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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그릇이 남긴 다섯 이야기: 말이 남긴 자리

September 8, 2026 by 신일 문 Leave a Comment

들어가는 글

상처받은 말을 다음 사람에게 넘기지 않기 위한 다섯 이야기

사람을 가장 오래 아프게 하는 말은 언제나 큰 소리로 오지 않는다.

걱정해서 한 말, 분위기를 지키기 위한 말, 가족이니까 할 수 있다는 말, 이름을 숨기고 던진 말 속에도 상처는 남는다. 말한 사람은 이미 잊었지만, 들은 사람은 그 문장으로 자신을 설명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경기도의 가상도시 하늘동을 배경으로 한 이 다섯 편의 이야기는, 한 사람에게서 나온 말이 다른 사람의 삶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아버지가 두려움 속에서 아들을 규정한다. 회사에서는 손실을 두려워한 상사가 부하의 보고를 막는다. 가정에서는 오래 참아온 어머니가 자신이 견딘 말을 딸과 손녀에게 물려준다. 상처받은 학생은 익명의 공간에서 다른 학생의 약한 부분을 공격한다. 다른 사람에게 빈자리를 가르치던 도예가는 아들의 침묵을 자기 뜻대로 해석해왔다.

이들은 특별히 잔인한 사람들이 아니다.

대부분 사랑하고 싶었고, 보호하고 싶었으며,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에 여유가 없을 때, 사랑은 통제가 되고 걱정은 모욕이 되며 침묵은 상대를 지우는 방법이 된다.

이 이야기들이 묻는 것은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가가 아니다.

상처받은 말이 내게 도착했을 때, 나는 그것을 어떤 모습으로 다음 사람에게 건네고 있는가.

내가 두려운 것을 상대의 성격이라고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사과하면서 용서까지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상대의 침묵을 내게 편한 의미로 채우고 있지는 않은가.

말의 상처는 말만으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온 말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기로 선택한다면, 상처의 이동은 그 자리에서 멈추기 시작한다.

이 다섯 이야기는 바로 그 순간들을 다룬다.

완전한 화해가 아니라, 끊어질 뻔한 관계 안에 작은 빈자리를 남기는 순간들이다.


Table of Contents
들어가는 글
Story 1: 읽지 않은 메시지
Story 2 회의실의 다섯 초
Story 3 이번 설에는 가지 않겠습니다
Story 4 삭제된 댓글
Story 5 빈 그릇을 두고 간 사람
마지막 글

Story 1: 읽지 않은 메시지

malgeureut modern stories 1

저녁 일곱 시가 되기 전에 소라는 식탁을 세 번이나 다시 차렸다.

잡채 그릇은 민재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옮겼고, 갈비찜 위에는 잣을 몇 알 더 올렸다. 식탁 가운데에는 조각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흰 생크림 위에 초콜릿으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합격 축하해, 민재야.’

태수는 퇴근길에 노트북을 사 왔다. 검은 상자를 식탁 옆에 세워두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려 했지만, 포장지 모서리가 구겨지지 않았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아빠가 뭘 샀는지 모르는 척해라.”

소라가 웃으며 말하자 태수는 넥타이를 풀며 대답했다.

“모르는 척은 무슨. 대학 가면 필요한 거니까 산 거지.”

“아직 축하도 안 했는데 벌써 대학 얘기예요?”

민재가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셔츠 어깨로 떨어졌다.

소라는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합격 발표가 난 뒤에도 민재는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보낸 축하 메시지에는 웃는 얼굴을 붙여 답했지만, 집에서는 자주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소라는 그것을 긴장이 풀린 뒤의 피로라고 생각했다.

태수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전자공학이면 노트북 좋은 거 써야지. 아빠 때는 이런 거 없이도 다 했지만.”

“그 말을 오늘 몇 번째 하는 줄 알아요?”

민재가 웃었다.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소라는 민재의 밥그릇에 밥을 조금 더 담았고, 태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우리 집에서 서울 명문대 나온 사람이 처음이네.”

태수가 병뚜껑을 열며 말했다.

“당신도 좋은 대학 나왔잖아요.”

“나는 지방대지. 민재하고 같나.”

그는 잔을 들어 아들을 보았다.

“고생했다. 이제 시작이야. 대학 가서 첫 학기만 잘 잡으면 장학금도 계속 받고, 인턴도 미리 준비하고. 요즘 배터리 쪽이 사람 많이 필요하니까 아빠 회사도 알아볼 수 있고.”

민재는 잔을 들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잡채 한 가닥을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아빠.”

“왜?”

“저, 입학을 한 학기 미루려고 해요.”

태수는 아들이 농담한다고 생각한 듯 잠시 웃었다. 그러나 민재가 웃지 않자 손에 들고 있던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말이야?”

“학교에 문의했어요. 입학 연기 신청할 수 있대요. 장학금은 다시 심사를 받아야 하지만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고요.”

“왜 그런 걸 학교에 먼저 물어봐?”

“결정하기 전에 알아본 거예요.”

“무슨 결정을 해?”

소라가 민재의 얼굴을 살폈다.

“천천히 말해. 무슨 일이 있어?”

민재는 식탁 아래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강원도 영월에 청소년센터가 있어요. 학교를 그만두거나 집을 나온 아이들이 지내는 곳인데, 거기서 여섯 달 동안 봉사자를 구해요. 공부도 도와주고, 시설 보수도 하고, 지역 모금 행사도 준비하는 일이에요.”

태수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 왜 네가 해?”

“지난여름에 일주일 동안 갔었잖아요. 그때 만난 선생님이 연락을 주셨어요.”

“일주일 체험한 것하고 대학을 미루는 건 다르지.”

“알아요.”

“알면서 지금 이 말을 해?”

태수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소라는 갈비찜을 덜어주려던 숟가락을 멈추었다.

민재는 준비해둔 말을 꺼내듯 천천히 설명했다.

“대학에 가기 싫다는 게 아니에요. 전자공학도 공부하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 바로 학교에 들어가면 그냥 정해진 대로 가게 될 것 같아요. 여섯 달만 다른 사람들하고 생활하면서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더 알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은 대학 다니면서도 자기 하고 싶은 거 찾는다.”

“저도 알아요.”

“알면 가면 되잖아.”

“아빠가 원하는 답은 이미 정해져 있잖아요.”

식탁 위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태수는 아들을 바라보다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래. 정해져 있다. 갈 수 있을 때 대학 가고, 받을 수 있을 때 장학금 받고, 기회가 있을 때 잡는 거야. 인생은 네가 기다려달라고 한다고 기다려주지 않아.”

“한 학기예요.”

“한 학기 뒤에는 또 다른 이유가 생길 수 있어. 그다음에는 군대고, 그다음에는 취업이야. 사람은 한 번 흐름을 놓치면 다시 들어가기 어려워.”

민재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빠는 제가 결국 대학에 안 갈까 봐 그러는 거예요?”

“당연히 걱정되지.”

“저를 못 믿는 거네요.”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아니까 하는 말이야.”

“아빠가 아는 세상하고 제가 살아갈 세상이 꼭 같아요?”

태수의 얼굴에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네가 아직 몰라서 그래.”

“모른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선택하면 안 돼요?”

“선택에는 책임이 따라. 그 책임을 결국 누가 질 것 같은데?”

민재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제 선택이니까 제가 져야죠.”

“네가 실패하면 부모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아?”

그 말이 나오자 소라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여보, 오늘은 일단 얘기만 들어보면 안 돼요?”

태수는 아내를 보지 않았다.

“우리가 이 아이를 여기까지 어떻게 키웠는데. 학원비, 입시 준비, 원서 쓸 때마다 같이 알아보고. 이제 길이 열렸는데 갑자기 산골에 가서 봉사하겠다고?”

“그래서 말을 못 했어요.”

민재가 말했다.

“뭐?”

“아빠가 제가 왜 가고 싶은지는 한 번도 안 물어볼 것 같아서요.”

“지금 충분히 들었어. 현실을 피하고 싶은 거잖아.”

“피하는 게 아니에요.”

“대학에 가는 게 두려우니까 의미 있어 보이는 일을 찾아가는 거지.”

“아니라고 했잖아요.”

“너는 항상 중요한 순간에 도망치는구나.”

말이 입 밖으로 나간 뒤, 세 사람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냉장고가 낮은 소리를 냈다. 식탁 위 케이크의 초가 에어컨 바람에 조금 흔들렸다.

태수는 곧바로 다른 말을 덧붙이려 했다.

“내 말은, 네가 나약하다는 뜻이 아니라…”

민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빠가 생각하는 저는 언제부터 도망치는 사람이었어요?”

“앉아. 아직 얘기 안 끝났어.”

“아빠 얘기는 끝난 것 같아요.”

민재는 방으로 들어갔다.

소라는 따라가려 했지만 태수가 말했다.

“놔둬. 지금 가면 더 감정적으로 나와.”

잠시 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라는 식탁 위의 음식을 바라보았다. 잡채는 윤기를 잃어가고 있었고, 갈비찜 위의 기름은 가장자리부터 굳고 있었다.

“당신은 아이의 계획에 반대한 게 아니에요.”

소라가 말했다.

“그럼?”

“아이를 어떤 사람인지 결정해버렸어요.”

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케이크 위의 ‘합격 축하해’라는 글자를 바라보다가 초를 껐다.

다음 날 아침, 민재의 방은 비어 있었다.

옷장의 절반이 비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대학 입학 안내서와 노트북 상자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소라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민재는 받지 않았다.

잠시 뒤 짧은 메시지가 왔다.

‘영월 가는 버스 탔어요.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소라는 현관 옆에 놓인 보온 가방을 보았다. 새벽에 일어나 만든 김밥과 과일을 넣어둔 가방이었다. 민재는 그것을 가져가지 않았다.

태수는 아들의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그게 지금 중요해요?”

“집을 나가면서 말도 안 하고 가는 게 정상은 아니잖아.”

“어젯밤에 말하려고 했잖아요.”

“그건 통보였지.”

소라는 보온 가방을 열었다. 안쪽에 맺힌 물방울이 비닐에 싸인 김밥 위로 떨어졌다.

“당신은 민재가 당신 말에 동의할 때까지 대화를 계속하려고 했어요. 그건 대화가 아니에요.”

태수는 출근 시간이 늦었다며 방을 나갔다.

차 안에서 그는 민재에게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빠가 어제 화가 나서 말이 좀 심했다. 하지만 네가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 네가 여기까지 오는 데 우리도 많은 것을 희생했고…’

신호등이 바뀌었다. 태수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전화기를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회사 주차장에 도착한 뒤 다시 문장을 읽었다. ‘희생’이라는 단어가 너무 무거워 보여 ‘노력’으로 바꾸었다.

‘장학금은 한 번 놓치면 다시 받기 어렵고, 사회에서는 여섯 달이 짧은 시간이 아니다. 아빠가 배터리 사업에서 많은 젊은 사람을 봤는데…’

메시지는 화면 세 개를 채울 만큼 길어졌다.

태수는 끝에 적었다.

‘아빠 마음도 조금은 이해해주면 좋겠다.’

그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 옆에 노란색 숫자 1이 남았다.

점심시간에도 1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후 세 시에도 그대로였다.

퇴근할 때까지 민재는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태수는 집에 돌아와 아들의 노트북 상자를 거실 벽 쪽으로 옮겼다. 소라는 김밥을 버리지 못하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민재가 전화했어?”

태수가 물었다.

“나한테는 했어요.”

“뭐라고 해?”

“잘 도착했다고요.”

“나한테는 왜 안 하지?”

소라는 설거지를 계속했다.

“당신 메시지는 읽었대?”

“아니.”

“얼마나 길게 보냈어요?”

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라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당신은 민재가 읽기를 바라는 거예요, 아니면 항복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내가 무슨 항복을 받아?”

“당신 말이 옳다고 인정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잖아요.”

“나는 아버지야. 걱정할 수도 있는 거지.”

“걱정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걱정이 왜 민재의 성격이 돼야 해요?”

태수는 소라의 말을 듣지 않는 척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안에는 전날 먹지 못한 음식들이 그대로 있었다.

가장 위 칸에 민재의 빈 밥그릇이 놓여 있었다. 소라가 씻은 뒤 찬장에 넣지 않은 것이었다.

“저건 왜 거기 있어?”

“모르겠어요. 손이 안 가서.”

태수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며칠 동안 민재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소라는 하루에 한 번씩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밥 먹었니?’
‘거기는 밤에 춥다던데 옷 따뜻하게 입어.’
‘답장 안 해도 돼. 엄마는 잘 있어.’

민재는 소라의 메시지에는 간혹 짧게 답했다.

‘먹었어요.’
‘괜찮아요.’
‘센터 도착했어요.’

태수의 긴 메시지 옆에는 계속 1이 남아 있었다.

태수는 그 숫자를 볼 때마다 화가 났다.

아들이 일부러 자신을 벌준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버지로서 해온 일을 모두 부정한다고 느꼈다.

그는 두 번째 메시지를 쓰려 했다.

‘대답을 안 하는 것도 책임 없는 행동이다.’

문장을 적고 한참 바라보다가 지웠다.

그날 밤 태수는 민재의 입학 연기 절차를 직접 확인하려고 서재의 오래된 서류함을 열었다. 출생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보험 서류 아래에서 낡은 종이봉투 하나가 나왔다.

봉투에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태수 고등학교.’

그 안에는 성적표와 상장 몇 장이 들어 있었다. 태수는 왜 그것을 아직 가지고 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성적표 뒷면에 파란 볼펜으로 쓴 글씨가 보였다.

‘너는 형만큼 될 수 없다. 정신 차려라.’

죽은 아버지의 글씨였다.

태수는 한동안 서류함 앞에 앉아 있었다.

그 문장을 처음 본 날의 냄새까지 떠올랐다. 장마철이었고, 아버지의 작업복에서는 기계 기름 냄새가 났다.

형은 서울의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태수는 수학 성적이 떨어졌고, 미술 동아리에서 밤늦게까지 산업디자인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는 그림이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네 형은 앞을 보고 가는데 너는 자꾸 옆길로 샌다.”

태수는 그날 그림들을 모두 버렸다.

몇 년 뒤 그는 전자공학을 공부했고, 배터리 회사에 들어갔다. 누구보다 늦게 퇴근했고, 실수를 줄이기 위해 모든 보고서를 두 번씩 읽었다.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오래된 성적표를 들고 있자, 그 선택의 시작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소라가 서재 문 앞에 섰다.

“뭐 해요?”

태수는 성적표를 뒤집어 놓았다.

“옛날 서류 좀 봤어.”

소라는 방으로 들어와 종이를 다시 뒤집었다. 아버지가 남긴 문장을 읽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저 말하고 다르게 말했어.”

태수가 먼저 말했다.

소라는 태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달라요?”

“나는 민재를 형하고 비교한 것도 아니고, 못난 사람이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당신은 도망치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계획을 두고 한 말이었어.”

“민재에게는 자기 존재를 말한 것처럼 들렸을 거예요.”

“당신은 왜 계속 민재 편만 들어?”

“나는 민재 편만 드는 게 아니에요.”

소라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나는 스무 살 아들의 인생이 걱정되는 당신도 이해해요. 몇 년 동안 등록금 걱정하고, 장학금 알아보고, 입시 서류를 같이 준비한 것도 알아요. 그런데 당신이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설명한다고 해서, 그 말이 덜 아파지는 건 아니에요.”

태수는 성적표를 접으려다 멈추었다. 이미 오래된 접힌 자국이 가운데에 남아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사과한 적이 없어.”

“그래서 당신도 하지 않을 거예요?”

태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소라는 서재를 나가다가 문 앞에서 멈추었다.

“민재가 당신을 용서하게 만드는 메시지를 쓰지 말아요.”

“그러면 뭘 써?”

“당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만 써요.”

그날 밤 태수는 침대에 누워서도 잠들지 못했다.

새벽 한 시가 지나자 그는 거실로 나왔다. 냉장고를 열었다. 민재의 빈 밥그릇이 여전히 위 칸에 있었다.

태수는 식탁에 앉아 전화기를 켰다.

자신이 보냈던 긴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첫 문장에는 ‘말이 좀 심했다’고 적혀 있었다. 자신이 잘못한 말을 작은 실수처럼 줄이는 표현이었다.

그 뒤에는 장학금, 취업, 부모의 노력, 사회 현실이 이어졌다.

마지막에는 아들의 이해를 요구하고 있었다.

태수는 처음부터 새로운 메시지를 썼다.

‘아빠는 네가 걱정돼서 그런 말을 했다. 네가 부모가 되어보면…’

그는 모두 지웠다.

다시 썼다.

‘나는 네가 후회할까 봐 두려웠다. 우리가 너를 위해 얼마나…’

다시 지웠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성적표에 적힌 문장이 떠올랐다.

‘너는 형만큼 될 수 없다.’

태수는 그 말을 평생 잊지 못했지만, 아버지에게 자신이 얼마나 아팠는지 말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마음속에서 계속 대답했다.

나는 형보다 못하지 않다.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 절반은,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에게 답장을 보내는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태수는 세 문장을 적었다.

‘네 선택에 동의하지 못해도 너를 모욕할 권리는 없었다.’

‘내 두려움을 네 성격처럼 말해서 미안하다.’

‘답장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메시지를 다섯 번 읽었다.

설명하고 싶은 말이 계속 떠올랐다. 왜 두려웠는지, 자신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부모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모두 남겨두었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새로운 메시지 옆에도 숫자 1이 나타났다.

다음 날 아침까지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태수는 평소보다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회의실 불을 켜자 한서연 대리가 이미 안에 있었다. 그는 두꺼운 시험 자료를 가슴에 안고 서 있었다. 책상 위에는 출시를 앞둔 가정용 배터리의 온도 변화 그래프가 놓여 있었다.

“일찍 왔네요.”

태수가 말했다.

“팀장님께 먼저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서연은 서류를 내밀었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어제 마지막 내구성 시험에서 온도가 한 번 급격히 올라갔습니다. 센서 오류일 수도 있지만, 같은 조건으로 다시 시험해야 할 것 같습니다.”

태수는 시계를 보았다.

한 시간 뒤에는 임원 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시험을 다시 하면 출시 일정이 미뤄질 수 있었다.

그는 습관처럼 말하려 했다.

“그 정도 수치라면 일단 보고서에서는…”

태수는 말을 멈추었다.

서연은 이미 다음 말을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입술을 다문 채 태수의 표정을 살폈다.

태수는 전화기를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민재에게 보낸 메시지 옆에는 아직도 숫자 1이 남아 있었다.

그는 전화기를 뒤집어 책상 위에 놓았다.

“앉아서 처음부터 말해봐요.”

서연은 바로 앉지 않았다.

태수도 자신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과 한 번으로 좋은 아버지가 된 것도 아니고, 부하 직원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아들의 선택이 두려웠다. 여전히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여전히 자신의 걱정이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누군가의 말을 끝내기 전에 그 사람의 성격부터 결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서연이 천천히 의자를 당겼다.

회의실 문이 닫혔다.

책상 위 그래프의 붉은 선 하나가 다른 선들보다 갑자기 높이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태수는 다시 한번, 누군가의 말을 들을 수도 있고 끊을 수도 있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Story 2 회의실의 다섯 초

malgeureut modern stories 2

한서연은 숫자가 사람보다 정직하다고 믿었다.

사람은 목소리를 높이거나 낮출 수 있었고, 기억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고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측정기에 남은 숫자는 자신이 본 것을 바꾸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믿으며 품질관리 일을 해왔다.

10월 첫째 주 월요일, 한빛에너지는 가정용 소형 배터리의 출시 전 마지막 내구성 시험을 진행했다. 새 제품은 정전이 발생하면 냉장고와 조명에 전력을 공급하는 장치였다. 회사는 그것을 ‘가족의 밤을 지키는 배터리’라고 홍보할 예정이었다.

오전 9시 17분, 시험실 3번 장비의 온도가 기준치를 넘어섰다.

71.2도.

불과 11초 뒤 정상 범위로 돌아왔지만, 서연은 화면을 확대했다. 센서 오류라기에는 상승 곡선이 매끄러웠다. 배터리 내부에서 실제로 열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계약직 기술자 윤상호가 장비 옆에서 물었다.

“센서 문제 아닐까요?”

“아직은 모르겠어요. 같은 조건으로 다시 돌려볼게요.”

두 번째 시험에서는 이상이 없었다.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상호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지만, 서연은 첫 번째 기록을 삭제하지 않았다. 우연은 원인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아직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일 뿐이었다.

그녀는 데이터를 정리해 김태수 팀장에게 가져갔다.

태수는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뒤집어 놓고 말했다.

“앉아서 처음부터 말해봐요.”

예전의 그라면 보고서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결론부터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그는 서연의 설명을 끝까지 들었다. 그래프를 두 번 확대해 보고, 시험 조건도 확인했다.

“재현은 안 됐고요?”

“네. 그래도 출시 전에 원인을 확인해야 합니다. 열흘 정도 추가 시험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태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출시 일정이 열흘 미뤄지면 광고 계약과 납품 일정도 함께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보고서 작성해서 오후 회의에 가져와요.”

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주 조금 안심했다.

누군가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준다는 것은 동의보다 먼저 오는 안도였다.

하지만 오후 회의실에는 숫자만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출시를 책임지는 박이사와 영업본부장, 생산팀장, 안전관리 책임자가 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벽면 화면에는 출시일까지 남은 날짜가 크게 표시되어 있었다.

D-18.

서연이 온도 상승 그래프를 띄우자 박이사가 물었다.

“재현됐습니까?”

“아직 재현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센서 오류라고 단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몇 번 중 한 번입니까?”

“현재까지 서른두 번 중 한 번입니다.”

박이사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서른두 번 중 한 번, 그것도 11초 만에 정상으로 돌아온 수치 때문에 출시를 미루자는 겁니까?”

“미루자는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닙니다. 원인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영업본부장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한 대리, 이번 제품에 얼마가 들어갔는지 알고 있죠?”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처럼 들렸지만 대답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었다.

박이사가 태수를 바라보았다.

“김 팀장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침까지 태수는 추가 시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의실에 앉아 있자 다른 숫자들이 떠올랐다. 지연될 납품 수량, 위약금, 평가 점수, 팀원들의 성과급.

그리고 대학 입학을 미루겠다고 말한 아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자신은 그 아이의 말을 듣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지금 이 방에서 서연의 말을 지지하면, 그 결과까지 책임져야 했다.

태수는 보고서보다 사람들의 표정을 먼저 살폈다.

“현재 데이터만으로는 결함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서연이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 그런데 첫 번째 곡선을 보면 내부 저항이…”

태수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한 대리.”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회의실을 멈추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지금은 분위기 파악할 때 아닌가?”

그 말이 떨어진 뒤 아무도 그래프를 보지 않았다.

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회의 결과, 출시는 예정대로 진행하고 시험만 계속하기로 했다. 단, 공식 보고서에는 ‘일시적 온도 편차가 관찰되었으나 재현되지 않음’이라고 기록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원래 서연이 작성한 문장은 달랐다.

‘내부 발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원인 규명 전까지 출시 승인 보류를 권고함.’

그날 저녁, 서연은 보고서의 문장을 세 번 고쳤다.

‘출시 승인 보류를 권고함’은 ‘추가 관찰이 필요함’이 되었다.

‘내부 발열 가능성’은 ‘센서 편차 가능성’이 되었다.

마지막에는 이렇게 남았다.

‘제품 안전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할 근거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음.’

저장 버튼을 누르기 전, 서연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

틀린 문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실을 작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안 가세요?”

윤상호가 시험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이것만 마무리하고요.”

“보고서 때문에요?”

서연은 대답 대신 화면을 닫았다.

상호는 계약이 두 달 남아 있었다. 문제를 크게 만들면 가장 먼저 책임을 떠안을 사람이 누구인지 서연은 알고 있었다. 정규직인 자신조차 입을 열기 어려운데, 상호에게 용기를 요구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일주일 뒤, 야간 반복 시험 중 배터리 한 대에서 연기가 발생했다.

불은 시험 장비 내부에서 곧바로 진압되었다. 다친 사람은 없었다. 건물에도 큰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출시 일정은 중단되었다.

다음 날 아침, 사내 메신저에는 사고 경위가 올라왔다.

‘야간 시험 담당자의 절차 미준수 가능성 조사 중.’

야간 담당자는 윤상호였다.

상호는 회의실에서 손등을 계속 문질렀다.

“저는 절차대로 했습니다.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생산팀장이 말했다.

“장비를 재가동하기 전에 냉각 시간을 충분히 뒀습니까?”

“매뉴얼에 적힌 시간보다 오 분 더 기다렸습니다.”

“본인이 그렇게 기억하는 거겠죠.”

상호가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의 노트북에는 첫 번째 이상 수치가 남아 있었다. 보고서의 수정 이력도 있었다. 누가 어떤 문장을 언제 고쳤는지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공개하면 태수의 지시뿐 아니라 자신의 침묵도 드러난다.

그녀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날 저녁, 언니 지혜에게 메시지가 왔다.

‘엄마한테 들었어. 회사에서 무슨 일 있다며? 괜찮아?’

서연은 한참 뒤 답장을 썼다.

‘괜찮지는 않아.’

곧 전화가 걸려 왔지만 받지 않았다. 대신 문장을 하나 더 보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왜 침묵했는지까지 알아주지 않더라.’

지혜가 물었다.

‘말하면 달라질까?’

서연은 답하지 못했다.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왜 더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침묵에는 더 분명한 결과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몫까지 잘못한 사람이 된다는 것.

이틀 뒤, 사고 원인을 논의하는 두 번째 회의가 열렸다.

상호는 참석자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계약직 직원의 진술은 서면으로 충분하다는 이유였다.

박이사는 회의를 시작하며 말했다.

“이번 일은 개인을 처벌하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고 회사의 신뢰를 지키기 위한 자리입니다.”

서연은 그 문장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회사의 신뢰를 지킨다는 말이, 때로는 회사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먼저 정해놓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화면에는 사고 분석 자료가 떠 있었다. 마지막 장의 제목은 ‘작업자 절차 미준수 가능성’이었다.

박이사가 물었다.

“추가 의견 있습니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서연은 노트북의 수정 이력 화면을 열었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손끝이 차가워졌다. 입을 열려고 했지만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

1초.

태수는 서연의 화면에 떠 있는 수정 이력을 보았다.

2초.

그는 아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떠올렸다.

‘내 두려움을 네 성격처럼 말해서 미안하다.’

3초.

자신이 서연에게 했던 말도 같은 종류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감당하기 두려운 위험을, 그녀가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문제로 바꾸었다.

4초.

서연이 입을 열었다.

5초가 되기 직전, 태수가 먼저 말했다.

“제가 한 대리의 보고를 중단시켰습니다.”

회의실의 시선이 태수에게 모였다.

그는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떨리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 시험에서 이미 이상 발열 징후가 있었습니다. 한 대리는 출시 보류를 권고하려 했습니다. 제가 회의 중에 말을 막았고, 보고서 표현을 낮추도록 했습니다.”

박이사의 얼굴이 굳었다.

“김 팀장, 지금 발언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서연은 태수를 바라보았다.

그가 먼저 말해주었으니 이제 자신은 피해자로 남을 수도 있었다. 모든 책임을 상사에게 넘기는 편이 더 안전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진실의 일부만 말하는 일이었다.

서연이 노트북을 화면에 연결했다.

“저도 보고서를 고쳤습니다.”

수정 전과 수정 후의 문장이 나란히 나타났다.

“지시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저장한 사람은 저입니다. 그리고 사고가 난 뒤에도 바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업본부장이 물었다.

“그럼 두 분 모두 기존 보고서가 문제였다는 걸 인정하는 겁니까?”

서연이 대답했다.

“보고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를 말한 사람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생길 손해를 먼저 계산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회의는 그 자리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내 감사가 시작되었다. 출시 일정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태수는 팀장 업무에서 잠정 배제되었다. 서연에게도 보고 의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않았다는 책임이 돌아왔다.

윤상호의 계약은 조사 기간 동안만 연장되었다. 정규직 전환에 대해서는 아무도 약속하지 않았다.

진실을 말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지는 않았다.

며칠 뒤, 서연은 빈 회의실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태수가 문 앞에 서서 말했다.

“한 대리.”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미안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설명이 붙어 있지 않았다. 일정이 촉박했다거나, 윗선의 압력이 심했다거나,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없었다.

서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한테 고맙다고 하지는 마세요.”

태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말할 수 있게 해주신 게 아니니까요. 저도 너무 늦게 말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서연은 노트북을 닫았다.

“다음에는 처음부터 들어주세요.”

태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연은 그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 창문 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산을 펴고 건물 사이를 걸었다. 누군가는 혼자였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우산 안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서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언니 지혜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이번 설에는 집에 올 거야?’

서연은 걷던 자리에 멈췄다.

몇 번이나 답장을 썼다가 지웠다.

그리고 마침내 짧게 보냈다.

‘언니가 가지 않겠다면, 이번에는 이유를 들을게.’

메시지는 곧 읽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지혜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듣겠다는 말은 문을 여는 일이었다.

그 문으로 상대가 곧바로 들어오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Story 3 이번 설에는 가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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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혜가 어머니에게 보내려던 문장은 열한 글자였다.

‘이번 설에는 가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사흘째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짧은 문장일수록 그 뒤에 따라올 말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가족끼리 이래도 되니.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혼하고 나더니 사람이 더 까칠해졌다.

엄마가 언제까지 살 것 같니.

지혜는 메시지를 지우고 냉장고를 열었다. 설에 가져가려고 사둔 한우와 과일 상자가 안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식탁에서는 열일곱 살 딸 최유나가 문제집을 펴놓은 채 귤의 흰 껍질을 하나씩 떼고 있었다.

“엄마.”

“응?”

“이번 설에도 외할머니 집 가?”

지혜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왜?”

“그냥 물어본 거야.”

유나는 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지혜는 딸이 정말로 궁금해서 물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난 추석, 어머니 정명숙은 친척들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유나에게 잡채를 더 먹으라고 권했다. 유나가 배부르다고 하자 명숙은 웃으며 말했다.

“먹고 싶은 것만 먹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면 못써. 네 엄마처럼 너무 예민하면 같이 사는 사람이 힘들어.”

방 안의 대화가 잠시 멈췄다.

누군가는 못 들은 척했고, 누군가는 전을 뒤집었다. 지혜는 어머니를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유나가 물었다.

“아빠가 엄마랑 이혼한 것도 엄마가 예민해서야?”

지혜는 핸들을 잡은 채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야.”

“그럼 왜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어?”

“할머니가 잘못 말한 거야.”

“엄마는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그 질문은 지난 넉 달 동안 지혜의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지혜는 유나에게 늘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면 어른에게 알리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어머니 앞에서 마흔한 살이 아니라 열한 살이 되었다.

말대꾸하지 않는 아이.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 아이.

상처받았다는 사실보다 어머니가 화낼 가능성을 먼저 걱정하는 아이.

유나가 다시 물었다.

“가기 싫어?”

지혜는 딸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는?”

유나는 귤껍질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싫다고 하면 엄마도 안 갈 거야?”

“그럴 수도 있어.”

“그럼 내가 가족을 못 만나게 하는 것 같잖아.”

지혜는 딸의 말 속에서 자신의 오래된 습관을 들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먼저 책임지는 습관.

거절하기 전에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장면부터 떠올리는 습관.

“그건 네 책임이 아니야.”

“엄마 책임이야?”

지혜는 잠시 생각했다.

“응. 결정하는 건 엄마 책임이야.”

그날 밤 지혜는 동생 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사 사고 이후 서연은 사내 감사를 받는 중이었다. 지혜는 동생에게 자신의 문제까지 얹고 싶지 않았지만, 지난번에 받은 메시지가 마음에 남아 있었다.

‘언니가 가지 않겠다면, 이번에는 이유를 들을게.’

서연은 한 번도 말을 끊지 않았다.

지혜는 지난 추석의 일과 유나의 질문을 이야기했다. 설에 가지 않을 생각이지만, 그것이 어머니를 벌주기 위한 행동처럼 느껴져 두렵다고 말했다.

“엄마가 아플까 봐 걱정돼. 혼자 지내는 사람이잖아. 아빠 돌아가신 뒤로 명절만 기다리고.”

“언니도 아프잖아.”

“나는 견딜 수 있어.”

“그 말을 엄마도 평생 했어.”

지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가 안 가려는 건 엄마를 아프게 하려는 거야?”

“아니.”

“다시는 안 보려는 거야?”

“그것도 아니야.”

“그럼 왜 안 가려고 해?”

지혜는 식탁 건너편에 놓인 유나의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유나가 모욕당하는 자리에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떡국을 먹고 싶지 않아. 내가 또 침묵하면, 엄마 말이 맞다고 가르치는 것 같아서.”

서연이 말했다.

“그 이유를 엄마한테 말해.”

“말하면 엄마가 알아들을까?”

“모를 수도 있어.”

“그럼 무슨 소용이야?”

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회사의 그 회의에서 내가 말한 것도, 사람들이 바로 알아들어서가 아니었어. 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내 침묵의 값을 치르게 되니까 말한 거야.”

통화를 마친 뒤, 지혜는 다시 메시지를 열었다.

이번에는 열한 글자 뒤에 이유를 적었다.

‘엄마, 이번 설에는 유나와 가지 않겠습니다.

지난 추석에 엄마가 유나에게 한 말은 아이에게 오래 남았습니다. 유나는 아빠가 떠난 이유가 제 성격 때문인지 물었습니다. 그때 제가 엄마의 말을 막지 못한 것도 잘못입니다.

엄마를 벌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유나의 부모와 외모와 성격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평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기 전까지는 가족 모임에 데려가지 않겠습니다.

엄마가 화날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제 결정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른 뒤, 지혜의 손이 떨렸다.

메시지에는 곧 읽음 표시가 떴다.

전화는 일 분도 지나지 않아 걸려 왔다.

“너 지금 제정신이니?”

명숙의 목소리는 인사도 없이 날아왔다.

“메시지 읽었어?”

“유나한테 내가 무슨 몹쓸 말을 했다고 이래? 요즘 애들이 너무 약해서 문제야. 그 정도 말도 못 듣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

“그 말이 유나한테 어떤 뜻으로 남았는지 메시지에 썼어.”

“나는 걱정돼서 한 말이야.”

“걱정이었어도 상처가 됐어.”

“그러니까 내가 나쁜 외할머니라는 거니?”

지혜는 눈을 감았다.

어머니와 이야기할 때마다 대화는 같은 곳으로 흘렀다. 어머니가 한 행동을 말하면, 어머니는 자신의 존재 전체가 부정당했다고 느꼈다. 그러면 지혜는 행동이 아니라 어머니의 선함을 증명해야 했다.

“엄마가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야. 그 말이 잘못됐다는 거야.”

“사람이 어떻게 말 한마디도 실수하지 않고 사니?”

“실수하지 말라는 게 아니야. 잘못 말했을 때, 상대가 아팠다는 걸 인정해 달라는 거야.”

명숙은 헛웃음을 지었다.

“너는 어릴 때부터 꼭 말을 그렇게 어렵게 했다. 나는 네 외할머니한테 그보다 심한 말도 듣고 살았어. 시어머니한테도 참을 만큼 참았고. 그래도 명절에 안 간 적은 한 번도 없어.”

지혜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가 참았다는 이유로 유나도 참아야 해?”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엄마가 받은 상처를 내가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야. 그런데 그 상처를 견딘 방식까지 유나한테 물려주고 싶지는 않아.”

“결국 네 딸만 중요하다는 거구나.”

“지금은 유나를 지키는 게 내 책임이야.”

“나는 네 엄마가 아니니?”

그 말에 지혜의 목이 막혔다.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것과 어머니의 말을 거절하는 일이 왜 서로 반대편에 있어야 하는지, 지혜는 알 수 없었다.

“엄마도 내 엄마야.”

“그런데 설에 안 와?”

“응. 이번에는 안 갈 거야.”

명숙이 전화를 끊었다.

지혜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앉아 있었다.

거절하고 나면 홀가분할 줄 알았다. 그러나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죄책감과 슬픔, 분노와 안도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경계를 세운다는 것은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일이 아니었다.

때로는 사랑하면서도 문을 닫는 일이었다.

문밖에서 누군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바로 열어주지 않는 일이었다.

그날 밤 명숙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실 한쪽에는 설 선물로 준비한 유나의 목도리가 놓여 있었다. 명숙은 목도리를 펼쳤다가 다시 접었다.

그녀에게 명절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식구들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자신이 아직 가족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날이 되었다.

딸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집이 비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는 일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오후, 명숙은 문화센터 도예 교실에 갔다.

교실 이름은 ‘빈자리’였다.

강사 오선자는 수강생들에게 손바닥만 한 그릇을 만들라고 했다.

“오늘은 뭘 담을지 생각하지 마세요. 비어 있는 모양만 살펴보세요.”

명숙은 흙의 가운데를 엄지로 눌렀다. 그릇이 넓어지자 손가락으로 입구를 다시 오므렸다.

선자가 다가와 물었다.

“왜 자꾸 입구를 닫으세요?”

“너무 벌어지면 모양이 흐트러지잖아요.”

“그릇은 벌어진 만큼 담을 수 있어요.”

“그러다 깨지면요?”

“흙이 견딜 수 있는 만큼만 넓혀야죠. 닫아버리는 것과는 달라요.”

명숙은 손을 멈췄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딸이 이번 설에 안 온대요.”

선자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자식이 부모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가 모르니까, 누가 옳다고는 못하겠네요.”

“요즘 사람들은 가족한테도 선을 긋는대요.”

선자는 자신의 작업대에 놓인 그릇을 천천히 돌렸다.

“선이 없는 그릇은 물을 담지 못해요.”

“그럼 가족이 남처럼 살아야 해요?”

“선은 밀어내려고만 긋는 게 아니에요.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가 다른 사람인지 알아야, 섞이지 않고 함께 있을 수 있죠.”

명숙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오라고 했는데 안 오는 건 불효예요.”

선자가 물었다.

“오라는 말 안에, 안 갈 수도 있다는 자리는 있었어요?”

명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날 아침, 명숙의 아파트에는 떡국 냄새가 가득했다.

서연은 어머니 혼자 명절을 보내게 할 수 없어 아침 일찍 찾아왔다. 하지만 지혜를 설득해서 데려오지는 않았다.

식탁에는 네 사람분의 수저가 놓여 있었다.

명숙은 지혜와 유나의 수저를 치우지 않았다.

“언니한테 전화해 봤니?”

“안 했어.”

“네가 말하면 들을 거야.”

“언니가 결정한 일이야.”

“너까지 언니 편을 드는 거니?”

서연은 떡국을 한 숟가락 떠서 식혔다.

“엄마 반대편에 서려는 게 아니야.”

“그럼?”

“언니가 한 말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거야.”

명숙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는 유나가 미워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야.”

“알아.”

“내가 얼마나 예뻐하는데.”

“그것도 알아.”

“그럼 됐잖아.”

서연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사랑한 마음이 있었다고 해서, 상처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명숙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같은 시각, 지혜와 유나는 집에서 만두를 빚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만든 만두는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유나가 속을 너무 많이 넣어 만두피가 터지자 지혜가 웃었다.

“그건 삶으면 다 풀어지겠다.”

“그냥 군만두로 만들면 되지.”

“모든 문제를 굽는 걸로 해결할 수는 없어.”

“오늘은 해결할 수 있어.”

둘은 터진 만두를 프라이팬에 올렸다.

점심이 가까워졌을 때 유나가 물었다.

“엄마, 외할머니 보고 싶어?”

지혜는 잠시 손을 멈췄다.

“응.”

“그런데도 안 간 거야?”

“응.”

유나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혜가 말했다.

“보고 싶다는 마음하고, 만나면 안 된다는 판단이 같이 있을 수도 있어.”

“할머니가 사과하면 갈 거야?”

“사과 한마디만 받으면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야. 서로 말하는 방식을 바꿔야겠지.”

“할머니가 안 바뀌면?”

지혜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럼 만나는 방법을 다르게 찾아야 할 거야.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나 때문에 안 간 거야?”

지혜는 딸의 손에 묻은 밀가루를 닦아주었다.

“너 때문이 아니라, 엄마가 해야 할 일을 이제 한 거야.”

오후 세 시가 넘어 명숙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식탁 위에 놓인 떡국과 갈비찜 사진이었다.

글은 없었다.

지혜는 답장하지 않았다.

한 시간 뒤, 두 번째 메시지가 왔다.

‘음식은 서연이 편에 보낸다.’

여전히 사과는 없었다.

지혜는 짧게 답했다.

‘잘 받을게. 고마워.’

저녁이 되자 서연이 음식이 든 가방을 가져왔다. 그 안에는 떡국 떡과 갈비찜, 유나가 좋아하는 약과가 들어 있었다. 맨 아래에는 포장하지 않은 목도리가 놓여 있었다.

유나는 목도리를 목에 둘러보았다.

“할머니가 만든 거야?”

“그런 것 같아.”

“전화해도 돼?”

지혜는 잠시 망설였다.

“네가 하고 싶으면.”

유나가 전화를 걸었다. 명숙은 두 번 울리기도 전에 받았다.

“목도리 받았어요.”

명숙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색 마음에 드니?”

“네. 고마워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명숙이 말했다.

“지난번에 할머니가 한 말은…….”

지혜는 주방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명숙은 문장을 끝내지 못했다.

“다음에 오면 네가 좋아하는 갈비 해줄게.”

유나는 지혜를 바라보았다.

“네.”

통화가 끝난 뒤 유나가 말했다.

“할머니가 미안하다는 말 하려고 했던 것 같아.”

“그랬을 수도 있어.”

“왜 못 했을까?”

지혜는 어머니가 평생 사과 대신 음식과 옷을 건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미안하다는 말은 어머니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아직 그 말을 담을 만한 자리가 없나 봐.”

“그럼 기다려?”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을 거야. 우리도 계속 말해야지.”

그날 밤, 지혜는 어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음식과 목도리 잘 받았어. 고마워.

하지만 음식이 지난 일을 대신할 수는 없어. 엄마가 들을 준비가 되면, 유나가 그 말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

답장은 다음 날 아침에 왔다.

‘지금은 자신 없다.’

잠시 뒤, 한 문장이 더 도착했다.

‘그래도 들어보려고는 한다.’

지혜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용서도 화해도 아니었다.

그러나 닫힌 문 안쪽에서, 누군가 손잡이에 손을 얹은 것처럼 느껴졌다.

옆방에서는 유나가 학교 친구와 통화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목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유나의 휴대전화 화면에는 하늘고등학교 학생들이 사용하는 익명 게시판이 열려 있었다.

누군가 유나의 설날 사진 밑에 댓글을 남겼다가 지웠다.

댓글은 사라졌지만, 유나는 이미 읽은 뒤였다.

‘엄마 닮아서 예민한 척하는 거 진짜 피곤하다.’

지혜가 방문을 두드렸다.

“유나야, 괜찮아?”

유나는 화면을 끄고 대답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말은 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읽힌 말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Story 4 삭제된 댓글

댓글은 27초 동안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박나리는 그 문장을 읽었다.

하늘고등학교 익명 게시판 ‘하늘숲’에는 매일 수백 개의 글이 올라왔다. 급식 메뉴에 대한 불평, 시험 범위에 대한 질문, 교사들의 말버릇, 누구와 누가 사귄다는 소문까지 모두 익명으로 오갔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평소 하지 못한 말을 했다.

자신의 이름이 사라지면, 말의 무게도 함께 사라진다고 믿는 것 같았다.

4월 둘째 주 월요일 아침, 나리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최유나의 책상 앞에 섰다.

“이거 네가 쓴 거야?”

나리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삭제된 댓글을 캡처한 사진이 떠 있었다.

‘박나리 맨날 보건실 가는 거 관심받으려고 그러는 거잖아. 부회장까지 하면서 멘탈 약한 척하는 거 웃김.’

유나는 캡처 화면을 보는 순간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쓴 문장이었다.

전날 밤 11시 43분에 쓰고, 27초 뒤 삭제한 댓글이었다.

“대답해.”

나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반 학생들이 두 사람을 보기 시작했다.

“내가 왜 썼다고 생각해?”

유나는 질문으로 시간을 벌었다.

“너 말고 내가 보건실 다니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몇 명 없으니까.”

“나만 아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네가 아니야?”

유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리는 휴대전화를 내렸다.

“너도 당해봤으면서.”

그 말이 더 아팠다.

두 달 전 설날, 유나가 집에서 만든 만두 사진을 게시판에 올렸을 때 누군가 댓글을 남겼다.

‘엄마 닮아서 예민한 척하는 거 진짜 피곤하다.’

댓글은 곧 삭제되었지만, 알림 화면에 남은 문장은 지워지지 않았다.

유나는 그 문장을 쓴 사람이 나리라고 생각했다.

나리는 며칠 전 미술 시간에 유나가 창문을 닫아달라고 하자 친구들에게 “쟤는 너무 예민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유나가 부모의 이혼 때문에 힘들어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상처는 범인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누군가를 지목하고 싶어 했다.

유나는 나리가 보건실에서 과호흡으로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나리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던 일이었다.

유나는 그 비밀을 익명 게시판에 올렸다.

게시 버튼을 누른 순간에는 가슴이 시원해졌다.

27초 뒤 정신을 차리고 삭제했다.

그 짧은 시간이면 충분히 없었던 일이 될 줄 알았다.

“미안해.”

유나가 겨우 말했다.

나리는 웃지 않았다.

“뭐가 미안한데?”

“그냥…….”

“내가 봐서? 아니면 네가 써서?”

교실 종이 울렸다.

나리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유나는 첫 수업 내내 칠판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나리의 캡처 화면은 이미 반 단체 대화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누가 쓴 거야?’

‘진짜 너무했다.’

‘근데 박나리 보건실 자주 가는 건 맞잖아.’

‘삭제했는데 굳이 캡처해서 퍼뜨리는 것도 좀 그렇지 않냐?’

사람들은 상처받은 사람보다 먼저, 상처가 공개되는 방식에 대해 판단했다.

유나는 휴대전화를 끄고 화장실로 갔다.

가장 안쪽 칸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때 강민서에게 메시지가 왔다.

‘괜찮아?’

민서는 중학교 때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설날에 받은 익명 댓글을 처음 보여준 사람도 민서였다.

유나는 답장했다.

‘안 괜찮아.’

‘나리한테 네가 쓴 거야?’

유나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썼다.

‘응.’

답장은 한참 뒤에 왔다.

‘왜 그랬어?’

유나의 손가락이 멈췄다.

민서는 유나가 왜 그랬는지 알고 있었다. 설날 댓글을 쓴 사람으로 나리를 의심한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서는 처음 듣는 사람처럼 물었다.

유나는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민서야.’

‘응?’

‘설날 댓글, 정말 나리라고 생각해?’

이번에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오후 수업이 끝날 무렵, 담임교사가 유나와 나리를 교무실로 불렀다.

학교 게시판 관리자는 삭제된 글도 작성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리의 어머니가 학교에 항의했고, 교감은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기를 원했다.

“두 학생이 서로 오해해서 벌어진 일로 정리하면 어떨까?”

담임교사가 말했다.

“유나가 사과하고, 나리가 캡처를 더 퍼뜨리지 않는 것으로.”

나리가 물었다.

“저는 왜 약속해야 해요?”

“일을 크게 만들면 둘 다 힘들어져.”

“제가 댓글을 쓴 것도 아닌데요.”

담임교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유나를 바라보았다.

“유나야, 정말 네가 작성했니?”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그랬어?”

유나는 나리를 보았다.

‘나리가 먼저 나를 공격했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면, 자신의 행동에 이유가 생긴다. 그러나 증거 없는 의심을 말하는 순간, 나리는 다시 가해자로 불릴 것이다.

“확인하지 않은 일을 사실처럼 생각했습니다.”

“나리에게 사과할 수 있겠니?”

“네.”

나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지금 사과 듣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서로 풀어야지.”

“왜 제가 지금 풀어야 해요?”

나리의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울지는 않았다.

“사과하는 사람 마음 편해지라고 제가 여기 앉아 있어야 해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나리는 교무실을 나갔다.

그날 저녁, 담임교사가 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혜는 유나가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현관문이 열렸을 때, 딸에게 가장 먼저 묻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하지만 그 말은 행동을 묻는 문장이 아니었다.

너는 어떻게 그런 인간일 수 있느냐고 묻는 문장이 될 수 있었다.

지혜는 숨을 고른 뒤 말했다.

“학교에서 전화 왔어.”

유나는 신발을 벗은 채 굳어 있었다.

“미안해.”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

유나가 고개를 숙였다.

“나리한테는 했어?”

“하려고 했는데, 듣기 싫대.”

“그럴 수 있어.”

“사과도 못 하게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지혜는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나는 지금 사과해서 빨리 끝내고 싶은 거야?”

유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나쁜 애 아니야.”

지혜는 그 말을 듣고 딸을 안아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누구나 실수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빨리 건네는 위로는, 때로 책임을 덮어버린다.

“엄마도 네가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럼 왜 그렇게 봐?”

“유나가 상처받은 아이인 것과, 나리를 상처 입힌 아이인 건 동시에 사실이니까.”

유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그런 댓글을 받았어.”

“알아.”

“나리가 썼다고 생각했어.”

“확인했어?”

“아니.”

“그럼 유나가 받은 상처는 이유가 될 수는 있어도, 허락이 될 수는 없어.”

유나가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 편 아니야?”

지혜는 지난 설날 어머니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 유나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를 지킨다는 것은, 아이가 한 일을 감추는 것과 같지 않았다.

“엄마는 네 편이야.”

지혜가 말했다.

“그래서 네가 한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지 않을 거야.”

유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지혜는 따라가지 않았다.

딸에게도 혼자 울 수 있는 자리가 필요했다.

다음 날 학교는 게시판 운영을 일시 중단했다.

전교생에게는 ‘건전한 온라인 문화 조성을 위한 점검’이라고 공지했다. 누구의 댓글 때문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이미 유나와 나리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유나는 시선이 등에 붙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점심시간, 상담교사 이수진이 유나를 불렀다.

상담실에는 민서가 앉아 있었다.

민서는 유나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수진이 말했다.

“민서가 할 말이 있다고 찾아왔어.”

민서는 두 손으로 교복 치마를 움켜쥐었다.

“설날에 네 사진에 댓글 쓴 거, 나야.”

유나는 의자에 앉지 못했다.

“뭐?”

“바로 지웠어.”

민서의 첫 설명은 사과가 아니라 삭제였다는 사실이 유나의 가슴을 찔렀다.

“왜?”

“그날 애들이 단체방에서 네 사진 얘기했어. 가족끼리 사이 안 좋으면서 행복한 척한다고.”

“내 가족 얘기를 네가 했어?”

“처음에는 그냥 네가 외할머니랑 싸웠다고만…….”

“그걸 왜 말해?”

“분위기가 그렇게 돼서.”

유나는 그 말을 이미 들어본 적이 있었다.

분위기를 파악하라는 말.

그 말은 언제나 책임의 주인을 흐리게 했다.

“그래서 우리 엄마가 나한테 했던 말까지 썼어?”

유나가 설날 전날 민서에게 털어놓았던 이야기였다.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예민하다고 불렀고, 자신도 같은 사람이 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민서는 그 가장 약한 부분을 농담으로 바꾸었다.

“애들이 웃을 줄 알았어. 그런데 올리고 나니까 너무 심한 것 같아서 바로 지웠어.”

“나는 읽었어.”

“미안해.”

“몇 달 동안 나리가 쓴 줄 알았어.”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너무 화나 있어서…….”

“그래서 나리가 대신 욕먹게 뒀어?”

민서가 울기 시작했다.

유나도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수진이 두 사람 사이에 앉았다.

“민서가 사과했으니 유나가 받아줘야 하는 것은 아니야.”

민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해요?”

“유나가 바로 용서해주지 않아도, 네가 책임질 방법을 찾아야지.”

수진은 유나에게도 말했다.

“민서가 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해서, 네가 나리에게 쓴 댓글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처음으로 그 말이 변명 없이 나왔다.

학교는 민서와 유나에게 각각 특별교육과 교내 봉사 처분을 내렸다. 게시판 사용도 한 학기 동안 금지했다.

민서와 유나는 더 이상 함께 점심을 먹지 않았다.

서로 사과했지만, 예전의 자리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유나는 나리에게 긴 사과문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글에는 설날에 자신이 받은 댓글과 민서를 의심하게 된 과정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읽어보니, 나리가 자신의 행동을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요청처럼 보였다.

유나는 전부 지웠다.

두 번째 글에는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는 문장이 들어갔다.

그 문장도 지웠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짧았다.

‘나는 확인하지 않은 의심을 사실처럼 믿고, 네가 맡긴 이야기를 이용해 너를 공격했어. 댓글을 지웠지만 네가 읽었다는 사실은 없어지지 않아. 네가 지금 내 사과를 받고 싶지 않다는 것도 존중할게. 내가 할 수 있는 책임이 무엇인지 선생님과 계속 찾겠다.’

유나는 그 편지를 상담교사에게 맡겼다.

나리가 읽을지, 버릴지는 나리에게 맡기기로 했다.

일주일 뒤, 나리에게서 답장이 왔다.

‘읽었어. 아직 너랑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

그것이 전부였다.

유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알겠어’라는 말조차 나리에게는 다시 대답해야 한다는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해 5월, 유나는 외할머니 명숙과 함께 도예 교실 ‘빈자리’를 찾았다.

설날 이후 처음으로 둘만 함께 외출한 날이었다.

명숙은 유나를 강사 오선자에게 소개했다.

“제 손녀예요.”

그 말에는 자랑스러움과 조심스러움이 함께 들어 있었다.

명숙은 유나 앞에서 지난 추석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못했다. 도예 교실로 오는 버스 안에서도 학교 성적과 부모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했을 것이다.

그날은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그 침묵은 외면이 아니라, 무엇을 말해야 할지 찾기 위한 기다림이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작은 그릇을 만들었다.

유나가 흙의 중심을 깊게 누르자 가장자리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망쳤나 봐요.”

선자가 그릇을 살펴보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요?”

“모양이 틀어졌잖아요.”

“처음 생각한 모양은 아닐 수 있죠. 그렇다고 쓸 수 없는 그릇은 아니에요.”

선자는 유나의 손을 고쳐 잡아주지 않았다.

“어떤 모양으로 남길지는 직접 정해보세요.”

유나는 기울어진 쪽을 억지로 펴지 않았다. 반대쪽을 조금 낮춰 새로운 입구를 만들었다.

명숙이 그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유나야.”

“네?”

“지난번에 할머니가 네 엄마한테 한 말.”

명숙은 손에 묻은 흙을 바라보았다.

“그건 할머니가 틀린 말을 한 거야.”

유나는 손을 멈췄다.

명숙은 ‘하지만’을 붙이지 않았다.

걱정해서 그랬다는 말도, 자신도 더 심한 말을 듣고 살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그 말을 듣고 아빠 일까지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어. 몰랐어도, 내가 한 말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유나는 곧바로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직 생각하면 속상해요.”

명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두 사람은 다시 흙을 만졌다.

용서는 그날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완성된 척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날 무렵, 선자는 창가의 긴 선반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수강생들이 만든 빈 그릇들이 놓여 있었다.

“다음 달에 하늘종합병원으로 가져갈 그릇들이에요. 오랫동안 병원에 있는 분들이 작은 물건이나 편지를 담을 수 있게요.”

유나는 자신이 만든 기울어진 그릇을 바라보았다.

“제 것도 놓아도 돼요?”

“물론이죠.”

“누가 가져가는지는 모르는 거예요?”

“네. 이름도 쓰지 않아요.”

유나는 그릇 바닥에 적으려던 자신의 이름을 지웠다.

그리고 빈 그릇을 선반 위에 놓았다.

이번에는 익명이라는 사실 뒤에 숨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에게, 아무 말도 강요하지 않는 빈자리를 건네기 위해서였다.

Story 5 빈 그릇을 두고 간 사람

malgeureut modern stories 5

오선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빈자리를 남기는 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이 남긴 침묵은 견디지 못했다.

6월 첫째 주, 도예 교실 ‘빈자리’의 창가에는 하늘종합병원으로 보낼 그릇 서른여덟 개가 놓여 있었다.

크기도 색도 달랐다. 반듯한 그릇도 있었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그릇도 있었다. 최유나가 만든 그릇은 입구가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선자는 그릇마다 작은 카드를 한 장씩 넣었다.

‘이곳에는 무엇을 넣어도 됩니다.

아무것도 넣지 않아도 됩니다.’

수강생 정명숙이 카드를 읽었다.

“정말 아무것도 안 넣어도 돼요?”

“그럼요.”

“그럴 거면 그릇이 왜 필요해요?”

선자는 웃었다.

“비어 있다는 걸 눈으로 볼 수 있잖아요.”

“빈 건 그냥 없는 거 아닌가요?”

“기다리고 있는 걸 수도 있죠.”

명숙은 유나가 만든 그릇을 상자에 넣었다.

“선생님은 기다리는 걸 잘하시나 봐요.”

선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5년째 연락하지 않는 아들 오현우가 있었다.

마흔두 살인 현우는 인천에서 작은 가구 공방을 운영했다. 선자는 손님의 소개로 아들의 소식을 간간이 들었다. 공방을 옮겼다는 것, 허리를 다쳤다는 것, 아내 소희가 다시 일을 시작했다는 것.

그러나 현우에게 직접 들은 소식은 하나도 없었다.

연락이 끊어진 것은 손녀가 태어난 지 넉 달쯤 되었을 때였다.

산후우울증을 겪던 소희는 아기를 안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선자는 며느리를 도와주겠다며 인천으로 갔지만, 사흘째 되던 날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이 하나 낳고 힘들다고 누워만 있으면 현우는 어떻게 하니? 엄마가 약하면 아이도 불안해져.”

소희는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현우가 어머니에게 그 말을 취소하라고 했다.

선자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저렇게 약한 사람한테 네 인생까지 끌려가면 어떡하니?”

현우의 얼굴이 굳었다.

“엄마는 걱정이라는 말로 사람을 모욕해.”

그날 현우는 어머니의 가방을 현관 앞에 내놓았다.

선자는 떠나면서 말했다.

“나중에 후회하고 찾아와도 그때는 늦어.”

현우는 그 뒤로 찾아오지 않았다.

선자는 사람들에게 며느리가 아들을 빼앗아 갔다고 말했다. 아들이 아내에게 휘둘린다고도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자신이 버림받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

자신이 한 말을 보지 않아도 되는 설명이었다.

병원에 보낼 그릇들을 정리하던 날, 선자의 손에서 카드 한 장이 떨어졌다. 그것을 주우려고 몸을 숙이는 순간, 명치 아래로 날카로운 통증이 지나갔다.

명숙이 선자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체했나 봐요.”

“얼굴이 하얘졌어요.”

선자는 의자에 앉았다. 통증은 곧 가라앉았지만, 명숙은 그냥 보내지 않았다.

검사 결과, 위에 종양이 발견되었다.

다행히 다른 곳으로 퍼진 흔적은 없었다. 의사는 수술로 제거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보호자에게 연락하세요.”

간호사의 말에 선자는 명숙의 전화번호를 적었다.

“아드님은요?”

“멀리 살아요.”

“수술 전에 알려두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선자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프다고 하면 올 사람이었으면, 진작 왔겠죠.”

그 말은 체념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요구가 숨어 있었다.

아들이 먼저 찾아와야 한다.

아들이 먼저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아들이 먼저 어머니가 늙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병실로 찾아온 명숙은 선자의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아드님한테 말 안 할 거예요?”

“무슨 자격으로 오라고 해요.”

“오라고 하지 말고, 알려만 주면 되잖아요.”

“알려주면 오라는 뜻이지.”

“그럼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요.”

선자는 창밖을 보았다.

“그 말을 어떻게 믿겠어요? 어머니가 수술한다는데 안 오면 불효자 되는 거잖아요.”

명숙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신도 딸에게 명절에 오라고 말하면서, 오지 않을 자리를 남기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면 선생님이 원하는 답을 받으려고 연락하지 마세요.”

명숙이 말했다.

“선생님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만 말해요.”

그날 밤 선자는 현우에게 보낼 음성메시지를 녹음했다.

4분 37초였다.

자신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소희를 돕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아들이 연락을 끊은 뒤 얼마나 외로웠는지 설명했다. 다음 주에 수술한다는 말도 세 번이나 했다.

끝까지 들어본 선자는 메시지를 지웠다.

다시 녹음했다.

이번에는 2분 11초였다.

그것도 지웠다.

마지막에는 글로 썼다.

‘현우야.

나는 네가 연락을 끊은 이유를 오랫동안 소희 탓으로 말해왔다. 하지만 내가 소희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고, 네가 멈추라고 했을 때도 듣지 않은 것이 먼저였다.

다음 주 화요일에 위 수술을 받는다. 이 사실을 핑계로 오라고 요구하지는 않겠다. 답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내가 한 말을 걱정이었다고 바꾸어 부르지 않겠다. 미안하다.’

선자는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마지막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미안하다.’

그 뒤에 붙이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나도 힘들었다.’

‘하지만 네가 5년이나 연락하지 않은 것은 너무했다.’

‘하지만 부모에게도 기회는 줘야 한다.’

선자는 그 말들을 쓰지 않았다.

메시지는 다음 날 오전에 읽혔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수술 당일, 명숙과 딸 서연이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지혜도 일을 마친 뒤 오겠다고 했다.

선자는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휴대전화를 다시 확인했다.

현우의 이름은 없었다.

“역시 안 오네요.”

선자가 말했다.

명숙은 괜찮을 거라는 말도, 아들이 곧 올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건 선생님 몫이고, 오는 건 아드님 몫이니까요.”

선자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은 별로 위로가 안 되네요.”

“저도 알아요.”

수술은 네 시간 넘게 걸렸다.

종양은 제거되었고, 추가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했지만 의사는 수술이 계획대로 끝났다고 말했다.

선자가 마취에서 깨어난 것은 저녁이었다.

병실 창가에 작은 그릇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입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그릇이었다.

유나가 만들어 병원에 기증한 그릇이었다.

선자가 간호사에게 물었다.

“저 그릇은 누가 가져왔어요?”

“오후에 남자분이 다녀가셨어요. 가족이라고는 하지 않으셨는데, 오선자 환자에게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선자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

“키가 크고, 오른쪽 눈썹 위에 흉터가 있었어요?”

“네, 있었던 것 같아요.”

현우였다.

선자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수술 부위가 당겼다.

명숙이 그릇을 가져다주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편지도, 전화번호도, 용서한다는 말도 없었다.

“밑에도 봐줘요.”

명숙이 그릇을 뒤집어 보았지만 이름조차 없었다.

선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왔으면 얼굴이라도 보고 가지.”

“아직 준비가 안 됐나 보죠.”

“그럼 이 빈 그릇은 왜 두고 갔을까요?”

명숙은 그릇을 다시 선자의 침대 옆에 놓았다.

“비어 있는 것도 그 사람의 답일 수 있잖아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어떻게 답이에요?”

“말할 준비가 안 됐다는 답이요.”

선자는 그릇을 바라보았다.

평생 흙을 만져온 그녀에게 빈 그릇은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아들이 남긴 빈 그릇만은 거절처럼 보였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현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병원에 갔지만 엄마 얼굴을 볼 준비는 아직 안 됐어.

그릇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어. 내 침묵을 엄마가 대신 해석하지 않았으면 해.

준비가 되면 내가 말할게.’

선자의 손가락이 답장 창 위에서 움직였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니?’

그녀는 문장을 지웠다.

‘엄마가 죽은 뒤에 후회하지 마라.’

그 문장도 지웠다.

오랫동안 화면을 바라본 뒤, 한 글자만 보냈다.

‘그래.’

너무 짧아 차갑게 보일까 걱정되었다.

이모티콘을 붙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현우가 남긴 빈자리를 자신의 불안으로 채우지 않기로 했다.

일주일 뒤,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 종양은 완전히 제거되었지만 정기적인 검사가 필요했다.

현우에게서는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선자는 퇴원하며 빈 그릇을 가방에 넣었다.

그릇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7월이 되어 선자는 도예 교실로 돌아왔다.

수강생들은 작은 케이크를 준비했다. 명숙은 선자의 자리에 따뜻한 보리차를 놓았다. 유나도 학교 수업이 끝난 뒤 외할머니와 함께 찾아왔다.

“선생님, 그릇이 병원에서 어떻게 쓰였어요?”

유나가 물었다.

선자는 가방에서 기울어진 그릇을 꺼냈다.

“이건 내가 받았어.”

“제 그릇이잖아요.”

“네가 만든 거였구나.”

유나는 그릇 안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네요.”

“응. 내 아들이 비워두고 갔어.”

유나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라 선자를 바라보았다.

선자가 웃었다.

“처음에는 서운했어. 이제는 그냥 비워두려고.”

그날 교실에는 새로운 방문자가 왔다.

강원도 영월의 청소년센터에서 봉사 중인 대학생 김민재였다. 아이들이 만든 작은 그릇 열두 개를 상자에 담아 가져왔다.

“아이들이 병원에 보내고 싶다고 해서요.”

민재가 말했다.

“처음 만든 거라 모양이 좀 이상합니다.”

선자는 그릇들을 하나씩 꺼냈다.

“사람 손으로 만든 건, 손이 지나간 모양이 남아야 예뻐요.”

창밖 길가에는 김태수가 차 옆에 서 있었다. 아들을 데려다주었지만 교실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민재가 창밖을 보고 손을 들었다.

태수도 손을 들어 보였다.

둘 사이에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많았다.

그렇다고 모든 말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명숙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혜에게서 온 영상통화였다.

화면에는 지혜와 유나가 함께 고른 새 목도리를 두른 모습이 보였다. 명숙은 예전처럼 왜 직접 오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지혜가 말하는 동안 기다렸다.

질문하기 전에 한 번 생각했다.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묻는 것인지, 딸이 말하고 싶은 것을 들으려는 것인지.

선자는 교실 한가운데 긴 탁자를 놓고, 그 위에 그릇들을 올렸다.

반듯한 그릇, 기울어진 그릇, 금이 간 뒤 다시 붙인 그릇, 아이들의 손자국이 남은 그릇이 한자리에 모였다.

맨 가운데에는 현우가 두고 간 빈 그릇을 놓았다.

누군가 물었다.

“저 그릇에도 카드를 넣을까요?”

선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건 그대로 둘게요.”

수업이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간 뒤에도 선자는 혼자 교실에 남아 있었다.

해가 지면서 창가의 그릇들 안으로 저녁빛이 들어왔다.

선자는 아들의 빈 그릇 앞에 앉았다.

그 안에는 사과를 받아들였다는 말도, 다시 만나겠다는 약속도 없었다.

그렇지만 선자는 더 이상 그 침묵을 불효나 미움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다.

자신의 말로 가득 채우지 않았다.

그릇은 비어 있었다.

그래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말이 그 사람의 속도로 도착할 자리가 남아 있었다.


마지막 글

첫 번째 이야기에서 김태수는 아들에게 사과한 뒤 답장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사과가 민재의 상처를 곧바로 치료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두려움을 아들의 성격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관계의 문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한서연은 말하는 사람의 용기만으로는 진실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일, 불편한 보고를 끝까지 듣는 일, 말한 사람이 혼자 대가를 치르지 않게 하는 일은 듣는 사람의 책임이기도 하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한지혜의 거절은 사랑의 반대가 아니었다. 가족 모임에 가지 않겠다는 결정은 어머니를 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견딘 상처를 딸에게 견디게 하지 않으려는 선택이었다. 건강한 경계는 관계를 끊는 벽이 아니라, 서로가 섞여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는 그릇의 가장자리다.

네 번째 이야기에서 유나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언제나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주한다.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을 공격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삭제된 댓글은 화면에서는 사라졌지만, 책임은 삭제되지 않았다.

마지막 이야기에서 오선자는 아들이 남긴 빈 그릇을 받는다. 그 안에는 용서도 화해도 약속도 없었다. 선자는 처음으로 아들의 침묵을 자신의 말로 채우지 않는다.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을 미움이나 불효라고 규정하지 않고, 아들의 말이 아들의 시간에 도착하도록 자리를 남겨둔다.

다섯 이야기를 지나며 ‘말의 그릇’은 점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릇이 크다는 것은 많은 말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상대를 설득하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뜻도 아니다.

자신의 감정과 두려움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상대의 잘못으로 바꾸지 않는 능력이다. 잘못을 인정하되 용서를 재촉하지 않는 태도이며, 상대의 거절과 침묵까지도 하나의 대답으로 존중하는 마음이다.

마음의 여유는 아무 상처도 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상처를 받았을 때, 그것을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쏟아붓지 않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다. 대답하기 전에 멈추는 몇 초이며, 사과 뒤에 변명을 붙이지 않는 절제이고, 상대가 아직 말하지 못한 것을 기다리는 빈자리다.

말은 한번 전달되면 완전히 거둘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말이 어디까지 이동할지는 바꿀 수 있다.

부모에게 받은 말을 자녀에게 넘기지 않을 수 있다. 직장에서 받은 모욕을 가족에게 가져가지 않을 수 있다. 익명으로 받은 상처를 또 다른 익명의 사람에게 던지지 않을 수 있다.

한 사람이 멈추면, 상처의 계승도 잠시 멈춘다.

한 사람이 들으면, 침묵 속에 갇혀 있던 말이 나올 자리가 생긴다.

한 사람이 자신의 말로 채우지 않으면, 관계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대답을 위한 공간이 남는다.

빈 그릇은 아무것도 없는 그릇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이 그 사람의 속도로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그릇이다.

주요 인물

김태수

49세, 한빛에너지 품질관리팀장. 가족과 직장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강하지만, 두려움을 권위적인 말로 바꾸는 습관이 있다. 아들에게 상처를 준 뒤 사과를 시작하며, 회사에서도 자신의 침묵과 판단에 대한 책임을 마주한다.

김민재

20세, 태수의 아들. 명문대 입학을 한 학기 미루고 강원도 영월의 청소년센터에서 봉사하기로 한다. 아버지의 사과를 즉시 받아들이지 않지만, 관계를 완전히 끊지도 않는다.

이소라

47세, 태수의 아내이자 민재의 어머니. 가족의 갈등을 쉽게 봉합하려 하기보다, 태수의 말이 아들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정확히 짚어준다.

한서연

29세, 한빛에너지 품질관리 엔지니어. 제품의 이상 징후를 발견하지만 조직의 압력 앞에서 보고서의 표현을 약하게 만든다. 이후 자신의 침묵까지 인정하며 책임을 선택한다.

윤상호

34세, 한빛에너지 계약직 기술자. 배터리 사고의 책임을 떠안을 위기에 처한다. 고용이 불안정한 사람에게 조직이 얼마나 쉽게 침묵을 요구하는지 보여주는 인물이다.

한지혜

41세, 서연의 언니이자 유나의 어머니. 이혼 후 딸을 키우고 있다.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딸에게 상처가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처음으로 가족 모임을 거절한다.

최유나

17세, 하늘고등학교 학생. 외할머니와 익명 댓글에서 받은 상처를 품고 있다가 다른 학생을 공격한다. 자신이 피해자인 동시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정명숙

67세, 지혜와 서연의 어머니. 오랫동안 가족을 위해 참아왔다는 자부심이 있지만, 자신이 견딘 방식을 딸과 손녀에게 요구한다. 도예 교실에서 관계에도 경계와 빈자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배운다.

박나리

17세, 유나의 같은 반 학생이자 학급 부회장. 자신이 맡긴 비밀을 유나가 익명 게시판에 올리면서 상처를 받는다. 사과를 즉시 받아들이지 않을 권리를 행사한다.

강민서

17세, 유나의 오랜 친구. 친구들의 관심을 얻으려 유나의 가장 약한 이야기를 익명 댓글로 사용한다. 곧 삭제했지만 그 말의 책임까지 사라지지 않았음을 마주한다.

이수진

하늘고등학교 상담교사. 사과를 강요된 화해로 만들지 않으며,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의 책임까지 넘기지 않도록 돕는다.

오선자

69세, 도예 교실 ‘빈자리’의 강사. 타인에게는 빈 공간의 의미를 가르치지만, 오랫동안 아들의 침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수술을 계기로 자신의 말과 변명을 분리하기 시작한다.

오현우

42세, 선자의 아들. 어머니가 아내에게 한 모욕적인 말을 멈추지 않자 연락을 끊었다. 병원을 찾아오지만 바로 화해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자신의 시간에 하겠다는 뜻으로 빈 그릇을 남긴다.

이 작품의 인물, 기업, 학교, 병원, 단체 및 하늘동이라는 지역은 모두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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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관계, 소설, 심리학 Tagged With: 가족갈등, 건강한경계, 경청, 관계회복, 도예, 말그릇, 말이남긴자리, 부모자녀, 빈그릇, 사과, 사이버폭력, 세대간상처, 연작소설, 용서, 익명댓글, 직장문화, 청소년심리, 침묵, 한국단편, 현대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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