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ip to main content
  • Skip to primary sidebar
  • Skip to footer
TableTalk

TableTalk

박경리 『토지』 인물 대화: 최서희와 김길상이 묻는 고향, 한, 사랑 그리고 삶

September 10, 2026 by 신일 문 Leave a Comment

들어가는 글

박경리의 『토지』는 땅을 둘러싼 이야기이면서,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인간이 무엇을 잃고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 작품이다.

평사리의 최참판댁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한 가족의 몰락과 복수에 머물지 않는다.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사랑하면서도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 나라를 빼앗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하루를 견딘 사람들의 삶으로 넓어진다.

이번 대화에서는 『토지』의 주요 인물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다섯 가지 질문과 마주한다.

고향은 땅인가, 사람인가, 기억인가.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상처도 치유되는가.

한은 사람을 무너뜨리는가, 아니면 살아가게 하는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많은 것을 잃고도 인간은 왜 계속 살아가는가.

최서희, 김길상, 이용, 공월선, 김환, 조준구.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그들이 선택한 삶은 모두 달랐다.

누군가는 되찾으려 했고, 누군가는 떠났으며, 누군가는 기다렸고, 누군가는 사랑했고, 누군가는 빼앗았고, 누군가는 그저 하루를 버텼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토지』라는 제목도 조금씩 다른 뜻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소유해야 할 땅이었다.

그다음에는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되었다.

그리고 기억과 가족, 한과 역사를 담는 장소가 되었다.

마지막에는 한 가지 질문만 남는다.

과연 사람이 땅을 소유하는 것일까.

아니면 땅이 수많은 인간의 삶을 잠시 받아 주고, 다음 세대로 넘겨주는 것일까.


Table of Contents
들어가는 글
Topic 1: 고향은 장소인가, 사람인가, 기억인가
Topic 2: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상처도 치유되는가
Topic 3: 한은 우리를 무너뜨리는가, 살아가게 하는가
Topic 4: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Topic 5: 그래도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
마지막 글

Topic 1: 고향은 장소인가, 사람인가, 기억인가

park kyungni toji

해가 지고 있었다.

평사리 들판 너머로 마지막 햇빛이 길게 누웠다. 섬진강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벼 사이를 지나 오래된 최참판댁 마당까지 올라왔다.

아무도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서희는 마당 끝에 서서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상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용이는 마당 한쪽의 흙을 발끝으로 천천히 밟았다. 월선은 말없이 먼 산을 바라보았고, 김환은 오래전에 사라진 누군가를 찾듯 낡은 기둥에 손을 얹었다.

조준구만이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조준구: 결국 다시 왔군.

서희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서희: 어디로요?

조준구: 뭐?

서희: 어디로 돌아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조준구가 피식 웃었다.

조준구: 여기가 평사리 아니냐. 최참판댁이고. 네가 그렇게 되찾고 싶어 했던 땅이고.

그제야 서희가 천천히 돌아섰다.

서희: 땅이 그대로 있다고 해서, 그곳이 예전의 고향입니까?

조준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길상이 들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길상: 사람은 없지.

서희가 길상을 바라보았다.

길상: 집은 남아 있을 수 있어. 산도 남아 있고, 강도 흐르지.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없어.

용이가 낮게 웃었다.

용이: 그러면 고향은 사람이란 말인가?

길상: 모르겠소.

용이: 나도 모르겠네.

월선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월선: 나는 알아요.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월선: 내 고향은 사람이었어요.

용이의 표정이 굳었다.

월선은 그를 보지 않았다.

월선: 그래서 더 힘들었어요. 땅은 찾아갈 수 있잖아요. 집도 찾아갈 수 있고. 산도 멀리서라도 볼 수 있고. 그런데 사람이 고향이 되어 버리면...

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

월선: 그 사람에게 돌아갈 수 없을 때는 어디로 가야 해요?

용이가 고개를 숙였다.

서희가 월선을 오래 바라보았다.

평사리의 저녁바람만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Question 1

고향을 고향으로 만드는 것은 땅인가, 사람인가, 기억인가?

서희: 나는 오랫동안 땅이라고 생각했어요.

길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빼앗겼으니까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집도, 논도, 밭도. 최씨 집안의 것이었으니까.

조준구: 역시 땅이었군.

서희가 차갑게 그를 바라보았다.

서희: 끝까지 들으세요.

조준구가 입을 다물었다.

서희: 그런데 되찾고 나서 알았어요. 내가 원했던 것은 땅만이 아니었다는 걸.

길상: 무엇이었소?

서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서희: 어머니였을지도 모르고... 어린 시절이었을지도 모르고...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서희: 아무 일도 일어나기 전의 나였을지도 모르죠.

길상의 눈빛이 달라졌다.

서희: 나는 땅을 되찾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줄 알았어요.

용이: 돌아가지 않더군.

서희: 네.

용이: 사람은 땅처럼 되찾을 수 없으니까.

조준구가 팔짱을 꼈다.

조준구: 그러면 이상하지 않나? 그렇게까지 땅을 되찾으려고 살았으면서, 이제 와서 땅이 중요하지 않았다고?

서희: 중요하지 않았다고 한 적 없습니다.

조준구: 그럼?

서희: 땅이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었던 겁니다.

김환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김환: 맞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김환: 사람들은 땅을 밟고 산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땅에는 죽은 사람도 함께 산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김환: 어머니가 걸었던 길. 사랑했던 사람이 앉았던 자리. 아이가 뛰놀던 마당.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방. 그런 것들이 다 땅에 붙어 있다.

월선: 그래서 어떤 곳에 가면 갑자기 가슴이 아픈가 봐요.

김환: 기억이 먼저 알아보니까.

용이가 월선을 바라보았다.

월선은 여전히 그를 보지 않았다.

용이: 나는 평생 땅에서 일했네. 그런데 내 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별로 없었어.

그가 흙을 한 줌 집었다.

용이: 이상하지. 내 것이 아닌 땅에서 평생 땀을 흘렸는데도 이 흙 냄새를 맡으면 집에 온 것 같으니.

서희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그녀에게 그 말은 불편한 진실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평사리는 빼앗긴 소유지였다.

용이에게 같은 평사리는 평생 일했던 삶의 자리였다.

서희: 그러면 이 땅은 누구의 고향이었을까요?

용이가 웃었다.

용이: 그걸 이제 묻는군.

서희도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용이: 최씨 집안만의 것은 아니었겠지.

조준구가 말했다.

조준구: 결국 내 말도 조금은 맞다는 건가? 땅에 이름을 써 놓았다고 영원히 그 사람 것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

서희가 그를 보았다.

서희: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 참 편리하게 들리는군요.

용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월선도 작게 웃었다.

긴장했던 공기가 잠깐 풀렸다.

길상이 말했다.

길상: 어쩌면 고향은 땅, 사람, 기억 가운데 하나가 아닌 것 같소.

서희: 그러면요?

길상: 셋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던 시간.

서희는 다시 들판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Question 2

고향을 떠난 사람은 정말 그곳에서 떠날 수 있는가?

김환이 천천히 마당을 걸었다.

김환: 떠나는 건 어렵지 않다.

길상: 돌아오는 게 어렵지.

김환: 아니.

길상이 그를 바라보았다.

김환: 정말 떠나는 게 어렵다는 말이다.

그는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김환: 몸은 떠날 수 있어. 여기서 간도로 갈 수도 있고, 서울로 갈 수도 있고, 바다를 건널 수도 있지. 그런데 여기 있는 것은 같이 간다.

서희: 기억.

김환: 기억만이 아니야.

월선: 한도 따라가죠.

김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김환: 그렇지.

월선은 이번에는 용이를 바라보았다.

월선: 사람도 따라가요.

용이가 숨을 들이마셨다.

월선: 실제 사람이 아니라 마음속의 사람이요.

용이: 월선아...

월선: 괜찮아요. 이제는 말할 수 있어요.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월선: 나는 여러 번 당신을 잊어 보려고 했어요.

용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월선: 미워하면 잊을 수 있을 줄 알았고, 체념하면 잊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 되더라고요.

용이: 미안하다.

월선이 고개를 저었다.

월선: 지금 사과를 받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월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에요. 어떤 사람은 고향을 떠나도 고향을 등에 지고 다녀요. 어떤 사람은 사람 하나를 마음에 넣고 평생 데리고 다니고요.

서희가 조용히 말했다.

서희: 나도 평사리를 가지고 간도로 갔던 것 같아요.

길상: 그랬소.

서희: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

길상: 당신이 평사리를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알고 있었소.

서희: 왜 말하지 않았어요?

길상: 당신에게는 돌아올 이유가 필요했으니까.

서희: 복수였어요.

길상: 처음에는.

서희의 얼굴이 굳었다.

길상: 나중에는 아니었소.

서희: 무엇이었는데요?

길상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길상: 당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으려 했던 것 같소.

그 말에 서희가 침묵했다.

조준구가 이번에는 비웃지 않았다.

용이가 말했다.

용이: 그러면 고향이라는 건 참 무서운 거구먼.

월선: 왜요?

용이: 아무리 멀리 도망가도 따라오잖아.

김환이 말했다.

김환: 그래서 고향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지.

서희: 살린다고요?

김환: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견디는 사람도 있으니까.

월선: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요?

김환: 그럴 때가 더 많지.

Question 3

돌아온 고향이 기억 속의 고향과 다르다면, 그래도 고향인가?

어느새 해는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서희가 천천히 옛집의 기둥을 만졌다.

서희: 이상하네요.

길상: 무엇이?

서희: 그렇게 돌아오고 싶었는데...

그녀가 마당을 둘러보았다.

서희: 돌아와 보니 내가 기억했던 곳이 아니에요.

용이: 집이 변해서?

서희가 고개를 저었다.

서희: 내가 변해서.

그 말에 모두 조용해졌다.

서희: 어린 서희가 이 마당을 보던 눈과 지금 내가 보는 눈은 다르잖아요.

월선이 말했다.

월선: 그러면 우리가 돌아가는 고향은 실제로는 없는 걸까요?

김환: 있을 수도 있지.

월선: 어디에요?

김환이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가 가슴을 가리켰다.

김환: 여기와 여기.

조준구가 말했다.

조준구: 그러면 땅은 필요 없다는 말 아닌가?

이번에는 서희가 화내지 않았다.

서희: 아니요.

조준구: 또 아니라고?

서희: 실제 장소가 있으니까 기억도 돌아갈 곳이 있는 겁니다.

그녀는 마당의 흙을 내려다보았다.

서희: 이 땅이 내 기억과 똑같을 필요는 없어요.

길상이 조용히 물었다.

길상: 그러면 무엇이면 되오?

서희는 한참 생각했다.

서희: 내가 여기서 살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곳.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문장이 모두에게 다른 의미로 닿았다.

용이에게는 노동이었다.

월선에게는 사랑이었다.

김환에게는 떠돌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

길상에게는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기억이었다.

조준구에게는 자신이 차지하려 했던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묻는 말이었다.

길상이 서희 옆으로 다가왔다.

길상: 이제 돌아온 것 같소?

서희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오래 생각한 뒤 말했다.

서희: 모르겠어요.

길상이 미소를 지었다.

길상: 그게 당신답군.

서희도 조금 웃었다.

그러다 그녀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서희: 그런데 한 가지는 알 것 같아요.

월선: 무엇을요?

서희: 나는 평생 이 땅을 되찾으려고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잠시 조준구를 바라보았다.

조준구도 피하지 않았다.

서희: 그런데 지금 여기 서 있으니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용이: 무슨 생각?

서희가 천천히 말했다.

서희: 내가 정말 되찾고 싶었던 것은...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서희: 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조준구가 눈을 좁혔다.

조준구: 그럼 뭐였는데?

서희가 대답하지 않았다.

길상도 대신 답하지 않았다.

월선도 기다렸다.

서희는 오래전 가족들이 걸었던 마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서희: 빼앗기기 전의 나.

바람이 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준구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자신만만한 표정이 사라졌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증오만 있는 눈이 아니었다.

서희: 그러니 이제 당신에게 물어봐야겠군요.

조준구: 나한테?

서희: 네.

서희가 한 걸음 그에게 가까이 갔다.

서희: 당신에게 빼앗긴 것을 모두 되찾았을 때...

잠시 침묵했다.

서희: 왜 내 상처는 그대로였을까요?

평사리에는 완전히 밤이 내려앉았다.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이미 다음 이야기를 열고 있었다.

다음 Topic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상처도 치유되는가

Topic 2: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상처도 치유되는가

park kyungni toji

서희: 당신에게 빼앗긴 것을 모두 되찾았는데……

서희는 조준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서희: 왜 내 상처는 그대로였을까요?

조준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평사리 들판을 지나던 바람이 멎은 듯했다.

용이가 조준구를 바라보았다.

길상은 서희 곁에 서 있었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월선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조준구가 입을 열었다.

조준구: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서희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조준구: 네 상처가 낫지 않은 것까지 내 책임인가?

서희: 무슨 뜻이죠?

조준구: 네가 원한 것은 되찾았잖아.

서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준구: 땅도 되찾았고, 재산도 되찾았고, 다시 최씨 집안의 주인이 되었어. 나도 잃을 만큼 잃었고.

그가 잠시 멈췄다.

조준구: 그런데 이제 와서 네 마음까지 내가 고쳐 놓으라고?

서희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길상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길상: 서희.

서희는 멈췄다.

하지만 조준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서희: 당신은 아직도 모르는군요.

조준구: 뭘?

서희: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준구: 땅 아니었나?

서희: 가족이었습니다.

조준구가 입을 다물었다.

서희: 어린 시절이었고, 집이었고, 내가 세상을 믿을 수 있었던 마음이었어요.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무거웠다.

서희: 당신은 땅을 빼앗았다고 생각했겠죠.

잠시 침묵했다.

서희: 나는 세상을 빼앗겼습니다.

Question 1

빼앗긴 것을 되찾는 것은 정의인가, 복수인가?

조준구가 헛웃음을 지었다.

조준구: 결국 나를 심판하려는 자리였군.

서희: 심판받을 일이 없었다고 생각합니까?

조준구: 내가 잘했다는 말은 아니야.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조준구: 하지만 한 가지는 묻고 싶군.

용이: 물어봐.

조준구가 평사리 들판을 가리켰다.

조준구: 저 땅은 원래 누구 것이었지?

서희: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조준구: 최씨 집안 것이었나?

서희: 그랬습니다.

용이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조준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조준구: 정말?

그가 용이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저 땅에서 평생 일한 사람은 누구였지?

서희가 조준구를 노려보았다.

조준구: 씨를 뿌린 사람은? 벼를 벤 사람은? 겨울을 견디고 다시 밭으로 나온 사람은?

용이: 우리 같은 사람들이었지.

조준구: 그런데 땅은 최씨 집안 것이었다.

서희: 그래서 당신이 빼앗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조준구: 그런 말이 아니야.

서희: 바로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조준구: 아니.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내가 남의 것을 탐냈다고 말하지. 맞아. 탐냈다. 그런데 땅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욕망 위에 세워진 것 아닌가?

길상: 자기 욕망을 설명하는 것과 정당화하는 것은 다르오.

조준구가 길상을 바라보았다.

조준구: 너는 언제나 그렇게 깨끗한 척하는군.

길상: 깨끗하다고 한 적 없소.

조준구: 그러면?

길상: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해서 당신의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오.

조준구가 대답하려 했지만 용이가 먼저 말했다.

용이: 그래도 준구 말에 하나는 있네.

서희가 용이를 바라보았다.

용이: 아씨,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시오.

서희: 말씀하세요.

용이: 우리 같은 사람에게 땅은 이상한 것이었소.

그는 어둠 속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용이: 우리가 평생 갈고 심고 거두어도 우리 것은 아니었으니까.

서희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용이: 그러니 최씨 집안이 땅을 되찾은 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오. 준구가 한 짓이 옳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고.

그가 서희를 바라보았다.

용이: 다만 아씨에게는 '되찾은 땅'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땅이었다는 거요.

서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희: 맞습니다.

조준구가 놀란 듯 그녀를 보았다.

서희: 그것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조준구를 보았다.

서희: 하지만 당신이 저지른 일을 농민들의 삶 뒤에 숨기지는 마세요.

조준구의 얼굴이 굳었다.

서희: 당신은 그들을 위해 땅을 원한 것이 아니니까.

침묵.

서희: 당신 자신을 위해 원했죠.

조준구는 반박하지 않았다.

월선이 조용히 말했다.

월선: 그러면 같은 땅을 원해도 마음은 다를 수 있겠네요.

길상: 그렇소.

월선: 빼앗긴 것을 돌려받으려는 마음과,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마음.

김환: 그리고 그 둘 사이에도 욕망은 있다.

서희가 김환을 바라보았다.

김환: 정의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드물다. 복수만으로 움직이는 사람도 드물고.

서희: 그러면 나는 어느 쪽이었다고 생각하세요?

김환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김환: 둘 다였겠지.

서희의 눈이 흔들렸다.

길상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김환: 되찾아야 할 것은 있었다. 그것은 정의였을 것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김환: 그러나 준구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을 테고.

서희는 부정하지 않았다.

서희: 있었습니다.

조준구가 그녀를 보았다.

서희: 아주 많이.

Question 2

나를 괴롭힌 사람이 고통받으면 내 상처는 조금이라도 나아지는가?

조준구가 천천히 물었다.

조준구: 그래서?

서희가 그를 보았다.

조준구: 내가 무너졌을 때 기뻤나?

서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준구: 솔직히 말해 봐.

서희: 기뻤습니다.

월선이 서희를 바라보았다.

서희는 피하지 않았다.

서희: 당신이 가진 것을 잃었을 때 기뻤어요.

조준구의 턱이 굳어졌다.

서희: 당신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느꼈던 두려움을 당신도 느끼기를 바랐어요.

조준구: 만족했겠군.

서희: 잠깐은.

그 한마디에 조준구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준구: 잠깐?

서희: 네.

조준구: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서희: 그래서 더 이상했습니다.

서희가 마당을 바라보았다.

서희: 평생 기다린 순간이 왔는데, 생각했던 만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월선: 마음이요?

서희: 네.

서희: 그날 밤에도 죽은 사람들은 죽어 있었어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희: 내 어린 시절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가 조준구를 보았다.

서희: 당신이 불행해져도 내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더군요.

조준구가 처음으로 시선을 피했다.

용이가 낮게 말했다.

용이: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하지.

월선: 무엇이요?

용이: 우리를 아프게 한 사람이 아프면 내 아픔도 줄어들 것 같잖아.

월선: 네.

용이: 그런데 아픔이 둘이 될 뿐일 때가 있어.

월선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월선: 그래도 억울한 사람에게 "복수하지 마세요"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어요.

길상: 그렇소.

월선: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용서를 말하면 너무 쉽잖아요.

서희가 월선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처음으로 따뜻함이 보였다.

서희: 맞아요.

길상이 서희에게 말했다.

길상: 나는 당신에게 용서하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소.

서희: 알고 있어요.

길상: 용서는 명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김환이 말했다.

김환: 더구나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면 안 된다.

월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상처 입은 사람에게 또 하나의 짐을 주는 셈이니까.

조준구가 씁쓸하게 웃었다.

조준구: 이상한 자리군. 아무도 나를 용서하라고 하지 않네.

서희: 받고 싶습니까?

그 질문에 조준구가 멈췄다.

서희: 내 용서가 필요합니까?

조준구: 필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이번에는 서희가 놀랐다.

조준구: 하지만 네가 용서한다고 해서 내가 했던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서희: 맞습니다.

조준구: 그러면 용서라는 게 무슨 소용이지?

월선이 조용히 대답했다.

월선: 어쩌면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닐지도 몰라요.

조준구: 그러면?

월선은 서희를 바라보았다.

월선: 살아남은 사람이 계속 살아가기 위한 것일 수도 있죠.

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Question 3

용서하지 않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서희: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갑작스러웠다.

조준구가 서희를 바라보았다.

길상도 그녀를 보았다.

서희: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나는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조준구: 예상했어.

서희: 하지만……

서희가 숨을 들이쉬었다.

서희: 이제 당신 때문에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조준구의 표정이 변했다.

서희: 예전에는 달랐어요. 당신에게서 땅을 되찾는 것이 내 삶의 이유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녀는 평사리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서희: 그러면 결국 내 삶의 중심에 당신이 있었던 겁니다.

조준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희: 당신을 미워하면서도, 내 인생을 당신에게 묶어 두고 있었던 거죠.

길상이 아주 조용히 말했다.

길상: 그 끈을 놓는 것이 용서와 같을 필요는 없소.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용서하지 않아도 놓을 수 있소.

월선: 잊지 않아도요?

길상: 잊지 않아도.

김환: 미워하지 않는 것과 잊는 것도 다르지.

용이가 말했다.

용이: 그럼 용서도 안 하고, 잊지도 않고, 그래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건가?

김환: 사람은 실제로 그렇게 많이 살아간다.

월선이 희미하게 웃었다.

월선: 그러네요.

용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월선: 나는 잊지 않았어요.

용이의 얼굴이 굳었다.

월선: 당신도, 내가 아팠던 것도.

용이: 월선아……

월선: 그런데 그 아픔만으로 살지는 않았어요.

용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월선: 그것도 살아가는 것이겠죠.

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그렇지.

조준구가 서희에게 물었다.

조준구: 그러면 나는 이제 네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가?

서희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서희: 아니요.

조준구가 뜻밖이라는 듯 눈을 들었다.

서희: 당신은 내가 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서희: 하지만 이제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닙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조준구가 처음으로 서희의 눈을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용이가 낮게 말했다.

용이: 사람을 미워하는 데도 힘이 많이 들지.

월선: 사랑하는 것만큼요?

용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용이: 어쩌면 더 많이.

월선이 씁쓸하게 웃었다.

김환: 그런데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길상: 무엇이오?

김환이 서희를 바라보았다.

김환: 놓는다고 해서 상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잖아.

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잊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고, 용서하지 않고도 앞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상처는 남는다.

월선: 그러면 그 상처는 어디로 가죠?

김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희가 말했다.

서희: 없어지지 않는다면……

그녀는 자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서희: 결국 여기 남겠죠.

월선도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월선: 오래 남아 있는 슬픔.

용이가 말했다.

용이: 말하지 못한 마음.

길상이 덧붙였다.

길상: 잊을 수 없는 사람.

김환이 말했다.

김환: 갚지 못한 원한도.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조준구가 낮게 말했다.

조준구: 후회도 있겠지.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준구는 아무도 보지 않았다.

평사리의 어둠 속에서 월선이 아주 천천히 한 단어를 말했다.

월선: 한.

아무도 그 말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서희가 월선을 바라보았다.

월선은 용이를 보았다.

김환은 어둠 너머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각자의 가슴속에는 서로 다른 한이 있었다.

그때 서희가 물었다.

서희: 그런데 한 가지가 궁금합니다.

길상: 무엇이오?

서희: 이 한이라는 것이……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서희: 우리를 평생 붙잡고 있는 걸까요?

월선이 조용히 물었다.

월선: 아니면 우리가 살아갈 힘이 되어 준 걸까요?

이번에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그들 모두의 삶을 향하고 있었다.

다음 Topic

한은 우리를 무너뜨리는가, 살아가게 하는가

Topic 3: 한은 우리를 무너뜨리는가, 살아가게 하는가

park kyungni toji

월선: 한.

그 한마디가 밤공기 속에 오래 남았다.

누구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같은 말을 알고 있다고 해서, 같은 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희에게는 빼앗긴 가족과 어린 시절이 있었다.

월선에게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있었다.

용이에게는 사랑하면서도 지키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

김환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운명이 있었다.

길상에게는 개인의 행복만을 바라볼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

조준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월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월선: 아까 서희 아씨가 물으셨죠.

서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한이 우리를 붙잡고 사는 건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지.

서희: 네.

월선이 희미하게 웃었다.

월선: 나는 오랫동안 한이 나를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용이가 고개를 들었다.

월선은 이번에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월선: 그런데 죽지는 않더라고요.

그 말이 너무 담담해서 더 아팠다.

월선: 아침이 오면 일어나야 했고, 배가 고프면 먹어야 했고, 누가 아프면 돌봐야 했어요.

그녀가 잠시 멈췄다.

월선: 마음은 끝난 것 같은데 몸은 계속 살아 있었어요.

용이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월선: 처음에는 그것이 잔인하다고 생각했어요.

서희: 무엇이요?

월선: 사람이 그렇게 슬픈데도 다음 날이 온다는 것이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월선: 그런데 나중에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어요.

길상: 어떻게?

월선은 어두운 들판을 바라보았다.

월선: 어쩌면 그게 생명인지도 모르겠다고.

Question 1

한은 잊어야 하는가, 품고 살아야 하는가?

용이: 잊을 수 있다면 잊는 게 낫지 않겠나.

월선이 그를 바라보았다.

용이는 그 시선을 견디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용이: 아니, 내가 할 말은 아니구나.

월선: 아니에요. 말해 보세요.

용이: 잊으면 덜 아프잖아.

월선: 그럴까요?

용이: 그렇지 않겠나?

월선은 한참 생각했다.

월선: 그런데 내가 당신을 잊으면……

용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아픈 것만 없어질까요?

용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월선: 좋았던 것도 같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침묵.

월선: 기다렸던 날도, 잠깐 행복했던 순간도, 당신이 나를 바라보던 눈도.

용이의 눈이 붉어졌다.

월선: 나는 아픔만 골라서 버릴 수가 없었어요.

서희가 조용히 말했다.

서희: 나도 그랬어요.

월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어머니를 잃은 기억을 없앨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김환: 그런데?

서희: 그 기억을 없애면 어머니까지 희미해질 것 같았어요.

김환의 표정이 굳었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서희: 그래서 붙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길상: 아픔을?

서희: 아니요.

잠시 생각했다.

서희: 사람을.

그 말에 월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월선: 맞아요.

서희: 그런데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픔까지 붙잡고 있었던 거죠.

김환이 낮게 말했다.

김환: 그게 한의 잔인한 점인지도 모르지.

용이: 무슨 말인가?

김환: 사랑과 아픔이 서로 엉켜 있어서 하나만 떼어낼 수 없다는 것.

길상이 물었다.

길상: 그러면 평생 품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오?

김환은 고개를 저었다.

김환: 품고 사는 것과 붙잡혀 사는 것은 다르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김환: 기억할 수는 있어. 그러나 그 기억에게 오늘의 삶까지 모두 내줄 필요는 없지.

월선이 아주 작게 말했다.

월선: 기억하되, 거기서 살지는 않는 것.

김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김환: 그래.

Question 2

한이 사라지면 나의 일부도 사라지는가?

조준구가 갑자기 웃었다.

크게 웃은 것은 아니었다.

조준구: 참 이상하군.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아까부터 너희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이라는 것이 무슨 귀한 유산이라도 되는 것 같아.

월선의 얼굴이 굳었다.

조준구: 아프면 버리면 되지. 왜 그렇게 소중하게 품고 있나?

서희가 차갑게 말했다.

서희: 버릴 수 있었으면 벌써 버렸겠죠.

조준구: 못 버린 건가, 안 버린 건가?

서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김환이 먼저 말했다.

김환: 좋은 질문이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김환: 정말 못 버린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버리지 않은 것인지.

서희: 내가 한을 원했다는 말입니까?

김환: 아니다.

그가 서희를 바라보았다.

김환: 다만 사람은 오래 품은 감정을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서희는 침묵했다.

김환: "나는 빼앗긴 사람이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김환: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다."

월선이 고개를 들었다.

김환: "나는 나라를 잃은 사람이다."

길상의 표정이 변했다.

김환: 그런 말이 너무 오래 계속되면, 어느 순간 사람은 묻게 된다.

용이: 뭘?

김환: 이것을 빼면 나는 누구인가.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서희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서희: 나는 오랫동안 "되찾아야 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길상: 알고 있소.

서희: 만약 되찾을 것이 없었다면……

그녀가 길상을 바라보았다.

서희: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을까요?

길상은 쉽게 답하지 않았다.

길상: 다른 이유를 찾았겠지.

서희: 그렇게 확신해요?

길상: 아니.

길상이 솔직하게 말했다.

길상: 하지만 당신의 생명은 복수보다 컸다고 믿소.

서희의 표정이 흔들렸다.

길상: 복수가 당신을 일으킨 날이 있었겠지. 분노가 당신에게 힘을 준 날도 있었을 것이오.

그는 서희를 바라보았다.

길상: 하지만 당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모든 것이 분노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서희: 그러면 무엇이었습니까?

길상: 사랑도 있었소.

서희가 말이 없었다.

길상: 죽은 사람을 사랑했고, 살아 있는 사람을 사랑했고, 지켜야 할 사람을 사랑했소.

월선이 말했다.

월선: 그러면 한이 사람을 살린 게 아니라……

길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한 속에 아직 사랑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걸까요?

이번에는 김환이 미소를 지었다.

김환: 그럴 수도 있겠지.

용이가 월선을 바라보았다.

용이: 그럼 네가 살아온 것도……

월선이 그의 말을 막았다.

월선: 당신 때문만은 아니에요.

용이가 멈췄다.

월선이 처음으로 조금 밝게 웃었다.

월선: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용이도 웃었다.

눈에는 아직 슬픔이 있었다.

월선: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많이 아팠어요. 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어요.

그녀는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월선: 나도 일했고, 사람을 돌봤고, 웃기도 했고, 다른 사람의 아픔도 보았어요.

그리고 용이를 바라보았다.

월선: 나는 당신을 사랑한 여자였지만, 그것만으로 끝나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용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이: 그래.

그 한마디에는 사과보다 더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Question 3

우리의 한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않고 끝낼 수 있는가?

길상이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길상: 개인의 한은 그래도 자기 가슴 안에서 끝낼 수 있을지 모른다.

김환이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그런데 나라의 한은 어떡하지?

아무도 가볍게 답하지 않았다.

길상: 나라를 빼앗겼다. 사람들이 죽었다. 고향을 떠났다. 이름과 말을 지키는 것조차 싸움이 되는 시대를 살았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길상: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잊으라고 할 수 있나?

서희: 안 됩니다.

대답은 단호했다.

서희: 잊어서는 안 됩니다.

월선: 그렇지만……

모두가 월선을 바라보았다.

월선: 미움까지 물려줘야 할까요?

서희의 표정이 멈췄다.

월선: 아이에게 "우리가 이렇게 아팠다"고 말하는 것과 "그러니 너도 저 사람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긴 침묵.

김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기억과 증오는 같은 것이 아니지.

길상: 역사를 잊지 않는 것과 증오를 의무로 만드는 것도 다르고.

용이: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서희: 무엇이요?

용이: 그렇게 깨끗하게 나눌 수 있겠느냐는 말이오.

그는 손으로 가슴을 가리켰다.

용이: 사람 마음이 책처럼 줄을 그어서 여기까지는 기억, 여기부터는 미움이라고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월선: 그렇죠.

용이: 부모가 울면서 이야기하면 아이는 그 눈물까지 기억할 거요.

서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용이의 말은 너무 현실적이었다.

김환이 말했다.

김환: 그래서 어려운 거다.

서희: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환은 한동안 생각했다.

김환: 사실을 말해야겠지.

서희: 그리고요?

김환: 아팠다고 말하고.

길상: 빼앗겼다고 말하고.

월선: 죽은 사람들의 이름도 기억하고.

용이: 그런데?

김환이 모두를 바라보았다.

김환: 다음에 무엇을 할지는 그 아이에게 남겨 두는 거다.

서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김환: 우리의 한을 아이의 운명으로 만들지 않는 것.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서희에게 깊이 들어갔다.

서희: 나는 내 아이들에게……

그녀가 말을 멈췄다.

길상이 기다렸다.

서희: 내가 잃은 것을 기억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길상: 그건 잘못이 아니오.

서희: 그런데 내가 미워한 것까지 물려주려고 한 적은 없었을까요?

길상은 대신 답하지 않았다.

서희도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월선이 말했다.

월선: 아마 우리 모두 그랬을 거예요.

용이: 뭘?

월선: 내가 아팠으니 네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녀가 잠시 웃었다.

월선: 그런데 알아주는 것과 대신 아파주는 것은 다른데.

서희가 월선을 바라보았다.

서희: 맞아요.

그때 조준구가 낮게 말했다.

조준구: 그렇다면 죄도 물려주지 말아야겠군.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서희: 무슨 뜻입니까?

조준구는 잠시 망설였다.

조준구: 아비가 잘못했다고 자식까지 평생 고개를 숙여야 하는가?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준구: 너희가 한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말자고 한다면……

그는 서희를 보았다.

조준구: 죄도 자식에게 물려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서희는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서희: 맞습니다.

조준구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서희: 당신의 죄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녀가 또렷하게 말했다.

서희: 당신의 자식이 대신 갚을 이유는 없습니다.

조준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희: 하지만 당신도 당신의 죄를 조상이나 시대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조준구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서희: 각자의 것은 각자가 짊어져야 합니다.

김환이 조용히 말했다.

김환: 그래야 끊을 수 있겠지.

월선: 무엇을요?

김환: 한이든 죄든, 대대로 운명처럼 내려가는 것을.

평사리에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차갑지 않았다.

용이가 말했다.

용이: 그러면 한을 없애는 것이 답은 아니겠군.

월선: 네.

용이: 잊는 것도 아니고.

월선: 네.

용이: 그럼 뭔가?

월선은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월선: 다른 것으로 만드는 것 아닐까요?

서희: 무엇으로요?

월선: 나는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웃었다.

월선: 하지만 내가 받은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주지 않는 것부터 시작할 수는 있겠죠.

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한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한이 어디로 갈지를 선택하는 것.

서희가 그 말을 되뇌었다.

서희: 어디로 갈지를 선택한다……

길상이 말했다.

길상: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복수로 보낼 것이고.

김환: 어떤 사람은 사랑으로.

용이: 어떤 사람은 그냥 참고 살겠지.

월선: 어떤 사람은 아이를 더 따뜻하게 안아 줄 수도 있고요.

모두가 조용해졌다.

서희가 말했다.

서희: 그렇다면 한이 우리를 살게 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월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한을 가지고도 살아가려 했던 우리가 있었던 거죠.

월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월선: 그 말이 더 좋아요.

서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여자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조준구가 물었다.

조준구: 그런데 말이야.

모두가 그를 보았다.

조준구: 자기 한을 다음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그가 길상을 바라보았다.

조준구: 나라의 한은 어떻게 할 건가?

길상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준구: 너는 개인의 미움은 내려놓으라고 하면서, 나라를 위해서는 싸웠잖아.

길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준구가 한 걸음 다가왔다.

조준구: 가족이 있는데도.

서희의 얼굴이 굳었다.

조준구: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이번에는 평사리의 밤공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조준구가 물었다.

조준구: 나라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상처를 남기는 것은……

그가 서희와 길상을 번갈아 보았다.

조준구: 정말 옳은 일이었나?

길상이 천천히 서희를 바라보았다.

서희도 그를 보고 있었다.

이번 질문에는 조준구의 악의만 있다고 할 수 없었다.

서희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서희: 그건……

그녀는 길상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서희: 나도 한번은 묻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다음 Topic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Topic 4: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park kyungni toji

서희: 그건……

서희는 길상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서희: 나도 한번은 묻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길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준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조준구: 왜? 이제 와서 대답하기 어렵나?

길상: 어렵소.

조준구가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조준구: 인정은 하는군.

길상: 쉬운 일이었다면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지도 않았겠지.

서희가 천천히 말했다.

서희: 나는 당신이 왜 그런 길을 택했는지 압니다.

길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나라를 빼앗긴 시대였고, 사람들이 잡혀가고, 죽고, 사라졌습니다. 누군가는 싸워야 했겠죠.

잠시 침묵했다.

서희: 그런데 이해하는 것과 아프지 않은 것은 다릅니다.

길상의 얼굴이 굳었다.

서희: 당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서희: 하지만 나에게는 당신이 필요했습니다.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서희: 아이들에게도 필요했고요.

길상은 대답하려 했지만 서희가 먼저 말했다.

서희: 그러니 오늘은 나라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남겨진 사람 이야기부터 했으면 좋겠습니다.

Question 1

나라와 가족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길상: 나는 그 둘을 정말 따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소.

서희: 하지만 실제로는 선택했죠.

길상이 멈췄다.

서희: 당신이 떠나는 순간, 나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길상: 맞소.

서희는 그 대답을 예상하지 못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내가 어떤 뜻으로 떠났든, 남겨진 당신에게는 선택처럼 보였을 것이오.

서희: 나라가 나보다 중요했던 겁니까?

길상이 바로 답하지 않았다.

조준구가 비웃듯 말했다.

조준구: 이제 재미있어지는군.

용이가 그를 노려보았다.

용이: 조용히 좀 해.

조준구는 어깨를 으쓱했다.

길상이 서희에게 말했다.

길상: 당신보다 나라가 더 중요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소.

서희: 그런데?

길상: 당신과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무너지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소.

서희가 조용히 들었다.

길상: 나라가 없으면 가족도 위험해진다. 집도, 이름도, 말도, 아이들의 앞날도.

서희: 그래서 가족을 떠났다?

길상: 그래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소.

서희: 당신은 그 생각이 옳았다고 아직도 믿습니까?

길상은 오래 침묵했다.

길상: 옳았다고 믿고 싶소.

서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길상: 하지만 그 선택 때문에 당신이 아팠다는 사실까지 옳다고 말할 수는 없소.

그 말에 서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월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월선: 어쩌면 어떤 선택은 옳고 그름으로만 말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조준구가 말했다.

조준구: 그건 편리한 말이지.

월선이 그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사람을 아프게 해 놓고 "시대가 그랬다"고 하면 끝인가?

길상이 조준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길상: 아니오. 그래서 내가 책임을 피할 생각은 없소.

조준구: 무슨 책임?

길상: 내가 선택한 일 때문에 가족이 겪은 외로움과 두려움.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시대가 나를 밀었다고 해서, 내가 한 선택까지 시대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소.

김환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그 말은 맞다.

용이가 한숨을 쉬었다.

용이: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은 그런 선택을 할 기회조차 없었네.

모두가 용이를 바라보았다.

용이: 나라는 크고, 집은 당장 배가 고팠으니까.

서희: 그것도 선택 아닙니까?

용이: 선택이라기보다 하루를 버틴 거지.

그가 웃었다.

용이: 누가 잡혀가면 무섭고, 세상이 뒤집히면 무섭고, 그래도 아침 되면 밥은 해야 하고 논에도 나가야 하고.

월선이 말했다.

월선: 그런 사람들은 나라를 사랑하지 않은 걸까요?

용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용이: 글쎄.

길상이 말했다.

길상: 아니오.

용이가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Question 2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가족을 지키며 살아간 사람들도 나라를 사랑한 것인가?

조준구: 참 좋군.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해도 다 애국자인가?

길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누가 말했소?

조준구가 입을 다물었다.

길상: 아이를 키운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월선: 아니죠.

길상: 굶지 않게 밥을 지은 사람은?

용이: 그것도 일이었지.

길상: 이름도 남지 않은 채 사람을 숨겨 주고, 먹이고, 소식을 전한 사람은?

김환이 말했다.

김환: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다.

길상: 바로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싸운 사람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오.

서희가 길상을 보았다.

서희: 그러면 당신은 왜 그렇게 오래 스스로 짐을 졌습니까?

길상: 무슨 뜻이오?

서희: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고 늘 생각했잖아요.

길상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길상: 아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외면하면 평생 나 자신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던 것 같소.

김환이 말했다.

김환: 그건 나라를 사랑해서였나, 자기 자신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였나?

길상이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둘 다였겠지.

서희가 말했다.

서희: 그러면 결국 독립운동도 아주 개인적인 일이었네요.

길상: 그럴 수 있소.

서희: 나라를 위한 일인데도?

길상: 사람은 나라라는 말만으로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는 평사리를 바라보았다.

길상: 아는 사람의 얼굴이 있었고, 빼앗긴 집이 있었고, 죽은 사람이 있었고, 아이들의 앞날이 있었소.

월선이 조용히 말했다.

월선: 그러면 나라는 결국 사람들의 얼굴이네요.

길상이 그녀를 보았다.

길상: 나에게는 그랬소.

용이가 웃었다.

용이: 그 말은 좀 알겠네.

조준구: 나는 잘 모르겠군.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나라라는 것은 나한테 뭘 해 줬지?

아무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조준구: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라고 말하지. 그런데 평생 힘 있는 놈들이 위에 있고, 힘없는 놈들이 밑에 있는 건 똑같았잖아.

용이의 표정이 굳었다.

조준구: 왕이 있든 일본이 있든, 땅 없는 놈은 땅이 없었고 돈 없는 놈은 돈이 없었어.

서희가 말했다.

서희: 그래서 나라를 빼앗겨도 상관없었다는 겁니까?

조준구: 적어도 나라라는 말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뜻은 아니었다는 거다.

김환이 말했다.

김환: 그건 맞다.

서희가 김환을 바라보았다.

김환: 조준구가 옳다는 말은 아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김환: 다만 나라가 사람들에게 보호받을 가치가 있으려면, 그 나라도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

길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상: 맞소.

용이: 나라가 뭔지도 모르겠는 사람에게 나라를 위해 죽으라고만 하면 안 되겠지.

월선이 말했다.

월선: 그러면 나라를 사랑하는 일은 나라를 비판하는 것과도 함께 갈 수 있겠네요.

김환이 말했다.

김환: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묻는 것일 수도 있지.

서희: 어떤 나라를 지키려는 것인지.

길상: 그렇소.

서희: 단순히 빼앗기지 않는 나라?

길상: 그것으로는 부족하오.

용이: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

길상이 용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상: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도 그런 것이었소.

Question 3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충돌하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월선이 길상을 바라보았다.

월선: 그래도 하나는 남았어요.

길상: 무엇이오?

월선: 사람이요.

서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나라를 사랑해서 떠났다는 말을 이해할 수는 있어요.

그녀가 잠시 용이를 보았다.

월선: 하지만 남겨진 사람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밤을 견디는 게 아니잖아요.

길상이 고개를 숙였다.

월선: 기다리는 사람은 한 사람을 기다려요.

용이는 월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월선: 나라가 아니라요.

긴 침묵.

서희가 말했다.

서희: 맞습니다.

길상이 서희를 바라보았다.

서희: 나는 조선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조용했다.

서희: 당신을 기다렸어요.

길상의 얼굴이 굳었다.

서희: 나라를 사랑하는 당신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잠시 멈췄다.

서희: 하지만 당신을 이해할수록 내가 외로워지는 날도 있었어요.

길상이 한 걸음 가까이 왔다.

길상: 미안하오.

서희: 사과를 받으려는 말이 아닙니다.

월선이 아주 약하게 웃었다. 조금 전 자신이 용이에게 했던 말과 같았다.

서희도 그것을 알아차린 듯 월선을 잠깐 보았다.

서희: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녀가 길상을 바라보았다.

서희: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하겠습니까?

모두가 길상을 바라보았다.

길상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흘렀다.

길상: 모르겠소.

서희의 표정이 움직였다.

길상: 예전 같으면 바로 그렇다고 했을 것이오.

서희: 지금은요?

길상: 지금은 내가 옳았다는 말보다, 내가 무엇을 잃게 했는지를 더 많이 보게 되오.

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길상: 그래도 다시 그 시대를 산다면……

그가 숨을 들이쉬었다.

길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소.

서희의 눈이 젖었다.

길상이 말을 이었다.

길상: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떠나는 것이 내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남아 있는 사람도 희생한다는 것을 더 일찍 알았을 것이오.

서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서희: 그 말은 듣고 싶었습니다.

길상은 고개를 숙였다.

용이가 낮게 말했다.

용이: 싸우러 가는 사람만 용기 있는 건 아니겠군.

김환이 그를 바라보았다.

용이: 남아서 가족을 먹이고, 기다리고, 하루를 버티는 것도 용기였겠지.

월선: 네.

용이: 그러면 나도 아주 쓸모없는 인생은 아니었나 보군.

월선이 즉시 말했다.

월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용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당신은 누군가의 역사책에 이름이 없었을 뿐이에요.

그녀의 눈이 젖었다.

월선: 내 인생에는 아주 크게 있었습니다.

용이는 말하지 못했다.

조준구가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비웃지 않았다.

김환이 천천히 말했다.

김환: 나라라는 것도 결국 그런 사람들로 남는 것이겠지.

서희: 어떤 사람들요?

김환: 큰 이름을 남긴 사람만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

길상이 말했다.

길상: 그리고 다음 사람에게 삶을 넘겨준 사람들.

월선이 들판을 바라보았다.

월선: 그러면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죽을 준비를 하는 것만은 아니겠네요.

용이: 살려는 것도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겠지.

조준구가 조용히 말했다.

조준구: 그래도 결국 다 죽잖아.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 말은 냉소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준구: 나라를 지켜도 죽고, 가족을 지켜도 죽고, 땅을 되찾아도 죽는다.

그가 서희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그러면 결국 무엇 때문에 그토록 버티는 거지?

이번에는 누구도 바로 답하지 못했다.

평사리의 밤은 깊어져 있었다.

서희가 천천히 말했다.

서희: 정말 그렇네요.

길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땅도 영원하지 않고, 나라도 영원하지 않고, 사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월선이 말했다.

월선: 사랑도 끝날 수 있고요.

용이가 고개를 숙였다.

김환이 아주 조용히 물었다.

김환: 그런데도 왜 사는 걸까.

그 질문이 여섯 사람 사이에 남았다.

조금 전까지 그들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제 질문은 더 작고, 더 깊어졌다.

왜 인간은 살아가는가.

서희가 어두운 들판 끝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다.

하지만 밤이 영원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다음 Topic

그래도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

Topic 5: 그래도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

park kyungni toji

김환: 그래도 왜 사는 걸까.

그 말이 여섯 사람 사이에 남았다.

평사리의 밤은 깊었다.

멀리서 바람이 들판을 훑고 지나갔다.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 큰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서희는 어둠 속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월선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용이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길상은 고개를 든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조준구만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

조준구: 대답 못 하겠지.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땅도 사라지고, 사람도 죽고, 나라까지 빼앗겼다가 돌아온다. 사랑도 끝나고, 집안도 무너지고.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조준구: 그래도 산다고?

용이: 살았지.

조준구: 왜?

용이가 대답하지 못했다.

조준구가 다시 웃었다.

조준구: 봐. 아무도 모르잖아.

월선이 조용히 말했다.

월선: 몰라도 살 수는 있잖아요.

조준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사람은 이유를 다 알아야만 사는 건 아니니까요.

조준구: 그럼 뭘 믿고 사는데?

월선은 잠시 생각했다.

월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는 것.

조준구: 그게 이유야?

월선: 어떤 날에는 그 정도면 충분했어요.

조준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Question 1

이렇게 많은 것을 빼앗긴 삶도 살아볼 가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서희가 먼저 말했다.

서희: 나는 쉽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길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서희: 너무 많은 것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월선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희: 누군가 내게 "그래도 좋은 인생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잠시 말을 멈췄다.

서희: 나는 모른다고 할 것 같습니다.

길상이 말했다.

길상: 그래도 후회합니까?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서희: 무엇을요?

길상: 살아온 것을.

서희는 오래 생각했다.

서희: 아니요.

길상이 눈을 들었다.

서희: 아팠습니다. 미웠습니다. 되돌리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서희: 하지만 내가 살아온 것 자체를 없애고 싶지는 않습니다.

월선이 서희를 바라보았다.

서희: 그 삶 속에 내가 사랑한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월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월선: 나도 그래요.

용이가 그녀를 보았다.

월선: 다시 살고 싶지는 않아요.

용이의 표정이 굳었다.

월선이 아주 조금 웃었다.

월선: 너무 힘들었으니까.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월선: 그런데 없었던 삶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아요.

용이: 왜?

월선이 용이를 바라보았다.

월선: 당신을 사랑했던 것도 그 안에 있으니까요.

용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월선: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은 것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용이가 겨우 말했다.

용이: 그렇지.

월선이 말을 이었다.

월선: 아팠다는 이유로 내 삶 전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사람은 고통의 크기만으로 자기 삶을 판단할 수 없겠지.

조준구가 비웃듯 물었다.

조준구: 그럼 고통도 다 의미가 있다는 건가?

김환이 즉시 고개를 저었다.

김환: 아니다.

조준구: 아니라고?

김환: 고통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조준구를 바라보았다.

김환: 사람을 죽이는 고통도 있다. 망가뜨리는 고통도 있다.

서희가 조용히 들었다.

김환: 중요한 것은 고통이 사람을 좋게 만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월선이 김환을 바라보았다.

김환: 그 고통 속에서도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길상이 물었다.

길상: 무엇이 남는다는 말이오?

김환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김환: 살아 있으려는 마음.

Question 2

인간을 마지막까지 살게 하는 것은 사랑인가, 한인가, 희망인가, 책임인가, 아니면 생명 그 자체인가?

용이가 말했다.

용이: 나는 책임이었던 것 같네.

월선이 그를 바라보았다.

용이: 누가 먹어야 하고, 누가 기다리고 있고, 누가 아프고.

그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용이: 그런 것 때문에 다음 날도 일어났지.

월선이 말했다.

월선: 나는 사랑이었던 것 같아요.

용이의 표정이 흔들렸다.

월선: 꼭 사랑받아서가 아니에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월선: 사랑하는 마음이 내 안에 남아 있었으니까.

서희가 말했다.

서희: 나는 처음에는 한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준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반드시 되찾겠다는 생각.

길상: 나중에는?

서희가 잠시 생각했다.

서희: 사람.

길상: 사람?

서희: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기니까 달라졌습니다.

그녀는 길상을 보았다.

서희: 복수만으로는 오래 살 수 없더군요.

길상이 조용히 말했다.

길상: 나는 책임이라고 생각했소.

김환이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나라에 대한 책임, 사람에 대한 책임.

잠시 멈췄다.

길상: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서희를 보았다.

길상: 책임이라는 말 뒤에 사랑이 있었던 것 같소.

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환이 말했다.

김환: 나는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조준구가 눈을 좁혔다.

조준구: 너무 큰 말이군.

김환: 큰 말이 아니다.

조준구: 그럼 뭔데?

김환은 땅을 가리켰다.

김환: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온다.

조준구: 그래서?

김환: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온다.

그는 조준구를 바라보았다.

김환: 생명은 이유를 설명한 뒤에 움직이지 않는다.

모두 조용히 들었다.

김환: 사람도 그런 순간이 있다.

월선: 무슨 뜻이에요?

김환: 너무 슬퍼서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아침이 오면 눈을 뜬다.

월선의 눈이 흔들렸다.

김환: 밥을 먹고, 누군가를 돌보고, 또 하루를 산다.

서희가 말했다.

서희: 아까 월선 씨가 했던 말이군요.

월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그래.

그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김환: 어쩌면 생명은 우리가 이해하기 전에 이미 우리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준구가 물었다.

조준구: 그럼 나 같은 인간도?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 질문에는 평소의 비웃음이 없었다.

조준구: 나도 살려고 했어.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조준구: 남보다 많이 가지려고 했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고, 내가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했지.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그게 내 방식이었어.

서희: 살아남는 것과 남을 짓밟는 것은 다릅니다.

조준구: 알아.

서희의 표정이 변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조준구: 이제는 알아.

조준구가 땅을 내려다보았다.

조준구: 나는 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기려고 한 건지도 모르지.

길상이 말했다.

길상: 둘은 다르오.

조준구: 그래.

조준구가 씁쓸하게 웃었다.

조준구: 너무 늦게 알았군.

김환이 말했다.

김환: 늦게 아는 것도 아는 것이다.

조준구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Question 3

다시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면,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같은 길을 선택할 것인가?

월선이 먼저 웃었다.

아주 슬픈 웃음이었다.

월선: 이 질문은 잔인하네요.

용이가 그녀를 보았다.

용이: 대답 안 해도 된다.

월선: 아니요.

그녀가 용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월선: 대답할 수 있어요.

용이는 숨을 멈춘 듯했다.

월선: 다시 태어나도……

잠시 멈췄다.

월선: 당신을 사랑할 것 같아요.

용이의 눈이 젖었다.

용이: 월선아.

월선: 하지만 이번에는……

용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나 자신도 조금 더 사랑할 거예요.

용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용이: 그래야 한다.

월선이 미소를 지었다.

용이: 나는……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월선은 기다렸다.

용이: 다시 살게 된다면 네 마음을 그렇게 오래 혼자 두고 싶지 않다.

월선의 얼굴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웃었다.

월선: 그 말이면 됐어요.

서희가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길상을 보았다.

길상도 이미 그녀를 보고 있었다.

서희: 당신은요?

길상이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길상: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또 외면하지 못할 것이오.

서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길상이 말을 이었다.

길상: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내가 옳다는 생각만으로 당신에게 침묵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오.

서희의 눈이 젖었다.

길상: 내가 감당하는 것만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고.

서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길상: 그리고……

그가 미소를 지었다.

길상: 다시 살아도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서희가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 뒤 말했다.

서희: 나도요.

길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하지만 다음번에는 좀 덜 고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용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월선도 웃었다.

길상까지 웃었다.

잠시 동안, 그들은 역사 속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오래 아팠던 사람들이었다.

김환이 말했다.

김환: 나는 잘 모르겠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김환: 어떤 삶은 다시 살고 싶다고 쉽게 말할 수 없으니까.

그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김환: 그래도 같은 사람들을 사랑했을 것 같다.

월선: 길도 같았을까요?

김환은 오래 생각했다.

김환: 아니.

월선: 왜요?

김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과 운명에 끌려가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아니까.

조준구가 비웃지 않고 물었다.

조준구: 나한테도 묻겠지?

서희가 말했다.

서희: 묻겠습니다.

조준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준구: 다시 살아도 많이 갖고 싶을 것 같다.

용이가 웃었다.

용이: 사람 쉽게 안 변하는군.

조준구도 아주 조금 웃었다.

조준구: 하지만 남의 것을 빼앗아서까지 가지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아마.

서희: 아마?

조준구: 사람이 그렇게 쉽게 자신을 장담할 수 있나?

서희는 잠시 그를 보다가 작은 웃음을 지었다.

서희: 그 말은 처음으로 믿을 만하군요.

잠시 뒤, 아주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월선이 고개를 들었다.

월선: 아침이 오나 봐요.

평사리의 동쪽 하늘이 아주 조금 밝아지고 있었다.

아직 해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밤의 색이 달라지고 있었다.

길상이 말했다.

길상: 많은 것이 끝났군.

서희가 고개를 저었다.

서희: 아니요.

길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끝난 것은 많지만,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용이가 들판을 바라보았다.

용이: 내일도 누군가는 저 밭에 나가겠지.

월선: 아이도 태어날 거고요.

김환: 누군가는 또 사랑할 것이다.

조준구: 또 싸우기도 하겠지.

서희가 말했다.

서희: 그리고 또 잃겠죠.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길상이 물었다.

길상: 그런데도?

서희는 아주 오래 평사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서희: 그런데도 살아가겠죠.

월선이 미소를 지었다.

월선: 왜요?

서희는 잠시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땅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가문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복수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서희: 꼭 이유가 있어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김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살아 있기 때문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첫 햇빛이 평사리 들판 위로 번졌다.

서희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손으로 흙을 만졌다.

평생 되찾으려 했던 땅이었다.

그녀가 손 안의 흙을 바라보았다.

서희: 나는 오랫동안 이 땅이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용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그러다 빼앗기고, 다시 되찾았습니다.

잠시 멈췄다.

서희: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이네요.

길상: 어떻게?

서희는 흙을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떨어뜨렸다.

서희: 우리가 이 땅을 가진 것이 아니라……

흙이 다시 땅으로 돌아갔다.

서희: 이 땅이 우리를 잠시 받아 주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환이 미소를 지었다.

용이는 아무 말 없이 들판을 보았다.

월선도 고개를 들었다.

조준구조차 침묵했다.

서희가 말했다.

서희: 할머니도, 어머니도, 나도, 아이들도……

그녀가 들판을 바라보았다.

서희: 모두 잠시 이곳을 지나갑니다.

길상이 말했다.

길상: 그리고 다음 사람이 오겠지.

서희: 네.

햇빛이 조금 더 넓게 퍼졌다.

평사리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위를 지나온 사람들은 모두 달랐다.

사랑한 사람도 있었다.

배신한 사람도 있었다.

빼앗긴 사람도 있었다.

빼앗은 사람도 있었다.

싸운 사람도 있었다.

그저 하루를 버틴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라진다.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월선이 아주 조용히 말했다.

월선: 이제 알 것 같아요.

용이: 뭘?

월선이 햇빛이 퍼지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월선: 한이 우리를 살린 것도 아니고, 땅이 우리를 살린 것도 아니었어요.

김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그냥……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월선: 우리 안의 생명이 끝까지 살려고 했던 거예요.

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시 한 번 흙을 만졌다.

이번에는 움켜쥐지 않았다.

그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놓아주었다.

아침이 왔다.

『토지』의 이야기는 끝나도,

땅 위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글

박경리 토지  땅과 인간의 대화

다섯 번의 대화 끝에서 인물들은 하나의 답에 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삶이 서로 다른 답을 남긴다.

서희에게 고향은 한때 되찾아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뒤 그녀는 자신이 진짜 찾고 싶었던 것이 땅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길상은 나라와 가족 사이에서 자신의 선택을 다시 바라본다. 나라를 위한 행동이 필요했다고 믿으면서도, 떠난 사람만 희생한 것이 아니라 남은 사람도 함께 대가를 치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월선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랑까지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을 사랑의 상처 하나로만 규정하지 않으려 한다.

용이는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가치를 보여 준다. 밥을 짓고, 논을 갈고, 가족을 지키고, 다음 날을 살아낸 삶도 역사의 일부였다.

김환은 한을 단순히 미움이나 슬픔으로 보지 않는다. 기억할 것은 기억하되, 그 아픔을 다음 세대의 운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조준구조차 마지막에는 자신이 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이기려고 했던 것인지 모른다고 인정한다.

그 순간 『토지』의 가장 깊은 질문이 드러난다.

인간을 살게 한 것은 복수였을까.

사랑이었을까.

한이었을까.

나라였을까.

책임이었을까.

대화의 마지막에서 그들은 더 근원적인 답에 가까워진다.

생명 그 자체.

사람은 모든 이유를 알고 난 뒤에 사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무너져도 아침이 오고, 누군가는 밥을 먹고, 아이를 돌보고, 밭으로 나가고, 또 사랑한다.

한이 사람을 살린 것이 아니라, 한을 품고도 계속 살아가려는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서희는 평생 되찾으려 했던 흙을 손에 올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움켜쥐지 않는다.

천천히 놓아준다.

그 순간 땅은 더 이상 소유물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사랑하고, 다투고, 잃고, 죽고, 다음 사람에게 삶을 넘겨주는 장소가 된다.

『토지』의 이야기는 끝나지만,

그 땅 위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최서희

최참판댁의 후손이자 『토지』의 중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 가족과 집, 땅을 잃은 뒤 강한 의지로 살아남는다. 빼앗긴 재산을 되찾는 과정에서 복수와 정의, 가족, 사랑,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마주한다.

이번 대화에서는 고향과 소유, 상처와 복수, 그리고 끝내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를 가장 깊이 질문하는 인물이다.

김길상

최서희와 긴 인연을 맺으며 개인의 사랑과 역사적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삶은 가족만을 위한 것도, 나라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독립운동과 가족 사이의 선택,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이 함께 치르는 희생을 돌아본다.

이용

평사리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거대한 이념이나 영웅적 행동보다 농사, 가족, 사랑, 생계를 통해 시대를 견딘다.

이번 대화에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삶도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가장 인간적인 답을 들려준다.

공월선

이용을 깊이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삶을 살아간 여성이다.

그녀의 삶에는 기다림과 외로움, 사랑과 한이 깊게 남아 있다.

그러나 이번 대화에서 월선은 자신을 단지 상처받은 여성으로만 규정하지 않는다. 사랑했지만 자신의 삶 전체가 그 사랑 하나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김환 · 구천이

가족의 비밀과 개인의 운명, 시대적 혼란을 함께 짊어진 인물이다.

그는 『토지』의 한과 생명이라는 주제를 깊이 연결한다.

이번 대화에서는 기억과 증오의 차이, 한을 다음 세대에게 넘기지 않는 문제, 그리고 인간 안에서 끝까지 살아 움직이는 생명에 대해 말한다.

조준구

최씨 집안의 몰락과 재산 문제에서 중요한 갈등을 만들어 내는 인물이다.

욕망과 탐욕, 자기 합리화의 얼굴을 보여 주지만 이번 대화에서는 단순한 악인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그의 질문은 다른 인물들의 정의와 복수, 소유, 애국심까지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살아남으려 했던 것인지, 남보다 이기려 했던 것인지 스스로 묻게 된다.

Related Posts:

  • 100년 후의 아이들은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까?
    100년 후의 아이들에게 어떤 대한민국을 남길 것인가?
  • black-stone-
    검은 돌이 기억한 사람들: 한국 가족의 백 년 이야기
  •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10인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10인이 말하는 인간, 가족, 사회, 그리고 미래
  • 일본10일여행
    일본 10일 여행|한국인의 눈으로 다시 보는 일본
  • 10-Days-Korea-Travel-
    한국 10일 여행|한국과 일본 게스트가 다시 보는 한국
  • malgeureut-
    왜 그 한마디는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가? 김윤나의 『말그릇』

Filed Under: 소설, 역사, 한국문학 Tagged With: 고향, 공월선, 구천이, 김길상, 김환, 독립운동, 박경리, 복수, 사랑, 생명, 역사, 이용, 인물대화, 조준구, 최서희, 토지, 평사리, 한, 한국문학, 한국소설

Reader Interactions

Leave a Reply Cancel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Primary Sidebar

Recent Posts

  • 박경리 토지 현대 단편소설: 잃어버린 것과 함께 다시 살아가는 다섯 이야기
  • 박경리 토지 전문가 대화 | 펄 벅, 한, 기억, 생명
  • 박경리 『토지』 인물 대화: 최서희와 김길상이 묻는 고향, 한, 사랑 그리고 삶
  • 말그릇이 남긴 다섯 이야기: 말이 남긴 자리
  • 왜 그 한마디는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가? 김윤나의 『말그릇』

Recent Comments

No comments to show.

Footer

Recent Posts

  • 박경리 토지 현대 단편소설: 잃어버린 것과 함께 다시 살아가는 다섯 이야기 September 11, 2026
  • 박경리 토지 전문가 대화 | 펄 벅, 한, 기억, 생명 September 11, 2026
  • 박경리 『토지』 인물 대화: 최서희와 김길상이 묻는 고향, 한, 사랑 그리고 삶 September 10, 2026
  • 말그릇이 남긴 다섯 이야기: 말이 남긴 자리 September 8, 2026
  • 왜 그 한마디는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가? 김윤나의 『말그릇』 September 8, 2026
  • 『침묵의 퍼레이드』에서 태어난 5개의 현대 단편|복수·침묵·상실을 그리다 August 23, 2026

Pages

  • Contact Us
  • Earnings Disclaimer
  • Privacy Policy
  • Terms of Service

Categories

Copyright © 2026 Aiville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