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 다섯 편의 현대 단편은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그보다 더 깊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게 되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하이오의 한 아버지는 자신이 직접 복수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정말 아무 책임도 없는지 마주합니다.
팔레스타인인 마리암은 죽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 가족이 만든 이야기가 진실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한 어머니는 딸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어느 순간 딸보다 자신이 미워하는 남자를 더 오래 바라보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시카고의 니아는 죽은 오빠가 사회의 상징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완벽한 피해자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한 사람으로 기억하기 위해 불편한 진실을 공개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외과의사 유세프는 38년 동안 아버지의 죽음과 연결해온 남자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살립니다.
장소는 다릅니다.
문화도 다릅니다.
그러나 다섯 사람이 마주하는 질문은 놀랄 만큼 비슷합니다.
정의가 충분히 오지 않았을 때, 남은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실이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까지 흔들 수 있다면 그래도 말해야 하는가.
미움을 놓는 것이 죽은 사람을 잊는 일이 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에게 내 남은 인생까지 내어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이야기들은 “용서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가지 않습니다.
누구도 억지로 치유되지 않습니다.
누구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되지 않습니다.
대신 아주 작은 변화가 시작됩니다.
누군가가 더 이상 길 건너편 집만 바라보지 않게 되고,
누군가는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을 알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원수를 검색하는 대신 딸의 사진을 열어봅니다.
그 변화가 이 다섯 편을 하나로 이어줍니다.
1 - 길 건너편 남자

에밀리가 사라진 뒤, 마크 카터에게는 새로운 아침 습관이 생겼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커튼을 열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침은 커피 냄새로 시작됐다.
아내 사라는 부엌에서 전날 말려둔 접시를 정리했고, 열일곱 살 딸 에밀리는 늘 시간이 없다며 이층에서 쿵쿵거리며 내려왔다.
에밀리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양말 한 짝을 꼭 거실에 벗어놓았다.
마크가 그것을 집어 들며 말했다.
“또?”
에밀리는 냉장고 문을 열어 오렌지 주스를 꺼내면서 대답했다.
“내일부터 안 그럴게.”
그 ‘내일’은 오지 않았다.
이제 마크가 아침마다 커튼을 여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길 건너편 집을 보기 위해서였다.
대니얼 머서의 집.
흰색 외벽.
조금 길게 자란 잔디.
진입로 옆의 낡은 우편함.
에밀리가 사라지기 전까지 마크는 그 집을 제대로 바라본 적도 없었다.
이제는 창문이 몇 개인지도 알았다.
오전 6시 40분.
현관문이 열렸다.
대니얼이 나왔다.
회색 후드티.
검은 개.
왼손에는 목줄.
어제와 같았다.
마크는 커피잔을 든 채 창문 뒤에 서 있었다.
대니얼은 인도를 걸었다.
카터 가족의 집 앞을 지나갔다.
모퉁이를 돌았다.
사라졌다.
그때마다 마크는 똑같은 생각을 했다.
왜 저 사람에게는 아직도 아침이 오는 걸까.
에밀리에게는 오지 않는데.
에밀리가 사라진 지 아홉 달째 되던 날, 경찰이 대니얼의 집을 수색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지켜봤다.
경찰차.
노란 통제선.
형사들.
방송국 카메라.
에밀리가 사라진 뒤 처음으로, 세상이 드디어 자신의 편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처럼 마크는 느꼈다.
대니얼은 과거에도 열아홉 살 여성의 실종 사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기소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처음에 에밀리를 거의 모른다고 말했다.
그런데 경찰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메시지를 발견했다.
범죄를 입증할 내용은 없었다.
동네에서 키우는 개와 관련된 일로 에밀리가 대니얼에게 연락했고, 그가 답장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거짓말은 거짓말이었다.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있었다.
마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경찰에게는 아니었다.
시신도 없었다.
혈흔도 없었다.
결정적인 장면이 찍힌 영상도 없었다.
몇 주 뒤, 대니얼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날 저녁, 이웃 몇 명이 카터 부부의 집에 모였다.
누군가는 맥주를 가져왔고, 누군가는 음식을 만들어왔다.
별로 먹는 사람은 없었다.
옆집 제프가 말했다.
“말도 안 돼요.”
맥주병을 내려놓으며 그가 덧붙였다.
“다들 알잖아요. 그 자식이 한 거라는 거.”
누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경찰은 맨날 증거, 증거, 증거.”
마크는 손에 든 맥주병만 내려다봤다.
제프가 말했다.
“내 딸이었다면 난 못 참아요. 매일 저 인간 얼굴을 어떻게 봅니까.”
마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누군가 말했다.
“언젠가는 누가 뭐라도 하겠지.”
잠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나중에 마크는 그 말을 누가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 문장만 기억했다.
누군가는 뭔가 하겠지.
마크가 말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
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다른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날 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마크는 커튼을 닫지 않았다.
소파에 누웠다.
길 건너 대니얼의 집이 보이는 방향이었다.
사라는 에밀리의 방을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크가 처음 알아챈 것은 화장대 위의 화장품 몇 개가 사라졌을 때였다.
그다음에는 바닥에 쌓여 있던 잡지.
옷장에 걸려 있던 옷 몇 벌.
어느 토요일 오후, 마크가 이층으로 올라갔을 때 사라는 에밀리의 옷을 상자에 넣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사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정리하는 거야.”
“다시 놔.”
손이 멈췄다.
“마크.”
“돌아올 수도 있어.”
“아홉 달이 지났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어.”
“없어.”
“있어.”
마크가 상자를 발로 찼다.
옷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사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마크를 더 화나게 했다.
“에밀리 물건 버리지 마.”
“버리는 거 아니야.”
“그럼 지금 뭐 하는데?”
사라가 일어섰다.
한동안 남편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은 이제 에밀리를 기다리는 게 아니야.”
마크가 움직임을 멈췄다.
“뭐?”
“그 남자가 벌 받기를 기다리고 있어.”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게 그거야.”
“아니야.”
“뭐가 달라?”
사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느 순간부터 당신은 에밀리 이야기를 안 해.”
“매일 하잖아.”
“아니.”
사라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대니얼 이야기를 해.”
“대니얼이 몇 시에 개를 데리고 나왔는지.”
“누구랑 이야기했는지.”
“몇 시에 집을 나갔는지.”
“어디에서 커피를 샀는지.”
목소리가 작아졌다.
“당신은 에밀리를 기억하는 시간보다 그 사람을 지켜보는 시간이 더 많아.”
마크는 방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벽을 주먹으로 쳤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식탁에는 의자가 세 개 있었다.
마크의 자리.
사라의 자리.
그리고 에밀리의 자리.
아무도 그곳에 앉지 않았다.
아무도 치우지 않았다.
타일러 그린은 스물네 살이었다.
네 집 건너에 살았다.
에밀리가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
어린 시절에는 가끔 같이 농구도 했다.
나중에 에밀리는 타일러를 ‘동네 오빠’라고 불렀다.
에밀리가 사라진 뒤 타일러는 자주 카터 집에 들렀다.
흔들리는 현관 난간을 고쳐주었다.
눈이 오면 보도를 치웠다.
사라가 장을 보고 돌아오면 말하지 않아도 봉투를 집 안까지 들어다 주었다.
착한 아이였다.
적어도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어느 저녁, 타일러가 차고로 찾아왔다.
마크는 공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카터 아저씨.”
“마크라고 불러.”
“네.”
타일러는 차고 입구에 서 있었다.
“왜?”
“하나 물어봐도 돼요?”
마크가 공구함을 닫았다.
“뭔데?”
타일러는 길 건너편을 바라봤다.
대니얼의 집.
“저 집이 없어지면…”
마크의 손이 멈췄다.
“뭐?”
타일러가 어색하게 웃었다.
“저 사람이 여기서 사라지면, 아저씨도 좀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마크는 타일러를 바라봤다.
“그런 거 묻지 마.”
타일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안 해요.”
“그래.”
타일러는 돌아갔다.
마크는 경찰에 전화하지 않았다.
사라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날 새벽 1시 7분.
휴대전화가 울렸다.
타일러였다.
저 인간이 영원히 저기 살지는 않을 거예요.
마크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답장을 썼다.
그만해.
한동안 그 두 글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지웠다.
휴대전화를 엎어놓았다.
이층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불이 난 것은 사흘 뒤였다.
새벽 2시 17분.
주황색 빛이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마크는 바로 눈을 떴다.
대니얼의 차고가 불타고 있었다.
불길은 이미 지붕까지 번지고 있었다.
“사라!”
두 사람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웃들이 하나둘 집 밖으로 나왔다.
누군가 911에 전화하고 있었다.
불길 사이로 대니얼이 현관문을 기어 나왔다.
옷이 타 있었다.
얼굴과 손에도 심한 화상을 입은 듯했다.
잔디밭에 쓰러졌다.
소방대원들이 달려갔다.
대니얼이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곧 들렸다.
“릴리!”
소방대원들이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마크는 그 이름을 몰랐다.
사라가 속삭였다.
“릴리가 누구야?”
뒤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조카일 거예요.”
열두 살이었다.
주말이면 가끔 대니얼의 집에서 지냈다.
마크도 본 적이 있었다.
금요일 오후, 작은 배낭을 메고 집 안으로 들어가던 아이.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십 분쯤 지나 소방관 한 명이 아이를 안고 나왔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담요 아래에서 작은 팔 하나만 보였다.
그날 밤 내내 한 문장이 마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애가 있는 줄 몰랐잖아.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애가 있는 줄 몰랐잖아.
새벽 다섯 시가 되자 그 문장은 질문으로 변했다.
그럼 아이만 없었으면 괜찮았던 건가?
화재는 방화로 밝혀졌다.
이틀 뒤 타일러가 체포됐다.
보안 카메라에 모습이 찍혀 있었다.
휘발유를 구입한 기록도 있었다.
휴대전화 위치 기록도 집 근처를 가리켰다.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타일러의 어머니가 울면서 카터 집을 찾아왔다.
사라가 현관에서 그녀를 만났다.
마크는 집 안쪽에 숨어 있었다.
그날 저녁 사라가 물었다.
“알고 있었어?”
마크는 소리가 꺼진 텔레비전을 바라봤다.
“뭘?”
“타일러.”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알고 있었어?”
“아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완전히는.
“마크.”
“몰랐어.”
“정말?”
마크는 아내를 바라볼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뉴스에서는 릴리가 심한 화상을 입고 치료 중이라고 보도했다.
여러 차례 수술이 필요했다.
그래도 목숨은 건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마크는 텔레비전을 껐다.
창밖에는 까맣게 타버린 대니얼의 집이 있었다.
매일 아침 그렇게 사라지기를 바라던 집.
이제 정말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자신이 무서웠다.
체포된 지 열흘 뒤, 타일러가 마크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변호사를 통해 전달된 요청이었다.
마크는 가고 싶지 않았다.
사라는 가라고도, 가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면회실 유리 너머의 타일러는 갑자기 아주 어려 보였다.
스물네 살.
에밀리보다 겨우 일곱 살 많았다.
“카터 아저씨.”
“마크라고 하랬잖아.”
타일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가 있는 줄 몰랐어요.”
마크는 말하지 않았다.
“정말이에요.”
“들었어.”
“누굴 죽이려고 한 게 아니에요.”
마크가 그를 바라봤다.
“그럼 뭘 하려고 했는데?”
대답하지 못했다.
“겁주려고?”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타일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다들 그랬잖아요.”
마크의 가슴이 조여왔다.
“뭘?”
“저 인간은 당해도 싸다고.”
“제프 아저씨도 그랬고, 릭도 그랬고. 다들.”
“그래서 집에 불을 질렀어?”
“다들 똑같이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불 안 질렀어.”
타일러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래도 다들 원했잖아요.”
마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들 똑같은 말을 했어요.”
타일러가 유리 가까이 몸을 숙였다.
“나는 그냥 진짜로 한 것뿐이에요.”
마크의 입안이 말랐다.
“아니야.”
“뭐가요?”
“난 너한테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어.”
타일러가 그를 바라봤다.
“알아요.”
그 대답이 어떤 비난보다 아팠다.
“아저씨는 시키지 않았어요.”
잠시 침묵.
“그런데 말리지도 않았잖아요.”
마크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어.”
“네.”
“말했잖아.”
“맞아요.”
타일러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제가 보낸 메시지요.”
마크는 숨을 멈췄다.
“답장 안 했잖아요.”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알았어요.”
타일러가 말했다.
“뭘?”
“아저씨가 진짜로 나를 막지는 않을 거라는 거.”
면회가 끝난 뒤에도 마크는 오랫동안 주차된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대니얼은 살아남았다.
화상은 심했다.
지역 뉴스에서는 그가 의식을 되찾은 뒤 가장 먼저 자기 상태를 묻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처음 한 말은 하나였다.
“릴리는?”
그뿐이었다.
사라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마크는 부엌에 있었다.
그 말을 들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릴리는?
그 한마디 때문에 마크는 몇 달 동안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을 보게 됐다.
대니얼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삼촌’이었다.
그렇다고 대니얼이 결백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에밀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설명되지 않았다.
마크의 의심이 틀렸다는 증거도 아니었다.
그런데 잠깐,
괴물이 사람이 되었다.
마크는 그것이 싫었다.
대니얼이 계속 괴물이기를 바랐다.
괴물은 미워하기 쉬웠으니까.
그 일요일 아침, 사라는 블루베리 팬케이크를 만들었다.
에밀리가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에밀리는 블루베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팬케이크 속에 들어 있는 블루베리를 하나하나 골라냈다.
“물컹한 과일은 싫어.”
그러면서도 블루베리가 터져 만들어지는 보라색 시럽은 좋아했다.
마크는 갑자기 그 사실을 기억했다.
식탁에는 접시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에밀리의 의자는 벽 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마크가 멈췄다.
“의자.”
사라는 프라이팬을 씻고 있었다.
“옮겼어.”
“왜?”
“아무도 안 앉잖아.”
마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자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같은 방 안에 있었다.
그저 식탁에서 조금 멀어졌을 뿐이었다.
마크는 창밖을 바라봤다.
까맣게 타버린 집.
그리고 말했다.
“경찰서에 갈게.”
사라의 손이 멈췄다.
“뭐?”
“말해야 할 게 있어.”
“무슨 말?”
“타일러에 대해서.”
사라의 표정이 바뀌었다.
“당신, 뭘 알고 있었어?”
“몰랐어.”
마크는 말을 멈췄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시 말했다.
“몰랐어.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라는 기다렸다.
마크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형사는 작은 조사실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젊은 여자 형사였다.
마크는 차고에서 타일러와 나눈 대화를 말했다.
그리고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형사는 휴대전화를 한동안 바라봤다.
“답장을 안 하셨네요?”
“네.”
“왜죠?”
마크는 자기 손을 바라봤다.
“모르겠습니다.”
형사는 기다렸다.
“무슨 짓을 할지는 몰랐어요.”
“알겠습니다.”
“집에 불을 지를 줄은 몰랐습니다.”
“네.”
“시키지 않았어요.”
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크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시킨 게 아닙니다.”
“들었습니다.”
“제가 불을 지른 것도 아니고요.”
형사는 펜을 내려놓았다.
“카터 씨.”
마크가 멈췄다.
“제가 카터 씨가 불을 질렀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무너졌다.
마크는 형사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야.
나는 시키지 않았어.
나는 몰랐어.
몇 번이나 반복해야 믿을 수 있을까.
마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형사는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 뒤 마크가 손을 내렸다.
“그 인간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형사는 기다렸다.
“대니얼이요.”
목소리가 떨렸다.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침묵.
“누군가…”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 대신 뭔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마크는 침을 삼켰다.
“그래도 아무한테도 해치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형사는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마크는 마침내 자신이 가장 피하고 있던 말을 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목소리가 갈라졌다.
“누군가 대신 해주기를 바랐습니다.”
방 안이 아주 조용해졌다.
그 고백으로 에밀리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릴리의 화상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타일러가 풀려나는 것도 아니었다.
대니얼의 유죄가 입증된 것도 아니었다.
무죄가 입증된 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단 하나만 달라졌다.
이제 마크는 자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고 말할 수 없었다.
몇 주 뒤.
사라는 다시 블루베리 팬케이크를 만들었다.
조금 태웠다.
마크는 식탁에 앉았다.
에밀리의 의자는 여전히 벽 쪽에 있었다.
그 위에는 우편물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예전의 마크였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크는 그것을 보았다.
사라도 마크가 보는 것을 알았다.
둘 다 말하지 않았다.
창밖에는 아직도 불탄 집이 보였다.
수리는 시작되지 않았다.
습관처럼 마크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려 했다.
그때 사라가 말했다.
“식겠다.”
마크가 고개를 돌렸다.
접시 위에 팬케이크가 있었다.
보라색 시럽.
에밀리가 좋아했던 것.
마크는 포크를 들었다.
한입 먹었다.
조금 질겼다.
“탔네.”
사라가 커피를 마셨다.
“알아.”
마크가 한입 더 먹었다.
그날 아침,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마크는 길 건너편 집을 바라보지 않고 아침을 먹었다.
2 - 동생의 이름

라미가 죽은 뒤, 아버지는 매일 아들의 이름을 말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라미라면 그런 짓은 안 했어.”
“라미라면 벌써 집에 왔을 거야.”
“라미가 살아 있었으면 가게를 물려받았을 텐데.”
그리고 가끔은 마리암에게 이런 말도 했다.
“라미는 너보다 가족을 더 생각했어.”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리암은 웃었다.
웃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평생 후회할 말을 해버릴 것 같았다.
라미는 마리암의 남동생이었다.
스물두 살.
마리암보다 네 살 어렸다.
평일에는 대학에 다녔고, 주말이면 아버지의 가게 일을 도왔다.
라미에게는 이상한 습관이 하나 있었다.
이어폰을 항상 한쪽만 끼었다.
양쪽을 다 끼는 법이 없었다.
한쪽은 귀에 꽂고, 다른 한쪽은 가슴 앞으로 늘어뜨렸다.
어머니가 수없이 말했다.
“사람이 말할 때는 그것 좀 빼라.”
그러면 라미는 말했다.
“두 개 다 끼면 엄마 잔소리 안 들리잖아.”
어머니는 화난 표정을 지으려 했다.
늘 실패했다.
결국 웃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라미가 돌아오지 않았다.
몇 시간 뒤 가족은 라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누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누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그런데 몇 주가 지나면서 집 안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사미르 칼릴.
마흔이 넘은 남자였다.
같은 동네에 살았다.
아버지도 그를 알고 있었다.
라미도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리고 라미가 죽기 얼마 전, 두 사람이 만났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처음에 사미르는 부인했다.
라미를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나중에는 만났다고 인정했다.
아버지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놈이 라미를 넘긴 거야.”
어느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는 렌틸콩 수프를 만들어 놓았다.
아무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마리암이 물었다.
“누구한테?”
아버지가 그녀를 바라봤다.
“사미르 말이다.”
“사미르가 누구한테 라미 이야기를 했다는 증거가 있어?”
아버지의 얼굴이 변했다.
“증거?”
“누구한테 뭘 말했다는 걸 우리가 알아?”
“라미가 그놈을 만났어. 그리고 라미가 죽었어.”
“그게 전부잖아.”
아버지가 주먹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전부가 아니야.”
어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해요.”
아버지는 멈추지 않았다.
“사미르는 거짓말했어.”
“라미를 만난 적 없다고 했지.”
“그러다가 만났다고 인정했어.”
“왜 거짓말을 했겠어?”
마리암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찔리는 게 있으니까.”
라미의 자리에는 그릇이 놓여 있지 않았다.
의자만 그대로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았다.
사미르는 여전히 동네를 돌아다녔다.
빵을 샀다.
택시를 불렀다.
약국에 갔다.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도 했다.
평범하게 살았다.
아버지는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어느 날 오후, 사미르가 가게 앞을 지나갔다.
아버지는 계산대 뒤에 있었다.
사미르는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도 부르지 않았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거의 먹지 않았다.
마리암이 물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어머니가 마리암을 바라봤다.
“뭘 물어봐?”
아버지가 대신 말했다.
“네가 라미를 죽게 했냐고?”
마리암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인간이 그렇다고 하겠어?”
어머니가 아버지의 접시에 음식을 조금 더 놓았다.
“당신도 모르잖아요.”
아버지의 손이 멈췄다.
“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도 모르잖아요.”
“또 그 얘기야?”
“모르잖아요.”
“나는 알아.”
어머니가 말했다.
“당신은 안다고 믿는 거예요.”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은 내 아들 편도 아니야?”
어머니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마리암도 숨을 멈췄다.
아버지 역시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했다.
그러나 사과하지 않았다.
의자를 밀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어머니는 수프만 바라봤다.
마리암이 말했다.
“너무했어.”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도 힘든 거야.”
“엄마도 힘들잖아.”
“알아.”
“그런데 왜 항상 그냥 있어?”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는데?”
“말해야지.”
“뭘?”
“사실을.”
어머니가 마리암을 바라봤다.
“무슨 사실?”
마리암은 대답하지 못했다.
라미가 죽은 지 여섯 달이 지난 어느 날, 마리암은 오래된 노트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라미가 쓰던 컴퓨터였다.
아버지는 손도 대지 않았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암도 대학 자료 몇 개를 옮기려고 켰을 뿐이었다.
바탕화면에는 사진이 가득했다.
친구들.
학교.
부서진 의자.
고양이.
먹다 만 샌드위치.
아무 의미도 없는 사진들.
라미가 살아 있을 때는 정말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제 마리암은 그중 하나도 지울 수 없었다.
폴더 깊숙한 곳에서 음성 파일 하나를 발견했다.
제목은 없었다.
날짜는 라미가 죽기 사흘 전.
마리암은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그러다가 라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았다.
급해 보였다.
“알았어요. 내일 만나요.”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암의 몸이 굳었다.
사미르였다.
확실했다.
“여기서는 말하지 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그리고 라미가 말했다.
“그러니까 저 좀 도와주세요.”
마리암의 손이 멈췄다.
다시 재생했다.
그러니까 저 좀 도와주세요.
그 문장은 지난 여섯 달 동안 가족이 만들어온 라미의 이야기 속에는 없었다.
아버지가 믿는 이야기는 단순했다.
사미르가 라미를 배신했다.
라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떤 일에 휘말렸다.
그런데 이 녹음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라미가 먼저 사미르를 찾아갔다.
라미가 도움을 요청했다.
무엇을 도와달라는 것이었을까.
무엇이 무서웠던 걸까.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
녹음은 거기서 끝났다.
마리암은 오랫동안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사미르의 집을 찾아갔다.
문을 연 사미르는 놀란 것 같지 않았다.
“마리암.”
“이야기 좀 해요.”
사미르는 잠시 망설이다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작은 집이었다.
낡은 소파.
선반 위의 약.
벽에 걸린 가족사진.
마리암은 앉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꺼냈다.
녹음을 틀었다.
사미르의 표정이 변했다.
“어디서 찾았어?”
“라미 컴퓨터요.”
사미르가 천천히 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대답이 없었다.
“라미가 아저씨한테 도와달라고 했잖아요.”
침묵.
“뭘 알고 있어요?”
사미르는 두 손을 모았다.
“네 아버지한테는 말할 수 없어.”
마리암의 가슴에서 화가 올라왔다.
“또 그 말이네요.”
사미르가 고개를 들었다.
“다들 입을 다물어요.”
“아저씨도.”
“엄마도.”
“아빠는 자기가 이미 정해놓은 답만 듣고.”
목소리가 떨렸다.
“라미는 죽었는데 아무도 나한테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아요.”
사미르는 한참 동안 마리암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라미는 무서워하고 있었어.”
마리암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가요?”
사미르가 창밖을 바라봤다.
“모르는 게 나은 일도 있어.”
마리암이 헛웃음을 쳤다.
“그건 누가 정하는데요?”
사미르는 말하지 않았다.
“라미?”
“아빠?”
“아저씨?”
“다들 나를 보호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
“그럼요?”
긴 침묵 끝에 사미르가 말했다.
“너만 보호하려는 게 아니야.”
마리암은 그 말을 이해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
“누구를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표정을 보는 순간 알았다.
“우리 가족?”
사미르가 눈을 감았다.
마리암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라미가 뭘 했어요?”
“마리암.”
“뭘 했냐고요.”
“나쁜 아이는 아니었어.”
심장이 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사미르가 그녀를 바라봤다.
“몇 사람 부탁으로 물건을 날랐어.”
“무슨 물건이요?”
“처음에는 자기도 몰랐던 것 같아.”
“처음에는?”
“나중에는 알게 됐어.”
마리암은 벽에 손을 짚었다.
“그래서 아저씨를 찾아왔어요?”
사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빠져나오고 싶어 했어.”
“겁을 먹었고.”
“아무도 모르게 끝내고 싶어 했어.”
마리암의 머릿속에서 다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저 좀 도와주세요.
“도와줬어요?”
사미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와줬냐고요.”
“그러려고 했어.”
마리암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왜 라미가 죽었어요?”
사미르는 고개를 숙였다.
“모르겠다.”
“거짓말.”
“정말 몰라.”
“아저씨가 누구한테 말했잖아요.”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아빠는 그렇게 생각해요.”
“알아.”
사미르는 잠시 망설였다.
“네 아버지한테는 그렇게 믿는 게 더 쉬울지도 몰라.”
마리암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쉽다고요?”
“자기 아들이 위험한 일에 스스로 발을 들였다는 것보다는.”
사미르가 말을 멈췄다.
이미 늦었다.
마리암이 말했다.
“그러니까 누가 라미를 배신했다고 믿는 편이 낫다는 거네요.”
사미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잔인하네요.”
“알아.”
“아빠는 매일 라미 이름을 말해요.”
“알아.”
“라미는 겁 같은 거 안 냈다고 해요.”
“라미는 가족을 제일 먼저 생각했다고 하고.”
“그런데 라미가 위험한 일을 하고 있었다고요?”
사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한 가지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
마리암은 그 말이 싫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 동생을 무슨 교훈처럼 말하지 마세요.”
사미르는 고개를 숙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가게 뒤쪽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머니는 콩을 씻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사미르 집.”
아버지의 얼굴이 달라졌다.
“거길 왜 가?”
“이야기하려고.”
“혼자?”
“응.”
“뭐래?”
마리암은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지금 틀면 된다.
모든 것을 말하면 된다.
그게 옳은 일일 것이다.
사미르가 라미를 배신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오히려 라미가 사미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버지가 믿고 있는 이야기는 적어도 완전한 진실은 아니었다.
말하면 된다.
마리암은 아버지를 바라봤다.
여섯 달 사이에 많이 늙었다.
흰머리가 늘었다.
볼은 움푹 들어갔다.
그런데 라미 이야기를 할 때만 예전의 아버지가 잠깐 돌아왔다.
자랑스러운 얼굴.
“라미는 겁 같은 거 안 냈어.”
“라미라면 가족을 배신하지 않았어.”
“라미는 옳고 그른 걸 아는 애였어.”
그 이야기가 아버지를 붙잡고 있었다.
마리암은 깨달았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그 이야기를 빼앗는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사미르가 뭐래?”
마리암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어머니의 손이 멈췄다.
아버지가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도움 될 만한 이야기는 없었어.”
“아무것도 모른대?”
마리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리고 다시 차를 마셨다.
“거짓말쟁이.”
마리암은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도 이미 마리암을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가 지나갔다.
마리암은 알았다.
엄마는 알고 있다.
자기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그날 밤 마리암은 어머니의 방으로 갔다.
아버지는 잠들어 있었다.
“엄마.”
어머니가 창문을 닫고 있었다.
“왜?”
“알고 있었어?”
손이 멈췄다.
“뭘?”
“라미가 위험한 일에 관련돼 있었다는 거.”
침묵이 대답이었다.
“알고 있었구나.”
“전부는 아니야.”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다는 건 알았어.”
“뭐가 무서웠는데?”
“어느 날 밤 라미가 울면서 들어왔어.”
마리암은 숨을 멈췄다.
라미가 울었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라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
“아무것도?”
“나를 안았어.”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어렸을 때처럼.”
마리암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게 다야?”
“도와달라고 했어.”
마리암이 눈을 감았다.
또 그 말이었다.
도와주세요.
“왜 아빠한테 말 안 했어?”
“라미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어.”
“죽은 뒤에도?”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침묵.
“아빠가 사미르를 그렇게 미워하다가 정말 누가 다치면 어떡해?”
“알아.”
“그럼 말해야지.”
“뭘 말해?”
“라미가…”
마리암의 말이 멈췄다.
정작 라미가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 자신도 몰랐다.
어머니가 말했다.
“네 아버지는 아들을 잃었어.”
“알아.”
“그런데 자기 아들이 무서워했고, 실수했고, 몰래 위험한 일에 들어갔고, 다른 사람한테 살려달라고 했다는 것까지 알게 되면…”
“그래서 계속 거짓말 속에서 살게 하자고?”
“거짓말이 아니야.”
“거짓말이야.”
마리암의 목소리가 커졌다.
“라미는 완벽하지 않았어.”
어머니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마리암은 어머니를 바라봤다.
“봐.”
“뭘?”
“엄마도 똑같아.”
어머니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그녀를 봤다.
마리암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엄마는 라미를 지키는 게 아니야.”
잠시 멈췄다.
“엄마가 기억하고 싶은 라미를 지키고 있는 거야.”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흘 뒤.
아버지의 사촌이 집에 왔다.
남자 두 명이 함께였다.
마리암은 가게 뒤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이대로 놔둘 수는 없잖아.”
“다들 알고 있어.”
“사미르가 언제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다닐 수 있겠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뭘 하려고?”
“그냥 이야기 좀 하자는 거지.”
마리암의 몸이 굳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남자 하나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마리암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만해.”
모두가 그녀를 바라봤다.
아버지가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사미르한테 가지 마.”
사촌이 웃었다.
“누가 어디 간다고 했어?”
“다 들었어요.”
아버지가 일어섰다.
“마리암, 위층으로 올라가.”
“싫어.”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라미 이야기잖아.”
아버지가 입을 다물었다.
마리암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손이 떨렸다.
“그럼 들어봐.”
아버지의 표정이 변했다.
“뭘?”
마리암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바람 소리.
라미의 목소리.
“알았어요. 내일 만나요.”
사미르.
“여기서는 말하지 마.”
그리고 라미.
“그러니까 저 좀 도와주세요.”
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녹음이 끝났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이게 뭐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라미 노트북에서 찾았어.”
“언제 녹음된 건데?”
“죽기 사흘 전.”
아버지가 휴대전화를 가져갔다.
다시 재생했다.
그러니까 저 좀 도와주세요.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뭘 도와달라는 거야?”
마리암은 대답하지 못했다.
“뭘?”
“라미가 위험한 일에 조금 관련돼 있었던 것 같아.”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누가 그래?”
“사미르.”
아버지가 웃었다.
“거봐.”
마리암의 가슴이 아팠다.
“아빠.”
“이제 자기 살려고 라미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잖아.”
“아니야.”
“죽은 애는 말도 못 하는데!”
“그게 아니야.”
“그럼 뭔데!”
그때 문 쪽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이에요.”
아버지가 돌아봤다.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어요.”
아버지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뭘?”
어머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이 뭘 알고 있었는데?”
“라미가 무서워하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한테는 말할 수 없다고 했어요.”
“왜?”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이 자기를 부끄러워할까 봐.”
아버지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사촌과 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날 밤,
아버지는 라미의 의자에 앉았다.
처음이었다.
마리암도 어머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식탁만 바라봤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누구에게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리암이 대답했다.
“우리도 전부 몰라.”
“나쁜 일이었어?”
“아마도.”
아버지가 눈을 감았다.
“라미가?”
“응.”
한참 뒤 그가 다시 물었다.
“라미가… 그랬다고?”
마리암의 가슴이 아팠다.
“아빠.”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내 아들을 모르고 살았구나.”
어머니가 곧바로 말했다.
“알았어요.”
아버지가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뭘 알았는데?”
어머니가 의자를 조금 가까이 끌었다.
“어떻게 웃는지 알았잖아요.”
“화나면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밥을 어떻게 먹는지도.”
“피곤하면 눈을 어떻게 비비는지도.”
“어렸을 때 천둥만 치면 얼마나 무서워했는지도.”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데 이건 몰랐잖아.”
어머니가 말했다.
“부모가 자식의 모든 걸 알 수는 없어요.”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리암이 조용히 말했다.
“나도 몰랐어.”
아버지가 딸을 바라봤다.
“그래도 라미는 라미야.”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마리암이 말했다.
“오늘은 몰라도 돼.”
그 말에 자신도 놀랐다.
아버지가 울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탓하고 싶었어.”
그가 처음으로 인정했다.
마리암이 말했다.
“알아.”
“사미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마리암은 잠시 숨을 멈췄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한 사람 잘못이면…”
목소리가 무너졌다.
“그게 더 쉬웠을 것 같아.”
아무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가 빵과 올리브, 치즈와 차를 식탁에 놓았다.
아버지는 늦게 내려왔다.
자기 자리로 가다가 멈췄다.
라미의 의자를 바라봤다.
어젯밤 자신이 처음 앉았던 자리.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를 식탁 쪽으로 조금 끌어당겼다.
어머니가 지켜봤다.
마리암도 봤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 앉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앉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가까이 가져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말했다.
“사미르를 만나러 갈 거야.”
마리암이 먹던 것을 멈췄다.
“왜?”
아버지는 빵을 조금 뜯었다.
“모르겠다.”
잠시 생각했다.
“물어보려고.”
“뭘?”
아버지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라미가 뭘 무서워했는지.”
마리암이 그를 바라봤다.
“화낼 거야?”
아버지의 얼굴에 아픈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도.”
어머니가 눈을 내렸다.
아버지는 라미의 의자를 바라봤다.
“그래도…”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라미 말고.”
잠시 말을 멈췄다.
“진짜 라미가 어떤 애였는지 알고 싶다.”
마리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아버지 앞에 차를 놓았다.
그가 한 모금 마셨다.
너무 뜨거웠는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 순간 마리암은 기억했다.
라미도 뜨거운 차를 마실 때마다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와 꼭 같았다.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울음도 날 것 같았다.
그날 아침,
라미가 죽은 뒤 처음으로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가 라미를 잊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3 - 빈 의자

매주 금요일 저녁이 되면 미리암 레비는 촛불 일곱 개를 꺼냈다.
두 개는 샤밧을 위해.
하나는 남편 아버지를 위해.
하나는 자기 어머니를 위해.
그리고 나머지 세 개는 이제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중 하나만 조금 더 가늘고 하얀 초였다.
노아를 위한 것이었다.
스물여섯에 죽은 딸.
미리암은 매주 그 초를 같은 자리에 놓았다.
식탁 끝.
빈 의자 앞.
노아가 앉던 자리였다.
아무도 그 의자에 앉지 않았다.
남편 다비드도.
동생 야엘도.
손주들도.
손님이 와도 마찬가지였다.
첫해에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둘째 해에도.
셋째 해가 되자 야엘이 한 번 물었다.
“언제까지?”
미리암은 무슨 뜻인지 알았다.
“뭐가?”
“그 의자.”
“앉고 싶어?”
“그런 뜻 아니잖아.”
“그럼 그냥 놔둬.”
그 뒤로 야엘은 다시 묻지 않았다.
노아가 죽던 날을 미리암은 이상할 만큼 정확하게 기억했다.
전화가 울린 시간.
창밖의 빛.
냉장고 안에 남아 있던 레몬.
다비드가 신발끈을 묶었다가 다시 풀어 매던 모습.
야엘이 아무 말 없이 벽에 기대앉아 있던 모습.
몇 년이 지나도 그날의 기억은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기억들이 먼저 사라졌다.
노아가 일곱 살 때 무슨 색 가방을 원했는지.
열두 살 때 누구와 싸웠는지.
고등학교에서 뭘 제일 싫어했는지.
그런 건 조금씩 희미해졌다.
하지만 노아가 죽던 날만큼은 선명했다.
그리고 또 하나.
해가 갈수록 더 선명해진 사람이 있었다.
아비 벤아미.
미리암은 그 이름을 잊지 않았다.
잊을 수가 없었다.
노아의 죽음에 관여했다고 믿는 남자.
경찰은 조사했다.
증거는 충분하지 않았다.
기소되지 않았다.
미리암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처음에는 경찰에 전화했다.
그다음에는 변호사.
그다음에는 기자.
인터넷에서 이름을 검색했다.
직장.
주소.
과거 인터뷰.
가족.
사진.
어디서 일하는지.
누구와 찍혔는지.
몇 년이 지나자 그가 어떤 안경을 쓰는지도 알게 됐다.
어느 날 다비드가 말했다.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
미리암이 돌아봤다.
“뭘?”
“검색하는 거.”
“왜?”
“아무것도 안 바뀌잖아.”
미리암이 차갑게 웃었다.
“당신은 바뀌어도 돼?”
“그런 뜻이 아니잖아.”
“나는 안 잊어.”
“누가 잊으래?”
“그럼 그만하라는 말도 하지 마.”
다비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다시 말하지 않았다.
야엘은 엄마와 다르게 슬퍼했다.
첫해에는 노아 이야기를 아주 많이 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까지.
영화관에 가면 중간에 꼭 잠들던 일.
도로 표지판을 보면 소리 내서 읽던 버릇.
길에서 처음 보는 개한테 마음대로 이름 붙이던 일.
매운 음식을 못 먹으면서도 늘 시켰다가 후회하던 일.
그런데 미리암은 언제나 결국 같은 곳으로 돌아갔다.
“그날 아비만 거기 없었어도.”
“아비는 뭘 알고 있었을까.”
“경찰은 왜 더 조사하지 않았을까.”
“누군가 뒤를 봐준 게 틀림없어.”
그러면 야엘은 조금씩 말을 줄였다.
어느 금요일 저녁.
샤밧 식탁에서 다비드가 노아의 옛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노아는 스무 살.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얼굴을 다 가리고 있었다.
야엘이 웃었다.
“이거 기억나. 사진 찍기 직전에 넘어졌잖아.”
다비드도 웃었다.
“맞아.”
미리암은 사진을 보며 말했다.
“이 여행 갔다 온 지 이 년 뒤였어.”
야엘의 웃음이 사라졌다.
“뭐가?”
“아비가 처음 노아와 접촉한 게.”
식탁이 조용해졌다.
다비드가 낮게 말했다.
“미리암.”
“사실이잖아.”
야엘은 아직 사진을 들고 있었다.
“지금 그 얘기를 꼭 해야 해?”
“왜?”
“나 지금 노아 얘기하고 있었잖아.”
“나도 노아 얘기하는 거야.”
“아니.”
미리암의 얼굴이 굳었다.
“뭐가 아니야?”
야엘이 사진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엄마는 노아 얘기 안 해.”
미리암이 딸을 바라봤다.
“아비 얘기하지.”
다비드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야엘.”
“맞잖아.”
야엘이 엄마를 똑바로 봤다.
“노아 사진을 봐도 아비.”
“노아 생일에도 아비.”
“노아가 좋아하던 식당에 가도 아비.”
“샤밧에도 아비.”
미리암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야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엄마는 노아보다 그 남자를 더 잘 기억해.”
미리암의 손이 멈췄다.
“그런 말 하지 마.”
“맞잖아.”
“아니야.”
“맞아.”
“그만해.”
“엄마, 아비가 어디서 일하는지 알지?”
“알아.”
“작년에 이사한 것도.”
“알아.”
“딸이 둘인 것도.”
“알아.”
“그 딸들이 어디 다녔는지도 알잖아.”
미리암은 대답하지 않았다.
야엘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물었다.
“노아가 마지막으로 좋아했던 영화가 뭐였어?”
미리암은 입을 열었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야엘도 그걸 봤다.
“봐.”
“잠깐 생각이 안 나는 것뿐이야.”
“아비에 관한 건 하나도 안 잊으면서?”
미리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긁었다.
“이제 그만해.”
“안 돼.”
“야엘.”
“엄마는 노아를 잊을까 봐 무서운 게 아니야.”
미리암의 얼굴이 붉어졌다.
“뭐?”
“화를 놓아버리는 게 무서운 거야.”
다비드가 일어났다.
“그만.”
야엘은 멈추지 않았다.
“화내고 있으면 아직 노아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 같으니까.”
미리암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네가 뭘 알아?”
“나도 언니를 잃었어.”
“넌 엄마가 아니잖아.”
“맞아.”
야엘의 목소리도 떨렸다.
“하지만 난 동생이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나도 노아를 잃었어.”
미리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야엘은 빈 의자를 바라봤다.
“근데 이 집에서는 노아를 슬퍼하는 방법이 하나뿐인 것 같았어.”
“화내는 거.”
“아비를 미워하는 거.”
“절대 안 잊는다고 말하는 거.”
야엘이 엄마를 봤다.
“나, 웃을 때마다 미안했어.”
미리암의 표정이 달라졌다.
“뭐?”
“웃으면 언니를 배신하는 것 같았다고.”
“누가 그런 생각 하랬어?”
“아무도.”
야엘은 눈물을 닦았다.
“근데 그렇게 느꼈어.”
그날 샤밧 음식은 대부분 남았다.
며칠 뒤.
미리암은 혼자 노아의 방에 들어갔다.
방은 예전 모습 그대로는 아니었다.
야엘이 조금씩 정리했고, 다비드도 몇 가지를 상자에 넣어두었다.
그래도 맨 위 선반 하나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노아의 오래된 상자.
미리암은 의자를 밟고 올라가 꺼냈다.
사진.
티켓.
노트.
무슨 뜻인지 모를 메모.
작은 조개껍데기.
그리고 오래된 휴대전화 하나.
충전하자 아직 켜졌다.
사진첩을 열었다.
친구들.
카페.
하늘.
신발.
노아.
그러다가 짧은 영상 하나를 발견했다.
삼십 초쯤.
미리암은 재생했다.
화면에는 노아와 야엘이 부엌에 있었다.
야엘은 팬에 뭔가를 태우고 있었다.
노아가 웃었다.
“큰일 났다. 엄마 온다.”
“조용히 해!”
“다 들키겠다.”
“창문 열어!”
둘이 웃었다.
노아가 카메라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거 누가 나중에 발견하면 전부 야엘 잘못이야.”
영상이 끝났다.
미리암은 다시 봤다.
또 봤다.
세 번째에는 중간에서 멈췄다.
그리고 울었다.
아주 오랜만에,
아비를 생각하지 않고 노아를 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다른 종류의 죄책감이 밀려왔다.
이렇게 많이 웃던 아이였는데.
나는 언제부터 노아의 웃음보다 노아가 죽은 날을 더 또렷하게 기억하게 된 걸까.
다음 금요일.
미리암은 평소처럼 촛불 일곱 개를 꺼냈다.
그러다 멈췄다.
두 개를 다시 넣었다.
다섯 개만 남겼다.
노아의 촛불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그 초는 그대로 있었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슬픔과 의미가 뒤섞여버린 두 개를 치운 것뿐이었다.
다비드가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늦게 야엘이 아이들과 함께 왔다.
노아의 의자는 여전히 식탁에 있었다.
비어 있었다.
미리암은 그걸 한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그거 저쪽으로 옮겨줘.”
다비드가 되물었다.
“의자?”
“응.”
아무도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야엘이 엄마를 봤다.
“어디로?”
미리암은 창가를 가리켰다.
“거기.”
다비드가 의자를 들었다.
식탁에서 떨어뜨려놓았다.
창가.
노아의 사진이 있는 선반 아래.
미리암은 작은 액자를 들고 왔다.
바닷가 사진.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얼굴을 다 가린 노아.
그 사진을 의자 위가 아니라 선반에 올려두었다.
손주 하나가 물었다.
“이제 저 자리에 앉아도 돼?”
미리암은 노아의 의자가 있던 빈 공간을 봤다.
식탁이 조금 낯설어 보였다.
조금 좁아진 것 같기도 했다.
“응.”
아이는 다른 의자를 끌어왔다.
누군가 앉기 위한 의자였다.
식사가 시작됐다.
빵.
생선.
샐러드.
수프.
미리암은 처음에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다비드가 손주에게 학교 이야기를 물었다.
야엘은 일 이야기를 했다.
평범한 대화.
노아가 없는데도 평범한 대화가 이어진다는 것이 미리암에게는 조금 무서웠다.
그때 야엘이 생선을 가리켰다.
“언니 이거 좋아했지?”
미리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는 싫어했어.”
야엘이 웃었다.
“자기가 안 빼잖아.”
다비드도 웃었다.
“항상 나한테 줬어.”
미리암도 웃었다.
진짜로.
“스무 살 때는 생선 가시를 전부 내 접시에 올려놨어.”
야엘이 웃었다.
“그건 기억 안 나.”
“나는 기억해.”
미리암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멈췄다.
나는 기억해.
노아 이야기였다.
노아만의 이야기.
아비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몇 년 동안 그렇게 간단한 일을 하지 못했다.
식사 뒤 야엘이 부엌으로 왔다.
미리암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엄마.”
“응?”
“고마워.”
미리암이 수도꼭지를 잠갔다.
“뭐가?”
야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미리암은 딸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난 그 사람 용서 안 해.”
야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평생.”
“응.”
“지금도 뭔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
“응.”
“진짜로 관련돼 있었을 수도 있어.”
“응.”
미리암은 접시의 물기를 닦았다.
“근데…”
잠시 멈췄다.
“이제 매일 안 봐도 될 것 같아.”
야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뭘?”
“그 사람.”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몇 주 뒤.
미리암은 혼자 컴퓨터를 열었다.
검색창에는 아비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몇 년 동안 거의 매일 입력한 이름.
새로운 검색 결과 하나가 떠 있었다.
클릭하려 했다.
손가락이 멈췄다.
한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창을 닫았다.
대신 사진 폴더를 열었다.
노아.
바다.
부엌.
친구들.
이상한 모자.
태운 음식.
야엘과 웃는 영상.
미리암은 사진 하나를 열었다.
노아가 빵을 입 안 가득 넣고 있는 사진이었다.
예쁘지도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상징적이지도 않았다.
그냥 노아였다.
미리암은 웃었다.
그리고 울었다.
둘 다였다.
다음 금요일.
미리암은 촛불에 불을 붙였다.
노아의 사진은 창가에 있었다.
의자도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빈 의자는 아니었다.
그 위에는 접어둔 담요가 놓여 있었다.
손주들이 춥다고 하면 덮어줄 담요.
식탁에서는 다비드가 와인을 따랐다.
야엘은 빵을 뜯었다.
아이 하나가 뭔가를 엎질렀다.
미리암이 한마디 했다.
다들 웃었다.
그 와중에 미리암은 노아의 사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나는 널 잊지 않았어.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아비를 용서한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도 용서하지 못할지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노아를 기억하기 위해
아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4 - 모두가 본 42초

첫 번째 영상은 42초였다.
42초.
한 사람의 인생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짧았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해 버리기에는 충분했다.
검은 재킷.
밤거리.
시카고의 한 나이트클럽 입구.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경비원의 팔이 보였다.
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카메라가 갑자기 옆으로 흔들렸다.
그리고 영상은 끝났다.
다음 날 아침이 되기 전에 수백만 명이 그 영상을 봤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이름은 마커스 리드였다.
스물여덟 살.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때 농구를 했다.
일요일이면 꼭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여동생 니아의 생일에는 항상 자신이 주려던 금액보다 정확히 10달러 많은 기프트카드를 보냈다.
니아가 한번 이유를 물었다.
“왜 꼭 10달러 더 보내?”
마커스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세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게 마커스였다.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면서 절대 웃지 않았다.
사람들을 웃게 했다.
화를 내면 목소리가 커졌다.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친절했다.
고집도 셌다.
가끔 정말 피곤한 사람이었다.
42초짜리 영상에는 그중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영상에 나온 것은 하나뿐이었다.
마커스가 바닥에 눌려 있는 모습.
사흘 뒤.
기자들이 니아의 집 앞에 몰려왔다.
처음에 어머니 데버라는 아무하고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일주일 뒤에는 카메라 앞에 앉아 있었다.
“제 아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제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싶습니다.”
그 장면도 퍼졌다.
사람들이 마커스의 사진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엄마 옆에서 웃고 있는 마커스.
조카를 안고 있는 마커스.
교회 앞에 서 있는 마커스.
사진 아래에는 수천 개의 글이 달렸다.
마커스에게 정의를.
그는 집에 돌아왔어야 했다.
경비원을 체포하라.
경비원의 이름도 곧 공개됐다.
에릭 월리스.
서른아홉 살.
전직 군인.
두 아이의 아버지.
그 정보 역시 순식간에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주소까지 인터넷에 올라왔다.
직장에는 협박 전화가 걸려왔다.
사람들은 아내의 SNS 계정을 찾아냈다.
누군가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이름까지 올렸다.
그걸 본 순간 니아의 가슴이 철렁했다.
무서웠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빠가 죽었다.
그때 니아에게는 그 사실이 다른 모든 것보다 컸다.
마커스가 죽은 지 2주 뒤.
큰 추모 행사가 열렸다.
니아는 어머니 옆에 앉았다.
무대 뒤에는 활짝 웃고 있는 마커스의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주 잘 나온 사진이었다.
연단에 선 사람이 말했다.
“마커스는 폭력의 희생자였습니다.”
박수가 나왔다.
“그들은 마커스의 목소리를 빼앗았지만, 우리의 목소리까지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니아는 말없이 프로그램 종이 모서리를 접었다 폈다.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데버라의 어깨를 만지고 등을 쓰다듬었다.
그 순간 니아의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오빠라면 이걸 정말 싫어했을 텐데.
자기 얼굴이 저렇게 크게 걸려 있는 것.
모르는 사람들이 박수 치는 것.
엄숙한 음악.
니아는 거의 마커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야, 그만 좀 해.
나 그렇게 훌륭한 사람 아니었어.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웃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한 달 뒤.
가족의 변호사가 연락했다.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니아는 어머니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로 갔다.
작은 회의실.
변호사가 노트북을 열었다.
“클럽에서 받은 영상입니다.”
데버라가 곧바로 물었다.
“그 영상이요?”
“사람들이 본 것과는 다릅니다.”
변호사가 잠시 머뭇거렸다.
“조금 더 일찍 시작합니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처음 몇 분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
클럽 앞 인도.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웃는 사람들.
휴대전화를 보는 사람들.
그리고 마커스가 나타났다.
니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오빠가 살아 있었다.
걷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아팠다.
조금 뒤 말다툼이 시작됐다.
마커스와 다른 남자.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상대가 두 팔을 벌렸다.
마커스가 가까이 다가갔다.
경비원 한 명이 두 사람 사이에 들어왔다.
에릭 월리스.
마커스가 그를 밀었다.
니아의 몸이 굳었다.
옆에서 데버라가 속삭였다.
“아니야.”
영상은 계속됐다.
마커스가 뭔가 소리쳤다.
에릭을 다시 밀었다.
경비원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마커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에릭의 얼굴이 달라졌다.
주변 사람들이 움직였다.
마커스가 팔을 휘둘렀다.
에릭이 그를 붙잡았다.
바닥으로 눌렀다.
그 순간부터,
전 세계가 본 42초가 시작됐다.
데버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꺼주세요.”
변호사가 영상을 멈췄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래서 이게 뭔데요?”
데버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아들이 문제였다는 거예요?”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뭔데요?”
“사용된 제압 방식에 관한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니아는 멈춰 있는 화면만 바라봤다.
화가 난 마커스.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니아가 물었다.
“주머니에는 뭐가 있었어요?”
변호사가 잠시 망설였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데버라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니아는 숨을 내쉬었다.
잠깐 안도했다.
그러나 영상의 앞부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커스가 먼저 밀었다.
소리를 질렀다.
다시 경비원에게 다가갔다.
그것도 사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자 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어떻게 해야 해?”
데버라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뭘?”
“영상.”
“아무것도 안 해.”
“사람들이 봐야 하지 않을까?”
어머니가 돌아봤다.
“왜?”
“사람들은 마지막 42초만 봤잖아.”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모르잖아.”
데버라의 얼굴이 굳었다.
“마커스는 죽었어.”
“알아.”
“자기 입으로 설명할 수도 없어.”
“그것도 알아.”
“그럼 왜 사람들이 우리 아들한테 돌을 던질 걸 우리가 직접 내놔야 해?”
니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람들 어떤지 너도 알잖아.”
니아도 알았다.
전체 영상이 공개되면 마커스를 지지하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사라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거봐.
마커스가 먼저 시작했잖아.
경비원은 자기 일을 한 거야.
마커스의 인생은 또다시 짧은 장면 하나로 설명될 것이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니아가 말했다.
“에릭 가족은?”
데버라가 멈췄다.
“뭐?”
“그 경비원 가족.”
“지금 나한테 그 이야기를 하는 거야?”
“집 주소까지 올라왔어.”
“니아.”
“아이들 학교도.”
데버라가 딸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넌 누구 동생이야?”
그 말에 니아는 완전히 멈췄다.
데버라도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바로 깨달은 듯했다.
그러나 사과하지 않았다.
니아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밤.
니아는 오래전에 저장해 둔 마커스의 음성메시지를 들었다.
생일날 온 메시지였다.
“야, 할머니.”
니아는 듣자마자 웃었다.
마커스가 고작 두 살 많았다.
“선물 보냈어. 10달러 더 넣었다.”
잠깐의 침묵.
“세금.”
마커스가 자기 농담에 혼자 웃었다.
“전화도 좀 해. 엄마가 맨날 나만 전화한다고 하잖아.”
끝.
40초쯤.
니아는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수백만 명이 42초를 보고 마커스를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니아에게는 이 바보 같은 40초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며칠 뒤.
니아에게 이메일 한 통이 왔다.
보낸 사람을 보고 처음에는 가짜라고 생각했다.
에릭 월리스의 아내였다.
내용은 짧았다.
당신에게 부탁하려고 보내는 메일이 아닙니다.
제 남편이 한 일을 변호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딸은 이제 학교에 가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우리 집 앞까지 찾아옵니다.
니아는 메일을 닫았다.
십 분 뒤 다시 열었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하지만 삭제하지 못했다.
마커스의 죽음은 점점 더 큰 이야기가 되어갔다.
TV.
팟캐스트.
신문 칼럼.
정치인.
활동가.
논평가.
마커스를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마커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했다.
어느 방송에서는 말했다.
“평화를 사랑했던 온화한 청년 마커스 리드.”
니아는 TV를 바라봤다.
혼잣말이 나왔다.
“아니었는데.”
마커스는 평화만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다.
싸운 적도 있었다.
대학을 한 번 그만두기도 했다.
엄마 허락 없이 차를 가져갔다가 크게 혼난 적도 있었다.
스무 살 때는 사촌과 주먹다짐도 했다.
그런데 조카 생일은 한 번도 잊지 않았다.
엄마가 중요한 병원 검사를 받을 때마다 같이 갔다.
니아가 실연당했을 때는 새벽 세 시까지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게 마커스였다.
그런데 세상은 그를 둘 중 하나로 만들고 싶어 했다.
성인.
아니면 범죄자.
그 사이에 있는 인간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 오후.
데버라는 또 기자회견을 할 예정이었다.
니아도 어머니 옆에 앉기로 되어 있었다.
차 안에서 데버라가 말했다.
“오늘은 쓸데없는 말 하지 마.”
니아는 창밖을 봤다.
“쓸데없는 말이 뭔데?”
데버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자회견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커스 사진.
피켓.
카메라.
어머니 옆에는 니아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
니아는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방 뒤쪽으로 걸어갔다.
데버라 옆의 의자는 비어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니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잠깐,
데버라의 얼굴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곧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니아는 뒤에서 지켜봤다.
계속 어머니 옆의 빈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밤.
니아는 변호사에게 전화했다.
“전체 영상을 공개하고 싶어요.”
잠시 침묵.
“확실합니까?”
“네.”
“어머님은요?”
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반대하시죠?”
“네.”
“그래도 공개하시겠습니까?”
“네.”
전화를 끊은 뒤 어머니에게 말했다.
예상보다 훨씬 크게 싸웠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엄마.”
“네 오빠를 보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당연히 있지.”
“그런데 왜 이래?”
니아도 소리를 질렀다.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마커스도 진짜 마커스가 아니니까!”
데버라가 멈췄다.
니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마커스는 오빠가 아니야.”
“무슨 소리야?”
“완벽한 피해자.”
“평화만 사랑했던 청년.”
“누구한테 손 한번 대본 적 없는 사람.”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데버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은 네 오빠의 나쁜 모습을 온 세상에 보여주겠다는 거야?”
“나쁜 모습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야.”
“그럼 뭔데?”
니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사람인 모습을 보여주려는 거야.”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커스는 실수했어.”
“화를 냈어.”
“멍청한 짓도 했어.”
“사람을 밀기도 했어.”
니아가 눈물을 닦았다.
“그래도 죽어도 되는 건 아니잖아.”
데버라가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 줄 것 같아?”
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데 왜?”
니아는 벽에 걸린 오빠 사진을 바라봤다.
웃고 있었다.
“거짓말로 오빠를 지키고 싶지 않아.”
데버라는 얼굴을 감쌌다.
“난 그냥 내 아들을 지키고 싶은 거야.”
“알아.”
“더 이상 사람들이 우리 애를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알아.”
니아는 어머니 옆에 앉았다.
한동안 둘 다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데버라가 물었다.
“영상이 나오면 사람들이 마커스를 욕할 거야.”
“응.”
“끔찍한 말도 할 거야.”
“응.”
“너 그거 견딜 수 있어?”
니아는 오래 생각했다.
“모르겠어.”
다음 날 오후.
전체 영상이 공개됐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야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건 완전히 다른 사건이잖아.
마커스가 먼저 시작했네.
경비원은 자기 일을 한 거다.
그래도 저런 방식으로 제압했어야 했나?
둘 다 잘못했다.
가족은 이 영상 알고 있었던 거야?
진실을 숨긴 거네.
마커스를 공격하지 마라.
처음부터 42초만 보고 판단한 게 문제였다.
니아는 계속 화면을 내렸다.
어제까지 마커스는 완벽한 피해자였다.
오늘은 모든 일을 자초한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 마커스를 칭찬하던 계정 가운데 일부는 이제 그를 비난했다.
마커스는 바뀐 것이 없었다.
영상이 길어졌을 뿐이었다.
데버라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만 봐.”
니아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조금만.”
“꺼.”
니아는 노트북을 닫았다.
방이 조용해졌다.
어머니는 그대로 서 있었다.
“왜?”
그 한마디였다.
니아가 고개를 들었다.
“뭐가?”
“왜 그랬어?”
니아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오빠 사진.
기자회견.
빈 의자.
음성메시지.
42초.
전체 영상.
모든 것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마침내 말했다.
“마커스가 모두의 상징이 되기 전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 오빠였으니까.”
데버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서?”
“오빠를 예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어.”
“나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니아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냥…”
“진짜 있었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었어.”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주가 흘렀다.
사람들의 관심은 조금씩 사라졌다.
다른 사건이 생겼다.
다른 영상이 퍼졌다.
다른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와 뉴스 제목에 등장했다.
세상은 움직였다.
니아에게는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이 메시지를 보냈다.
마커스를 욕하는 사람.
마커스를 옹호하는 사람.
니아를 비난하는 사람.
용감하다고 칭찬하는 사람.
니아는 대부분 읽지 않게 됐다.
어느 일요일 오후.
어머니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치킨.
마카로니.
콘브레드.
데버라가 말했다.
“마커스 이거 싫어했는데.”
니아가 고개를 들었다.
“마카로니?”
“아니, 콘브레드.”
“오빠 콘브레드 좋아했어.”
“싫어했어.”
“좋아했다니까.”
“내가 엄마야.”
니아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엄마 콘브레드를 싫어했던 거 아니야?”
데버라가 딸을 노려봤다.
“뭐?”
니아가 웃었다.
어머니는 웃지 않으려고 했다.
실패했다.
둘이 같이 웃었다.
잠시 뒤 데버라가 말했다.
“잠깐.”
“왜?”
“나 진짜 알고 싶어.”
“뭘?”
“걔 콘브레드 좋아했어?”
니아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물어보자.”
어머니가 웃었다.
“어떻게?”
니아는 저장해 둔 음성메시지를 열었다.
마커스의 목소리가 방 안에 흘렀다.
“야, 할머니.”
데버라가 바로 웃었다.
니아도 웃었다.
그 목소리 속의 마커스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상징도 아니었다.
완벽한 사람도 아니었다.
악당도 아니었다.
그냥 마커스였다.
약 40초 뒤,
음성메시지가 끝났다.
니아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데버라가 말했다.
“다시.”
니아는 다시 재생했다.
“야, 할머니.”
밖에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다.
TV는 꺼져 있었다.
SNS도 열려 있지 않았다.
댓글도 없었다.
카메라도 없었다.
그날 오후만큼은,
아무도 마커스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마커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이야기했다.
세상은 42초 동안
마커스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보았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 식탁에 앉아 있었다.
5 -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은 의사

그날 밤, 유세프 칼릴이 마시고 있던 것을 커피라고 부르려면 조금 관대해질 필요가 있었다.
새벽 2시 13분.
예루살렘의 한 병원.
근무는 아직 끝날 기미가 없었다.
유세프는 자판기 앞에 서서 미지근하고 쓴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그걸 어떻게 매일 마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았다.
응급의학과 의사 다니엘 로젠.
“커피야.”
“진흙탕이지.”
“네가 타는 것보다는 낫다.”
“내가 언제 커피를 탔는데?”
유세프가 조금 웃었다.
두 사람이 같은 병원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었다.
유세프는 쉰넷의 팔레스타인계 외과의사였다.
다니엘은 마흔여덟의 이스라엘계 응급의학과 의사였다.
자라온 집도 달랐다.
가족에게서 들은 역사도 달랐다.
세상을 보는 방식도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응급실 안에서는 그런 차이가 나중 일이 됐다.
환자가 들어오면 먼저 기도를 본다.
호흡.
혈압.
출혈.
때로는 이름도 모른 채 사람을 살리기 시작한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를 사랑하는지.
누구를 미워하는지.
무엇을 믿는지.
그런 걸 따질 시간은 없다.
적어도 유세프는 늘 그렇게 일해왔다.
그날 밤까지는.
병원 방송이 나왔다.
고령 남성.
다발성 외상.
의식 저하.
복강 내 출혈 의심.
다니엘이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가자.”
유세프도 커피를 버렸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환자는 이미 들것에 실려 들어오고 있었다.
일흔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흰머리.
피로 젖은 셔츠는 가위로 잘려 있었다.
산소마스크.
간호사가 환자 정보를 읽었다.
“엘리 나본, 일흔여덟.”
유세프의 발이 멈췄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엘리 나본.”
다시 들렸다.
그 이름을 마지막으로 입 밖에서 들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잊고 산 날은 하루도 없었다.
들것 위의 남자를 봤다.
늙었다.
38년 전 사진에서 본 얼굴과는 많이 달랐다.
볼은 패였고.
머리는 하얬다.
깊은 주름이 얼굴을 가득 메웠다.
그래도 알 수 있었다.
엘리 나본.
아버지의 죽음과 연결된 남자.
유세프가 38년 동안 아버지를 죽게 만든 사람이라고 믿어온 남자.
“유세프?”
다니엘이 보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야?”
짧은 침묵.
유세프가 말했다.
“아니.”
거짓말이었다.
그때 간호사가 외쳤다.
“혈압 떨어집니다!”
시간이 다시 움직였다.
유세프는 들것 가까이 갔다.
이름을 지웠다.
기억도 지웠다.
엘리 나본이 아니다.
일흔여덟 살 남자.
복강 내 출혈.
그게 전부다.
검사 결과 비장 파열, 간 손상, 골반 골절.
유세프가 말했다.
“수술 들어갑니다.”
수술 전 손을 씻다가 아버지의 손이 떠올랐다.
크고 굵은 손.
아버지는 시계를 고치는 일을 했다.
어릴 때 유세프는 늘 궁금했다.
저렇게 굵은 손가락으로 어떻게 그렇게 작은 톱니를 만질 수 있을까.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웃었다.
“손이 중요한 게 아니야.”
작은 시계를 가리켰다.
“기다릴 줄 아느냐가 중요한 거야.”
그리고 말했다.
“서두르면 망가져.”
유세프가 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죽었다.
그 뒤 집 안에는 한 사람의 이름이 남았다.
엘리 나본.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
아버지의 위치를 누군가에게 알려줬다고 소문난 사람.
재판은 없었다.
유세프가 직접 본 증거도 없었다.
누가 봤다고 했다.
누가 들었다고 했다.
누가 아는 사람에게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소문은 어느 순간 사실이 됐다.
엘리가 배신했다.
엘리가 아버지를 죽게 했다.
어머니는 그 이름을 거의 말하지 않았다.
삼촌들은 달랐다.
몇 번이고 말했다.
그래서 유세프도 외웠다.
열여섯 살 소년이 슬픔과 함께 외운 이름이었다.
수술대 위에서 환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초록색 천.
피.
모니터.
숫자.
“석션.”
유세프의 손이 움직였다.
절개.
출혈 부위를 찾는다.
지혈.
봉합.
아버지가 죽은 뒤 유세프는 의사가 됐다.
복수하려고 의사가 된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어왔다.
의대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 어머니는 울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으면…”
그 뒤는 말하지 않았다.
가족은 늘 그런 데서 말을 멈췄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으면.
수술 도중 혈압이 다시 떨어졌다.
“유세프.”
“보고 있어.”
더 흡인한다.
더 수혈한다.
출혈을 잡는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정말 잠깐.
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조금만 늦으면.
판단을 하나만 늦추면.
이 남자는 일흔여덟이다.
부상도 심하다.
피도 많이 잃었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1초도 머물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존재했다.
유세프는 자기 손을 봤다.
“혈액 더 주세요.”
그리고 수술을 계속했다.
네 시간 뒤.
엘리 나본은 살아 있었다.
중환자실로 옮긴 뒤 유세프는 복도 벽에 등을 기댔다.
다니엘이 종이컵을 들고 나타났다.
“이건 진짜 커피야.”
유세프는 받지 않았다.
“됐어.”
다니엘은 옆에 섰다.
잠시 뒤 말했다.
“아는 사람이 맞지?”
유세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름 들었을 때 얼굴 보고 알았어.”
“아버지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야.”
다니엘은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관련?”
“그렇게 들으며 컸어.”
“증거는?”
유세프가 그를 봤다.
“지금 그걸 묻는 거야?”
“의사로 묻는 거 아니야.”
“그럼 뭔데?”
다니엘이 잠시 생각했다.
“10년 넘게 같이 일한 사람으로.”
유세프는 시선을 돌렸다.
“증거는 없어.”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다음 날.
엘리의 딸이 병원에 왔다.
레이철.
유세프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아버지 수술하신 선생님 맞으시죠?”
“네.”
레이철이 유세프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정말 감사합니다.”
유세프의 몸이 굳었다.
“아직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래도 살아 있잖아요.”
레이철의 눈에 눈물이 찼다.
“저한테는 아버지밖에 없어요.”
유세프는 대답하지 못했다.
저한테는 아버지밖에 없어요.
열여섯 살의 자신도 그랬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아버지가 없어졌다.
그리고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아버지가 그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을 자신이 살렸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유세프는 손을 뺐다.
“제 일이니까요.”
말하고 나서 바로 그 문장이 싫어졌다.
사흘 뒤 엘리는 의식을 되찾았다.
유세프는 병실에 가지 않았다.
다른 의사에게 맡겼다.
의학적으로 자신이 갈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흘째 되던 날.
복도에서 레이철이 그를 불렀다.
“선생님.”
유세프가 멈췄다.
“아버지가 선생님을 보고 싶대요.”
“저를요?”
“성함을 듣더니…”
레이철이 잠시 망설였다.
“아는 성이라고 하셨어요.”
유세프의 몸 안으로 찬 기운이 지나갔다.
“칼릴 선생님 맞으시죠?”
“네.”
“아버지가 그 이름을 안다고 해요.”
유세프는 병실 문 앞에 거의 5분 동안 서 있었다.
의료적으로 꼭 필요한 만남은 아니었다.
거절해도 된다.
그냥 돌아가도 된다.
그래도 문을 열었다.
침대 위의 남자는 작아 보였다.
38년 동안 기억 속의 엘리는 거대했다.
아버지를 빼앗은 사람.
어머니를 울게 한 사람.
가족을 망가뜨린 사람.
괴물.
그런데 병실에 있는 것은 여러 줄에 연결된 노인이었다.
엘리가 눈을 떴다.
유세프를 봤다.
“칼릴?”
목소리가 약했다.
“네.”
“아버지가…”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아델?”
유세프의 몸이 굳었다.
“맞습니다.”
잠시 기다렸다.
“아델 칼릴이 제 아버지입니다.”
엘리가 눈을 감았다.
“그렇군.”
그게 전부였다.
유세프 안에서 뭔가 터졌다.
“그게 다입니까?”
엘리가 다시 눈을 떴다.
“뭐가?”
“제 아버지를 알았잖아요.”
“알았지.”
“아버지에 관한 정보를 넘겼죠.”
엘리는 오래 말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들었나.”
“38년 동안 모두에게 들었습니다.”
엘리가 천장을 바라봤다.
“모두.”
그리고 작게 말했다.
“편리한 말이군.”
유세프가 주먹을 쥐었다.
“부인합니까?”
“뭘?”
“당신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걸.”
엘리가 그를 봤다.
“자네는 그렇게 믿고 있군.”
“대답하세요.”
긴 침묵.
마침내 엘리가 말했다.
“나는 자네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유세프는 숨 쉬는 것도 잊었다.
38년 동안 기다려온 말이었다.
“누구에게요?”
대답이 없었다.
“뭘 말했습니까?”
“어디에 있는지.”
유세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화인지 슬픔인지 분간이 안 됐다.
“그럼 역시 당신이…”
“하지만.”
엘리가 끊었다.
“자네가 들은 이야기와는 달라.”
“뭐가 다릅니까?”
“나는 그가 죽길 바라서 위치를 말한 게 아니야.”
유세프가 헛웃음을 쳤다.
“아버지는 죽었습니다.”
“알고 있어.”
“그럼 뭐가 다르죠?”
엘리가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지.”
유세프는 그 말을 견딜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고요?”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했어.”
잠시 후 엘리가 말했다.
“자네 아버지도 아마 그랬겠지.”
유세프는 더 있을 수 없었다.
병실을 나왔다.
그날 밤 유세프는 어머니를 찾아갔다.
여든둘이 된 어머니는 혼자 살았다.
“이 시간에 웬일이니.”
“근처에 왔다가.”
또 거짓말이었다.
어머니가 차를 내왔다.
벽에는 아버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지금의 유세프보다 훨씬 젊었다.
“엄마.”
“응?”
“엘리 나본 기억나?”
어머니의 찻잔이 멈췄다.
“갑자기 그 이름을 왜…”
“병원에 실려 왔어.”
“환자로?”
“내가 수술했어.”
어머니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살아 있니?”
“응.”
긴 침묵.
유세프는 아버지 사진을 봤다.
“엄마는 진짜 뭘 알고 있어?”
어머니가 고개를 숙였다.
“이제 다 지난 일이야.”
“안 지났어.”
“38년이나 됐잖니.”
“38년이라서 묻는 거야.”
유세프가 어머니를 바라봤다.
“엘리가 아빠를 배신했어?”
대답이 없었다.
“엄마.”
한참 뒤 어머니가 말했다.
“네 아버지와 엘리는…”
말을 멈췄다.
“친구였어.”
유세프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뭐?”
“젊었을 때부터.”
“난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없어.”
“내가 안 했으니까.”
“왜?”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마지막쯤에는 네 아버지도 엘리를 미워하지 않았어.”
“거짓말.”
“아니야.”
“그럼 왜 아무도 말 안 했어?”
“가족들은 몰랐으니까.”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세프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나한테 안 말했어?”
어머니가 아들을 봤다.
“네게 필요했으니까.”
“뭐가?”
“미워할 사람이.”
유세프는 움직이지 못했다.
“너는 열여섯이었어.”
어머니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아빠가 죽은 뒤 매일 밤 물었잖아.”
“누구 때문이냐고.”
“나는 답을 못 했어.”
“그런데 사람들이 엘리 이름을 말하기 시작했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무너졌다.
“그 이름을 붙잡고 나서야 네가 조금 잤어.”
유세프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래서 그냥 두었다고?”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서 미움까지 빼앗으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슬픔밖에 안 남을 것 같았어.”
병원으로 돌아온 뒤 유세프는 엘리의 기록을 열었다.
사회복지사 기록에서 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가족력.
지역 봉사.
후원 활동.
그리고 작은 의료지원기금.
유세프도 아는 곳이었다.
10여 년 전 사촌의 아들이 수술을 받았을 때 비용 일부를 지원받은 적이 있었다.
후원자는 익명이었다.
유세프는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나중에 답이 왔다.
엘리 나본은 그 기금의 공동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화가 났다.
심하게.
엘리가 아버지를 배신한 사람 하나로만 남아 있었다면 더 쉬웠을 것이다.
평생 사람을 해친 인간이었다면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면 38년 동안 품어온 이야기가 그대로 남는다.
그런데 엘리는 모르는 사람들을 도왔다.
그중에는 유세프 자신의 친척까지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실은.
괴물에게 선한 일이 하나라도 있으면 곤란했다.
괴물은 한쪽으로만 생겨야 미워하기 편하니까.
퇴원 전날.
유세프가 엘리의 병실로 들어갔다.
노인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선생.”
“의료지원기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런 일을 했습니까?”
“어떤 일?”
“사람을 돕는 일.”
엘리가 아주 조금 웃었다.
“이상한 질문이군.”
“대답해 주세요.”
오래 침묵한 뒤 엘리가 말했다.
“예전에…”
숨을 고르며 말했다.
“돕지 못한 사람이 있었어.”
유세프의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입니까?”
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유세프도 다시 묻지 않았다.
조금 뒤 엘리가 입을 열었다.
“나를 용서할 필요 없어.”
유세프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은 당신이 할 말이 아닙니다.”
“그래.”
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다시 침묵.
유세프가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유세프.”
발이 멈췄다.
엘리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세프가 돌아봤다.
노인은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네 아버지도…”
목소리가 약해졌다.
“같은 눈을 하고 있었어.”
유세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실을 나온 뒤 유세프는 벽에 기대 섰다.
울지 않았다.
소리치지도 않았다.
엘리를 용서한 것도 아니었다.
38년 동안 아버지의 죽음에는 선명한 모양이 있었다.
아버지가 있었다.
엘리가 배신했다.
아버지가 죽었다.
유세프는 그 모양을 붙잡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부서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고 있었을까.
엘리는 왜 위치를 알렸을까.
그가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버지는 왜 마지막에는 엘리를 미워하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또 무엇을 알고 있을까.
모른다.
그리고 유세프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끝까지 모를 수도 있겠구나.
곧 다른 수술 호출이 왔다.
교통사고를 당한 젊은 남자였다.
유세프는 세면대 앞에 섰다.
비누를 묻혔다.
손목.
손등.
손가락 사이.
수천 번 해온 순서.
그때 자기 손을 봤다.
아버지와 닮지 않았다.
아버지 손가락은 굵었다.
자기 손가락은 길고 가늘었다.
외과의사의 손이었다.
그동안 유세프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름.
기억.
슬픔.
분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끝까지 가지고 살아야 아버지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런지는 이제 알 수 없었다.
수술이 끝난 것은 오후 세 시였다.
유세프는 다시 자판기 앞으로 갔다.
커피를 뽑았다.
한 모금 마셨다.
역시 맛이 없었다.
“정말 안 질리냐.”
다니엘이 다가왔다.
“오늘도 맛없어.”
“어제도 그랬잖아.”
“내일도 그럴 거야.”
다니엘이 웃었다.
조금 지나 엘리 이야기를 꺼냈다.
“퇴원한다며?”
“응.”
“얘기했어?”
“조금.”
다니엘은 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창가에 서 있었다.
아래로 구급차 한 대가 병원에 들어오고 있었다.
또 누군가가 실려 온다.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
유세프는 종이컵을 들었다.
엘리를 용서하지 않았다.
열여섯 살 소년의 슬픔도 사라지지 않았다.
38년 동안 품은 분노를 잘못이었다고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아버지를 떠올렸을 때.
처음으로,
엘리의 얼굴보다 먼저
아버지의 손이 떠올랐다.
굵은 손가락.
그 손 사이에 놓인 작은 시계.
그리고 아버지의 목소리.
“손이 중요한 게 아니야.”
“기다릴 줄 아느냐가 중요한 거야.”
“서두르면 망가져.”
유세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미워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니었다.
용서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를 떠올릴 때,
그 남자의 얼굴이 먼저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유세프는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응급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또,
살려야 할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맺는 글

첫 번째 이야기 **「길 건너편 남자」**에서 마크는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불을 지른 사람은 자신이 아닙니다.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을 수 있었던 순간, 그는 침묵했습니다.
그의 가장 큰 변화는 법적으로 죄가 있느냐가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이런 바람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대신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침묵은 단순한 무행동이 아니게 됩니다.
두 번째 이야기 **「동생의 이름」**에서는 침묵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마리암의 어머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죽은 아들을 완벽한 사람으로 기억해야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강해질수록 실제 라미는 사라집니다.
겁을 먹은 라미.
실수한 라미.
도움을 요청한 라미.
마지막에 아버지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라미가 아닙니다.
진짜 라미입니다.
사랑은 때로 사랑하는 사람의 흠까지 남겨두는 일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 **「빈 의자」**에서는 미움이 기억을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미리암은 딸 노아를 잊지 않기 위해 아비를 미워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비가 어디에 사는지, 어떤 가족이 있는지는 모두 기억하면서도 노아가 마지막으로 좋아했던 영화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때 드러나는 것은 아주 잔인한 사실입니다.
원수를 오래 바라보다 보면, 원수가 사랑했던 사람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그래서 미리암의 변화는 용서가 아닙니다.
아비를 검색하지 않는 날이 생기는 것.
노아의 영상을 다시 보는 것.
딸이 웃던 얼굴을 먼저 기억하는 것.
그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중요합니다.
네 번째 이야기 **「모두가 본 42초」**에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사회가 얼마나 빨리 단순한 이야기로 바꾸는지가 드러납니다.
마커스는 처음에는 완벽한 피해자가 됩니다.
전체 영상이 공개된 뒤에는 반대로 모든 일을 자초한 사람처럼 취급됩니다.
두 이야기 모두 마커스가 아닙니다.
그는 화를 냈습니다.
사람을 밀었습니다.
고집도 셌습니다.
그런데 가족에게는 다정했고, 여동생을 웃겼고, 어머니에게 매주 전화했습니다.
니아가 지키고 싶은 것은 오빠의 무결함이 아닙니다.
오빠가 인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수백만 명은 마커스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봤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훨씬 적었습니다.
마지막 이야기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은 의사」**에서는 가장 오래된 미움이 흔들립니다.
유세프는 38년 동안 엘리를 아버지의 죽음과 연결해왔습니다.
그 이름은 고통에 이유를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죽었다.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
그 사람이 엘리다.
그 구조는 잔인하지만 단순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유세프가 원했던 만큼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와 친구였던 사람.
잘못된 판단을 했을지도 모르는 사람.
누군가를 도운 사람.
유세프의 가족까지 간접적으로 도운 사람.
그렇다고 선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더 어렵습니다.
괴물이라면 미워하기 쉽습니다.
사람이 되면 질문이 생깁니다.
유세프는 끝까지 엘리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 변화는 훨씬 더 작습니다.
아버지를 떠올렸을 때,
처음으로 엘리의 얼굴보다 아버지의 손이 먼저 떠오릅니다.
다섯 편을 돌아보면 같은 변화가 반복됩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시선이 달라집니다.
마크는 길 건너편 집이 아니라 아침 식탁을 봅니다.
마리암의 아버지는 사미르보다 라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미리암은 아비 대신 노아가 웃는 모습을 봅니다.
니아와 어머니는 세상의 댓글 대신 마커스의 바보 같은 음성메시지를 듣습니다.
유세프는 엘리의 얼굴보다 아버지의 손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래서 이 다섯 이야기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용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 조용한 변화입니다.
미워하는 사람보다 사랑했던 사람을 먼저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용서하지 못한 채로도
자기 삶으로 돌아오는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습니다.
마크 카터 — 「길 건너편 남자」
오하이오에 사는 아버지. 실종된 딸 에밀리 때문에 길 건너편 남자를 의심하며 살아가다가, 자신이 직접 복수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 대신 해주길 바랐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마리암 — 「동생의 이름」
팔레스타인인 여성. 남동생 라미의 죽음을 둘러싼 가족의 이야기가 완전한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죽은 사람의 기억을 지키는 일과 실제 모습을 받아들이는 일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미리암 레비 — 「빈 의자」
이스라엘에서 딸 노아를 잃은 어머니. 딸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붙잡아온 분노가 오히려 딸의 기억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니아 리드 — 「모두가 본 42초」
시카고에서 오빠 마커스를 잃은 여동생. 바이럴 영상과 사회적 논쟁 속에서 오빠가 성인이나 악인이 아니라 결함을 가진 실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지키려 합니다.
유세프 칼릴 —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은 의사」
예루살렘에서 일하는 팔레스타인계 외과의사. 38년 동안 아버지의 죽음과 연결해온 남자의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살리면서, 오랫동안 붙잡아온 증오의 형태를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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