난 길은 엉뚱한 마을로 이어졌다.
준서는 이름보에 나타난 희미한 선을 따라갔다.
천 위의 지도는 걸을 때마다 달라졌다.
아침에는 왼쪽으로 굽어 있던 길이 오후에는 곧게 펴졌고, 강줄기는 비가 오면 넓어졌다. 어떤 날에는 검은 점이 사라져 준서를 멈추게 했다.
그럴 때 그는 금이 간 흰 그릇을 꺼냈다.
그릇을 땅에 놓으면 금의 방향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준서는 그 방향으로 걸었다.
사흘째 저녁, 오래된 감나무가 보였다.
나무는 절반이 타 있었으나 살아 있었다.
그 뒤로 집 지붕이 나타났다.
강씨 집이었다.
준서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집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을 기다리는 집의 모습은 아니었다.
대문은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담장은 낮아졌으며,
사랑채 한쪽은 헐려 군인 막사로 쓰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장독대에는 낯선 항아리가 놓였고, 마당에는 그가 모르는 아이 둘이 돌을 던지며 놀고 있었다.
아이가 준서를 보고 소리쳤다.
“아버지!”
집 안에서 남자가 나왔다.
그의 이름은 박만식이었다.
전쟁 중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이었다. 아내와 두 아이, 늙은 어머니와 함께 강씨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만식은 준서를 위아래로 보았다.
“누구시오?”
준서는 대답했다.
“이 집 사람입니다.”
만식은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은 우리가 삽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무슨 일이오?”
준서는 대문을 바라보았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만식은 길을 막았다.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지.”
준서가 말했다.
“남의 집이 되기 전에 우리 집이었습니다.”
“우리도 전쟁 전에 다른 집이 있었소.”
둘은 한동안 서로를 보았다.
누가 더 많이 잃었는지 겨루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잃은 집은 서로 비교할 수 없었다.
집은 크기로 잃는 것이 아니라, 다시 못 들어간다는 사실로 잃는 것이었다.
만식의 어머니가 안에서 나왔다.
작고 마른 노인이었다.
그녀는 준서를 보자 말했다.
“저 사람이구먼.”
만식이 물었다.
“누구요?”
“밤마다 부엌 돌이 부르던 사람.”
준서의 얼굴이 굳었다.
“돌이 남아 있습니까?”
노인은 부엌 쪽을 가리켰다.
“저 집은 돌 때문에 뜯지도 못했어.”
전쟁이 지나간 뒤 군인들이 집의 마루와 문짝을 떼어 땔감으로 쓰려 했으나, 부엌 바닥의 검은 돌만은 움직이지 않았다고 했다.
곡괭이 끝이 부러졌고,
돌을 끌어내려던 줄이 세 번 끊어졌으며,
한 군인은 돌 위에서 자다가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 이름을 밤새 불렀다.
그 뒤 누구도 손대지 않았다.
준서는 부엌으로 갔다.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힘을 주었다.
몸은 앞으로 가려 했으나 발바닥이 땅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만식의 아이들은 웃었다.
“아저씨가 문을 못 들어가!”
준서는 대문까지 돌아갔다 다시 걸어왔다.
마찬가지였다.
집은 그를 들이지 않았다.
만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 이 집 사람이 맞소?”
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따리 안에서 놋숟가락이 떨렸다.
준서는 그것을 꺼냈다.
도윤의 숟가락이었다.
손잡이는 여전히 짧았고, 불에도 그을리지 않았던 놋빛이 남아 있었다.
그는 숟가락을 문턱에 놓았다.
숟가락은 안쪽으로 한 번 굴러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마치 집이 물건까지 돌려보내는 것 같았다.
준서는 마당에 앉았다.
피난길에서 그토록 무겁게 들고 온 문서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남은 토지 문서 몇 장과 족보, 이름보, 사람들의 열쇠가 있었다.
만식은 상자를 보았다.
“문서가 있소?”
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식의 얼굴이 굳었다.
“우리는 갈 곳이 없소.”
“나도 없습니다.”
“이 집을 돌려달라는 거요?”
준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그 말을 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집 안에 있는 아이들의 신발과 빨랫줄의 젖은 옷, 아궁이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자 그 문장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집을 되찾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집을 잃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부엌의 숟가락들이 떨렸다.
강씨 집에는 원래 있던 숟가락 몇 개가 아직 남아 있었다.
박만식의 아내가 놀라 부엌으로 나왔다.
“또 저러네.”
준서가 물었다.
“자주 떱니까?”
“누가 거짓말하면요.”
만식의 아내는 준서를 보았다.
“아저씨가 무슨 말을 안 했어요?”
준서는 말했다.
“이 집을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숟가락이 더 크게 떨렸다.
만식의 아이들이 웃었다.
“거짓말이다!”
준서는 얼굴을 붉혔다.
“그럼 내가 왜 왔겠소?”
만식의 어머니가 말했다.
“집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집이 남았는지 보러 온 거겠지.”
숟가락은 멈췄다.
준서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더 정확했다.
그는 집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집이 자신 없이도 존재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자기가 돌아오지 않아도 부엌에서 불이 타고,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고, 누군가 대문을 닫고 잠들었다는 사실이 고마우면서도 서러웠다.
준서는 마당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만식은 방 하나를 내주겠다고 했으나, 준서는 집이 허락하지 않는 곳에서 잘 수 없다고 했다.
“집이 말도 합니까?”
만식이 물었다.
“우리 집은 오래전부터 그랬습니다.”
“뭐라고 하는데요?”
준서는 대문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말은 안 합니다.”
그날 자정, 부엌에서 낮은 울림이 들렸다.
준서는 깨어났다.
검은 돌 위에 흰 눈이 쌓이고 있었다.
여름이었다.
눈은 부엌 안에만 내렸다.
박만식 가족도 일어났다.
아이들은 눈을 만지려 했으나 손이 닿으면 눈송이가 사라졌다.
눈은 돌 위에 문장을 만들었다.
누가 집에 살았는가를 묻지 말고,
누가 집을 살게 했는가를 물어라.
만식은 글을 읽고 준서를 보았다.
“무슨 뜻이오?”
준서는 말했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만식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집을 비워 둔 사람보다 불을 피운 사람이 주인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
준서는 가슴이 아팠다.
“그럼 저는 무엇입니까?”
노인은 말했다.
“돌아온 사람이겠지.”
그날 새벽, 준서는 다시 문턱 앞에 섰다.
이번에는 한 발이 안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발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한쪽 발은 집 안에, 다른 발은 마당에 둔 채 오래 서 있었다.
만식의 아이 하나가 물었다.
“아저씨는 들어온 거예요, 안 들어온 거예요?”
준서는 말했다.
“나도 모르겠다.”
아이의 동생이 대꾸했다.
“반만 들어왔네.”
부엌 거울에 준서의 얼굴이 비쳤다.
절반만 보였다.
준서는 강무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람을 기록에서 지운 뒤 거울에 얼굴 절반만 남았던 조상.
그러나 준서는 누구를 지웠는지 알 수 없었다.
전쟁 중 명부에서 본 이름들,
경고하지 못한 사람들,
사라진 동생,
자기 대신 집에서 살게 된 사람들.
지워진 얼굴이 너무 많아 어느 얼굴이 자기 얼굴 절반을 가져갔는지 알 수 없었다.
준서는 이름보를 펼쳤다.
강준호의 이름은 가운데 있었다.
그 아래 빈칸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는 붓을 들었다.
‘사망’이라고 쓰려 했다.
그러나 붓끝이 천에 닿지 않았다.
‘생존’이라고 쓰려 했다.
그 말도 쓸 수 없었다.
박만식의 아내가 물었다.
“누구 이름입니까?”
“동생입니다.”
“죽었습니까?”
“모릅니다.”
“그럼 왜 뭘 쓰려고 합니까?”
준서는 붓을 내려놓았다.
“모른다는 말을 견디기 어려워서요.”
그녀는 말했다.
“전쟁 뒤에는 모르는 사람이 제일 많습니다.”
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아침, 마을 사람들이 강씨 집으로 모였다.
돌아온 옛 주민이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준서를 알아보았다.
어떤 사람은 알아보지 못했다.
전쟁 전 아이였던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 있었고, 어른이었던 사람들은 늙었거나 죽었다.
한 노인이 말했다.
“강준서가 맞구먼.”
다른 사람이 물었다.
“어떻게 아시오?”
“말할 때 입술 한쪽이 먼저 움직였어.”
준서는 자기도 몰랐던 버릇으로 신분을 증명했다.
새 면사무소에서는 토지와 가옥 소유권을 다시 조사한다고 했다.
준서는 남은 문서를 가지고 갔다.
담당자는 젊은 남자였다.
그는 전쟁 전에 망월리를 본 적도 없었다.
문서를 살펴보며 말했다.
“일부가 없습니다.”
“피난길에 버렸습니다.”
“왜 버렸습니까?”
“사람이 먼저 배를 타야 해서요.”
“그건 안타깝지만 행정적으로는 곤란합니다.”
준서는 물었다.
“사람 대신 문서를 태웠으면 더 나았습니까?”
담당자는 불쾌한 얼굴을 했다.
“감정적으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전쟁이 감정적이었습니다.”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준서는 잠시 웃었다.
“법이 전쟁을 안 겪었군요.”
담당자는 집의 현재 거주자인 박만식에게 임시 점유권이 있다고 했다.
준서에게는 전쟁 전 소유권 일부가 인정될 수 있지만, 모든 가족이 돌아왔다는 증명이 필요했다.
“가족이 몇 명이오?”
담당자가 물었다.
준서는 이름보를 펼쳤다.
“어느 때를 기준으로 합니까?”
“현재요.”
“현재 어디에 있는 사람까지요?”
“살아 있는 가족.”
“살아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요?”
“제외해야지요.”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은요?”
“그것도 제외합니다.”
“그럼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은 가족이 적어집니까?”
담당자는 한숨을 쉬었다.
“철학하러 온 게 아닙니다.”
“저도 집을 찾으러 왔습니다.”
“명단을 쓰시오.”
준서는 빈 종이를 받았다.
가족 구성원.
그는 첫 줄에 자기 이름을 썼다.
두 번째 줄에 어머니 윤서진을 썼다.
세 번째 줄에 강준호를 쓰려다 멈췄다.
담당자가 재촉했다.
“살았소, 죽었소?”
“모릅니다.”
“그럼 쓰지 마시오.”
준서는 이름을 썼다.
담당자가 붉은 줄을 그었다.
준서는 다시 썼다.
담당자가 다시 지웠다.
세 번째에는 종이가 찢어졌다.
면사무소 벽에 걸린 거울이 흔들렸다.
담당자의 얼굴은 그대로였으나 준서의 얼굴은 완전히 사라졌다.
방 안 사람들은 준서를 볼 수 있었다.
거울만 빈 의자를 비췄다.
담당자는 놀랐다.
“이게 무슨 일이오?”
준서가 말했다.
“기록이 사람보다 빠른 모양입니다.”
그날부터 준서는 면사무소에 갈 때 작은 거울을 가지고 다녔다.
자기 이름이나 가족 이름이 지워질 때마다 거울을 책상 위에 놓았다.
관리들은 불편해했다.
“이걸 왜 놓습니까?”
“서류가 제대로 됐는지 확인하려고요.”
“거울로?”
“당신들 기록보다 빠릅니다.”
결국 준호의 이름은 ‘생사 미상’으로 적혔다.
담당자는 그런 항목이 원래 없다고 했다.
준서는 직접 빈칸을 만들었다.
새 항목이 생긴 뒤, 마을의 다른 사람들도 찾아왔다.
실종된 남편,
돌아오지 않은 딸,
북쪽에 남은 부모,
피난 중 헤어진 아이의 이름을 쓰기 위해서였다.
명부에는 생존과 사망 사이에 긴 줄이 생겼다.
그 줄은 매일 길어졌다.
사람들은 그 칸을 망월리 칸이라고 불렀다.
“왜 우리 마을 이름을 붙여요?”
준서가 물었다.
한 여자가 말했다.
“여기도 있는지 없는지 오래 몰랐잖아요.”
준서는 그 말을 듣고 더 묻지 않았다.
집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면사무소는 강씨 집을 두 가족이 함께 사용하라고 했다.
박만식 가족은 사랑채와 안방을 썼고, 준서는 비어 있던 작은 방 하나를 받았다.
그러나 집은 여전히 준서를 온전히 들이지 않았다.
아침에는 문이 열렸고, 저녁에는 닫혔다.
어떤 날은 부엌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밥을 먹으려 하면 숟가락이 손에서 떨어졌다.
마루에 누우면 자고 있는 동안 몸이 조금씩 대문 쪽으로 밀려났다.
한 번은 아침에 깨어 보니 준서가 집 밖 감나무 아래에 누워 있었다.
만식의 아이들이 물었다.
“집이 아저씨를 싫어해요?”
준서는 말했다.
“집도 오래 비우면 삐친다.”
“미안하다고 했어요?”
준서는 생각했다.
그는 집을 잃었다고만 생각했지, 집을 떠났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전쟁이 내쫓았으므로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집의 입장에서는 이유보다 부재가 먼저였을지도 몰랐다.
그날 밤 준서는 검은 돌 앞에 앉았다.
“미안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고 싶었다.”
숟가락 하나가 떨렸다.
준서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삼킨 말은 이것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이 두려웠다.
집이 없어졌을까 봐,
동생이 먼저 돌아와 있을까 봐,
아무도 자신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봐,
집이 그대로 남아 자기가 변했다는 사실만 드러날까 봐 두려웠다.
준서는 끝까지 말했다.
“돌아왔는데도 내가 이 집 사람인지 모르겠다.”
검은 돌의 금 사이로 작은 싹 하나가 올라왔다.
흙도 빛도 없는 부엌 바닥에서 푸른 싹이 자랐다.
만식의 어머니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이제 들어오라는 뜻이구먼.”
다음 날 준서는 두 발 모두 문턱을 넘었다.
집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박만식 가족에게 퇴거 통지가 왔다.
강씨 집의 전쟁 전 소유가 일부 인정되었고, 기존 거주자는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만식은 종이를 들고 준서를 찾아왔다.
“당신이 신청했소?”
“권리를 확인해 달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를 내보내는 거군.”
“그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부엌 숟가락이 떨렸다.
만식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집 숟가락은 편리하군.”
준서는 통지서를 받았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어떻게?”
준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기가 집에 들어올 수 있게 된 날 다른 가족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은 검은 돌의 문장보다 분명했다.
누가 집을 살게 했는가를 물어라.
전쟁 동안 강씨 집을 살게 한 사람은 박만식 가족이었다.
지붕의 구멍을 막았고,
무너진 담을 쌓았으며,
부엌에 불을 피웠고,
검은 돌 위에 매일 밥을 지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집은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준서는 면사무소로 갔다.
“두 가족 이름을 함께 올려 주십시오.”
담당자가 말했다.
“한 집에 소유자는 하나여야 합니다.”
“가족은 둘입니다.”
“그러니까 분쟁이지요.”
“분쟁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법이 그렇습니다.”
준서는 물었다.
“법은 집에 누가 불을 피웠는지 봅니까?”
“소유 문서를 봅니다.”
“그 문서 절반은 강물에 있습니다.”
“그러면 더 어렵습니다.”
준서는 금이 간 흰 그릇을 책상 위에 놓았다.
담당자는 인상을 썼다.
“이번에는 왜 그릇입니까?”
“빈칸을 만들러 왔습니다.”
“무슨 빈칸?”
“이름보에도 생사 사이 칸이 생겼습니다. 집도 소유와 무소유 사이가 필요합니다.”
“그런 제도는 없습니다.”
“그럼 만드십시오.”
“당신은 올 때마다 제도를 하나씩 만드려고 하는군.”
준서가 말했다.
“전쟁이 사람을 기존 칸에 남겨 두지 않았으니까요.”
오랜 다툼 끝에 강씨 집은 공동 거주 가옥으로 기록되었다.
소유자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 대신 관리 책임자로 강준서와 박만식 두 이름이 함께 올라갔다.
담당자는 말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둘이 책임지시오.”
준서는 대답했다.
“문제가 안 생겨도 둘이 책임지겠습니다.”
박만식은 쉽게 마음을 풀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 두 가족은 같은 부엌에서 밥을 먹었다.
서로 다른 솥을 사용했지만, 불은 하나였다.
만식의 아이가 물었다.
“그럼 이제 이 집은 누구 거예요?”
만식은 말했다.
“어른들이 아직 싸우는 중이다.”
준서는 말했다.
“집이 정할 거다.”
아이는 검은 돌을 내려다보았다.
“돌은 글씨를 못 쓰잖아요.”
만식의 어머니가 웃었다.
“글씨 못 쓰는 것들이 더 오래 기억한다.”
식사가 끝난 뒤 준서는 금이 간 흰 그릇을 밥상 끝에 놓았다.
만식의 아내가 물었다.
“누구 밥입니까?”
“못 돌아온 사람들.”
“우리 집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작은 그릇 하나를 더 가져왔다.
만식은 형의 이름을 말했다.
전쟁 중 북쪽 길에서 헤어졌다고 했다.
만식의 어머니는 남편 이름을 말했다.
고향에 남았다가 소식이 끊겼다고 했다.
준서는 강준호의 이름을 말했다.
두 가족은 자기들이 기다리는 사람 이름을 번갈아 불렀다.
이름은 서로 다른 고향에서 왔지만 같은 밥상 끝에 놓였다.
그날 밤 집의 모든 문이 열렸다.
바람도 없었다.
대문과 방문, 곳간 문, 찬장 문까지 저절로 열렸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도둑이 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집 안의 모든 빈 공간에 누군가 앉았다가 일어난 자국이 남았다.
방석이 눌렸고,
밥그릇 가장자리에 밥풀이 붙었으며,
마루에는 젖은 발자국이 대문에서 부엌까지 이어졌다.
준서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누가 왔었군요.”
만식이 물었다.
“누구?”
준서는 대답했다.
“우리가 이름을 부른 사람들 중 누군가.”
아이들은 다음 날 아침 발자국을 따라갔다.
발자국은 검은 돌 앞에서 멈췄다.
돌의 금 사이에서 자란 싹은 밤새 손바닥만큼 커져 있었다.
잎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한쪽 잎에는 강씨 집 족보에 쓰던 글씨와 비슷한 무늬가 있었고,
다른 잎에는 박씨 집 아이가 흙바닥에 이름을 쓸 때 쓰던 서툰 획이 있었다.
만식의 아이가 말했다.
“나무도 두 집 사람이네.”
준서는 웃었다.
“그런가 보다.”
몇 주 뒤, 피난민 마을에서 편지가 왔다.
윤서진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준서는 편지를 세 번 읽었다.
어머니는 그가 떠난 뒤 겨울을 넘겼고, 봄비가 내리기 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마지막까지 준호의 밥그릇을 놓았으며, 죽기 전날에는 빈 그릇에 밥을 가득 담았다고 했다.
누군가 물었을 때 서진은 이렇게 말했다.
“내일은 내가 못 차릴 수도 있으니까.”
준서는 편지를 접었다.
울음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검은 돌 앞에 앉아 금이 간 그릇에 밥을 담았다.
어머니의 이름을 말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숟가락이 떨리지 않았다.
말을 삼킨 것이 아니라, 이름이 너무 커서 입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었다.
박만식의 어머니가 준서 옆에 앉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소?”
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밥그릇을 보았다.
“그릇 하나 더 놓으시오.”
“이미 있습니다.”
“저건 못 돌아온 사람들 거라며.”
“어머니도 못 돌아옵니다.”
노인은 말했다.
“죽어서 못 오는 것과 길을 몰라 못 오는 건 다르지.”
그녀는 작은 그릇을 하나 가져왔다.
“이건 돌아올 필요 없는 사람을 위한 거요.”
준서는 물었다.
“그런 사람도 있습니까?”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간 사람.”
준서는 새 그릇에 밥을 담았다.
그리고 이름보 맨 아래, 연옥이 만든 줄 옆에 윤서진의 이름을 수놓았다.
죽고 나서도 떠날 줄 아는 사람들의 자리.
그 옆에 이렇게 적었다.
윤서진은 두 아들을 기다렸고,
둘 중 어느 쪽도 자기 기다림의 빚으로 만들지 않았다.
문장을 다 쓴 뒤 준서는 오래 바라보았다.
연옥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사람이 한 일을 한 줄로 적으면 그 한 줄이 사람보다 오래 산다.
준서는 문장 끝에 작은 빈칸을 남겼다.
어머니가 그렇지 못했던 순간을 누군가 기억한다면 적을 수 있도록.
그날 밤, 집은 다시 준서를 밖으로 밀어냈다.
그는 감나무 아래에서 깨어났다.
처음에는 집이 자기를 거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당을 보니 박만식 가족도 모두 밖에 누워 있었다.
아이들은 이불을 덮은 채 평화롭게 자고 있었다.
집 안에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겹쳐 누구 목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준서는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밥상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강이문,
백연화,
강연옥,
장도윤,
강무석,
강도한,
그리고 준서가 알지 못하는 얼굴들.
그들 사이에 윤서진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멸치 항아리 뚜껑을 열며 말했다.
“아직도 이걸 안 버렸구나.”
장도윤이 얼굴을 찌푸렸다.
“냄새가 심합니다.”
연화가 말했다.
“죽은 사람도 코는 있나 보네.”
사람들이 웃었다.
준서는 문을 열려 했다.
열리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서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금이 간 흰 그릇에 밥을 담아 빈 자리 하나 앞에 놓았다.
그 자리는 준서의 자리 같기도 했고,
준호의 자리 같기도 했다.
새벽이 되자 집 안은 비어 있었다.
문은 다시 열렸다.
밥상 위에는 밥그릇 하나만 남아 있었다.
밥은 따뜻했다.
그릇 아래에는 젖은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종이에는 준호의 글씨로 짧게 적혀 있었다.
형,
나는 아직 돌아가는 중이다.
준서는 종이를 들었다.
먹물은 번져 있었고, 언제 쓰였는지 알 수 없었다.
박만식이 물었다.
“정말 동생 글씨요?”
준서는 오래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럼 살아 있다는 뜻이오?”
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숟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그는 이제 알았다.
모르는 것을 그대로 두는 일도 한 사람을 기억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준서는 쪽지를 이름보의 강준호 이름 아래 남아 있던 빈칸에 꿰매 넣었다.
날짜는 적지 않았다.
그 대신 한 줄을 덧붙였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 길어
사람이 먼저 늙을 수도 있다.
그날부터 강씨 집 대문에는 작은 판자가 두 개 걸렸다.
하나에는 강씨 집이라고 적혀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박씨 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바람이 불면 두 판자가 서로 부딪혀 소리를 냈다.
멀리서 들으면 싸우는 소리 같았고,
가까이서 들으면 밥 먹으라고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을 어느 쪽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몰랐다.
결국 예전처럼 말했다.
“검은 돌 있는 집.”
집은 사람보다 이름을 덜 필요로 했다.
그리고 준서가 돌아온 지 일 년이 되는 날,
부엌 바닥의 두 갈래 잎 사이에서 작은 꽃 하나가 피었다.
꽃잎은 절반이 흰색이고 절반이 검은색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집이 두 가족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라고 했다.
준서는 그렇게 믿지 않았다.
집이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데는 꽃 하나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준서가 문턱을 넘을 때 집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박만식이 뒤따라 들어와도 밀어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같은 문으로 들어갔다.
서로 먼저 들어왔다고 말하지 않았다.
부엌의 숟가락들도 조용했다.
제8장: 전기가 들어온 밤 사라진 그림자

망월리에 전기가 들어온다는 소식은 전봇대보다 먼저 도착했다.
면사무소 사람들은 봄부터 말했다.
“올해 안에는 불이 들어옵니다.”
여름이 되자 말했다.
“장마만 지나면 됩니다.”
장마가 지나자 말했다.
“전봇대가 아직 산을 못 넘었습니다.”
가을에는 전봇대가 고갯길 아래까지 왔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보러 갔다.
검은 나무기둥들이 길가에 누워 있었다. 너무 곧고 길어서 나무라기보다 잘라 놓은 밤처럼 보였다.
박만식이 물었다.
“저걸 세우면 정말 밤이 밝아집니까?”
기사가 말했다.
“스위치만 누르면 낮처럼 됩니다.”
만식의 어머니는 혀를 찼다.
“낮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들이 밤까지 밝히겠구먼.”
아이들은 전기를 기다렸다.
어른들은 전기세를 걱정했다.
노인들은 불빛이 너무 밝으면 조상들이 들어올 길을 잃는다고 했다.
젊은 사람들은 조상도 새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준서는 어느 쪽 말도 믿지 않았다.
그는 전기가 들어오면 장부를 밤에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 생각했다.
전쟁 뒤 그는 망월리의 호적과 토지 기록을 다시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공식 직책은 크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름이 사라졌거나 땅의 경계가 달라졌거나 죽은 사람이 다시 세금 명부에 올라오면 먼저 그를 찾아왔다.
준서는 낮에는 면사무소에 있었고, 밤에는 검은 돌 있는 집에서 기록을 고쳤다.
박만식은 그런 준서를 보며 말했다.
“당신은 종이를 원망하면서 평생 종이만 붙들고 사는구먼.”
준서가 대답했다.
“칼에 베였다고 칼을 다 버릴 수는 없지요.”
“칼 말고 숟가락으로도 먹고살 수 있소.”
부엌에서 숟가락 하나가 떨렸다.
만식이 웃었다.
“보시오. 숟가락도 내 편이오.”
준서는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부터 붓 대신 숟가락을 더 오래 들고 밥을 먹었다.
그 무렵, 두 가족은 더 이상 강씨 집과 박씨 집으로 나뉘어 살지 않았다.
방은 나뉘어 있었지만 아이들은 서로의 방에서 잤고, 쌀독은 따로 있었지만 어느 집 밥인지 모르게 섞일 때가 많았다.
박만식의 큰아들 박성호는 강준서의 조카딸 강미란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
두 아이는 나이가 같았고, 함께 자랐으며, 형제처럼 싸웠다.
그러나 열일곱이 되자 사람들은 둘을 전처럼 보지 않았다.
성호가 우물에서 미란의 물동이를 들어 주면 여자들이 수군거렸다.
미란이 성호의 찢어진 셔츠를 꿰매 주면 남자들이 헛기침을 했다.
두 아이는 사람들의 눈 때문에 오히려 서로를 피하기 시작했다.
만식의 아내는 말했다.
“어릴 때 같이 목욕하던 애들인데 뭘 그러우.”
준서의 며느리는 대꾸했다.
“그래서 더 문제지요.”
만식은 물었다.
“뭐가 문제요?”
두 여자는 동시에 말했다.
“당신은 몰라도 됩니다.”
부엌 숟가락들이 한꺼번에 떨렸다.
만식은 말했다.
“이 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제일 시끄럽게 들키는구먼.”
성호는 기계를 좋아했다.
전쟁 때 부서진 라디오를 주워 와 안을 뜯어 보았고, 미군 트럭에서 떨어진 나사와 철사를 모았다. 그는 고장 난 물건을 고치는 데는 재주가 있었지만, 고치고 난 뒤 나사가 늘 두세 개 남았다.
“왜 남지?”
만식이 물으면 성호는 말했다.
“원래 필요 없던 겁니다.”
“만든 사람은 왜 넣었을까?”
“겁이 많아서요.”
성호가 고친 라디오는 소리가 났다.
다만 방송보다 잡음이 더 컸고, 비 오는 날에는 일본 노래와 미군 방송과 설교가 한꺼번에 들렸다.
어느 밤에는 아무도 다이얼을 돌리지 않았는데 라디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준호야, 밥 먹어라.”
준서는 방에서 뛰어나왔다.
“방금 뭐라고 했니?”
성호가 말했다.
“저도 들었어요.”
라디오는 다시 잡음만 냈다.
준서는 밤새 다이얼 앞에 앉아 있었다.
같은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성호가 말했다.
“전파가 겹친 것 같습니다.”
준서는 물었다.
“어디 전파가?”
“모르죠.”
“모르면 왜 설명하니?”
“설명 안 하면 더 무서워하실까 봐요.”
준서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틀렸다고도 할 수 없었다.
강미란은 글을 잘 썼다.
어릴 때부터 이름보를 읽고 자랐고, 죽은 사람과 사라진 사람과 돌아온 사람의 이름이 한 천 위에 함께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학교에서는 역사를 연도와 사건으로 배웠다.
미란은 교과서 여백에 사람 이름을 적었다.
전쟁이 일어난 해 옆에는 피난길에서 사라진 아이들의 이름을,
해방된 해 옆에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 정부가 세워진 해 옆에는 어느 쪽에도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다.
교사가 책을 보고 말했다.
“왜 교과서에 낙서를 했니?”
미란은 대답했다.
“사람이 빠져 있어서요.”
“역사에는 모든 사람을 넣을 수 없다.”
“그럼 빠진 사람은 어디에 들어갑니까?”
교사는 말했다.
“집에서나 기억해라.”
미란은 교과서를 덮었다.
“집도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날 학교에서 돌아온 미란은 이름보를 펼쳤다.
천은 여러 번 덧대어져 원래 모양을 알 수 없었다. 오래된 실은 바랬고, 전쟁 뒤에 붙인 천은 아직 색이 진했다.
윤서진의 이름 옆 빈칸은 그대로였다.
강준호의 이름 아래에는 젖은 편지가 꿰매져 있었다.
형,
나는 아직 돌아가는 중이다.
미란은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그녀는 준서에게 물었다.
“작은할아버지는 정말 살아 계세요?”
준서는 말했다.
“모른다.”
“돌아오는 중이라고 했잖아요.”
“편지가 그렇게 말했다.”
“그럼 믿어요?”
준서는 이름보를 접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기다리는 건요?”
“그 둘 사이 어디쯤 있겠지.”
미란은 그 말을 공책에 적었다.
준서가 물었다.
“왜 적니?”
“나중에 할아버지가 다르게 말할 수도 있으니까요.”
준서는 웃지 않았다.
하지만 화내지도 않았다.
전봇대가 망월리에 세워진 것은 미란이 열여덟이 되던 겨울이었다.
산을 넘는 동안 전봇대 하나가 굴러 떨어져 논두렁에 박혔다.
기사들은 끌어올리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그 전봇대만 비스듬히 선 채 사용하기로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절하는 전봇대라고 불렀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날, 집집마다 전구가 달렸다.
검은 돌 있는 집에는 부엌과 안방, 사랑채에 하나씩 설치되었다.
전선은 천장을 따라 검은 덩굴처럼 이어졌다.
만식의 어머니는 전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집 안에 뱀이 기어 다니는 것 같구먼.”
성호가 말했다.
“전기는 뱀이 아닙니다.”
“물면 죽는다며.”
“잘못 만지면요.”
“그럼 뱀보다 더 나쁘지. 뱀은 밟아야 문다.”
전기 기사는 스위치를 설명했다.
“이걸 위로 올리면 켜지고, 아래로 내리면 꺼집니다.”
만식이 여러 번 눌러 보았다.
“안 켜지는데?”
“아직 전기가 안 왔습니다.”
“그럼 지금은 왜 달았소?”
“내일 쓰려고요.”
만식의 어머니가 말했다.
“밥도 내일 먹으려고 오늘 상 차려 놓진 않는데.”
기사는 설명을 포기했다.
전기가 들어오는 날, 마을 사람들은 해가 지기 전부터 집 안에 모였다.
면사무소에서 정확히 저녁 일곱 시에 전원을 넣는다고 했다.
시계가 있는 집이 드물어 사람들은 각자 다른 시간에 일곱 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박만식은 해가 완전히 지면 일곱 시라고 했다.
강준서는 라디오 시보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만식의 어머니는 배고프면 일곱 시라고 했다.
결국 모두 저녁을 먹은 뒤 기다렸다.
전구 아래에는 밥상이 놓였다.
강씨와 박씨 가족뿐 아니라 이웃도 모였다.
아이들은 스위치 가까이에 서려고 다투었다.
성호가 전기 기사에게 배웠다는 이유로 스위치를 맡았다.
미란이 말했다.
“네가 만든 것도 아닌데 왜 네가 켜?”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올리는 거 하나잖아.”
“잘못 올리면 감전될 수 있어.”
만식이 물었다.
“정말이냐?”
성호는 잠시 망설였다.
숟가락이 떨렸다.
미란이 웃었다.
“역시.”
성호는 얼굴을 붉혔다.
그 순간 라디오에서 시보가 울렸다.
성호가 스위치를 올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숨을 내쉬었다.
만식의 어머니가 말했다.
“낮이 산을 못 넘었나 보구먼.”
몇 초 뒤 전구가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부엌이 환하게 밝아졌다.
사람들은 동시에 소리를 냈다.
아이들은 박수를 쳤고, 여자들은 눈을 가렸으며, 남자들은 괜히 전구 아래를 살폈다.
부엌 벽의 그을음,
천장의 거미줄,
찬장 아래 쌓인 먼지,
항아리의 금,
사람들의 주름이 모두 갑자기 드러났다.
만식이 말했다.
“이렇게 더러웠나?”
아내가 대꾸했다.
“어두울 때도 더러웠어요.”
사람들은 웃었다.
준서는 검은 돌을 보았다.
밝은 전구 아래에서 돌의 금은 전보다 더 선명했다.
세월 동안 생긴 균열이 나뭇가지처럼 퍼져 있었다.
그러나 돌 위에서 자란 두 갈래 식물은 보이지 않았다.
꽃이 피었던 자리도 사라졌다.
준서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디 갔지?”
성호가 말했다.
“빛이 너무 세서 시든 것 아닐까요?”
만식의 어머니는 전구를 노려보았다.
“밝다고 다 살리는 건 아니지.”
그때 미란이 벽을 보았다.
“저기 이상해요.”
사람들의 그림자가 부엌 벽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전구 하나 아래 여러 사람이 모여 있어 그림자들은 서로 겹쳤다.
하지만 수가 맞지 않았다.
방 안에는 열세 명이 있었다.
벽에는 열두 개의 그림자만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 그림자를 찾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손을 흔들었고,
어른들은 몸을 좌우로 움직였다.
모두 그림자가 있었다.
준서만 없었다.
그는 전구 아래에 서 있었다.
몸은 분명 바닥에 있었지만 벽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누군가 말했다.
“강 선생 그림자가 없네.”
준서는 벽을 바라보았다.
전쟁 뒤 면사무소 거울에서 얼굴이 사라졌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는 기록이 이름을 지울 때마다 반사가 사라졌다.
이번에는 아무도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전기가 들어온 것뿐이었다.
성호가 전구를 껐다.
부엌은 어두워졌다.
등잔을 켰다.
등잔불 아래에서는 준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전구를 다시 켜자 사라졌다.
사람들은 여러 번 반복했다.
전구 아래에서는 없고,
등잔 아래에서는 있었다.
만식이 말했다.
“당신 그림자가 전기세를 아끼려나 보오.”
아무도 크게 웃지 않았다.
준서는 웃었다.
자기가 먼저 웃지 않으면 모두 더 무서워할 것 같았다.
“새 불빛이 나를 싫어하는 모양입니다.”
숟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그는 진심이었다.
그날 밤 사람들은 돌아갔지만 준서는 잠들지 않았다.
그는 전구와 등잔을 번갈아 켰다.
전기 빛 아래에서는 그림자가 없었다.
등잔불 아래에서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
촛불 아래에서는 두 개로 갈라졌다.
달빛 아래에서는 그림자가 문턱을 넘어 마당까지 나갔다.
빛마다 다른 준서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밝은 빛만 그를 남기지 않았다.
미란이 부엌으로 나왔다.
“안 주무세요?”
“너도 안 자는구나.”
“할아버지 그림자 보고 싶어서요.”
준서는 전구를 켰다.
그림자는 사라졌다.
미란은 벽 가까이 갔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준서의 그림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만졌다.
벽은 차가웠다.
“무서워요?”
준서가 물었다.
“조금요.”
“내가 없어질까 봐?”
미란은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가 이미 절반쯤 사라져 있었던 것 같아서요.”
준서는 그녀를 보았다.
미란은 말했다.
“항상 기록하고, 기다리고, 다른 사람 이름을 남겼잖아요. 그런데 할아버지 이야기는 이름보에 별로 없어요.”
“살아 있는 사람은 아직 안 쓰는 거다.”
“다른 살아 있는 사람도 있잖아요.”
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숟가락 하나가 떨렸다.
미란이 말했다.
“할아버지는 자기 이야기를 쓰면 자기 편을 드는 것 같아서 싫어하죠?”
준서는 전구를 껐다.
등잔불 아래 그의 그림자가 돌아왔다.
“자기 이야기는 자기가 제일 많이 틀린다.”
“남이 쓰면 안 틀려요?”
“더 크게 틀릴 수도 있지.”
“그럼 둘 다 쓰면 되잖아요.”
준서는 그 말을 기억해 두었다.
전기가 들어온 뒤 망월리는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라디오가 늘었고,
재봉틀이 들어왔으며,
밤에 공부하는 아이가 생겼다.
국밥집은 늦게까지 장사했고, 마을 청년들은 전구 아래서 화투를 쳤다.
사람들은 어둠이 줄어들면 두려움도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밤이 밝아지자 사람들은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서로의 가난,
집의 균열,
얼굴의 피로,
밥그릇 크기의 차이,
누가 어느 집에 늦게 들어가는지까지 보였다.
소문은 전기보다 빨리 퍼졌다.
특히 박성호와 강미란에 관한 소문이 그랬다.
두 사람은 전기 기술을 배우기 위해 함께 읍내에 다녔다.
성호는 수리 기술을 배우고 싶었고, 미란은 야간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
같은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어느 날 비가 많이 와 마지막 버스가 끊겼다.
두 사람은 읍내 여관 처마 밑에서 밤을 새웠다.
방에 들어가지 않았고, 서로 손도 잡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에는 다음 날 아침 이미 두 사람이 함께 도망갔다 돌아왔다는 말이 돌았다.
만식은 성호를 불렀다.
“무슨 일이 있었냐?”
“버스가 끊겼어요.”
숟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같이 있었냐?”
“네.”
“둘만?”
“처마 밑에 개 한 마리도 있었습니다.”
숟가락이 떨리지 않았다.
만식은 한숨을 쉬었다.
“개 이름은 뭐였냐?”
“몰라요.”
“이름도 모르는 개를 증인으로 세울 순 없구나.”
준서는 미란에게 물었다.
“왜 집에 연락하지 않았니?”
“전화가 없잖아요.”
“전보라도—”
“한밤중에 누가 전보를 보내요?”
준서는 말문이 막혔다.
전기가 들어왔어도 전화는 아직 없었다.
새 시대는 늘 필요한 것보다 보여 주기 좋은 것을 먼저 가져왔다.
마을 어른들은 두 사람을 혼인시키자고 했다.
소문을 잠재우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이유였다.
성호는 반대하지 않았다.
미란은 반대했다.
“소문 때문에 결혼하면 소문이 우리보다 오래 살아요.”
준서가 말했다.
“서로 싫은 건 아니지 않니?”
“싫지 않다고 결혼해야 합니까?”
부엌 숟가락은 조용했다.
미란은 진심이었다.
성호는 옆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란이 그를 보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성호는 말했다.
“나는… 네가 원하면.”
숟가락이 떨렸다.
미란의 얼굴이 굳었다.
“네가 원하는 건?”
성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만식이 끼어들었다.
“남자가 저렇게 말하면 하겠다는 뜻이지.”
미란은 말했다.
“왜 본인도 모르는 뜻을 아버님이 아세요?”
만식은 입을 다물었다.
만식의 어머니가 웃었다.
“남자는 자기 마음을 아버지한테 맡겨 놓고 사나 보지.”
성호가 얼굴을 붉혔다.
그날 밤 그는 미란을 대문 밖으로 불렀다.
전봇대 아래였다.
전구 빛이 두 사람 얼굴을 희게 비췄다.
성호의 그림자는 뚜렷했다.
미란의 그림자는 길고 가늘었다.
“나는 너와 결혼하고 싶어.”
성호가 말했다.
숟가락은 멀리 부엌에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왜 아까 말 안 했어?”
“사람들 앞에서 말하면 네가 거절하기 어려울까 봐.”
“지금은 쉬워?”
“여긴 우리 둘뿐이잖아.”
미란은 전봇대를 올려다보았다.
“전봇대도 있어.”
“저건 말 못 해.”
비스듬히 선 전봇대에서 낮은 소리가 났다.
전선이 바람에 울린 것이었다.
미란이 말했다.
“확실해?”
성호는 전봇대를 보았다.
“저건 바람이야.”
“돌도 처음에는 다 바람이라고 했대.”
성호는 한동안 침묵했다.
“나는 네가 글을 쓰는 게 좋다.”
“글을 쓰는 여자는 팔자가 세다는데.”
“우리 집에는 이미 팔자 센 사람들이 많아.”
“내가 읍내로 가고 싶으면?”
“나도 갈 수 있어.”
“네가 가기 싫으면?”
성호는 생각했다.
“그럼 네가 먼저 가고, 내가 나중에 갈게.”
미란은 그 대답을 마음에 들어 했다.
“나중이 언제인데?”
“전기 기사 자격을 따면.”
“못 따면?”
“라디오를 고치면서 따라갈게.”
“나사가 남잖아.”
“이번에는 다 쓰겠다.”
두 사람은 웃었다.
미란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첫째, 자기 이름을 바꾸지 않을 것.
둘째, 이름보를 계속 맡을 것.
셋째, 아이가 생겨도 글쓰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
넷째, 성호가 죽은 뒤 혼자 찾아와 잔소리하지 않을 것.
성호가 물었다.
“죽은 뒤에는 만나도 됩니까?”
“일 년에 한 번 정도.”
“장도윤처럼?”
“그분은 대화라도 잘했대.”
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살아 있을 때 연습하겠습니다.”
혼례는 다음 봄에 치르기로 했다.
그러나 겨울이 오기 전, 망월리에 도로 건설 계획이 내려왔다.
새 도로가 산을 뚫고 읍내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다.
면사무소는 발전이라고 했다.
젊은이들은 환영했다.
쌀과 물건을 쉽게 나를 수 있고, 버스가 들어오며, 병원에 빨리 갈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도로가 검은 돌 있는 집을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부엌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측량 기사들이 붉은 말뚝을 박았다.
한 말뚝이 검은 돌 바로 옆에 꽂혔다.
강준서는 뽑아 버렸다.
다음 날 기사가 다시 박았다.
준서는 다시 뽑았다.
사흘째에는 말뚝 두 개가 생겼다.
만식이 말했다.
“저쪽도 고집이 세구먼.”
준서는 말했다.
“말뚝은 고집이 없습니다. 박는 사람이 있지.”
면사무소에서 회의가 열렸다.
도로를 우회하면 비용이 늘어난다고 했다.
집을 철거하면 보상금을 준다고 했다.
새 집을 지을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오래된 집을 없애는 대가로는 충분하다고 관리들은 말했다.
준서는 물었다.
“오래된 집을 없애는 대가는 누가 정합니까?”
“평수와 자재로 계산합니다.”
“기억은요?”
“보상 항목에 없습니다.”
“검은 돌은?”
“돌은 폐기물입니다.”
회의실의 전등이 깜빡였다.
준서의 그림자가 벽에서 사라졌다.
관리들은 이제 그 현상에 익숙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말했다.
“전기 문제입니다.”
성호가 전선을 보았다.
“전기에는 문제 없습니다.”
미란이 말했다.
“그럼 말에 문제가 있겠네요.”
도로 건설을 지지하는 마을 사람들도 있었다.
국밥집 박씨의 아들은 말했다.
“집 한 채 때문에 마을 전체가 뒤처질 수는 없습니다.”
만식이 물었다.
“그 집에 우리도 사는데 어느 박씨를 말하는 거요?”
사람들은 웃지 않았다.
도로 문제는 집안 문제보다 컸다.
누군가는 검은 돌이 마을의 역사라고 했고,
누군가는 돌 때문에 젊은이들이 떠난다고 했다.
누군가는 조상과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산 사람의 길을 죽은 사람의 부엌이 막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미란은 두 의견을 모두 이름보에 적었다.
준서가 물었다.
“왜 저 말까지 적니?”
“우리와 반대라고 기록에서 빼면, 옛날과 뭐가 달라요?”
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란은 도로를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을 헐지 않고 길을 낼 방법을 찾자고 했다.
성호는 측량도를 들여다보았다.
“도로를 약간 동쪽으로 돌리면 됩니다.”
기사가 말했다.
“그러면 비탈을 더 깎아야 해요.”
“가능합니까?”
“가능하지만 돈이 듭니다.”
미란이 물었다.
“집을 철거하고 두 가족을 옮기는 돈도 들잖아요.”
“그건 다른 예산입니다.”
“돈은 같은 나라 돈 아닌가요?”
기사는 한숨을 쉬었다.
“예산은 서로 모르는 척해야 굴러갑니다.”
숟가락이 없는 회의실이었지만 모두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도로 공사는 예정대로 시작되었다.
집 철거 날짜가 정해졌다.
준서는 밤마다 검은 돌 앞에 앉았다.
“이번에는 내가 지켜야 하나?”
돌은 대답하지 않았다.
“집을 살게 한 사람이 주인이라 했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집을 옮기면 되나?”
숟가락 하나가 떨렸다.
준서는 놀랐다.
그는 집을 옮길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믿음 속에는 집이 지금 자리에 있어야만 집이라는 생각이 숨어 있었다.
피난민 마을에서 서진은 말했었다.
돌도 없으면 우리가 서 있는 데가 집이다.
준서는 그 말을 오랫동안 기억했으면서도 끝까지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다음 날 그는 가족을 불렀다.
“부엌을 옮기자.”
박만식이 말했다.
“부엌을 어떻게 옮겨?”
“집을 해체해 다른 곳에 다시 짓는다.”
“돌은?”
“같이 옮긴다.”
성호가 검은 돌을 두드려 보았다.
“예전에 움직이려다 곡괭이가 부러졌잖아요.”
미란이 말했다.
“그때는 땔감으로 뜯으려 했고, 이번에는 집으로 옮기려는 거잖아.”
만식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도 이유는 구분하겠지.”
철거 날이 왔다.
마을 사람들은 집 앞에 모였다.
일꾼들이 지붕 기와를 내리고, 문짝과 기둥에 번호를 적었다.
미란은 번호 옆에 그 집에서 있었던 일을 짧게 기록했다.
첫 번째 기둥에는:
강무석이 떠나던 날 붙잡지 못한 기둥.
두 번째 문짝에는:
죽은 장도윤이 넘지 못했던 문턱.
부엌 선반에는:
윤서진이 멸치 냄새로 나라를 숨긴 곳.
마루판에는:
두 가족이 서로 먼저 들어왔다고 말하지 않은 자리.
일꾼들은 웃었다.
“이걸 다 적으면 다시 맞추기 어렵습니다.”
미란이 말했다.
“안 적으면 더 잘못 맞춥니다.”
전기가 들어온 뒤 사라졌던 준서의 그림자는 집이 해체되는 동안 다시 나타났다.
처음에는 발밑에만 있었고,
기둥이 하나씩 내려갈수록 길어졌다.
지붕이 완전히 내려오자 그의 그림자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크기가 되었다.
미란이 말했다.
“할아버지 그림자가 돌아왔어요.”
준서는 그것을 보았다.
“집이 없어져서 돌아온 건지도 모르지.”
“집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옮기는 거예요.”
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돌을 옮기는 순간이 왔다.
여섯 명이 쇠막대기를 넣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열 명이 달라붙었다.
돌은 꼼짝하지 않았다.
성호가 말했다.
“밥부터 먹읍시다.”
사람들은 웃었다.
그러나 만식의 어머니는 진지하게 말했다.
“맞다. 돌도 밥 먹고 가야지.”
미란은 금이 간 흰 그릇에 밥을 담아 돌 위에 놓았다.
다른 그릇에는 물을 담았다.
준서는 이름보를 펼쳐 지금까지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읽었다.
강씨와 박씨,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
이름을 말하지 않고 밥만 먹고 간 사람들의 점까지 모두 읽었다.
마지막에 말했다.
“우리는 집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데려가려 합니다.”
부엌의 모든 숟가락이 한 번 울렸다.
돌은 가볍게 들렸다.
너무 갑자기 움직여 여섯 사람이 뒤로 넘어졌다.
만식이 바닥에서 말했다.
“돌이 일부러 버틴 것 같구먼.”
성호가 말했다.
“밥을 기다렸겠지요.”
만식의 어머니가 대꾸했다.
“사람이나 돌이나 빈속에는 고집이 세다.”
검은 돌은 소달구지에 실렸다.
집의 기둥과 문짝과 기와도 뒤따랐다.
새 집터는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감나무 밭이었다.
그곳에는 오래전 전쟁에서 반쯤 탄 감나무가 서 있었다.
준서가 처음 돌아왔을 때 길을 알려 준 나무였다.
집을 다시 짓는 동안 두 가족은 천막에서 살았다.
성호와 미란의 혼례도 미뤄졌다.
미란은 말했다.
“집이 없는데 어디서 혼인해?”
성호는 천막을 가리켰다.
“여기서도 할 수 있지.”
“죽은 사람도 방은 있었어.”
“그건 장도윤 이야기고.”
“당신도 일 년에 한 번만 올 생각이면 천막에서 해도 돼.”
성호는 집 공사를 더 열심히 했다.
새 집은 옛집과 똑같지 않았다.
기둥 몇 개는 썩어 새 나무로 바꾸었다.
방의 위치도 달라졌다.
박씨 가족의 방과 강씨 가족의 방 사이에는 함께 쓰는 큰 부엌을 만들었다.
부엌 중앙에 검은 돌을 놓았다.
전선은 다시 천장을 따라 이어졌다.
전구를 달기 전 미란이 말했다.
“이번에는 등잔도 남겨 둬요.”
성호가 물었다.
“전기가 있는데 왜?”
“가장 밝은 빛에서 안 보이는 사람도 있으니까.”
새집에 처음 전기가 켜진 밤, 사람들은 다시 그림자를 세었다.
이번에는 방 안에 열네 명이 있었고, 그림자도 열네 개였다.
그러나 벽 가장자리에는 작은 그림자 하나가 더 있었다.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크기였다.
사람들이 움직여도 그대로 서 있었다.
준서는 그것을 보았다.
“누구 그림자지?”
미란은 이름보를 펼쳤다.
그 순간 꿰매 두었던 준호의 편지 아래에 새 문장이 나타났다.
나는 거의 다 왔다.
준서는 숨을 멈췄다.
성호가 물었다.
“또 준호 할아버지 글씨예요?”
준서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췄다.
글씨는 준호의 것 같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사람의 글씨도 늙는지 알 수 없었다.
미란이 말했다.
“날짜를 적을까요?”
준서는 말했다.
“아니.”
“왜요?”
“거의 다 왔다는 말은 언제나 오늘이어야 하니까.”
작은 그림자는 그날 밤 내내 벽에 남아 있었다.
새벽이 되자 사라졌다.
대신 대문 밖에 낡은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흙이 묻어 있었고, 밑창은 여러 번 기운 흔적이 있었다.
준서는 구두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왼쪽 구두 안쪽에 ‘강준호’라는 이름이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만식이 물었다.
“돌아온 건가?”
준서는 대문 밖 길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구두만 있었다.
미란이 말했다.
“사람 없이 구두만 돌아왔네요.”
준서는 구두를 집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대문 안쪽에 놓았다.
한쪽은 집 안을 향하고,
다른 한쪽은 길을 향하게 했다.
“왜 이렇게 놔요?”
성호가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가는 중인지 아직 모르니까.”
그해 봄, 성호와 미란은 새집 부엌에서 혼인했다.
신랑과 신부는 검은 돌 위에 함께 절했다.
사람들은 오래된 집에서 가져온 기둥과 새 기둥 사이에 앉았다.
강씨 집 간판과 박씨 집 간판도 함께 걸려 있었다.
혼례가 끝난 뒤 미란은 새 이름보를 펼쳤다.
첫 줄에 자기 이름을 썼다.
강미란.
그 아래에 박성호를 적었다.
두 이름 사이에는 선을 긋지 않았다.
대신 작은 문을 수놓았다.
문은 열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두 집안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미란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문은 하나가 되는 상징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사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남겨 둔 틈이었다.
잔치가 끝날 무렵 만식의 어머니가 전구 아래에서 졸기 시작했다.
준서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노인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전기가 밝긴 밝구먼.”
“좋으십니까?”
“좋지.”
잠시 뒤 덧붙였다.
“다만 사람은 밝은 데서도 잘못 본다.”
준서는 벽을 바라보았다.
모든 그림자가 제자리에 있었다.
준호의 것일지도 모르는 작은 그림자는 없었다.
그러나 대문에는 여전히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그날 밤, 새 도로로 첫 버스가 지나갔다.
집이 있던 옛자리 위를 바퀴가 굴렀다.
사람들은 길가에 나가 손을 흔들었다.
버스 안 승객들도 손을 흔들었다.
아무도 그 아래에 한때 부엌이 있었고,
검은 돌 위에 밥그릇이 놓였으며,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같은 식탁에 앉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버스가 멀어진 뒤 준서는 옛집 자리로 갔다.
아스팔트는 검고 매끈했다.
그는 손바닥을 길 위에 올렸다.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자동차가 지나간 열인지,
아직 땅속에 남은 아궁이의 열인지 알 수 없었다.
준서는 길 한가운데 서서 말했다.
“우리는 옮겼다.”
멀리 새집 부엌에서 숟가락 하나가 울렸다.
준서는 다시 말했다.
“버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새 도로의 전봇대들이 밤마다 불을 밝혔다.
마을은 더 이상 지도에서 찾기 어려운 곳이 아니었다.
버스표에도 망월리라는 이름이 찍혔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 기록에 그 이름이 돌아왔다.
그러나 버스 안내원은 발음을 자주 틀렸다.
“망월리 내리실 분!”
어떤 날에는 망원리라 했고,
어떤 날에는 만월리라 했으며,
한 번은 망우리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매번 큰 소리로 고쳐 주었다.
“망월리요!”
이름은 돌아왔지만,
사람들이 계속 불러 주지 않으면 다시 다른 것이 될 수 있었다.
전기가 들어온 뒤 첫해 겨울,
준서는 이름보에 자기 이름을 쓰기로 했다.
그는 미란을 불렀다.
“네가 써라.”
“살아 있는 사람은 안 쓴다면서요.”
“생각이 바뀌었다.”
“뭐라고 쓸까요?”
준서는 한참 생각했다.
“강준서는 기록이 사람을 지울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록을 버리지 못했다.”
미란이 적었다.
“그다음은요?”
“집을 되찾으려 돌아왔지만,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고 망설였다.”
미란이 적었다.
“또요?”
“동생을 오래 기다렸지만, 기다림을 믿음이라고 부를 때도 있었고 두려움이라고 부를 때도 있었다.”
미란은 붓을 멈췄다.
“좋은 말만 안 쓰시네요.”
“나쁜 말만도 아니지.”
“빈칸 남겨요?”
“많이.”
미란은 준서 이름 아래 넓은 빈 공간을 남겼다.
그 아래에 자기 문장을 하나 덧붙였다.
강준서는 가장 밝은 빛에서 그림자를 잃었고,
집을 옮긴 뒤에야 다시 얻었다.
준서가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미란은 말했다.
“저도 아직 몰라요.”
“모르는데 왜 썼니?”
“나중에 뜻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준서는 웃었다.
그날 밤 전구가 꺼졌다.
마을 전체가 정전되었다.
사람들은 등잔과 촛불을 켰다.
검은 돌 있는 집 벽에 수많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지금 집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다.
조상들의 그림자,
피난길에 밥을 먹고 간 사람들의 그림자,
이름 없이 점으로 남은 사람들의 그림자,
박씨 집과 강씨 집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의 그림자가 겹쳐 있었다.
그 가운데 늙은 남자 하나의 그림자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왼쪽 다리를 조금 절고 있었다.
준서는 숨을 삼켰다.
“준호야?”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준서는 문을 열었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구두 한 켤레만 대문 안쪽으로 완전히 돌아서 있었다.
두 짝 모두 집을 향하고 있었다.
정전이 끝나 전구가 다시 켜졌다.
벽의 수많은 그림자는 사라졌다.
그러나 대문 앞 구두는 그대로였다.
준서는 그날 처음으로 구두를 부엌 안으로 들였다.
밥상 끝에 놓고, 그 앞에 밥 한 그릇을 차렸다.
“이제 돌아온 겁니까?”
미란이 물었다.
준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럼 왜 안에 들여요?”
준서는 말했다.
“돌아올 자리를 먼저 들이는 거다.”
금이 간 흰 그릇이 따뜻해졌다.
전구 아래에서도 준서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검은 돌의 가장 깊은 금 사이에서,
오래전 사라졌던 두 갈래 잎이 다시 돋아났다.
이번에는 잎이 세 갈래였다.
아무도 세 번째 잎이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았다.
집은 언제나 사람보다 먼저,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의 자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9장: 쓰이기 전에 도착한 편지

강미란과 박성호가 망월리를 떠난 것은 첫아이가 태어난 다음 해였다.
사람들은 젊은 부부가 도시로 가는 이유를 이해했다.
성호는 전기 기술자로 더 큰 일을 배울 수 있었고, 미란은 야간학교를 마친 뒤 신문사에서 글을 쓰고 싶어 했다. 망월리에도 전기가 있었고 버스도 다녔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가능성이 산 너머에 있다고 믿었다.
산은 늘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가능성은 이상하게도 매년 더 멀리 갔다.
떠나기 전날, 미란은 이름보를 펼쳐 자기 이름 옆의 작은 문을 만졌다.
문은 여전히 열린 채 수놓아져 있었다.
박성호가 짐을 묶으며 말했다.
“닫아야 하는 것 아니야?”
“뭘?”
“문. 우리가 떠나니까.”
미란은 고개를 저었다.
“떠나기 위해 열어 둔 거야.”
“그럼 돌아올 때는?”
“다른 문으로 오면 되지.”
성호는 잠시 생각했다.
“집에 문이 그렇게 많았나?”
“당신이 아직 못 찾은 거겠지.”
부엌 숟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성호는 결혼 뒤 거짓말이 줄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란 앞에서는 거짓말을 포기하는 것이 빨랐다.
두 사람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박도현이었다.
도현이 태어났을 때, 강준서는 아이를 안고 한참 얼굴을 보았다.
“누구를 닮았어요?”
미란이 물었다.
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의 왼쪽 눈매는 준호와 닮았다.
적어도 준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닮았다는 말은 아이에게 축복이 될 수도 있었고, 짐이 될 수도 있었다.
미란이 말했다.
“작은할아버지 닮았죠?”
준서는 놀라 그녀를 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할아버지가 그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요.”
“내 얼굴이 어떤데?”
“돌아온 사람을 본 것 같기도 하고, 더 오래 기다리게 된 사람 같기도 해요.”
준서는 아이를 미란에게 돌려주었다.
“글 쓰는 사람은 남의 얼굴을 너무 오래 본다.”
미란은 웃었다.
“기록하는 사람도요.”
도시로 떠나는 날, 준서는 도현에게 작은 놋숟가락을 하나 주었다.
장도윤의 숟가락은 아니었다.
그 숟가락은 여전히 집에 남아 있었다.
준서가 준 것은 전쟁 뒤 새로 만든 평범한 숟가락이었다.
미란이 물었다.
“왜 이걸 주세요?”
“밥 잘 먹으라고.”
“그 말뿐이에요?”
“숟가락이 다 무슨 상징이어야 하니?”
그 순간 부엌 숟가락들이 가볍게 떨렸다.
미란이 웃었다.
“상징 맞네요.”
준서는 한숨을 쉬었다.
“이 집에서는 물건도 말을 너무 많이 배웠다.”
도시는 망월리와 다른 방식으로 시끄러웠다.
망월리에서는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 비 오는 소리, 사람 부르는 소리가 각각 따로 들렸다.
도시에서는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왔다.
버스 경적,
공장 기계,
확성기 광고,
아이 울음,
라디오 음악,
공사장 망치 소리가 서로를 밀치며 골목을 지나갔다.
미란과 성호는 공장 근처 작은 단칸방을 얻었다.
방 하나에 부엌이 붙어 있었고, 창문을 열면 옆집 창문과 거의 닿았다.
성호는 말했다.
“망월리 사랑채보다 작네.”
미란이 대꾸했다.
“사랑채에는 우리 둘만 살지 않았잖아.”
“그래도 이 방은 누우면 벽에 발이 닿아.”
“발이 길어진 거겠지.”
“결혼하고 길어졌나?”
“생활이 사람을 늘이기도 하잖아.”
그들은 웃었다.
도현은 방이 좁다는 것을 몰랐다.
아이에게는 기어갈 바닥과 잡고 일어설 벽만 있으면 세상이 충분히 넓었다.
성호는 전기 공사장에서 일했다.
새 아파트와 공장, 상가에 전선을 연결했다.
그가 만든 빛은 도시 곳곳에서 켜졌지만, 정작 자기 집 전구는 자주 깜빡였다.
미란이 말했다.
“남의 집 불은 잘 켜면서 우리 집은 왜 이래?”
성호가 천장을 보았다.
“전선이 오래됐어.”
“당신이 고치면 되잖아.”
“집주인 허락이 필요해.”
“감전될 때도 허락받아야 해?”
성호는 다음 날 몰래 고쳤다.
고치고 나니 나사 하나가 남았다.
미란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건?”
성호는 말했다.
“집주인 것.”
숟가락은 망월리에 있었지만, 전구가 두 번 깜빡였다.
성호는 남은 나사를 다시 넣었다.
미란은 낮에는 도현을 돌보고, 밤에는 글을 썼다.
처음에는 신문사에 투고했다.
공장 여공들의 이야기,
피난민 마을에서 도시로 온 사람들,
철거되는 판잣집,
고향 이름으로 불리는 도시 골목에 대해 썼다.
원고는 자주 돌아왔다.
어떤 편집자는 글이 너무 슬프다고 했다.
다른 편집자는 너무 사적이라고 했다.
한 사람은 여성 독자가 좋아할 내용이 아니라고 했다.
미란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거절 편지 뒷면에 새 글을 썼다.
성호가 물었다.
“화 안 나?”
“나요.”
“그런데 왜 조용해?”
“종이가 더 오래 화낼 수 있으니까.”
첫 글이 신문에 실린 것은 도시로 온 지 이 년째 되던 겨울이었다.
제목은 ‘이름 없는 골목의 저녁’이었다.
피난민들이 고향 이름을 도시 골목에 붙이고 사는 이야기였다.
신문에는 미란의 이름 대신 ‘박성호 씨 부인’이라고 적혔다.
미란은 신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성호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말해 볼까?”
“누구한테?”
“신문사에.”
“뭐라고?”
“내 이름을 빼 달라고.”
미란은 웃지 않았다.
“당신 이름이 문제는 아니야.”
“그럼?”
“내 이름이 없는 게 문제지.”
성호는 신문을 접었다.
다음 날 그는 신문사에 전화했다.
전화가 있는 전기상회까지 가서 십 원을 내고 통화를 했다.
편집자는 관행이라고 말했다.
성호가 물었다.
“누구 관행입니까?”
“신문사 관행이지요.”
“신문사가 글도 썼습니까?”
편집자는 전화를 끊었다.
그 뒤 미란이 보낸 두 번째 글은 실리지 않았다.
성호는 자기가 일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미란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전구가 깜빡였다.
“당신도 내가 참았으면 실렸을 거라고 생각하잖아.”
미란이 말했다.
성호는 한동안 침묵했다.
“조금.”
“왜?”
“당신 글이 계속 실렸으면 좋으니까.”
“내 이름 없이?”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할 수도 있잖아.”
미란은 도현이 자는 쪽을 보았다.
“이름 없이 시작하면 나중에는 이름을 돌려 달라고 해야 해.”
“돌려 달라고 하면 되지.”
“돌려주는 사람이 자기가 준 줄 알아.”
성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 밤 전구가 세 번 깜빡인 뒤 꺼졌다.
성호는 의자를 놓고 올라가 전구를 돌렸다.
불은 다시 켜졌다.
“전선 문제가 아니었네.”
미란이 말했다.
“그럼?”
“집이 당신 편인가 봐.”
성호는 천장을 보았다.
“망월리도 아닌데?”
“집이 따라온다고 했잖아.”
그날 이후 미란은 글 끝에 반드시 자기 이름을 크게 썼다.
강미란.
결혼한 뒤에도 바꾸지 않은 이름이었다.
어떤 편집자는 그것이 본명인지 물었다.
미란은 말했다.
“제가 대답하는 이름입니다.”
세 번째 글은 작은 여성 잡지에 실렸다.
원고료는 적었지만 이름은 정확했다.
미란은 첫 원고료로 도현의 신발과 성호의 새 공구함을 샀다.
성호가 물었다.
“당신 것은?”
“내 이름 샀잖아.”
“이름이 원래 당신 거였는데.”
“그래서 싸게 산 거야.”
망월리에는 전화가 들어왔다.
마을 전체에 한 대였다.
국밥집 옆 구멍가게에 검은 전화기가 놓였다.
전화가 오면 가게 주인이 골목으로 뛰어나가 사람을 불렀다.
“강준서 선생 전화요!”
준서가 밭에 있으면 아이 하나가 달려갔다.
아이가 늦게 가면 전화는 끊겼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전화가 오기 전에 전화가 올 사람 근처에 머무는 습관이 생겼다.
어떤 날에는 아무 전화도 오지 않았지만, 모두 국밥집 주위를 서성였다.
만식이 말했다.
“전화가 사람을 부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전화를 기다리러 가는구먼.”
미란은 한 달에 한 번 집으로 전화했다.
통화는 늘 짧았다.
“도착했니?”
준서가 물었다.
“벌써 이 년 전에 도착했어요.”
“그래도 전화는 이제 왔잖아.”
“도현은 잘 커?”
“지금 옆에 있어요.”
“말하니?”
“할아버지라고 해 봐.”
도현은 수화기를 붙잡고 숨만 쉬었다.
준서는 도시의 아이 숨소리를 들었다.
“나를 아는 것 같구나.”
미란이 웃었다.
“숨만 쉬었는데요?”
“모르는 사람한테는 더 크게 쉰다.”
전화가 끊긴 뒤 준서는 수화기에서 한동안 귀를 떼지 않았다.
그 안에서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아주 멀리 누군가 걷는 소리 같기도 했다.
전화가 들어온 지 석 달째 되던 날, 구멍가게 전화가 울렸다.
주인은 수화기를 들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잡음만 들렸다.
그러다 늙은 남자 목소리가 말했다.
“망월리입니까?”
“그렇소.”
“검은 돌 있는 집을 찾습니다.”
주인은 놀랐다.
“누구시오?”
“강준호입니다.”
수화기가 손에서 떨어질 뻔했다.
주인은 골목으로 뛰어나갔다.
“강준서 선생!”
준서는 그때 감나무 아래에서 장작을 패고 있었다.
그는 도끼를 놓고 뛰었다.
구멍가게에 도착했을 때 전화는 끊겨 있었다.
“정말 준호라고 했소?”
“그렇다니까요.”
“목소리는?”
“늙었어요.”
“어디서 전화했답니까?”
“못 물었어요.”
“왜요?”
“당신 부르러 갔지.”
“다시 전화 온다고 했소?”
주인은 기억하려 했다.
“아무 말 안 했어요.”
준서는 하루 종일 전화 옆에 앉았다.
저녁이 되어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오지 않았다.
사흘째, 전화가 울렸다.
준서가 직접 받았다.
“여보세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준호야?”
잡음 사이로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준서는 숨을 멈췄다.
도현이었다.
미란이 도시에서 전화한 것이었다.
“도현아?”
아이는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신발 할아버지 언제 와?”
준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란이 수화기를 받았다.
“죄송해요. 이름보 이야기하다가 구두를 보여 줬더니 도현이 계속 물어봐요.”
“괜찮다.”
“목소리가 왜 그래요?”
준서는 전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감기다.”
구멍가게 선반의 숟가락 하나가 떨렸다.
가게 주인이 준서를 보았다.
“여기도 저러네.”
준서는 전화를 끊고 집으로 돌아갔다.
준호의 구두는 여전히 부엌 한쪽에 있었다.
두 짝 모두 집 안을 향해 있었다.
그날 밤 구두 안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전에는 없던 종이였다.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면
편지를 보내겠다.
준서는 종이를 이름보에 꿰매지 않았다.
이번에는 기다렸다.
편지가 오기 전에 날짜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일주일 뒤, 우편배달부가 집으로 왔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가방에는 편지가 가득했다.
“강준서 씨?”
“예.”
“편지가 하나 있습니다.”
봉투에는 발신인 주소가 없었다.
받는 사람 주소에는 ‘망월리 검은 돌 있는 집 강준서’라고만 적혀 있었다.
우편배달부는 말했다.
“주소가 이래도 왔네요.”
준서가 물었다.
“어디서 보낸 겁니까?”
“소인은 부산으로 찍혀 있습니다.”
봉투 안에는 짧은 편지가 있었다.
형,
전화했는데 늦었다.
목소리를 듣기 전에 끊었다.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설명하려면
전쟁보다 긴 이야기가 필요하다.
나는 살아 있다.
하지만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준서는 마지막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살아 있다.
그 말은 분명했다.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그 말은 더 무거웠다.
만식이 편지를 읽었다.
“왜 못 돌아온다는 거요?”
준서는 말했다.
“안 온다는 게 아니라, 돌아갈 수 있는지 모른다는 거요.”
“살아 있으면 오면 되지.”
만식의 어머니는 이제 거의 아흔이 되어 방 안에서 말했다.
“살아 있다고 길이 다 열리는 건 아니다.”
준서는 부산으로 답장을 썼다.
준호야,
집은 옮겼다.
옛집 자리는 도로가 되었다.
검은 돌은 새집 부엌에 있다.
네 구두도 있다.
사람들은 많이 달라졌고,
집은 그보다 조금 덜 달라졌다.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돌아오려는 사람이 문 앞까지 오면
집이 먼저 정할 것이다.
준서는 봉투에 부산 소인 외에는 주소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답장을 보낼 곳이 없었다.
그는 우체국에 갔다.
직원은 말했다.
“주소가 없으면 못 보냅니다.”
“편지는 왔습니다.”
“오는 것과 보내는 건 다릅니다.”
“왜 다릅니까?”
“오는 편지는 이미 왔으니까요.”
준서는 그 논리를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럼 보관해 주십시오.”
“언제까지요?”
“주소를 알 때까지.”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우체국은 기다리는 곳이 아닙니다.”
준서는 말했다.
“편지는 원래 기다리는 것 아닙니까?”
직원은 편지를 받지 않았다.
준서는 집으로 돌아와 답장을 준호의 구두 안에 넣었다.
다음 날 종이는 사라졌다.
두 달 뒤, 두 번째 편지가 왔다.
형,
집이 옮겼다는 말을 읽고 오래 웃었다.
나는 집이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사람은 집을 두고 떠날 수 있지만
집은 사람을 두고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도 나를 기다리다 지쳤나 보다.
내 구두를 잘 보관해 줘.
발은 아직 내가 가지고 있다.
준서는 그 문장에서 오랜만에 동생의 웃음을 들었다.
그는 편지를 들고 마을 사람들에게 읽어 주지 않았다.
미란에게 먼저 알렸다.
전화로 준호가 살아 있다고 말했다.
미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말이에요?”
“그렇다.”
“어디 있어요?”
“부산 어딘가.”
“왜 안 와요?”
“설명하려면 전쟁보다 긴 이야기가 필요하대.”
미란은 수화기 너머에서 숨을 내쉬었다.
“그 이야기를 써 달라고 하세요.”
“왜?”
“사람이 못 돌아오는 이유도 이름보에 있어야 하니까요.”
준서는 말했다.
“본인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쓰지 말아야죠.”
“너는 늘 쓰려고 하는 줄 알았다.”
미란은 대답했다.
“기억하는 것과 공개하는 건 다르잖아요.”
준서는 그 말을 공책에 적었다.
이번에는 미란이 물었다.
“왜 적으세요?”
“네가 나중에 다르게 말할 수도 있으니까.”
도시에서 도현은 ‘신발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는 준호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가족 중 가장 자주 그를 그렸다.
도현이 그린 준호는 늘 큰 구두를 신고 있었다.
얼굴은 매번 달랐다.
어떤 그림에서는 수염이 길었고,
어떤 그림에서는 아이처럼 젊었으며,
한 번은 얼굴 없이 모자만 있었다.
미란이 물었다.
“왜 얼굴을 안 그렸어?”
도현은 말했다.
“아직 안 왔으니까.”
“오면 얼굴이 생겨?”
“내가 보면.”
그 대답은 미란을 오래 생각하게 했다.
도현은 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망월리 이야기를 좋아했다.
친구들은 검은 돌과 떨리는 숟가락을 믿지 않았다.
한 아이가 말했다.
“그건 옛날 사람들이 지어낸 거야.”
도현은 화를 내지 않았다.
“너희 집에는 아무것도 기억하는 게 없어?”
“사진 있어.”
“사진은 누가 찍어야 하잖아.”
“그럼?”
“우리 집 돌은 알아서 기억해.”
선생이 그 말을 듣고 도현에게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도현은 집에 돌아와 미란에게 물었다.
“사실인데 사람들이 안 믿으면 거짓말이에요?”
미란은 말했다.
“사실이라고 다 증명되는 건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해?”
“믿게 하려고 너무 많이 말하지 마.”
“왜?”
“설명하다 보면 사실보다 설명이 커질 수 있어.”
“그럼 아무 말도 안 해?”
미란은 이름보를 꺼냈다.
“남길 수는 있지.”
도현은 자기 이름을 찾아보았다.
없었다.
“왜 나는 없어요?”
“아직 네가 쓸 일이 없어서.”
“태어난 것도 일이잖아.”
미란은 웃었다.
그날 도현의 이름을 이름보에 수놓았다.
박도현.
옆에는 이렇게 적었다.
신발만 먼저 돌아온 사람을
얼굴 없이 기억한 아이.
도현은 문장을 읽었다.
“나중에 얼굴 보면 고쳐요?”
“네가 고쳐.”
“틀리면?”
“빈칸 남겨 줄게.”
도현은 자기 이름 옆에 큰 빈칸을 요구했다.
“얼마나 크게?”
“내가 늙을 때까지.”
미란은 천을 한 폭 더 붙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시에 온 지 오 년째, 미란은 작은 신문사의 상근 기자가 되었다.
여성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글을 쓰고 싶다고 했지만, 처음에는 주로 살림과 교육에 관한 기사를 맡았다.
그녀는 살림 기사 안에 공장 여성들의 노동 시간을 넣었고,
교육 기사 안에 철거민 아이들의 통학 거리를 넣었다.
편집장은 말했다.
“왜 모든 글에 사회 문제가 들어갑니까?”
미란은 대답했다.
“사회면에 못 쓰게 하시니까요.”
편집장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 웃었다.
“당돌하군.”
“원고료에 포함됩니까?”
그 뒤 미란은 사회면 기사를 하나씩 맡게 되었다.
성호는 전기 기술자 자격을 땄다.
자격증을 받은 날 그는 미란에게 보여 주었다.
“이제 따라왔네.”
“어디를?”
“당신이 먼저 간 곳.”
미란은 자격증을 보았다.
“나사는 다 썼어?”
성호는 주머니에서 나사 하나를 꺼냈다.
“기념으로 남겼어.”
전구가 깜빡였다.
성호는 나사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건 정말 필요 없는 거야.”
전구가 다시 깜빡였다.
그는 결국 공구함에 넣었다.
망월리에서 준서는 준호의 편지를 기다렸다.
편지는 규칙 없이 왔다.
한 달 뒤 오기도 했고,
반년 동안 오지 않기도 했다.
어떤 편지는 쓰인 날짜보다 소인이 빨랐다.
예를 들어 봉투에는 4월 3일 소인이 찍혀 있는데, 편지 첫 줄에는 4월 8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준서는 처음에는 준호가 날짜를 잘못 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한 편지는 도착한 날로부터 사흘 뒤에 쓰였다고 되어 있었다.
준서는 우체국에 갔다.
“어떻게 편지가 쓰이기 전에 도착합니까?”
직원은 봉투를 보았다.
“날짜를 잘못 썼겠지요.”
“계속 잘못 씁니까?”
“연세가 있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소인은요?”
“기계가 찍습니다.”
“기계는 안 틀립니까?”
직원은 말했다.
“기계도 사람이 만듭니다.”
“그럼 둘 다 틀릴 수 있겠군요.”
“그렇지요.”
“그런데 왜 사람만 틀렸다고 합니까?”
직원은 준서를 내보냈다.
가장 이상한 편지는 여름에 왔다.
형,
다음 겨울에는 꼭 가겠다.
그때는 도현이 열 살이겠구나.
아이에게 내 얼굴을 먼저 정하지 말라고 해라.
나는 많은 얼굴로 살았다.
어떤 곳에서는 군인이었고,
어떤 곳에서는 부역자였고,
어떤 곳에서는 피해자였고,
어떤 곳에서는 가해자였다.
어떤 이름으로는 살아 있었고,
다른 이름으로는 이미 죽었다.
망월리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준서는 편지를 읽고 날짜를 보았다.
다음 해 1월 17일.
아직 여섯 달 뒤였다.
그는 편지를 숨겼다.
미란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준호가 다음 겨울 온다는 말을 먼저 알려 모두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기다림이 약속으로 변하면,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 사람이 두 번 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이름보에 문장이 나타났다.
겨울에 한 사람이 돌아온다.
박만식이 그것을 보았다.
“준호인가?”
준서는 말했다.
“모른다.”
숟가락이 떨렸다.
“알고 있구먼.”
준서는 편지를 보여 주었다.
만식은 날짜를 보았다.
“아직 안 쓴 편지네.”
“이미 왔습니다.”
“그럼 미래에서 온 건가?”
“우체국에서는 날짜를 틀렸다고 합니다.”
만식의 어머니가 방에서 말했다.
“우체국은 늘 늦게 오면서 미래는 못 믿는구먼.”
준서는 편지를 이름보에 꿰매려 했다.
그러나 바늘이 천을 통과하지 않았다.
편지는 아직 쓰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봉투째 검은 돌 아래에 놓았다.
겨울이 올 때까지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집은 비밀을 잘 지키지 않았다.
부엌의 모든 그릇이 매일 한 자리씩 옆으로 움직였다.
밥상 끝에 한 사람 앉을 공간이 생겼다.
준호의 구두는 밤마다 조금씩 대문 쪽으로 갔다가 아침이면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
감나무에는 철도 아닌데 작은 흰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누군가 온다고 짐작했다.
“누가 옵니까?”
아이들이 물었다.
준서는 말했다.
“겨울이.”
숟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겨울도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도현이 아홉 살이 되었다.
그해 가을, 그는 학교에서 가족사진을 가져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도현은 집에 있는 사진을 모두 꺼냈다.
성호와 미란의 혼례 사진,
도현의 돌 사진,
망월리 새집 앞에서 찍은 사진,
강준서와 박만식이 함께 선 사진.
마지막 사진 뒤에는 오래된 가족사진이 한 장 붙어 있었다.
열한 명이 찍었는데 열두 명이 나온 사진.
강이문이 버리고 온 딸 강연옥이 가족들 사이에 서 있었다.
도현은 사진을 학교에 가져갔다.
선생은 인원을 세었다.
“열두 명이네.”
도현이 말했다.
“찍을 때는 열한 명이었대요.”
아이들이 웃었다.
선생은 사진이 겹쳐 찍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다시 세었다.
열세 명이었다.
원래 없던 늙은 남자 하나가 가장 뒤에 서 있었다.
왼쪽 다리를 조금 기울이고 있었다.
도현은 그 사람이 신발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았다.
본 적 없었지만 알았다.
그는 사진을 들고 미란에게 갔다.
“엄마, 할아버지 왔어.”
미란은 사진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
늙은 남자는 선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에는 작은 종이 가방을 들고 있었고, 발에는 망월리 부엌에 놓인 것과 같은 낡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사진 속 구두와 집에 있는 구두가 어떻게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지 미란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 집안에서는 물건이 사람보다 먼저 돌아오는 일이 이미 있었다.
사진 뒤에 글씨가 나타나 있었다.
도현에게.
내 얼굴을 네가 먼저 봐도 좋다.
다만 이것만이 내 얼굴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도현은 물었다.
“진짜 준호 할아버지예요?”
미란은 대답했다.
“그분이 맞다고 생각해.”
“살아 있어?”
“그렇다고 들었어.”
“언제 와?”
미란은 사진을 만졌다.
“모르겠다.”
도현이 말했다.
“겨울에 올 것 같아.”
“왜?”
“사진에서 두꺼운 옷 입었잖아.”
미란은 그날 밤 망월리에 전화했다.
구멍가게 주인이 준서를 불러왔다.
“할아버지, 사진에 사람이 한 명 더 생겼어요.”
준서는 눈을 감았다.
“왼쪽 다리를 절고 있니?”
“네.”
“구두를 신었고?”
“네.”
“도현이가 먼저 봤니?”
“네.”
준서는 한참 말이 없었다.
미란이 물었다.
“뭔가 알고 계세요?”
준서는 미래 날짜가 적힌 편지 이야기를 했다.
미란은 화를 냈다.
“왜 지금까지 말 안 했어요?”
“확실하지 않았다.”
“혼자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요?”
“사람들까지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평생 기다렸어요.”
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숟가락은 전화기에서 멀리 있었지만, 수화기 안에서 금속 울리는 소리가 났다.
미란이 말했다.
“이번에는 기다릴지 말지 우리가 정하게 해 주세요.”
준서는 고개를 숙였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게 했다.
“미안하다.”
미란은 그 말을 듣고 화를 조금 내려놓았다.
“겨울에 내려갈게요.”
“신문 일은?”
“휴가를 내야죠.”
“성호는?”
“따라올 거예요.”
옆에서 듣던 성호가 말했다.
“나도 의견 물어봐.”
미란은 수화기를 막고 물었다.
“갈 거지?”
“가야지.”
“봐요. 물어봤어요.”
성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그해 겨울, 눈이 일찍 왔다.
망월리 지붕과 새 도로, 전봇대 위에 흰 눈이 쌓였다.
미란과 성호, 도현은 도시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도현은 가는 내내 오래된 가족사진을 품에 안고 있었다.
버스 안내원이 말했다.
“망원리 내리실 분!”
도현이 큰 소리로 외쳤다.
“망월리예요!”
승객들이 웃었다.
안내원이 말했다.
“어린 선생님이구먼.”
도현은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이름은 틀리면 안 돼요.”
버스가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 준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많이 늙었다.
등이 굽었고, 머리는 거의 희었다.
그러나 도현이 달려오자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신발 할아버지는요?”
도현이 첫마디로 물었다.
준서는 대문 쪽을 보았다.
“아직이다.”
집 안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준호의 자리,
준서의 자리,
미란과 성호와 도현의 자리,
박만식 가족의 자리,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금 간 그릇,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빈 그릇이 놓였다.
사람들은 저녁까지 기다렸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밤이 되자 눈이 더 많이 내렸다.
준서는 전구를 껐다.
등잔을 켰다.
벽에 많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러나 왼쪽 다리를 저는 늙은 남자의 그림자는 없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도현이 졸기 시작했다.
미란이 말했다.
“자러 가자.”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 오면 얼굴 봐야 해.”
“내일 볼 수도 있잖아.”
“편지는 오늘이라고 했어요?”
준서는 말했다.
“겨울이라고만 했다.”
도현은 눈을 비볐다.
“겨울은 길잖아요.”
만식의 어머니는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
백 살이 가까운 나이였다.
그녀는 이불 속에서 말했다.
“오는 사람보다 기다리는 사람이 날짜를 더 좁게 잡지.”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새벽 한 시가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성호는 아궁이에 장작을 더 넣었다.
미란은 준서를 보았다.
“편지를 보여 주세요.”
준서는 검은 돌 아래에서 봉투를 꺼냈다.
편지에는 여전히 다음 해 1월 17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날은 아직 열흘 뒤였다.
미란이 말했다.
“우리가 너무 일찍 왔네요.”
준서는 고개를 저었다.
“편지가 너무 일찍 왔지.”
도현은 편지를 보았다.
“그럼 열흘 기다리면 되잖아요.”
어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시의 일,
학교,
생계가 있었다.
열흘은 짧지 않았다.
도현에게는 짧았다.
그는 방학 중이었다.
“저 혼자 있을게요.”
미란이 말했다.
“안 돼.”
“왜?”
“아홉 살이잖아.”
“신발 할아버지는 몇 살 때 혼자 있었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미란은 신문사에 전보를 보냈다.
가족의 장기 미귀환자 귀환 가능성으로 열흘간 복귀 연기.
편집장은 답장을 보냈다.
장기 미귀환자가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 바람.
미란은 다시 보냈다.
설명하려면 전쟁보다 긴 기사 필요.
편집장은 하루 뒤 답했다.
그럼 써 오시오.
미란은 그 전보를 이름보 옆에 놓았다.
가족은 열흘을 기다렸다.
첫날에는 모두 대문 소리에 놀랐다.
둘째 날에는 버스가 설 때마다 나갔다.
셋째 날에는 낯선 사람이 지나가면 얼굴을 살폈다.
넷째 날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기대가 줄었다.
다섯째 날에는 준서가 준호의 밥을 절반만 담았다.
도현이 다시 가득 채웠다.
여섯째 날에는 눈이 녹기 시작했다.
일곱째 날에는 준호의 구두 한 짝이 밖을 향했다.
여덟째 날에는 다시 안으로 돌아왔다.
아홉째 날 밤, 전화가 울렸다.
구멍가게 주인이 눈길을 뛰어왔다.
“부산에서 전화요!”
준서와 미란, 도현이 함께 달렸다.
성호는 만식의 어머니를 부축하고 뒤따랐다.
준서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잡음이 들렸다.
그 뒤 늙은 남자의 숨소리가 들렸다.
“형.”
준서는 벽을 붙잡았다.
“준호야.”
“내일 갑니다.”
“어디서 오니?”
“부산역입니다.”
“왜 지금까지—”
준서는 말을 멈췄다.
전쟁보다 긴 이야기를 전화 한 통에 묻고 싶지 않았다.
“몇 시에 도착하니?”
“기차가 제시간이면 오후 두 시.”
만식의 어머니가 옆에서 말했다.
“기차는 제시간에 안 와.”
준호가 수화기 너머에서 웃었다.
그 웃음은 늙었지만 준서가 기억하던 것과 같았다.
“누구 목소리입니까?”
“이 집을 네 대신 오래 산 사람.”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만식의 어머니가 수화기를 빼앗았다.
“직접 와서 해.”
준호는 다시 웃었다.
전화는 곧 끊겼다.
준서는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서 있었다.
이번에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기쁨보다 두려움이 먼저 왔다.
내일 돌아오는 사람이 자신이 기다린 동생과 다르면 어쩌나.
동생이 형을 원망하면 어쩌나.
자기가 준호를 너무 오래 기다린 나머지, 실제 사람보다 기다림을 더 사랑하게 되었으면 어쩌나.
도현이 물었다.
“왜 안 웃어요?”
준서는 말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면 웃는 법부터 기억해야 한다.”
다음 날, 가족은 정오부터 버스 정류장에 나갔다.
준호는 기차를 타고 큰 역까지 온 뒤, 버스로 갈아탄다고 했다.
첫 버스가 왔다.
준호는 없었다.
두 번째 버스에도 없었다.
오후 두 시가 지났다.
세 시가 되었다.
만식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네 시가 되자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도현은 가족사진을 품에 넣었다.
“안 올 수도 있어요?”
미란이 대답하려 했으나 준서가 먼저 말했다.
“올 수도 있고, 못 올 수도 있다.”
도현이 물었다.
“그럼 왜 기다려요?”
준서는 말했다.
“오늘은 그 둘 중 하나가 정해질 날이니까.”
해가 지기 직전, 마지막 버스가 고개를 넘어왔다.
버스는 절하는 전봇대 앞에서 한 번 멈췄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내렸다.
장바구니를 든 여자,
군복 외투를 입은 남자,
기침하는 노인,
아이를 업은 젊은 부부.
마지막으로 늙은 남자 하나가 계단을 내려왔다.
왼쪽 다리를 절었다.
그는 오래된 구두 대신 검은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한 손에는 작은 종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
사진 속 모습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얼굴에는 도현이 그린 여러 얼굴이 조금씩 섞여 있었다.
군인의 얼굴,
도망자의 얼굴,
늙은 아이의 얼굴,
오래 살아남은 사람의 얼굴.
준서는 움직이지 못했다.
준호도 움직이지 않았다.
두 형제는 눈 속에서 서로를 보았다.
수십 년 동안 하고 싶었던 말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어느 것도 먼저 나오지 못했다.
미란은 숟가락이 있었다면 모두 부러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도현이 앞으로 나갔다.
“신발 할아버지예요?”
준호는 아이를 보았다.
“그런 이름으로 불렸니?”
“네.”
“신발은 잘 있었고?”
“먼저 왔어요.”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다 길을 잘 찾았구나.”
도현은 사진을 꺼냈다.
“이게 할아버지 얼굴이에요?”
준호는 사진 속 늙은 남자를 보았다.
오래 바라본 뒤 말했다.
“그날의 얼굴은 저랬나 보다.”
“오늘은요?”
준호는 웃었다.
“네가 보고 있는 게 오늘 얼굴이지.”
그제야 준서가 한 걸음 나왔다.
“준호야.”
준호는 형을 보았다.
“형.”
두 사람은 안지 않았다.
악수도 하지 않았다.
준서는 동생의 종이 가방을 받아 들었다.
가방은 매우 가벼웠다.
“이것뿐이냐?”
“가져올 수 있는 건.”
준서는 가방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집으로 걸었다.
준호는 새 도로를 보았다.
“집이 여기 있었지?”
“그랬다.”
“정말 옮겼구나.”
“믿지 않았니?”
“집은 사람보다 고집이 센 줄 알았다.”
준서는 말했다.
“밥 먹이면 움직이더라.”
준호가 웃었다.
그 웃음에 형제 사이의 세월이 잠시 줄어들었다.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준호가 멈췄다.
집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검은 돌 위에서 밥 냄새가 났다.
준서가 문을 열었다.
“들어와.”
준호는 문턱을 넘지 못했다.
발이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준서는 오래전 자기가 돌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집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던 순간.
준호가 말했다.
“집이 나를 싫어하나?”
준서는 대답했다.
“아직 누군지 묻는 거다.”
준호는 대문 앞에 섰다.
“강준호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말했다.
“강준서의 동생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
“윤서진의 아들이다.”
숟가락 하나가 부엌에서 떨렸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산에서 사람들을 두고 도망친 적도 있고,
사람을 살린 적도 있고,
살리려다 죽게 한 적도 있다.
전쟁 뒤에는 다른 이름으로 살았다.
내가 피해자인 척한 날도 있었고,
가해자가 아니라고 스스로 속인 날도 있었다.
형에게 돌아가고 싶었지만,
형이 나를 용서하면 내가 나를 용서해야 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늦었다.”
집 안의 모든 숟가락이 울렸다.
거짓말 때문이 아니었다.
너무 오래 삼킨 말이 한꺼번에 나와서였다.
준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는 돌아온 사람이 아니라,
돌아오려고 오래 실패한 사람이다.”
그 순간 문턱 아래에서 흰 눈이 피어올랐다.
하늘에서는 내리지 않았다.
눈은 땅에서 올라와 준호의 구두를 덮었다.
검은 돌의 세 갈래 잎이 부엌 바닥에서 흔들렸다.
준호는 한 발을 안으로 들였다.
집은 밀어내지 않았다.
두 번째 발도 들어왔다.
도현이 물었다.
“이제 집이 알아봤어요?”
준호는 말했다.
“모르겠다.”
준서가 대답했다.
“들여보냈으면 충분하다.”
밥상 끝에는 준호의 자리가 있었다.
그 앞에 그의 오래된 구두가 놓여 있었다.
준호는 구두를 만졌다.
“이건 내가 전쟁 끝나고 신던 거다.”
“어떻게 먼저 왔니?”
준서가 물었다.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 역에서 잃어버렸어.”
“언제?”
“삼십 년쯤 전.”
도현이 말했다.
“구두가 삼십 년 동안 걸어왔나 봐요.”
만식의 어머니가 말했다.
“사람보다 빨리 왔으니 뛰어왔겠지.”
사람들이 웃었다.
준호도 웃었다.
그러다 금이 간 흰 그릇을 보았다.
“어머니가 놓던 그릇이구나.”
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까지 네 밥을 차렸다.”
준호의 웃음이 사라졌다.
“내가 너무 늦었네.”
준서는 말했다.
“어머니는 네 기다림을 빚으로 만들지 않았다.”
“형은?”
준서는 동생을 보았다.
그 질문은 수십 년 동안 자기 안에 있었다.
“나는 가끔 빚으로 만들었다.”
숟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네가 돌아오면 내가 기다린 세월이 옳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준호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옳아졌나?”
준서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다.”
“그럼 헛기다렸네.”
“아니.”
준서는 밥그릇을 동생 앞으로 밀었다.
“기다림이 옳아지는 게 아니라, 사람이 돌아오는 거다.”
준호는 밥을 한 숟갈 먹었다.
아주 천천히 씹었다.
“집 밥이다.”
만식이 말했다.
“이 집에서 산 지 오래된 내가 했소.”
준호는 그를 보았다.
“고맙습니다.”
“직접 와서 하라더니 정말 왔구먼.”
만식의 어머니가 말했다.
준호가 그녀에게 절했다.
“제 대신 집을 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인은 말했다.
“네 대신 산 건 아니다. 우리도 살 데가 필요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럼 됐다.”
식사가 끝난 뒤 준호는 종이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편지 묶음과 작은 나무함 하나가 있었다.
나무함 안에는 여러 이름으로 된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강준호,
김정수,
박영길,
최만복.
어떤 것은 사진이 젊었고,
어떤 것은 중년이었으며,
어떤 것은 이름만 있고 사진이 없었다.
도현이 물었다.
“어느 게 진짜 이름이에요?”
준호는 대답했다.
“전부 나였고, 전부 내가 아니었다.”
미란은 이름보를 가져왔다.
“어떤 이름을 적을까요?”
준호는 천을 오래 보았다.
자기 이름 아래 편지와 문장들이 겹쳐 있었다.
나는 아직 돌아가는 중이다.
나는 거의 다 왔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 길어 사람이 먼저 늙을 수도 있다.
그는 말했다.
“다 적어라.”
“다요?”
“사람이 살아남으려고 쓴 이름도 그 사람 삶이다.”
미란은 강준호 아래에 다른 이름들을 적었다.
한 이름마다 작은 괄호를 만들었다.
괄호 안은 비워 두었다.
도현이 물었다.
“왜 비었어요?”
미란은 말했다.
“그 이름으로 무슨 사람이었는지 본인이 말하고 싶을 때 쓰려고.”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하면 나한테 유리하게 말할 거다.”
도현이 말했다.
“그럼 다른 사람도 쓰면 되잖아요.”
준서가 미란을 보았다.
“네가 가르쳤구나.”
미란은 말했다.
“저 아이가 원래 그렇게 생각해요.”
준호는 웃었다.
“우리 집은 빈칸이 많구나.”
준서가 대답했다.
“사람보다 문장이 먼저 끝나지 않게 하려고.”
그날 밤, 이름보에는 새 문장이 나타났다.
돌아온 사람은
떠났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기다린 사람도
기다리기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재회는
옛날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처음 만나는 일이다.
도현이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럼 할아버지 둘은 오늘 처음 만난 거예요?”
준호가 말했다.
“그런 셈이지.”
준서는 동생을 보았다.
“반갑다.”
준호도 형을 보았다.
“나도.”
두 사람은 그제야 악수했다.
손은 늙고 거칠었다.
한 사람은 기록을 붙들며 살아남았고,
다른 사람은 이름을 바꾸며 살아남았다.
서로의 손바닥에는 상대가 알지 못한 세월이 새겨져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도현은 준호 옆에서 잠들었다.
준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나를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지?”
미란이 말했다.
“얼굴을 모르고 오래 기억해서요.”
“그게 가능하니?”
“우리 집에서는 얼굴을 알고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으니까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벽을 보았다.
전기 불빛 아래 모든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준서,
준호,
미란,
성호,
도현,
박만식과 가족들.
그러나 한 그림자가 밥상 끝에 더 앉아 있었다.
윤서진의 그림자였다.
그녀는 두 아들의 밥그릇을 번갈아 보며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준호가 말했다.
“어머니가 화나신 것 같다.”
준서가 그림자를 보았다.
“왜?”
“밥이 적다고.”
만식의 어머니가 이불 속에서 말했다.
“죽은 사람도 자식 먹는 건 적어 보이지.”
미란은 밥솥에서 밥을 더 퍼 두 형제 그릇에 나누어 담았다.
윤서진의 그림자는 그제야 희미해졌다.
사라지기 전, 그녀는 밥상 끝의 빈 그릇 하나를 가리켰다.
도현이 잠에서 깨 물었다.
“저건 누구 자리예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집 안에는 이미 돌아올 사람이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검은 돌의 세 번째 잎 옆에서 네 번째 작은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보았다.
“누가 더 옵니까?”
준서는 고개를 저었다.
“집은 늘 우리보다 먼저 자리를 만든다.”
아침이 되자 우편배달부가 찾아왔다.
그는 준호를 보고 놀랐다.
“편지 주인이 오셨군요.”
준호가 말했다.
“내 편지를 배달한 분입니까?”
“몇 통은요.”
“어떻게 쓰기 전에 배달했습니까?”
우편배달부는 잠시 생각했다.
“우편은 날짜보다 주소를 더 믿습니다.”
준서가 물었다.
“주소도 ‘검은 돌 있는 집’뿐이었는데.”
“그래도 집이 있었잖습니까.”
우편배달부는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런데 편지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받는 사람은 강준호였다.
주소는 망월리 검은 돌 있는 집.
발신인은 윤서진.
준호의 손이 떨렸다.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우편배달부가 말했다.
“소인은 없습니다.”
봉투는 오래되어 누렇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풀은 아직 젖어 있었다.
준호는 편지를 열지 못했다.
준서가 물었다.
“읽을래?”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는 봉투를 금이 간 흰 그릇 아래에 놓았다.
“왜 안 읽어요?”
도현이 물었다.
준호는 말했다.
“도착한 편지도 사람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할아버지는 이미 왔잖아요.”
준호는 어머니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만졌다.
“몸만.”
검은 돌에서 낮은 울림이 났다.
이번에는 숟가락이 떨리지 않았다.
누구도 거짓말하지 않았다.
준호가 돌아온 날,
망월리의 우편함에는 빈 봉투 하나가 남아 있었다.
받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봉투 안쪽에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다음 편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읽을 것이다.
미란은 그 문장을 이름보에 옮기지 않았다.
그녀는 빈 봉투를 네 번째 싹 옆에 놓았다.
기억은 때때로 과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자리를 요구하며 보내는 편지일 수도 있었다.
제10장: 세상에 알려진 뒤 바뀐 기억

강준호가 돌아온 뒤 첫해에는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강미란은 기자였고, 집안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었지만 공책을 펼치지 않았다.
준호가 여러 이름으로 살았다는 사실도,
산에서 사람들을 살리고 버린 일도,
전쟁이 끝난 뒤 부산에서 삼십 년을 보낸 이유도 묻지 않았다.
그녀는 기다렸다.
강준서는 그 기다림을 조심성이라고 생각했다.
박성호는 아내가 질문을 참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걱정했다.
“아픈 데 있어?”
“왜?”
“당신이 사흘째 아무것도 안 물어봤어.”
“사람이 질문을 안 하면 아픈 거야?”
“당신은.”
미란은 남편을 노려보았다.
부엌의 숟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성호는 안도했다.
“다행이네.”
“뭐가?”
“정말 걱정해서 한 말이었어.”
강준호는 집 안에 들어왔지만 처음 몇 달 동안은 대문 가까운 방에서 잤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니었다.
안방도 비어 있었고 사랑채에도 자리가 있었지만, 그는 가장 바깥쪽 작은 방을 골랐다.
밤중에 일어나면 구두를 신고 마당을 걸었다.
어떤 날은 대문 밖까지 나갔다.
준서가 물었다.
“어디 가니?”
“아무 데도.”
숟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준호에게 아무 데도는 실제로 갈 수 있는 장소였다.
그는 새벽이면 돌아와 검은 돌 앞에 앉았다.
어머니 윤서진이 보낸 편지는 여전히 금이 간 흰 그릇 아래에 있었다.
봉투는 오래되었지만 풀은 마르지 않았다.
준호는 매일 그것을 만졌다.
열지는 않았다.
도현은 답답해했다.
“왜 안 읽어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편지 읽는 데 준비가 필요해요?”
“어떤 편지는 읽고 나면 읽기 전으로 못 돌아간다.”
도현은 그 말을 생각했다.
“책도 그래요?”
“좋은 책은 그렇겠지.”
“학교책은 아니네요.”
준호는 웃었다.
“학교책도 가끔은.”
도현은 당시 열 살이었다.
그는 신발 할아버지가 돌아오면 모든 이야기가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준호가 돌아오자 이야기는 더 많아졌다.
사람들이 준호를 찾아왔다.
옛 동료라고 말하는 사람,
전쟁 때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
그 때문에 가족을 잃었다고 하는 사람,
김정수라는 이름으로 그를 알았다는 사람,
박영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일했다는 사람이 차례로 왔다.
서로의 말은 맞지 않았다.
한 사람은 준호가 용감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비겁했다고 했다.
한 사람은 끝까지 남았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가장 먼저 도망쳤다고 했다.
한 사람은 아이들을 살렸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어른들을 두고 갔다고 했다.
도현이 준호에게 물었다.
“누가 맞아요?”
준호는 대답했다.
“사람마다 본 자리가 달랐겠지.”
“할아버지는 어디 있었어요?”
준호는 웃지 않았다.
“늘 내가 있어야 할 자리보다 조금 옆에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미란은 처음으로 공책을 꺼냈다.
준호가 보았다.
“쓰려고?”
“잊지 않으려고요.”
“누가 읽나?”
“아직은 저만요.”
숟가락은 조용했다.
미란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기사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준호의 이야기는 너무 길었고,
모순이 많았으며,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 이름도 있었다.
무엇보다 준호가 아직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한 사건을 이야기하다가 멈췄다.
다음 날에는 같은 사건을 다른 순서로 말했다.
일주일 뒤에는 처음 이야기에 없던 사람이 등장했다.
미란이 물었다.
“지난번에는 그 사람이 없었잖아요.”
준호는 말했다.
“그때는 생각나지 않았다.”
“정말요?”
부엌 숟가락 하나가 떨렸다.
준호는 한숨을 쉬었다.
“생각났는데 말하고 싶지 않았다.”
“왜요?”
“그 사람을 말하면 내가 한 일도 말해야 하니까.”
미란은 공책을 덮었다.
“그럼 오늘은 안 써도 돼요.”
준호가 물었다.
“기자들은 그런 것도 기다리나?”
“좋은 기자는요.”
“너는?”
미란은 잠시 생각했다.
“연습 중이에요.”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그는 조금씩 말했다.
전쟁이 끝난 뒤 준호가 부산으로 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후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상병 하나를 데리고 남쪽까지 내려갔다. 그 병사는 도중에 죽었고, 준호는 그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다.
죽은 병사의 이름은 김정수였다.
검문소에서 준호는 자기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어느 편에서도 안전하지 않았다.
그는 김정수의 이름을 말했다.
처음에는 하루만 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루가 한 달이 되었고,
한 달이 몇 년이 되었다.
김정수라는 이름으로 준호는 항구에서 짐을 날랐고,
전기선을 고쳤으며,
부서진 창고에서 잠을 잤다.
어느 날 김정수의 고향에서 편지가 왔다.
가족이 아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보낸 편지였다.
준호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편지는 계속 왔다.
어머니가 아프다는 편지,
동생이 결혼한다는 편지,
아버지가 죽었다는 편지.
준호는 김정수의 가족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돈을 조금씩 보냈다.
“왜 돈을 보냈어요?”
미란이 물었다.
“이름 값을 냈다.”
“이름도 빌릴 수 있어요?”
“훔쳤지.”
숟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준호는 그 말을 피하지 않았다.
몇 년 뒤 그는 김정수의 가족을 찾아갔다.
자기가 김정수의 전우였다고 말했다.
김정수는 전쟁 중 죽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준호의 손을 잡고 울었다.
“우리 정수가 마지막에 무슨 말을 했습니까?”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김정수는 마지막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만 짧게 쉬다 죽었다.
그러나 준호는 말했다.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부엌의 모든 숟가락이 크게 떨렸다.
준호는 이야기를 멈췄다.
그 일은 수십 년 전이었지만 숟가락은 이제야 거짓말을 들은 것처럼 울렸다.
도현이 물었다.
“왜 거짓말했어요?”
“어머니가 듣고 싶어 했으니까.”
“그래도 거짓말이잖아요.”
“그렇지.”
“잘못했어요?”
준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모르겠다.”
준서가 말했다.
“위로하려고 한 말일 수도 있다.”
미란이 물었다.
“위로는 사실이 아니어도 됩니까?”
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숟가락 하나가 떨렸다.
준호가 웃었다.
“우리 집은 나만 심문하는 게 아니구나.”
그날 밤 윤서진의 봉투가 조금 열렸다.
아무도 손대지 않았지만 가장자리 한쪽이 저절로 떨어졌다.
안에서는 종이 냄새가 아니라 갓 지은 밥 냄새가 났다.
준호는 봉투를 다시 눌러 닫았다.
도현이 말했다.
“편지가 읽히고 싶어 해요.”
준호는 대답했다.
“나도 읽고 싶다.”
“그럼 왜?”
“원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건 다르다.”
도현은 그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무엇이든 어렵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준호는 김정수 다음에 박영길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항구에서 이름을 아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박영길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준호가 스스로 만든 이름이었다.
그 이름으로 그는 작은 전파상을 운영했다.
고장 난 라디오를 고쳤고, 전쟁 뒤 버려진 부품으로 전축을 만들었다.
그는 기계에 재주가 없었다.
고칠 때마다 소리가 더 나빠졌다.
미란이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가게를 했어요?”
“손님들이 새것을 살 돈이 없었으니까.”
“고쳐지지 않았는데 돈을 받았어요?”
“전보다 조금 덜 고장 나게 했다.”
성호가 말했다.
“그것도 기술입니다.”
미란이 남편을 보았다.
“당신 나사가 왜 늘 남는지 알겠네.”
성호는 입을 다물었다.
박영길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준호는 결혼도 했다.
그의 아내는 오명희였다.
전쟁 때 가족을 잃은 여자였다.
두 사람은 서로 과거를 묻지 않기로 하고 함께 살았다.
아이도 하나 있었다.
딸이었다.
이름은 박하진.
미란의 붓이 멈췄다.
“딸이 있었어요?”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서가 일어났다.
“딸이 있다고?”
목소리가 너무 커서 전구가 흔들렸다.
“왜 지금 말하니?”
준호가 형을 보았다.
“지금 말하고 있잖아.”
“삼십 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편지에는—”
“어떻게 쓰나? 형, 나는 다른 이름으로 결혼했고 딸도 있다고?”
준서는 말을 잃었다.
미란이 물었다.
“지금 어디 있어요?”
“모른다.”
“왜요?”
준호는 오래 침묵했다.
오명희는 어느 날 준호의 과거 신분증들을 발견했다.
강준호,
김정수,
박영길.
그녀는 어느 이름이 남편인지 물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명희는 말했다.
“이름을 말 못 하는 사람하고는 살아도, 얼굴을 숨기는 사람하고는 못 산다.”
준호는 자기가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고 했다.
명희는 거울을 가져왔다.
거울 안에는 준호의 얼굴이 세 개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젊었고,
하나는 늙었으며,
하나는 아예 눈이 없었다.
명희는 딸을 데리고 떠났다.
준호는 찾지 않았다.
“왜 안 찾았어요?”
도현이 물었다.
준호는 말했다.
“내가 찾으면 더 도망갈 것 같았다.”
“그래도 아버지잖아요.”
“그때는 내가 누구 아버지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도현은 화가 났다.
그는 준호의 신발을 밀어 버렸다.
“그래서 그냥 안 갔어요?”
“그렇다.”
“나쁜 사람이네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어른들은 아이를 말리려 했다.
준호가 손을 들었다.
“맞다.”
도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요?”
“그 아이한테는.”
“지금도요?”
“아마.”
도현의 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찾아야죠.”
“어디 있는지 모른다.”
“신문에 내면 되잖아요.”
모두 미란을 보았다.
미란은 공책을 덮었다.
그 순간 그녀가 기록하는 이야기가 가족 안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처음 생겼다.
준호의 딸 박하진을 찾을 수 있다면,
글은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것만 아니라 돌아오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글이 나가면 준호가 숨겨 온 다른 이름과 일도 함께 드러날 수 있었다.
미란은 물었다.
“찾고 싶어요?”
준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숟가락이 떨렸다.
“네.”
그는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내가 찾을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미란이 말했다.
“찾는 것과 용서받는 건 달라요.”
“알고 있다.”
“하진 씨가 만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것도 안다.”
“과거가 신문에 나갈 수 있어요.”
준호는 검은 돌을 바라보았다.
“숨겨 둔다고 없어진 건 아니더라.”
미란은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 제목은 ‘여러 이름으로 살아남은 남자’였다.
편집장은 원고를 읽고 말했다.
“좋은 기사요.”
미란은 그 말이 불안했다.
편집장이 좋은 기사라고 할 때에는 대개 누군가의 불행이 잘 정리되었다는 뜻이었다.
“어떤 점이 좋습니까?”
“전쟁, 이념, 가족, 실종, 비밀 결혼. 독자들이 좋아할 요소가 다 있소.”
미란은 원고를 회수했다.
“왜 가져가요?”
“아직 안 됐습니다.”
“충분히 됐소.”
“사람이 아직 안 됐어요.”
편집장은 웃었다.
“기사는 사람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소.”
미란은 대답했다.
“그래서 기사가 사람을 망치기도 하죠.”
그녀는 원고를 다시 썼다.
영웅이라는 단어를 모두 지웠다.
배신자라는 단어도 지웠다.
비극적 운명이라는 표현도 지웠다.
그 대신 준호가 한 말을 그대로 남겼다.
나는 돌아온 사람이 아니라,
돌아오려고 오래 실패한 사람이다.
그녀는 김정수의 가족 이야기도 썼다.
죽은 아들의 이름을 살아 있는 사람이 빌린 일,
그 이름으로 번 돈을 보낸 일,
마지막 말에 대해 거짓말한 일을 썼다.
준호의 허락을 다시 받았다.
“그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어요.”
“살아 있다면 내 거짓말을 알게 되겠지.”
“후회해요?”
“어떤 날에는.”
“다른 날에는요?”
“그 말 덕분에 어머니가 잠들었을 거라고 믿는다.”
미란은 두 문장을 모두 적었다.
기사에는 박하진을 찾는 문장도 넣었다.
박영길이라는 이름으로 부산에서 전파상을 했던 남자에게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의 이름은 박하진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딸이 살아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제목은 마지막에 바뀌었다.
‘돌아온 사람에게는 몇 개의 이름이 필요한가’.
기사는 일요일 신문에 크게 실렸다.
준호의 사진은 싣지 않았다.
대신 낡은 구두 한 켤레 사진을 실었다.
한쪽은 집 안을 향하고,
다른 한쪽은 길을 향해 놓였던 때의 사진이었다.
신문이 나온 날 아침, 망월리 구멍가게 앞에는 사람들이 모였다.
사람들은 기사보다 먼저 제목을 읽었다.
“강준호 씨가 신문에 났대.”
“영웅이었나?”
“아니, 이름을 여러 개 썼다는데.”
“간첩인가?”
“부산에서 전파상을 했다잖아.”
“그게 왜 신문에 나?”
사람들은 기사를 읽기 전에 결론부터 만들었다.
점심이 되기 전, 준호는 네 가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
사기꾼,
전쟁 영웅.
오후에는 다섯 번째가 생겼다.
딸을 버린 아버지.
준호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도현이 신문을 들고 들어왔다.
“할아버지 이야기가 다르게 퍼져요.”
준호가 물었다.
“어떻게?”
도현은 사람들이 한 말을 전했다.
준호는 웃었다.
“내가 여러 이름으로 살았더니, 이제 사람마다 이름 하나씩 붙여 주는구나.”
미란은 웃지 못했다.
“미안해요.”
“네가 쓴 말이 아닌데 왜?”
“글을 세상에 내보낸 건 저예요.”
준호는 신문을 펼쳤다.
“네가 쓴 건 크게 틀리지 않았다.”
“크게?”
“작게는 많이 틀렸겠지.”
“어디가요?”
“내가 말한 걸 썼잖아.”
“그게 왜 틀려요?”
“내가 나한테 유리하게 말했을 테니까.”
도현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빈칸 남겼잖아요.”
준호는 아이를 보았다.
“신문에는 빈칸이 없더라.”
미란은 그 문장을 오래 기억했다.
신문이 나온 지 사흘 뒤, 편지들이 오기 시작했다.
어떤 편지는 준호를 칭찬했다.
어려운 시대를 견딘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편지는 욕했다.
남의 이름을 훔친 범죄자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아버지도 여러 이름으로 살았다고 썼다.
어떤 사람은 준호 때문에 죽은 사람을 안다고 했다.
대부분은 정확한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감정은 정확했다.
한 편지는 김정수의 여동생에게서 왔다.
오빠의 이름을 쓴 사람이 당신이었군요.
돈을 보낸 사람도 당신이었습니까?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오빠가 마지막에 자기를 불렀다고 믿었습니다.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당신을 미워해야 하는지,
감사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준호는 편지를 읽고 오래 앉아 있었다.
도현이 물었다.
“답장할 거예요?”
“해야겠지.”
“뭐라고요?”
준호는 종이를 놓았다.
“모르겠다.”
미란이 말했다.
“모른다고 쓰세요.”
준호는 답장을 썼다.
김정수의 이름을 훔친 것은 나입니다.
돈을 보낸 것도 나입니다.
당신의 어머니에게 거짓말한 것도 나입니다.
그분을 위로하려 했다는 말로
내 거짓말을 깨끗하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날 내가 본 것은
아들을 기다리다 늙은 어머니였습니다.
나는 진실을 말할 용기도 없었고,
침묵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미워해도 이해합니다.
감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답장을 보내고 며칠 뒤, 이름보에서 김정수라는 이름 옆 괄호가 저절로 채워졌다.
어머니가 듣고 싶어 한 마지막 말을 대신 만들어 준 이름.
미란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누가 썼지?”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썼다면 저렇게 쓰지 않았을 거다.”
도현이 물었다.
“좋은 뜻이에요, 나쁜 뜻이에요?”
준서가 대답했다.
“둘 다겠지.”
신문 기사가 나간 지 열흘째, 부산에서 전화가 왔다.
미란이 받았다.
여자 목소리였다.
“박하진을 찾는 기사 쓴 분 맞습니까?”
미란은 숨을 고르고 말했다.
“네.”
“제가 박하진입니다.”
미란은 준호를 보았다.
그는 부엌 반대편에 앉아 있었지만 전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처럼 얼굴이 굳었다.
“잠시만요.”
미란이 말했다.
“아버지 바꿔 드릴까요?”
전화기 너머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아니요.”
준호의 얼굴이 내려앉았다.
미란은 물었다.
“그럼 제가 들을까요?”
“기사를 왜 썼어요?”
“아버님이 찾고 싶어 하셔서요.”
“찾고 싶었다면 왜 삼십 년 동안 안 찾았죠?”
미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 질문이 아니었다.
하진이 말했다.
“저는 그 사람이 죽은 줄 알고 살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기자님이 왜 사과해요?”
“글을 썼으니까요.”
“그 글 때문에 회사 사람들이 다 알게 됐어요.”
미란은 눈을 감았다.
자기가 박하진을 찾은 것이 아니라,
박하진이 숨겨 두고 살던 과거를 세상 앞에 끌어낸 것일 수도 있었다.
“기사를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알아요.”
“정정이나 추가 기사를 쓸 수는 있습니다.”
“제가 원하면요?”
“네.”
하진은 잠시 침묵했다.
“저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뜻도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건 있어요.”
“말씀하세요.”
“왜 어머니를 찾지 않았는지.”
미란은 준호를 보았다.
“직접 물어보시겠어요?”
“아니요.”
“제가 물어서 전해 드릴까요?”
“그것도 싫어요.”
“그럼 어떻게—”
하진이 말했다.
“그 사람이 먼저 답하면 읽을지 결정하겠습니다.”
미란은 그 말을 준호에게 전했다.
준호는 종이를 앞에 두고 사흘 동안 쓰지 못했다.
첫날에는 ‘미안하다’라고 썼다가 찢었다.
둘째 날에는 오명희 이야기를 쓰다 중단했다.
셋째 날에는 빈 종이만 바라보았다.
도현이 물었다.
“왜 못 써요?”
“무슨 말을 써도 나를 설명하게 되니까.”
“설명하면 안 돼요?”
“설명은 자꾸 핑계 쪽으로 간다.”
“그럼 질문에만 대답해요.”
준호는 도현을 보았다.
“왜 안 찾았는지?”
“네.”
준호는 한 줄을 썼다.
나는 부끄러움을 책임감으로 착각했다.
그 아래 또 썼다.
너희를 내버려 두는 것이
너희를 보호하는 일이라고 스스로 믿었다.
하지만 사실은
너희가 나를 보고 실망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편지는 하진에게 전달되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
두 달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준호는 기다렸다.
이번에는 밥그릇을 놓지 않았다.
하진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사실이 딸에게 빚이 되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현은 매일 밥상 끝에 작은 빈 접시를 놓았다.
“왜 접시냐?”
준호가 물었다.
“밥그릇 놓으면 기다리는 것 같으니까.”
“접시는?”
“그냥 올 수도 있는 자리.”
준호는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접시를 치우지 않았다.
기사가 나간 뒤 이름보도 변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가족이 직접 겪었거나 들은 일이 천 위에 나타났다.
이제는 신문을 읽은 낯선 사람들의 문장이 밤마다 생겼다.
강준호는 시대의 희생자였다.
그 아래 다른 실로:
강준호는 자기 선택의 책임을 시대에 돌렸다.
또 다른 곳에는:
그는 많은 사람을 살렸다.
그 옆에는:
살리지 못한 사람을 말하지 않았다.
천은 서로 모순되는 문장으로 가득 찼다.
미란은 지우려 했다.
실이 풀리지 않았다.
준서가 말했다.
“이름보가 망가졌다.”
미란은 고개를 저었다.
“세상이 들어온 거예요.”
“세상은 우리 집 일을 모른다.”
“그래도 읽었잖아요.”
“읽은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우리도 그랬어요.”
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문에 실린 뒤, 가족의 기억은 더 이상 가족만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기사 속 준호를 자기 아버지, 자기 원수, 자기 시대와 겹쳐 읽었다.
그들이 틀렸다고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준호는 집 안에 앉아 밥을 먹는 늙은 남자와 달랐다.
어느 날 저녁, 준호가 이름보를 보다가 말했다.
“내가 여기 너무 많다.”
실제로 그랬다.
강준호,
김정수,
박영길,
최만복,
기사 속 남자,
편지 속 남자,
사람들이 욕한 남자,
사람들이 용서한 남자가 천 여러 곳에 나타나 있었다.
도현이 물었다.
“어느 게 진짜예요?”
준호는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본 것도 거짓은 아니겠지.”
“그럼 다 진짜예요?”
“다 진짜라면 사람이 너무 많아진다.”
미란은 천 가운데에 새 공간을 만들었다.
그녀는 아무 문장도 쓰지 않고 사람 모양의 윤곽만 수놓았다.
얼굴은 비워 두었다.
준호가 물었다.
“저건 누구냐?”
“아직 말로 정리되지 않은 할아버지요.”
“그게 제일 나와 닮았구나.”
그날 밤 검은 돌 위의 네 번째 싹이 잎을 펼쳤다.
잎에는 아무 무늬도 없었다.
하얀 표면만 있었다.
도현은 손가락으로 만지려 했다.
준호가 막았다.
“아직 쓰지 마라.”
“왜요?”
“빈 곳은 빈 채로 두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기사가 실린 해 가을, 강준서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프기 시작한 뒤에도 면사무소에 나갔다.
생사 미상 칸이 새 행정 서식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젊은 관리가 말했다.
“이제 전쟁이 끝난 지 오래됐습니다.”
준서가 물었다.
“모르는 사람도 끝났습니까?”
“미확인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 행정이 복잡합니다.”
“사람이 복잡한 겁니다.”
“언젠가는 사망 처리해야 합니다.”
“언젠가를 누가 정합니까?”
“법이요.”
준서는 웃었다.
“법은 늘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쪽에서 날짜를 정하지.”
그는 마지막까지 생사 미상 칸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몸이 먼저 약해졌다.
죽기 전날, 미란을 불렀다.
“내 이름 아래 빈칸이 아직 있지?”
“네.”
“거기 하나 써라.”
“뭘요?”
“강준서는 기록을 고치려 했지만, 기록을 고치는 사람도 기록이 될 수 있다는 걸 늦게 알았다.”
미란이 적었다.
“또요?”
준서는 생각했다.
“동생을 기다렸고, 돌아온 뒤에는 기다리던 사람보다 실제 동생을 알아가는 일이 더 어려웠다.”
준호는 방 한쪽에서 그 말을 들었다.
“형.”
준서가 고개를 돌렸다.
“왜?”
“나도 어려웠어.”
준서는 웃었다.
“다행이다.”
“뭐가?”
“나만 못한 게 아니라서.”
두 형제는 오랫동안 서로를 보았다.
준서는 말했다.
“어머니 편지 읽어라.”
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왜 지금?”
“내가 먼저 죽으면 네가 또 미룰까 봐.”
“형이 무슨 상관이야?”
“형이니까.”
숟가락 하나가 떨렸다.
준서는 웃었다.
“반쯤은 네가 읽는 걸 보고 싶어서다.”
“그럼 지금 읽으면 되잖아.”
“내 앞에서는 못 읽을 거잖아.”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준서는 다음 날 새벽 숨을 거두었다.
전구가 켜져 있었지만 그의 그림자는 마지막까지 벽에 남아 있었다.
숨이 멈춘 뒤에도 그림자는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일어나 문턱을 넘었다.
대문까지 간 뒤 잠시 멈췄다.
그곳에는 오래전 준호의 구두가 놓여 있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림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날 면사무소의 생사 미상 칸 맨 아래에 강준서의 이름이 나타났다.
관리들은 그가 분명 죽었다고 했다.
사망 신고도 들어왔고 장례도 치렀다.
그러나 이름 옆에는 생사 미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젊은 관리가 붉은 줄을 그었다.
다음 날 다시 나타났다.
세 번 지운 뒤 그는 포기했다.
망월리 사람들은 말했다.
“평생 그 칸을 지켰으니 죽어서도 거기 있고 싶은가 보지.”
준호는 대답했다.
“형은 죽은 것도 확실하게 정리되는 걸 싫어했어.”
장례가 끝난 밤, 준호는 어머니의 편지를 꺼냈다.
봉투는 더 이상 젖어 있지 않았다.
풀이 완전히 말라 있었다.
준호는 검은 돌 앞에 앉았다.
미란과 성호, 도현은 멀리 앉았다.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준호가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종이 한 장이 있었다.
글씨는 윤서진의 것이었다.
준호야,
네가 이 편지를 읽는다면
나는 이미 밥을 차리지 못하는 곳에 있을 것이다.
네가 돌아오지 않은 이유를
나는 다 알지 못한다.
네가 옳았는지도, 틀렸는지도
내가 대신 정하지 않겠다.
다만 이것은 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돌아오지 않은 사람과 다르다.
그러나 오래 돌아오지 못하다 보면
어느 날부터는 돌아오지 않는 쪽을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다.
그 선택까지 전쟁 탓으로 돌리지는 마라.
또 네가 돌아온다면
미안하다는 말만 오래 하지 마라.
미안함은 밥이 아니다.
먹이는 사람도 살지 못하고
먹는 사람도 배부르지 않다.
네가 살아 있다면 살아라.
사람을 찾을 수 있으면 찾아라.
용서받지 못해도 할 일을 해라.
그리고 형한테 밥 좀 더 먹으라고 해라.
그 아이는 기다릴 때마다 밥을 줄인다.
편지는 거기서 끝났다.
준호는 마지막 줄을 읽고 웃었다.
웃다가 울었다.
“형은 이미 갔는데.”
그가 말했다.
부엌 벽에서 준서의 그림자가 잠시 나타났다.
밥그릇을 가리켰다.
도현이 말했다.
“밥 더 먹으래요.”
준호는 눈물을 닦았다.
“죽어서도 어머니 말을 듣는구나.”
미란은 편지를 이름보에 옮길지 물었다.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전부는 쓰지 마라.”
“왜요?”
“어머니가 나한테 보낸 거다.”
“그럼 무엇을 남길까요?”
준호는 오래 생각했다.
“미안함은 밥이 아니다.”
미란은 그 한 문장만 수놓았다.
그 옆에 빈칸을 남겼다.
누군가에게는 미안함이 살아갈 첫 끼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이 오기 전, 박하진에게서 편지가 왔다.
짧았다.
당신 편지는 읽었습니다.
아직 만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 딸에게는
외할아버지가 살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언젠가 그 아이가 만나고 싶어 하면
막지 않겠습니다.
준호는 편지를 읽고 말했다.
“딸이 또 있구나.”
미란이 물었다.
“손녀죠.”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는 딸이 하나 더 생긴 것 같다.”
도현이 말했다.
“원래 있었어요.”
“몰랐잖아.”
“모른다고 없어진 건 아니잖아요.”
준호는 아이를 보았다.
“너는 우리 집 말을 너무 잘 배웠다.”
박하진의 딸 이름은 서윤이었다.
열두 살이었다.
하진은 사진을 보내지 않았다.
주소도 적지 않았다.
편지 끝에는 이렇게 썼다.
아이에게 당신 이야기를 어떻게 말할지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기사에 나온 대로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란은 그 문장을 읽고 마음이 아팠다.
자기가 쓴 글이 사람을 찾았지만,
그 사람이 자기 삶을 다시 설명해야 하는 부담도 만들었다.
그녀는 후속 기사를 쓰기로 했다.
이번에는 준호 이야기가 아니었다.
제목은 ‘한 사람의 이야기는 누구의 것인가’였다.
기사에는 실종자 가족, 전쟁 생존자, 기자, 독자, 자녀의 목소리를 함께 담았다.
미란은 썼다.
사람을 찾기 위해 공개한 이야기는
사람을 찾은 뒤에도 공개된 채 남는다.
기록은 문을 열 수 있지만
열린 문으로 누가 들어오는지는 통제하지 못한다.
기사가 실린 뒤 편집장은 말했다.
“전보다 덜 흥미롭군.”
미란은 물었다.
“왜요?”
“정답이 없소.”
“그래서 쓴 겁니다.”
“독자들은 결론을 원해요.”
“사람은 결론 뒤에도 사는데요.”
편집장은 원고를 다시 읽었다.
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속 기사가 나온 날 밤, 이름보에 있던 낯선 사람들의 문장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실이 바래어 원래 가족의 기록과 구분될 만큼만 남았다.
준호의 얼굴 없는 윤곽 안에는 작은 점 하나가 생겼다.
미란이 말했다.
“얼굴이 생기려나 봐요.”
준호는 말했다.
“점부터면 오래 걸리겠구나.”
도현이 물었다.
“어디 점이에요?”
“아직 모르지.”
“코일 수도 있어요.”
성호가 말했다.
“단추일 수도 있고.”
준호는 웃었다.
검은 돌의 네 번째 잎에도 작은 검은 점이 나타났다.
그날 밤, 빈 봉투 하나가 우편함에 들어 있었다.
몇 해 전 보낸 사람도 받는 사람도 없던 봉투였다.
이번에는 안쪽에 새로운 글씨가 있었다.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너희가 먼저 끝내지 않았으면 한다.
도현은 문장을 읽고 말했다.
“누가 쓴 거예요?”
미란은 네 번째 잎을 보았다.
“미래의 누군가.”
준호가 물었다.
“우리 집 사람인가?”
도현이 대답했다.
“아직 모르잖아요.”
“그럼 왜 자리를 주나?”
도현은 빈 접시를 밥상 끝에 놓았다.
“올 수도 있으니까.”
준호는 그 접시를 보았다.
하진을 위해 놓았던 자리와 같았다.
기다림이 아니라,
가능성의 자리.
그는 처음으로 그 차이를 이해했다.
그날부터 강씨와 박씨 집 밥상에는 세 종류의 빈 그릇이 놓였다.
죽은 사람을 위한 금이 간 그릇,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위한 빈 밥그릇,
아직 올지 모르는 사람을 위한 작은 접시.
손님들은 물었다.
“왜 접시는 비어 있습니까?”
도현은 말했다.
“아직 배고픈지 모르니까요.”
어른들은 그 대답을 웃어넘겼다.
그러나 집은 웃지 않았다.
집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의 기억도,
언젠가는 자리를 요구한다는 것을.
몇 달 뒤, 이름보의 새 천 끝에 작은 이름 하나가 저절로 수놓아졌다.
서윤.
박하진의 딸.
준호의 손녀.
그 아래에는 아무 문장도 없었다.
미란은 붓을 들지 않았다.
도현도 쓰지 않았다.
준호는 이름을 손끝으로 만졌다.
“나를 만나기도 전에 여기 들어왔구나.”
미란이 말했다.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자기 자리를 먼저 보낸 걸 수도 있어요.”
“무슨 뜻이냐?”
“나중에 와서 고치겠다는 뜻.”
준호는 웃었다.
“우리 집 아이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어른들 기록을 못 믿는구나.”
부엌의 숟가락들이 조용했다.
그 말은 농담이었지만,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
세상에 알려진 뒤 기억은 얼굴을 바꾸었다.
한 사람의 기억은 가족의 것이었고,
신문의 것이었고,
독자의 것이었고,
상처받은 사람의 것이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검은 돌은 어느 한 얼굴도 진짜라고 선택하지 않았다.
돌은 다만 계속 들었다.
사람들이 말한 것,
말하지 않은 것,
말한 뒤 후회한 것,
세상이 대신 말해 버린 것을 모두 들었다.
그리고 어느 봄날 새벽,
검은 돌의 네 번째 잎이 완전히 펼쳐졌다.
그 잎 위에는 거울처럼 희미한 빛이 돌았다.
안을 들여다보면 자기 얼굴이 아니라,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준호가 보았을 때에는 열두 살 소녀의 눈이 보였다.
미란이 보았을 때에는 공책을 든 늙은 여자가 보였다.
성호가 보았을 때에는 나사 하나를 들고 웃는 아이가 보였다.
도현이 보았을 때에는 아무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빈 종이 한 장이 있었다.
도현은 말했다.
“제 건 왜 비었어요?”
준호가 대답했다.
“네가 쓸 차례라서겠지.”
도현은 검은 돌 앞에 앉았다.
공책을 펼쳤다.
첫 줄에 이렇게 썼다.
가족의 이야기는
가족이 아는 이야기보다 늘 더 크다.
그리고 두 번째 줄은 쓰지 않았다.
집 안의 모두가 기다렸다.
도현은 연필을 내려놓았다.
“아직 모르겠어요.”
준호가 말했다.
“잘 썼다.”
“아무것도 안 썼는데요.”
“모르는 걸 안 썼잖아.”
검은 돌이 아주 낮게 울렸다.
그것은 칭찬처럼 들렸고,
경고처럼도 들렸다.
기억이 세상에 알려진 뒤 가장 어려운 일은
더 많이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에서 멈출지를 배우는 일이었다.
제11장: 오기 전에 이미 기억된 아이

서윤이 망월리에 처음 온 것은 열여섯 살 여름이었다.
그녀는 혼자 왔다.
박하진은 역까지 딸을 데려다주었지만 버스에는 타지 않았다.
“가서 꼭 만나야 하는 건 아니야.”
하진이 말했다.
“그럼 왜 보내요?”
“네가 가고 싶다고 했으니까.”
“엄마는 싫어요?”
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 그녀는 창문을 두드렸다.
서윤이 창문을 열었다.
하진은 작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그 사람한테 줘.”
“외할아버지한테?”
하진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주고 싶을 때.”
봉투에는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풀로 봉하지도 않았다.
서윤은 안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가 말하지 않은 것을 함부로 먼저 읽고 싶지 않았다.
망월리로 가는 버스 안에는 선풍기가 없었다.
창문을 열면 뜨거운 바람과 먼지가 들어왔다.
안내원은 마을 이름을 세 번 틀렸다.
“망원리 내리실 분!”
“망월리요.”
서윤이 말했다.
안내원이 그녀를 보았다.
“거기 사니?”
“아니요.”
“그런데 어떻게 알아?”
“이름을 들었으니까요.”
안내원은 웃었다.
“처음 가는 곳 이름을 그렇게 정확히 아는 사람도 있구나.”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가는 곳이라고 해서 처음 들은 곳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망월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검은 돌,
떨리는 숟가락,
저절로 늘어나는 이름보,
먼저 돌아온 구두,
신문에 나온 여러 이름의 남자.
하지만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마다 망월리가 달랐다.
어머니에게 망월리는 자신을 버린 남자의 고향이었다.
신문에서 망월리는 전쟁과 화해의 상징이었다.
박도현이 보낸 편지에서 망월리는 물건이 사람보다 오래 기억하는 집이었다.
강미란의 기사에서는 사실이 한 사람에게만 속하지 않는 곳이었다.
서윤에게 망월리는 아직 장소가 아니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미리 설명해 둔 문장이었다.
버스가 절하는 전봇대를 지나 멈췄다.
안내원이 말했다.
“망월리.”
이번에는 정확했다.
서윤은 작은 여행가방과 어머니의 봉투를 들고 내렸다.
정류장에는 박도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현은 스무 살이었다.
키가 많이 자랐고, 얼굴에는 어릴 때보다 말이 적어 보였다.
두 사람은 편지를 여러 번 주고받았지만 실제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도현이 물었다.
“서윤이지?”
“네.”
“사진보다 크네.”
“사진은 안 자라니까요.”
도현은 웃었다.
“우리 집 말투랑 비슷하다.”
서윤의 얼굴이 굳었다.
“저는 그 집에서 자란 적 없어요.”
도현은 곧 웃음을 거두었다.
“미안해.”
서윤은 사과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다.
그 집안 사람들은 사과도 오래 한다고 들었는데, 도현은 달랐다.
“괜찮아요.”
둘은 집으로 걸었다.
도로 옆에는 논이 있었고, 전봇대 사이로 전선이 늘어져 있었다.
도현은 지나가는 곳마다 설명하려 했다.
“저기가 옛집 자리야.”
서윤은 아스팔트를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도 자리야.”
“집이 없으면 자리가 남아요?”
“우리 집에서는.”
서윤은 그 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그 집에서는 가능하다는 식으로 말하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현은 그녀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서윤이 먼저 물었다.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세요?”
“많이 늙으셨어.”
“저를 기다렸어요?”
도현은 생각했다.
“기다렸다고 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셨어.”
“그게 무슨 뜻이에요?”
“네가 부담 느낄까 봐 밥그릇도 안 놓았어.”
“그런데 이름보에는 제 이름을 적었잖아요.”
도현은 걸음을 늦췄다.
“그건 우리가 쓴 게 아니야.”
“누가 썼는데요?”
“이름보가.”
서윤은 더 묻지 않았다.
그 대답은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종류였다.
누군가 결정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대답.
검은 돌 있는 집은 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작았다.
기사 사진에서는 훨씬 커 보였다.
대문에는 여전히 두 판자가 걸려 있었다.
강씨 집.
박씨 집.
바람이 불 때마다 부딪혔다.
서윤은 소리를 들었다.
멀리서는 싸움처럼 들렸고,
가까이에서는 정말 숟가락 소리 같았다.
마당에는 강미란과 박성호가 서 있었다.
미란은 이미 중년이 되어 있었다.
손에는 공책 대신 행주가 들려 있었다.
“서윤아.”
미란이 다가왔다.
서윤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안기지도 않았다.
미란은 중간에서 멈췄다.
“멀리 오느라 힘들었지?”
“괜찮았어요.”
성호가 여행가방을 들었다.
“가볍네.”
서윤이 말했다.
“며칠 있을지 몰라서요.”
“오래 있어도 되고, 오늘 가도 돼.”
성호는 그렇게 말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미란이 남편 뒤를 보며 말했다.
“저 사람은 필요한 말을 가끔 먼저 한다.”
부엌 숟가락은 조용했다.
서윤은 도현을 보았다.
“저분도 숟가락이 검사해요?”
“누구든.”
“아이도요?”
“특히 아이들이 더 잘 걸려.”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 서윤은 문턱에서 멈췄다.
발이 붙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스스로 멈춘 것이었다.
검은 돌이 부엌 중앙에 보였다.
돌에는 네 갈래 잎이 자라고 있었다.
네 번째 잎에는 작은 검은 점이 있었다.
미란이 말했다.
“들어와.”
서윤은 물었다.
“집이 저를 받아들여야 해요?”
미란은 잠시 생각했다.
“아니.”
“외할아버지는 집이 받아들여야 들어왔다면서요.”
“그건 그분 이야기였어.”
“저는요?”
“네가 받아들일지 정하면 돼.”
서윤은 문턱을 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숟가락도 떨리지 않았고,
눈도 땅에서 올라오지 않았으며,
검은 돌도 울리지 않았다.
서윤은 조금 안도했고 조금 실망했다.
자기가 특별한 사람은 아니길 바랐지만,
아무 반응도 없으니 이미 이야기 속에 있는 자기 이름보다 실제 자신이 작아진 기분이었다.
강준호는 안방에 누워 있었다.
그는 신문에 실린 구두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사람은 늙으면 자기 물건보다 작아질 수 있었다.
준호가 몸을 일으켰다.
“서윤이냐?”
그는 울지 않았다.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그저 오랫동안 얼굴을 보았다.
서윤은 그 시선이 불편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미안하다.”
“뭐가요?”
“얼굴을 먼저 기억하려고 해서.”
“처음 보는데 어떻게 기억해요?”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서윤은 그 대답이 뜻밖이었다.
어른들은 보통 자기 말을 설명하려 했다.
준호는 틀렸다는 말을 받아들였다.
“앉을래?”
준호가 말했다.
서윤은 방 안에 들어갔다.
벽에는 오래된 사진과 신문 기사, 편지 몇 통이 있었다.
자기 이름이 수놓인 이름보도 접혀 있었다.
준호가 물었다.
“어머니는 잘 있니?”
“네.”
“나에 대해 뭐라고 하시니?”
“많이 말하지 않아요.”
“그렇겠지.”
“신문보다 덜 말해요.”
준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신문은 말을 멈출 줄 모르니까.”
서윤은 어머니가 준 봉투를 무릎 위에 놓았다.
준호의 눈이 봉투로 갔다.
“그건 뭐니?”
“엄마가 줬어요.”
준호의 손이 조금 떨렸다.
“나한테?”
“제가 주고 싶을 때 주래요.”
준호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럼 아직 주지 마라.”
서윤은 놀랐다.
“왜요?”
“네 손에 있는 동안은 네가 결정할 수 있으니까.”
그 말은 서윤이 처음으로 마음에 들어 한 준호의 말이었다.
점심에는 여러 사람이 모였다.
박만식은 세상을 떠난 뒤였고, 그의 아내도 없었다.
그러나 박씨 집 자손들이 여전히 오갔다.
그날은 성호의 동생과 사촌들까지 왔다.
모두 서윤을 보고 말했다.
“하진이 닮았네.”
“눈은 준호 어르신 닮았어.”
“입은 명희 씨 같을지도 모르지.”
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저를 아는 사람처럼 말하지 마세요.”
밥상이 조용해졌다.
한 노인이 말했다.
“우리가 너희 어머니 어릴 때—”
“아무도 엄마 어릴 때 몰랐잖아요.”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숟가락 하나가 떨렸다.
누군가 거짓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척한 말이 진실 가까이 갔다가 되돌아온 것 같았다.
미란이 말했다.
“맞아. 우리는 사진과 이야기로만 알았지.”
다른 친척이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그래도 가족끼리는 닮은 데를 찾는 법이야.”
서윤이 물었다.
“왜요?”
“같은 피니까.”
준호가 밥그릇을 보며 말했다.
“피가 사람을 너무 쉽게 설명해.”
모두 준호를 보았다.
그는 계속 말했다.
“나는 같은 피를 가진 사람을 오래 버렸고, 다른 피를 가진 사람들 이름으로 살았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도현이 서윤 앞에 반찬을 놓았다.
“이건 안 매워.”
서윤이 말했다.
“매운 것도 먹어요.”
“편지에 매운 거 못 먹는다고—”
“어릴 때요.”
도현은 반찬을 다시 놓았다.
“그럼 이것도 먹어.”
서윤은 웃지 않으려다 조금 웃었다.
점심 뒤 미란은 이름보를 보여 주었다.
천은 방 하나를 덮을 만큼 길어져 있었다.
오래된 이름은 흐렸고,
새 이름은 선명했다.
어떤 사람 옆에는 한 문장,
어떤 사람 옆에는 여러 문장,
어떤 사람 옆에는 빈칸만 있었다.
서윤은 자기 이름을 찾았다.
서윤.
박하진의 딸.
강준호의 손녀.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가 제 이름을 썼어요?”
“저절로 나타났어.”
미란이 말했다.
“그런 대답 싫어요.”
“알아.”
“누가 썼는지 모르면서 왜 지우지 않았어요?”
미란은 이름을 보았다.
“기다렸어.”
“제가 올 때까지?”
“네가 지울지 남길지 정할 때까지.”
서윤은 실을 만졌다.
“지울 수 있어요?”
“가위로 자르면 되지.”
“그러면 천이 상하잖아요.”
“기록보다 사람이 먼저야.”
미란은 작은 가위를 내밀었다.
서윤은 받지 않았다.
“생각해 볼게요.”
“그래.”
“왜 저를 강준호의 손녀라고 먼저 써요? 엄마 딸인 게 먼저 아닌가요?”
미란은 붓을 가져왔다.
“고칠 수 있어.”
서윤은 직접 실 아래에 글을 썼다.
박하진의 딸.
그 아래에 다시:
아직 강준호의 손녀라고 부를지 정하지 않은 사람.
글을 다 쓰자 부엌 숟가락 하나가 울렸다.
서윤이 물었다.
“거짓말인가요?”
미란은 말했다.
“아니. 중요한 걸 삼키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어.”
“숟가락이 그런 것도 알아요?”
“우리도 정확히 몰라.”
서윤은 처음으로 그 집의 ‘모른다’는 말을 덜 싫어했다.
적어도 이번에는 모른다는 사람이 자기 모름을 숨기지 않았다.
그날 오후, 마을 회관에 텔레비전이 들어왔다.
망월리 최초의 컬러텔레비전이었다.
사람들은 저녁 방송을 보려고 모였다.
국가 기념식과 전쟁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예정이었다.
준호는 가지 않으려 했다.
도현이 물었다.
“왜요?”
“전쟁은 이미 충분히 봤다.”
미란이 말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편집한 전쟁이에요.”
“그게 더 피곤하지.”
서윤이 말했다.
“저는 보고 싶어요.”
준호는 손녀를 보았다.
“그럼 가자.”
회관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텔레비전 화면은 작았지만, 사람들은 창문 밖 세상보다 더 집중해서 보았다.
광고가 먼저 나왔다.
깨끗한 주방,
새 냉장고,
웃는 가족이 화면에 나타났다.
망월리 사람들은 광고 속 집에 검은 돌도, 금 간 그릇도, 빈 접시도 없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냉장고 가격만 물었다.
다큐멘터리가 시작되었다.
굵은 목소리의 해설자가 말했다.
전쟁은 영웅과 배신자를 갈랐고,
국가는 희생을 통해 다시 일어섰습니다.
화면에는 군인,
피난민,
무너진 다리,
행진하는 군중이 빠르게 지나갔다.
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서윤은 그를 보았다.
“외할아버지도 저기 있었어요?”
“어딘가에는.”
“어느 쪽이었어요?”
“화면 바깥.”
서윤은 그 대답이 회피라고 생각했다.
“항상 그렇게 말하잖아요. 있어야 할 자리 옆에 있었다고.”
준호는 화면을 보았다.
“그 말도 오래 쓰면 숨는 곳이 된다.”
서윤은 놀랐다.
“그럼 어디 있었어요?”
준호가 대답하려는 순간 화면이 흔들렸다.
흑백 기록 영상 속 군인들 사이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젊은 강준호였다.
그는 부상병을 업고 걷고 있었다.
준호가 숨을 멈췄다.
“저 사람 외할아버지예요?”
서윤이 물었다.
“그런 것 같다.”
화면 속 준호는 영웅처럼 보였다.
카메라는 그가 사람을 업고 강을 건너는 장면을 길게 보여 주었다.
해설자는 말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용기 있는 청년들.
회관 사람들이 준호를 보았다.
“강 어르신 아니오?”
“정말이네!”
“영웅이셨구먼!”
준호는 일어나 텔레비전 앞으로 갔다.
화면을 손으로 막았다.
“그다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웃었다.
“방송인데 어떻게 막아요?”
준호는 말했다.
“그다음을 보여 줘야 해.”
화면은 이미 다른 장면으로 넘어갔다.
미란이 물었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준호의 입술이 떨렸다.
“강을 건넌 뒤, 나는 그 부상병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을 두고 갔다.”
회관이 조용해졌다.
“왜요?”
도현이 물었다.
“총소리가 가까워졌고, 내가 죽을까 봐.”
“부상병은 살았어요?”
“아니.”
서윤이 화면을 보았다.
젊은 준호는 여전히 누군가를 살리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방송은 그의 공포와 도망을 보여 주지 않았다.
“텔레비전이 거짓말했네요.”
서윤이 말했다.
미란은 고개를 저었다.
“한 장면은 사실일 수도 있어.”
“그런데 다음 장면을 안 보여 줬잖아요.”
준호가 말했다.
“그게 내가 평생 한 일이기도 하다.”
“뭐가요?”
“내게 유리한 장면까지만 기억한 것.”
그 순간 텔레비전 화면이 꺼졌다.
정전이 아니었다.
회관의 전등은 켜져 있었다.
화면만 검게 변했다.
검은 화면 위에 회관 사람들의 얼굴이 비쳤다.
그러나 준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젊은 군인의 얼굴과 늙은 남자의 얼굴이 번갈아 나타났다.
서윤이 텔레비전 가까이 갔다.
화면 속 젊은 준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를 알아보는 것 같아요.”
준호는 말했다.
“그 사람은 너를 모른다.”
“그런데 왜 봐요?”
“아마 내가 지금 보고 있어서.”
화면 속 젊은 준호의 입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서윤은 입 모양을 읽으려 했다.
도망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기다려.
서윤은 뒤로 물러났다.
텔레비전이 다시 켜졌다.
다큐멘터리는 끝나고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웃는 가족이 새 밥솥 앞에 앉아 있었다.
회관 사람들은 방금 일을 전기 문제라고 했다.
성호는 텔레비전 뒤를 살폈다.
“기계에는 이상이 없어요.”
한 노인이 말했다.
“그럼 방송국 문제겠지.”
미란은 말했다.
“방송국보다 기억 문제일 수도 있어요.”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기억은 수리할 데가 없잖아.”
성호가 말했다.
“그래서 더 자주 고장 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윤은 준호에게 물었다.
“왜 그 사람들을 두고 갔어요?”
“무서웠다.”
“그래도 다시 갈 수 있었잖아요.”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안 갔어요?”
준호는 천천히 걸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자기가 살았다는 사실에 이유를 만들고 싶어 한다.”
“외할아버지는 무슨 이유를 만들었어요?”
“내가 살아야 다른 사람을 기억할 수 있다고.”
“기억했어요?”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숟가락은 멀리 집에 있었지만, 절하는 전봇대의 전선이 떨렸다.
“모두 기억하지는 못했다.”
서윤이 말했다.
“그러면 그 사람들 이름을 알아요?”
“몇 명은.”
“나머지는요?”
“모른다.”
“이름보에 점으로 적힌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에요?”
“어떤 점은.”
서윤은 걷기를 멈췄다.
“외할아버지가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을 가족 기록에 넣었어요?”
“그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와 같은 길에 있었다.”
“그럼 왜 이름을 안 알아봤어요?”
준호는 피곤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사람이 모든 잘못을 바로잡을 만큼 오래 살지는 못한다.”
서윤이 말했다.
“그래서 하나도 안 해도 돼요?”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럼 지금 해요.”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을 찾든, 이름을 찾든.”
준호는 웃지 않았다.
“네 어머니가 널 보낸 이유를 알 것 같다.”
“엄마는 저를 누구 고치라고 보내지 않았어요.”
준호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 또 네게 일을 맡겼구나.”
다음 날 서윤은 이름보의 점들을 세기 시작했다.
검은 점은 마흔세 개였다.
어떤 점 옆에는 장소가 적혀 있었고,
어떤 점 옆에는 날짜만 있었으며,
아무것도 없는 점도 열일곱 개였다.
“이 사람들 누구예요?”
서윤이 물었다.
미란이 말했다.
“피난길에 밥을 먹고 간 사람들, 이름을 말하지 못한 사람들, 나중에 소식을 잃은 사람들.”
“다 같은 점이에요?”
“처음에는 이름이 없다는 뜻이었어.”
“점도 사람마다 달라야 하지 않아요?”
미란은 천을 보았다.
“그 생각을 못 했네.”
서윤은 각 점 주위에 작은 모양을 그렸다.
누군가에게는 반달,
누군가에게는 파도,
누군가에게는 작은 문,
누군가에게는 빈 사각형.
도현이 물었다.
“왜 다르게 그려?”
“이름이 없어도 같은 사람은 아니니까.”
“무슨 모양인지 어떻게 정해?”
“모르니까 임시로.”
준호가 말했다.
“임시가 오래가면 또 이름이 된다.”
서윤은 붓을 멈췄다.
“그럼 나중에 고칠 수 있게 연필로 할게요.”
그녀는 천에 직접 그리지 않고, 얇은 종이 조각을 점 옆에 매달았다.
이름을 찾으면 떼어 낼 수 있게 했다.
그날부터 가족은 점들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준호는 기억나는 장소와 얼굴을 말했다.
미란은 옛 기사와 명부를 뒤졌다.
도현은 면사무소 기록을 찾아갔다.
성호는 라디오 방송에 사연을 보낼 수 있다고 했다.
서윤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처음 찾은 이름은 이복순이었다.
전쟁 때 아이 둘과 함께 피난길에서 검은 돌 있는 집에 머물렀던 여자였다.
이름보에는 ‘오른손 손가락이 하나 없던 여자’라고만 적혀 있었다.
서윤이 옛 피난민 마을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 확인했다.
이복순.
아이들은 둘 다 살아남았고,
한 명은 교사가 되었으며,
한 명은 바다에서 죽었다.
미란은 점 하나를 풀어 이름을 수놓았다.
이복순.
그 순간 검은 돌 위 네 번째 잎의 점이 조금 커졌다.
두 번째 이름은 찾지 못했다.
세 번째도 찾지 못했다.
일주일 동안 아무 성과가 없었다.
서윤은 화가 났다.
“왜 기록을 제대로 안 했어요?”
미란이 말했다.
“그때는 먹이고 보내는 것만으로도—”
“이름 물을 시간도 없었어요?”
준호가 말했다.
“어떤 사람은 이름을 말하면 위험했다.”
“그럼 나중에 물을 수 있었잖아요.”
“나중이 오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서윤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과거의 사람들을 쉽게 심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심판하지 않으려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도 싫었다.
그날 저녁, 숟가락이 처음으로 서윤 앞에서 떨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왜 저래요?”
서윤이 물었다.
준호가 말했다.
“말하고 싶은 걸 삼켰나 보다.”
서윤은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여러분이 어려운 시대를 살았다는 말로 너무 쉽게 용서받으려는 것 같아서 화가 나요.”
숟가락은 더 크게 떨렸다.
“그런데 저도 안전한 시대에서 과거 사람들을 너무 쉽게 판단하는 것 같아 부끄러워요.”
숟가락이 멈췄다.
미란은 말했다.
“둘 다 적자.”
서윤은 이름보 자기 이름 아래에 썼다.
서윤은 오기 전부터 가족을 판단했고,
온 뒤에는 판단하지 않는 것도 책임 회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문장을 읽고 말했다.
“너무 잘 정리됐어요.”
미란이 물었다.
“싫어?”
“사람보다 문장이 먼저 완성된 것 같아요.”
미란은 그 문장 뒤에 가위로 작은 틈을 냈다.
“나중에 이어 써.”
서윤은 그 틈을 만졌다.
이름보에 문장을 더하는 대신 천 자체를 잘라 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날 밤, 절단된 틈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부엌 안에서 시작되어 대문 밖으로 나갔다.
검은 돌의 네 번째 잎이 흔들렸다.
잎에 비친 얼굴이 바뀌었다.
이제 준호가 들여다보면 서윤 얼굴 대신 이름 없는 사람들의 눈이 보였다.
미란이 보면 신문에서 지운 문장들이 보였다.
도현이 보면 길게 이어진 빈칸이 보였다.
서윤이 들여다보았을 때는 자기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입이 없었다.
“왜 입이 없어요?”
도현이 물었다.
서윤은 말했다.
“아직 제 말보다 다른 사람 말을 더 많이 들었으니까.”
그날 오후, 마을에 방송국 사람들이 왔다.
전쟁 다큐멘터리에 나온 젊은 준호의 신원을 확인했다며 후속 촬영을 하고 싶다고 했다.
감독은 말했다.
“강준호 선생님 이야기는 국가적 화해의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준호가 물었다.
“어느 부분이요?”
“전쟁 속에서 사람을 구하고, 여러 이름으로 살아남고, 끝내 가족에게 돌아온 이야기.”
서윤이 물었다.
“사람들을 두고 도망친 부분도 나오나요?”
감독은 당황했다.
“모든 내용을 다 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또 같은 방송이잖아요.”
감독은 미란을 알아보았다.
“기자님도 아시겠지만, 방송에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미란이 말했다.
“시간이 짧으면 사람을 단순하게 해야 합니까?”
“시청자가 이해할 수 있어야죠.”
준호는 감독에게 물었다.
“사람이 이해되기 위해 얼마나 줄어들어야 합니까?”
감독은 웃으며 말했다.
“좋은 질문이네요. 인터뷰에서 그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준호는 웃지 않았다.
“지금 대답을 듣고 싶은 겁니다.”
촬영팀은 마당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준호는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서윤이 말했다.
“나가서 이번에는 그다음 장면도 말하세요.”
“방송에서 자르면?”
“말했다는 기록은 남잖아요.”
미란은 손녀를 보았다.
“그 기록은 누가 갖는데?”
서윤은 촬영 카메라를 보았다.
“우리가 따로 녹음하면 되죠.”
성호는 작은 녹음기를 가져왔다.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눌렀다.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갑니다.”
감독이 말했다.
“저희 촬영에 방해됩니다.”
성호가 물었다.
“진실은 한 기계에서만 녹음돼야 합니까?”
결국 두 기계가 동시에 돌아갔다.
방송국 카메라는 준호의 얼굴을 찍었다.
가족의 녹음기는 그의 목소리만 담았다.
감독이 물었다.
“전쟁 중 부상병을 구하던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무슨 생각으로 위험을 무릅쓰셨습니까?”
준호는 대답했다.
“그 사람을 두고 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기였군요.”
“그때는.”
“그 뒤에는요?”
“강을 건너고 나서 총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내려놓고 도망쳤습니다.”
감독은 잠시 침묵했다.
“그 부분은 확인이 어렵습니다.”
서윤이 뒤에서 말했다.
“좋은 부분은 확인 안 해도 방송했잖아요.”
감독은 카메라를 멈추었다.
“가족분들은 조용히 해 주십시오.”
준호가 말했다.
“그 아이 말도 녹음하십시오.”
“인터뷰 대상은 선생님입니다.”
“내 이야기가 그 아이한테도 갔습니다.”
감독은 피곤한 얼굴을 했다.
“이러면 방송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미란이 말했다.
“사람이 어려우니까요.”
촬영은 계속되었다.
감독은 준호에게 후회하는지 물었다.
준호는 말했다.
“후회합니다.”
“가장 후회하는 것은?”
“하나를 고르면 나머지가 덜 중요해질 것 같아 고르지 않겠습니다.”
“시청자를 위해 하나만—”
“시청자에게 내 죄를 보기 좋게 정리해 줄 생각은 없습니다.”
촬영은 예정 시간보다 길어졌다.
감독은 마지막에 물었다.
“그래도 가족에게 돌아오신 지금은 평안하십니까?”
준호는 검은 돌을 바라보았다.
“평안은 도착지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오늘 도망치지 않은 시간.”
감독은 만족한 얼굴을 했다.
“좋은 마무리입니다.”
서윤이 속삭였다.
“또 문장으로 사람보다 먼저 끝냈네.”
준호가 들었다.
“맞다.”
그는 카메라를 향해 덧붙였다.
“그리고 내일은 다시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감독의 표정이 굳었다.
방송은 한 달 뒤 나왔다.
제목은 ‘여러 이름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온 영웅’이었다.
준호가 사람을 두고 도망친 이야기는 짧게 나왔다.
‘평생의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는 해설 아래였다.
마지막에는 준호의 말이 나왔다.
평안은 도착지가 아닙니다.
오늘 도망치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 뒤에 했던 말은 잘렸다.
그리고 내일은 다시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방송이 끝난 뒤 마을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은 성호의 녹음기를 가져왔다.
가족은 부엌에 모여 잘리지 않은 인터뷰를 들었다.
테이프에는 카메라 밖 목소리도 들어 있었다.
감독의 한숨,
서윤의 질문,
미란의 반박,
성호가 테이프를 뒤집는 소리,
도현이 물을 따르는 소리까지 모두 남아 있었다.
준호가 말했다.
“방송보다 이게 더 나답다.”
서윤이 물었다.
“목소리만 있는데요?”
“사람은 얼굴보다 주변 소리에 더 많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오래된 가족사진이 벽에서 떨어졌다.
유리에는 금이 갔지만 사진은 찢어지지 않았다.
열한 명을 찍어 열두 명이 나왔고,
나중에는 준호까지 열세 명이 되었던 사진.
이제 사진 속 사람은 열네 명이었다.
가장 뒤에 서윤이 서 있었다.
현재의 열여섯 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진을 찍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다.
사진 속 서윤은 입이 없었다.
실제 서윤은 사진을 오래 보았다.
“또 저를 먼저 정했네요.”
그녀는 화가 났다.
사진을 찢으려 손을 들었다.
준호가 막지 않았다.
미란도 막지 않았다.
도현만 말했다.
“네 사진이기도 해.”
“그래서 제가 정해야 해요.”
서윤은 사진에서 자기 부분만 오려냈다.
가족들은 숨을 삼켰다.
사진 속에는 사람 모양의 빈 공간이 생겼다.
그 순간 방 안 모든 거울에서 서윤의 모습이 사라졌다.
“서윤아.”
미란이 말했다.
서윤은 방 안에 그대로 있었다.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거울에는 비치지 않았다.
준호가 말했다.
“사진에서 자기를 지워서 그런가?”
서윤은 대답했다.
“제가 저를 지운 게 아니에요. 제가 아닌 걸 잘라낸 거예요.”
숟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서윤은 잘라낸 자기 모습을 검은 돌 위에 놓았다.
종이 속 입 없는 얼굴이 네 번째 잎에 비쳤다.
잎은 갑자기 갈색으로 변했다.
미란이 말했다.
“상하는 것 같아.”
서윤은 사진 조각을 다시 집어 들었다.
“제가 돌려놓으면 괜찮아져요?”
준호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잎이 죽잖아요.”
“기록을 살리려고 네가 틀린 자리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서윤은 준호를 보았다.
그는 신문과 방송 속 자기 얼굴을 오래 견딘 사람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왜 자기 사진을 안 잘랐어요?”
준호는 말했다.
“겁이 났다.”
“뭐가요?”
“사진을 자르면 내가 없어질까 봐.”
“없어졌어요?”
“아니다. 너무 많이 생겼지.”
서윤은 오려낸 사진 조각 뒷면에 자기 이름을 썼다.
서윤.
그 아래에:
이 얼굴은 다른 사람들이 먼저 만든 얼굴이었다.
그녀는 조각을 빈 봉투 안에 넣었다.
몇 해 전 미래에서 왔다고 믿었던 봉투.
봉투 안쪽의 문장은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너희가 먼저 끝내지 않았으면 한다.
서윤은 그 아래에 썼다.
이제 태어났습니다.
아직 끝내지 마세요.
봉투를 닫자 거울에 서윤의 모습이 돌아왔다.
그러나 전과 조금 달랐다.
모든 거울에서 얼굴이 서로 달랐다.
부엌 거울에서는 화난 얼굴,
안방 거울에서는 겁먹은 얼굴,
우물가 거울에서는 웃고 있는 얼굴,
작은 손거울에서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이 비쳤다.
서윤은 말했다.
“어느 게 저예요?”
미란이 대답했다.
“다 네가 본 얼굴일 수 있어.”
“그럼 진짜는요?”
준호가 말했다.
“네가 하나만 고르지 않아도 되는 사람.”
검은 돌의 네 번째 잎은 갈색 가장자리만 남기고 다시 푸르게 되었다.
잎의 검은 점은 작은 입 모양으로 변했다.
도현이 말했다.
“이제 말할 수 있겠네.”
서윤은 잎을 보았다.
“제가 아니라 잎이요.”
그날 밤 서윤은 어머니가 준 봉투를 준호에게 건넸다.
“지금은 주고 싶어요.”
준호는 두 손으로 받았다.
“네가 읽었니?”
“아니요.”
“왜 지금 주니?”
“외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서가 아니에요.”
준호는 기다렸다.
“모르는데도 엄마 말은 전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준호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편지 한 장과 낡은 라디오 나사 하나가 있었다.
하진의 글씨였다.
아버지,
이 말을 쓰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나는 아직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가 없는 동안
나는 아버지 없이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나타났다고 해서
그 삶을 틀렸다고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서윤을 보낸 것은
아버지에게 돌려보낸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가 자기 과거를
자기 눈으로 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에게 좋은 외할아버지가 되려고
나쁜 아버지였던 일을 덮지 마십시오.
하지만 나쁜 아버지였다는 이유로
좋은 외할아버지가 될 가능성까지 버리지는 마십시오.
편지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더 있었다.
라디오를 고칠 때마다 나사가 남았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아버지 가게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준호는 작은 나사를 손바닥에 올렸다.
성호가 가까이 와 보았다.
“아주 오래된 라디오 나사네요.”
“내 가게 것일까?”
“모르죠.”
“필요한 나사였을까?”
성호는 웃었다.
“남은 나사는 늘 자기가 필요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준호도 웃었다.
그러나 곧 울었다.
서윤은 그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 눈물이 어머니를 위한 것인지,
오명희를 위한 것인지,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준호는 나사를 이름보에 꿰매려 했다.
서윤이 말했다.
“물건까지 다 기록해야 해요?”
“잃어버릴까 봐.”
“공구함에 넣으면 되잖아요.”
성호가 자기 공구함을 가져왔다.
안에는 평생 남겨 둔 나사들이 작은 칸마다 들어 있었다.
“여기 두세요.”
준호가 물었다.
“어느 칸?”
성호는 빈칸 하나를 가리켰다.
“아직 어디서 빠졌는지 모르는 나사 칸.”
준호는 하진이 보낸 나사를 그곳에 넣었다.
그 순간 공구함 안 모든 나사가 한 번씩 가볍게 움직였다.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작은 박수처럼 들렸다.
서윤이 망월리에 머문 마지막 날, 가족은 이름을 찾은 점들을 다시 세었다.
마흔세 개 중 일곱 개에 이름이 생겼다.
서른여섯 개는 여전히 점이었다.
서윤은 말했다.
“많이 못 찾았네요.”
미란이 대답했다.
“일곱 명은 찾았어.”
“서른여섯 명은요?”
준호가 말했다.
“못 찾은 숫자가 찾은 사람을 작게 만들 필요는 없다.”
서윤은 그 말을 공책에 적으려다 멈췄다.
“왜 안 쓰니?”
준호가 물었다.
“좋은 말인데 너무 잘 끝나서요.”
“그럼 뒤에 하나 더 써.”
서윤은 적었다.
하지만 일곱 명을 찾았다는 말로
서른여섯 명을 잊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덜 편하구나.”
“좋은 문장은 불편해야 해요?”
“가끔은.”
떠나는 아침, 서윤은 이름보 자기 이름 아래 문장을 고쳤다.
서윤은 오기 전부터 가족을 판단했다.
그 문장은 남겼다.
그 아래에 이어 썼다.
온 뒤에는 판단하지 않는 것도 책임 회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남겼다.
그리고 잘라 두었던 틈 아래에 새 문장을 붙였다.
그러나 가족이 이미 만들어 둔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복종이라고 생각했다.
미란이 읽고 말했다.
“강하다.”
서윤이 물었다.
“너무해요?”
“아니.”
“외할아버지는요?”
준호는 문장을 읽었다.
“맞다.”
“기분 안 나빠요?”
“난다.”
숟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은 웃었다.
“그럼 더 믿을 수 있네요.”
버스 정류장까지 모두 배웅하러 갔다.
준호는 천천히 걸었다.
서윤이 말했다.
“다음에는 엄마랑 올 수도 있어요.”
준호는 기대하는 얼굴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안 올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고.”
“기다릴 거예요?”
준호는 작은 접시를 떠올렸다.
“자리는 둘 거다.”
“밥그릇 말고요?”
“접시.”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가 왔다.
안내원이 문을 열며 말했다.
“망월리에서 어디까지?”
서윤은 도시 이름을 말했다.
버스에 오르기 전 준호를 돌아보았다.
“외할아버지.”
“왜?”
“방송에서 잘린 마지막 말, 기억해요.”
“어떤 말?”
“내일은 다시 도망칠 수도 있다는 말.”
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서윤은 말했다.
“내일 도망치더라도 모레 다시 오면 되잖아요.”
준호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누가 가르쳐 줬니?”
“아무도요.”
그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떠난 뒤, 준호는 절하는 전봇대 아래 오래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작은 접시 위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서윤이 쓴 글씨였다.
기다리지 말라는 말은
자리를 없애라는 뜻이 아니다.
준호는 그 문장을 이름보에 옮기지 않았다.
작은 접시 아래에 그대로 두었다.
그날 밤 텔레비전 화면이 저절로 켜졌다.
방송은 끝난 뒤였다.
화면에는 아무 프로그램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이름을 찾지 못한 서른여섯 개의 점이 별처럼 떠 있었다.
한 점씩 화면 가장자리로 움직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서윤의 얼굴이 나타났다.
입이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말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준호는 화면 가까이 갔다.
입 모양을 읽었다.
아직 끝내지 마세요.
화면이 꺼졌다.
검은 화면에 준호의 얼굴이 비쳤다.
이번에는 젊은 얼굴도,
영웅의 얼굴도,
도망자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날 저녁 손녀를 배웅하고 돌아온 늙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준호는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서윤이 다녀간 뒤 그는 알았다.
기억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
과거가 정해 준 얼굴을 거절할 권리를 남겨 두는 일이기도 했다.
검은 돌의 네 번째 잎은 완전히 펼쳐졌다.
그 옆에서 다섯 번째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누가 올 것인지 묻지 않았다.
사람이 오기 전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법을
가족도 조금씩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2장: 마지막 이름을 찾는 사람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잃어버린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사람을 찾는 사람보다
찾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망월리에서는 조금 달랐다.
그 집은
아직 이름을 찾고 있었다.
서윤이 떠난 뒤
부엌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누군가가 없어졌을 때보다,
누군가가 다시 살아가기 시작했을 때
집은 더 조용해지는 법이었다.
작은 접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제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접시가 아니라,
누군가가 다시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한 접시였다.
준호는 매일 그 접시를 닦았다.
밥은 담지 않았다.
도현은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교수들이 가르치는 역사보다
할머니의 이름보가
더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전쟁을 숫자로 배웠다.
몇 명이 죽었고,
몇 명이 피난 갔고,
몇 년에 끝났는지를 외웠다.
도현은 늘 같은 생각을 했다.
숫자는 사람을 설명하지 못한다.
사람이 숫자를 설명한다.
방학이 되자
도현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오래된 상자를 하나 들고 왔다.
전국 각지에서 모은 자료였다.
피난민 명단.
실종자 명단.
신문 스크랩.
낡은 사진.
도현은 이름보 옆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이제 시작해 봅시다."
준호가 웃었다.
"뭘?"
"점들을 이름으로 바꾸는 일."
미란은 말했다.
"다 찾을 수는 없어."
"알아요."
"그런데 왜?"
도현은 대답했다.
"한 사람이라도."
그 말은
예전 준호가 했던 말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조금 달랐다.
준호는 살아남기 위해
한 사람을 구하려 했고,
도현은 기억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을 찾으려 했다.
그들은 작업을 시작했다.
점 하나.
사진 한 장.
신문 한 줄.
오래된 주민등록부.
교회 세례 명부.
학교 졸업앨범.
라디오 사연.
무덤 이름.
편지 끝에 적힌 주소.
하루 종일 찾아도
이름 하나도 나오지 않는 날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도 실망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모른다는 것이 실패였지만,
이제는
찾고 있다는 사실이
희망이 되었다.
준호는 거의 걷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억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저 사람은 왼손으로 밥을 먹었어."
"저 아이는 웃을 때 앞니가 하나 없었지."
"그 여자는 늘 문턱에서 신발을 벗었어."
미란은 웃었다.
"이름은 기억 안 나시면서요."
준호도 웃었다.
"사람은 이름보다 버릇이 오래 남더라."
그 말 덕분에
도현은 새로운 방법을 생각했다.
이름을 찾지 말고
버릇을 찾자.
신문에 작은 광고를 냈다.
혹시 이런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왼손으로 밥을 먹던 사람.
항상 문턱에서 신발을 가지런히 놓던 사람.
웃을 때 앞니 하나가 없던 아이.
전쟁 중
망월리를 지나간 적이 있는 사람.
몇 주 뒤,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우리 외삼촌 같습니다."
"문턱에서 신발을 벗던 분은 우리 어머니였습니다."
"앞니가 없던 아이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점 하나가
이름이 되었다.
또 하나가
사진이 되었다.
또 하나는
손녀가 찾아왔다.
몇 달 동안
마흔세 개 점 가운데
스물셋 개가 이름을 되찾았다.
아직 스무 개가 남았다.
도현은 말했다.
"절반도 못 찾았네요."
준호가 고개를 저었다.
"절반이나 찾았구나."
그날 밤
검은 돌의 다섯 번째 싹이
처음으로 꽃봉오리를 만들었다.
잎만 자라던 돌에서
처음 꽃이 피려 하고 있었다.
아무도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미란이 물었다.
"왜 이제 꽃이 피죠?"
준호가 한참 돌을 바라보다 말했다.
"기억이...
이제 앞으로 자라기 시작했나 보다."
며칠 뒤
도현은 이상한 편지를 받았다.
보낸 사람도,
주소도 없었다.
봉투 안에는
사진 한 장.
젊은 준호와
이름을 모르는 군인 하나가
함께 웃고 있었다.
사진 뒤에는
짧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서로 이름을 몰랐다.
그래도 끝까지 함께 걸었다.
도현은 그 사진을 준호에게 가져갔다.
준호는 오래 바라보다가 말했다.
"생각난다."
"누구예요?"
"모른다."
"아직도요?"
"그래."
준호는 사진을 가슴에 안았다.
"그런데...
이 사람을 정말 좋아했어."
도현은 웃었다.
"이름도 모르는데요?"
준호도 웃었다.
"좋아하는 데 이름이 꼭 필요하진 않더라."
며칠 뒤
그 군인의 이름이 발견되었다.
최동식.
사진을 본
그의 손자가 연락해 온 것이다.
손자는 망월리를 찾아왔다.
그는 사진을 보자마자 울었다.
"할아버지가 늘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에서
이름도 모르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고."
준호는 떨리는 손으로 손자를 잡았다.
"나도 그 친구 이름을
이제야 알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숟가락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은
진실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는 날이었다.
그날 밤
이름보에는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이름은
사람을 다시 살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끝까지 찾았다는 사실은
죽은 사람도
외롭게 두지 않는다.
며칠 뒤
준호는 도현을 불렀다.
"검은 돌."
"네."
"가져와."
도현은 조심스럽게 돌을 안았다.
준호는 손을 올렸다.
"이 돌은...
우리 집 것이 아니다."
모두가 놀랐다.
"그럼 누구 거예요?"
준호가 웃었다.
"다음 사람 거다."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호는 손을 떼며 말했다.
"기억도 그렇다."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잠깐 맡고 있는 것이다."
그날 새벽
준호는 잠든 채 세상을 떠났다.
놀랍게도
집 안에서는
아무 숟가락도 떨리지 않았다.
검은 돌도 울지 않았다.
금 간 그릇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조용했다.
도현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작은 접시를 보았다.
접시 위에는
따뜻한 밥 한 숟갈이 놓여 있었다.
아무도 담지 않았는데.
그 옆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이번에는
기다리지 말고
함께 먹자.
준호의 장례가 끝난 뒤
가족들은 이름보를 펼쳤다.
준호 이름 아래에는
새로운 문장이 하나만 있었다.
강준호는
마침내
자기 이름으로
죽었다.
그날 아침
검은 돌의 다섯 번째 꽃이
처음으로 피었다.
꽃잎은 흰색도,
붉은색도 아니었다.
오래된 편지 종이처럼
희미한 빛을 띠고 있었다.
꽃 가운데에는
작은 거울이 하나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기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아직 누군가에게
기억되지 못한 사람이 보였다.
도현은 그 거울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다음 사람을 찾으러 갑시다."
꽃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람이 불자
이름보의 빈칸들이
아주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것처럼.
맺는 글
망월리의 가족은 처음에는 기억이 과거를 지키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의 밥을 차리고, 사라진 사람의 구두를 보관하고, 행정 기록이 지운 이름을 천 위에 다시 수놓았다. 잊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기다리는 것이 충성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가족은 기억에도 폭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기억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이미 완성된 얼굴을 씌울 수 있었다. 가족은 서윤이 오기 전에 그녀를 강준호의 손녀로 기록했고, 신문은 준호를 피해자와 영웅과 배신자로 정리했으며, 텔레비전은 한 사람을 구한 장면만 남기고 그가 다른 사람들을 두고 도망친 다음 장면을 잘라 냈다.
거짓말만이 진실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만 말하는 것,
너무 아름답게 정리하는 것,
상대가 도착하기 전에 그의 이야기를 끝내는 것도 진실을 훼손했다.
그래서 이 가족이 마지막에 배운 것은 더 많이 기억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어디에서 멈출지,
어디에 빈칸을 둘지,
그리고 다음 사람이 자기 목소리로 고칠 수 있도록 기록을 미완성으로 남기는 방법이었다.
강준호는 자신의 잘못을 완전히 갚지 못했다. 버린 딸에게 용서받지도 못했고, 이름을 찾지 못한 모든 사람을 찾아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죄책감을 가족에게 상속하는 대신, 책임을 행동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가 남긴 말처럼,
미안함은 밥이 아니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끝없이 사과하는 일이 아니라, 용서받지 못하더라도 찾아야 할 사람을 찾고, 해야 할 일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강준호가 죽은 뒤에도 이름보에는 스무 개의 점이 남았다.
그 실패는 결말의 결함이 아니다.
그 점들은 이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기억은 한 세대가 끝내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이름을 찾으면, 그 뒤에 또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한 가족의 상처를 기록하면, 그 기록에서 빠진 다른 가족의 목소리가 나타난다. 과거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와서 그 이해를 고친다.
검은 돌에 핀 꽃은 가족에게 과거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아직 기억되지 못한 사람을 보여 주었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마지막 변화다.
가족은 더 이상 조상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은 미래를 향해 자리를 만든다.
죽은 사람을 위한 금이 간 그릇,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위한 빈 밥그릇,
아직 올지 결정하지 않은 사람을 위한 작은 접시.
망월리의 밥상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살아 있다.
그리고 어쩌면 모든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족보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 자기 이름을 말할 때까지 비워 둘 수 있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강이문
한여름에 내리는 눈을 따라 망월리에 도착한 집안의 시조. 백연화와 결혼해 검은 돌 위에 집을 짓지만, 이전 아내와 딸을 버렸다는 비밀을 남긴다. 그의 선택은 이후 세대가 반복해서 마주해야 하는 버림과 기억의 시작이 된다.
백연화
강이문의 아내이자 검은 돌 있는 집의 첫 안주인. 금이 간 흰 그릇과 오지 않은 사람을 위한 밥상을 지킨다. 그녀가 시작한 빈자리의 관습은 세대를 지나 죽은 사람, 실종자,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을 위한 자리로 발전한다.
강연옥
죽은 장도윤과 혼인한 여자. 강이문이 버린 첫째 딸의 이름을 물려받았으며, 집안이 숨겨 온 최초의 상처를 드러낸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삶을 명령해서는 안 된다는 진실을 가장 먼저 말한다.
장도윤
죽은 뒤 강연옥과 혼인한 남자. 그의 존재는 사랑과 의무,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의 경계를 흔든다. 그의 놋숟가락은 가족이 삼킨 진실을 오래 기억한다.
윤서진
강준서와 강준호의 어머니. 전쟁 중 어느 편의 군인이든 밥을 먹이고, 실종된 두 아들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기다림을 자식의 빚으로 만들지 않았으며, “미안함은 밥이 아니다”라는 편지로 준호에게 책임과 삶의 차이를 가르친다.
강준서
기록과 행정 속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지키려 한 형. 동생 준호를 수십 년 동안 기다리며 ‘생사 미상’이라는 새로운 상태를 만든다. 돌아온 동생을 받아들이는 일이 기다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을 배운다.
강준호
전쟁 뒤 여러 이름으로 살아남은 실종자. 김정수, 박영길, 최만복이라는 이름을 거치며 영웅과 비겁자, 피해자와 가해자의 얼굴을 함께 가진다. 오랜 세월 뒤 집으로 돌아와 딸과 손녀, 그리고 이름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마주한다. 마지막에는 마침내 자기 이름으로 죽는다.
박만식
전쟁 뒤 검은 돌 있는 집에 들어와 살게 된 피난민. 강씨 가족과 집을 나누며 혈연이 아닌 사람도 집의 기억에 포함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가족과 강씨 가족이 함께 집에 들어가는 순간, 집은 소유보다 공동의 삶을 선택한다.
강미란
교사이자 기자이며 이름보의 새로운 기록자. 가족의 숨겨진 역사를 세상에 알리지만, 공개된 이야기가 사람을 찾는 동시에 상처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기록할 권리와 멈출 책임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한다.
박성호
미란의 남편이자 전기 기술자. 전기가 기억을 모두 밝혀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며, 등잔과 녹음기, 오래된 나사들을 보존한다. 가족의 무거운 역사 속에서 현실적인 유머와 조용한 배려를 담당한다.
박도현
미란과 성호의 아들. 얼굴을 알지 못한 강준호를 ‘신발 할아버지’로 기억한 아이이며, 성장한 뒤 역사 자료를 모아 이름보의 검은 점들을 실제 이름으로 되돌리는 일을 시작한다. 모르는 것을 억지로 완성하지 않는 새로운 기록자의 태도를 보여 준다.
박하진
강준호가 박영길이라는 이름으로 살던 시절 낳은 딸. 아버지 없이 살아온 삶을 아버지의 귀환 때문에 잘못된 것으로 만들기를 거부한다. 준호를 즉시 용서하지 않지만, 딸 서윤이 자기 과거를 직접 볼 권리는 인정한다.
서윤
박하진의 딸이자 강준호의 손녀. 가족이 자신을 만나기 전에 만들어 둔 얼굴을 거부한다. 이름보와 가족사진을 직접 고치며, 기억은 복종이 아니라 수정할 권리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를 무조건 용서하지도, 쉽게 심판하지도 않는 다음 세대의 목소리다.
오명희
준호가 박영길로 살던 시절의 아내이자 하진의 어머니. 남편의 여러 신분증을 발견한 뒤, 이름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살 수 있어도 얼굴을 숨기는 사람과는 살 수 없다고 말한다. 딸을 데리고 떠남으로써 준호가 외면한 책임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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