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한로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저는 어떤 답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답을 서두르는 태도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죽고 싶다”는 말은 너무 강해서,
듣는 순간 모두를 얼어붙게 만듭니다.
그 말은 마치 결론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을 결론으로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만난 아이들은
정말로 죽고 싶어서라기보다,
지금의 감정을 설명할 언어가 없어서
그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슬픔, 수치심, 피로, 외로움, 분노, 무력감.
이 복잡한 감정이 하나로 뭉쳐
“죽고 싶다”라는 말로 터져 나왔습니다.
한국 사회는 빠릅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바쁩니다.
우리는 결과를 먼저 묻고,
이유를 나중에 묻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설에서
잠시 멈추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의 강한 말을
바로 판단하지 않고,
조금 더 곁에 머무는 장면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자몽살구클럽』은
거대한 해결책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완벽하지 않은 아이들이
완벽하지 않은 방식으로
서로의 곁에 남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저는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본 글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구성한 ‘가상의 대화’ 형식의 창작물이며, 실제 인물의 발언이나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 아닙니다.
주제 1. “죽고 싶다”는 말은 정말 죽음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관계를 향한 마지막 신호인가

서울의 작은 스튜디오.
카메라가 켜져 있지만 분위기는 방송용이라기보다 대화에 가깝다.
테이블 위에는 물컵만 놓여 있다.
누구도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는 표정이다.
사회: 정혜신
“죽고 싶다”는 말을 우리는 너무 자주 듣습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청소년 자살률이 높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저는 늘 질문이 생깁니다.
그 말은 정말 죽음을 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관계를 향한 마지막 신호일까요?
오늘 첫 번째 질문입니다.
질문 1
“죽고 싶다”는 말의 실제 의미는 무엇입니까?
김현수 (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임상적으로 보면,
청소년이 “죽고 싶다”고 말할 때
실제로 죽음을 구체적으로 계획한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압도된 상태입니다.
도망칠 수 없고, 멈출 수도 없고,
자기 감정을 설명할 언어가 부족한 상태.
그 말은 종종
“이 상태를 끝내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삶 전체가 아니라, 지금의 상황을 멈추고 싶다는 것.
하지만 우리가 그 말을 문자 그대로만 듣거나
반대로 너무 가볍게 넘기면,
그 신호는 사라집니다.
한로로 (작가)
저는 그 말이 나오는 순간의 표정을 기억합니다.
아이들은 눈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딘가를 응시합니다.
정말 죽고 싶어서라기보다,
자기 안의 감정을 더 이상 혼자 감당할 수 없어서
밖으로 밀어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말은 끝이라기보다
“지금 여기 좀 봐줘”라는 요청에 가까웠습니다.
김누리 (교육 비평가)
저는 구조적 맥락을 빼놓을 수 없다고 봅니다.
한국의 중학생은 이미 경쟁 체계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비교는 일상이고,
미래는 늘 현재를 압박합니다.
이 구조 안에서는
개인의 고통이 개인의 문제로 축소됩니다.
“죽고 싶다”는 말은
그 체계 안에서 숨이 막힌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언어적으로 보면,
“죽고 싶다”는 말은 가장 극단적인 단어를 빌려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청소년은 아직 감정을 세분화하는 언어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습니다.
슬픔, 수치심, 분노, 무력감, 피로, 외로움.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강한 단어에 압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단어의 강도보다
그 단어가 등장한 맥락을 읽어야 합니다.
최진석 (철학자)
존재론적으로 보면,
“죽고 싶다”는 말은
삶을 거부한다기보다
현재의 자기 상태를 거부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의미를 잃을 때
존재 자체를 의심합니다.
그러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의미가 바뀌면, 존재의 감각도 바뀝니다.
문제는
그 말을 들은 우리가
의미를 다시 열어줄 수 있느냐입니다.
정혜신 (사회)
저는 늘 이렇게 묻습니다.
“지금 혼자예요?”
위험을 판단하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계를 확인하는 질문입니다.
정말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
그 말이 더 자주 나옵니다.
질문 2
그 말을 들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김현수
첫째, 평가하지 않는 것.
“왜 그런 생각을 해?”는 심문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둘째, 구체적으로 묻는 것.
“지금 안전해?”
“오늘 밤 누가 옆에 있어?”
구체성은 생명을 지키는 언어입니다.
한로로
저는 “그 말을 취소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 하면 안 돼.”
이 말은 아이를 다시 침묵하게 만듭니다.
그 대신,
“그만큼 힘들다는 거지?”라고 말해주는 것.
말을 지워버리지 않는 것.
그게 관계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누리
개인에게만 책임을 돌리지 않는 시선도 필요합니다.
그 아이가 처한 구조,
학교 문화,
입시 압박.
이것을 보지 않으면
모든 고통은 개인의 나약함으로 환원됩니다.
신형철
문학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문학은 “그 말이 나올 수 있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우리는 그 말을 조금 다르게 듣게 됩니다.
최진석
저는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인 선택은 종종 순간적입니다.
그 순간을 지나가게 하는 것.
철학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다시 열어줍니다.
질문 3
작가에게 묻겠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정말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한로로
저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말을 결론처럼 다루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죽고 싶다”는 말이 나왔을 때
그 다음 문장이 이어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누군가 그 말을 했을 때,
그 자리에 조금 더 머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었습니다.
스튜디오 안은 조용해진다.
아무도 단정하지 않는다.
“죽고 싶다”는 말은
종착점이 아니라
관계를 향한 마지막 문장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그 문장을 끊지 않는 것이다.
주제 2. 우정은 실제로 생명을 지키는 보호 요인인가, 아니면 또 다른 압박이 되는가

서울의 스튜디오 안.
조명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앞선 대화의 무게가 아직 공기 속에 남아 있다.
사회: 정혜신
청소년 자살 연구에서 “보호 요인”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또래 관계, 즉 우정입니다.
그런데 저는 늘 조심스럽습니다.
우정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을까요?
아니면 때로는 또 다른 부담이 되기도 할까요?
첫 번째 질문입니다.
질문 1
임상적으로 보았을 때, 우정은 실제로 자살 위험을 낮추는 보호 요인입니까?
김현수 (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결론부터 말하면, 네.
또래 지지는 분명히 보호 요인입니다.
실제 연구에서도
“최소 한 명의 신뢰 가능한 친구가 있는 경우”
자살 사고의 지속 가능성이 낮아집니다.
왜냐하면 고립감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청소년기에는 부모보다 또래의 영향력이 더 큽니다.
자기 존재를 확인받는 통로가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 관계가 “상호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로로 (작가)
저는 아이들이 서로를 구하는 장면을 쓰고 싶었지만,
그것을 영웅 서사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감정적으로 흔들리고,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라면을 먹고,
같이 집에 가는 그 시간이
아이를 오늘 하루 더 살게 만든다고 느꼈습니다.
구원이라기보다,
“함께 버팀”에 가까웠습니다.
김누리 (교육 비평가)
저는 구조를 함께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는 성적 중심 체계입니다.
친구도 경쟁 상대가 됩니다.
이 구조 안에서 우정은 양가적입니다.
한편으로는 보호막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교의 장이 됩니다.
“쟤는 잘하는데 나는 왜…”
이 감정은 또 다른 고립을 만듭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문학에서 우정은 종종 구원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우정은 훨씬 복잡합니다.
저는 이 소설이 좋았던 이유가
우정을 미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 남습니다.
이 “불완전한 지속”이
오히려 현실적입니다.
최진석 (철학자)
존재는 혼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관계는 자유를 침해할 수도 있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버텨야 해.”
이 말은 사랑이 아니라 의무가 됩니다.
진짜 보호 요인은
상대의 자유를 인정하는 관계입니다.
정혜신 (사회)
저는 상담 현장에서
이 문장을 자주 듣습니다.
“선생님, 제가 없으면 그 애가 죽을 것 같아요.”
이 말은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한 아이에게
타인의 생명을 맡기는 구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질문 2
우정이 보호 요인에서 “압박”으로 바뀌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김현수
공동 의존이 시작될 때입니다.
한 사람이 감정의 중심이 되고,
다른 한 사람이 그것을 전부 떠안는 구조.
청소년은 아직 감정 조절 능력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구조는 매우 불안정합니다.
한로로
저도 그 부분을 고민했습니다.
아이들이 서로에게 너무 매달리지 않도록,
하지만 쉽게 끊어지지도 않도록.
그래서 소설 안에서는
어른이나 다른 통로의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 않았습니다.
우정이 전부가 되지 않도록.
김누리
한국에서는 또래 문화가 강합니다.
집단 안에 속하지 못하면
사회적 사망과 비슷한 감각을 느끼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정이 끊기는 경험은
성인보다 훨씬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이 부분은 학교 문화와도 연결됩니다.
신형철
언어가 바뀔 때 위험해집니다.
“너밖에 없어.”
“너 아니면 안 돼.”
이 문장은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관계를 닫힌 구조로 만듭니다.
열린 관계는 숨을 쉬게 하지만
닫힌 관계는 질식하게 합니다.
최진석
철학적으로 말하면,
타인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삼는 순간입니다.
상대를 나의 생존 도구로 만들면
그 관계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정혜신
그래서 저는 청소년에게
이 문장을 가르칩니다.
“네가 친구를 돕는 건 중요하지만,
네가 친구의 인생을 책임질 수는 없어.”
이 경계가 필요합니다.
질문 3
그렇다면, 건강한 우정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김현수
첫째, 상호성.
둘째, 개방성.
셋째, 다른 도움과 연결될 수 있는 구조.
한로로
저는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거창한 대화가 없어도 됩니다.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관계.
김누리
경쟁을 잠시 멈출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학교 안에서
점수와 비교가 사라지는 순간.
그 순간이 우정을 숨 쉬게 합니다.
신형철
우정은 해답이 아니라 맥락입니다.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배경이 생기는 것.
그것이 의미를 만듭니다.
최진석
자유를 허용하는 관계.
떠날 수 있어도 머무는 관계.
그게 건강한 관계입니다.
스튜디오 안은 다시 조용해진다.
우정은 기적이 아니다.
하지만 시간을 늘려준다.
그리고 그 시간은
선택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정은 구원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고립을 줄이는 힘은 분명히 있다.
주제 3. 왜 학교와 어른은 보지 못하는가 — 부재는 개인의 무관심인가, 구조의 결과인가

서울 스튜디오의 공기가 조금 더 무거워진다.
이제 대화는 청소년 개인을 넘어, 사회로 향한다.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지만, 누구도 연출하지 않는다.
사회: 정혜신
많은 청소년이 “아무도 몰랐다”고 말합니다.
부모도, 선생님도, 어른도.
그런데 정말 몰랐던 걸까요?
아니면 보지 못한 걸까요?
첫 번째 질문입니다.
질문 1
어른의 부재는 무관심입니까, 아니면 구조적 한계입니까?
김누리 (교육 비평가)
저는 구조적 문제라고 봅니다.
한국의 학교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선발기관에 가깝습니다.
성적과 진학이 중심이 되면
감정은 주변부로 밀려납니다.
교사도 성과 평가를 받고,
부모도 결과로 평가받습니다.
이 구조 안에서는
누구도 일부러 외면하지 않아도
아이의 감정은 뒤로 밀립니다.
김현수 (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임상에서 만나는 부모들은
대부분 아이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몰랐어요.”
“저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그건 무관심이라기보다
감정을 읽는 훈련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한국에서는 정서 교육이 거의 없습니다.
감정을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한로로 (작가)
저는 소설에서 어른을 악역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을 미워하면서도
여전히 기대합니다.
“혹시 누가 알아봐 주지 않을까.”
그 기대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고 느꼈습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문학은 단순한 책임 추궁보다
관계의 균열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어른은 완전한 타자가 아닙니다.
그들도 같은 구조 안에서 소모됩니다.
문제는
누구의 잘못인가가 아니라
어디서 연결이 끊겼는가입니다.
최진석 (철학자)
존재는 인식될 때 안정됩니다.
청소년은
“내가 보이고 있는가”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합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는
점점 스스로를 의심합니다.
어른의 부재는
인식의 부재입니다.
정혜신 (사회)
상담 현장에서 저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요즘 누가 너를 제일 자주 봐?”
많은 아이들이
“아무도요.”라고 답합니다.
이 말은 물리적 부재가 아니라
정서적 부재를 의미합니다.
질문 2
어른은 왜 아이의 신호를 놓치는 걸까요?
김현수
신호가 너무 미세하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은 도움을 직접적으로 요청하지 않습니다.
성적 하락, 지각 증가, 짜증, 과도한 침묵.
이것을 문제행동으로만 보면
신호는 사라집니다.
김누리
또 하나는 속도입니다.
한국 사회는 너무 빠릅니다.
대화가 짧아지고,
관계가 효율 중심이 됩니다.
아이의 미묘한 변화는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한로로
저는 “괜찮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괜찮아.”
“다들 그래.”
이 말은 상황을 안정시키는 말이지만
감정을 지워버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형철
언어의 관성입니다.
우리는 늘 같은 문장으로 반응합니다.
“그 나이엔 다 그래.”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이 문장은 사실을 설명하는 듯 보이지만
개별성을 지웁니다.
최진석
두려움도 있습니다.
아이의 깊은 고통을 마주하면
어른 자신의 삶도 흔들립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문제를 축소하거나 단순화합니다.
정혜신
그래서 저는 “답하지 말고, 먼저 듣자”고 말합니다.
어른은 해결자가 되려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해결보다 인식이 먼저입니다.
질문 3
그렇다면, 어른은 무엇을 바꿔야 합니까?
김누리
학교의 평가 구조가 바뀌어야 합니다.
감정 교육과 상담이
부수적이 아니라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김현수
가정에서 감정을 말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왜 그랬어?” 대신
“어땠어?”라고 묻는 것.
한로로
저는 단 하나만 바꿀 수 있다면
“결론을 미루는 태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이의 말을 듣고
즉시 판단하지 않는 것.
신형철
문학은 느림을 가르칩니다.
한 문장을 오래 읽는 훈련은
한 사람을 오래 보는 훈련과 닮았습니다.
최진석
존재를 존재로 인정하는 태도.
성과 이전에,
역할 이전에,
한 사람으로 보는 것.
스튜디오 안은 잠시 고요하다.
어른의 부재는
항상 냉혹함에서 오지 않는다.
때로는 피로, 속도, 두려움에서 온다.
그러나 결과는 같다.
보이지 않는 아이는
점점 자신을 지운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속도를 늦추고,
다시 보는 것이다.
주제 4. 밝은 표정 뒤의 고통 — 한국 청소년은 왜 감정을 숨기는가

스튜디오의 공기가 한층 조용해진다.
창밖은 이미 아침이지만, 대화는 여전히 밤의 깊이를 품고 있다.
책 속 아이들은 웃는다.
사진을 찍고, 농담을 하고, 클럽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런데 동시에 “죽고 싶다”는 말도 한다.
사회: 정혜신
한국 청소년을 만나면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겉으로는 티 안 나요.”
“저는 밝은 애예요.”
왜 우리는 힘들어도 밝게 보여야 할까요?
첫 번째 질문입니다.
질문 1
한국 청소년은 왜 감정을 숨기는가?
김현수 (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울증 환자 중 상당수가 “밝은 아이”로 평가받습니다.
이걸 우리는 ‘가면성 우울’이라고 부릅니다.
한국 사회는 감정 표현보다 성취를 더 높게 평가합니다.
슬픔은 약함으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청소년은 빨리 배웁니다.
“힘들다고 말하면 부담이 된다”는 걸.
그래서 감정을 숨기는 게
생존 전략이 됩니다.
김누리 (교육 비평가)
저는 이것을 경쟁 사회의 부산물이라고 봅니다.
학교는 끊임없이 비교를 만듭니다.
SNS는 끊임없이 전시를 만듭니다.
밝은 표정은 자기 관리의 일부가 됩니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야
낙오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감정까지도 경쟁의 영역이 됩니다.
한로로 (작가)
저는 소설 속 아이들을 일부러 많이 웃게 했습니다.
그 웃음이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라,
동시에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정말로 웃습니다.
하지만 그 웃음이
고통을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 두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현대 청소년 언어에는 아이러니가 많습니다.
“망했다”, “미치겠다”, “죽겠다” 같은 과장된 표현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이 과장된 언어는
감정을 희석시키는 동시에 숨깁니다.
강한 말을 농담처럼 사용하면
진짜 감정도 농담처럼 보입니다.
최진석 (철학자)
인간은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인정은
“잘하고 있다”는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 자체보다
이미지를 관리합니다.
이미지와 존재 사이의 간극이 커질수록
내면은 더 고립됩니다.
정혜신 (사회)
상담에서 아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 진짜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죠?”
그 질문에는
이미 깊은 두려움이 들어 있습니다.
질문 2
밝음이 방어기제가 될 때, 어떤 위험이 생깁니까?
김현수
위험은 ‘지연’입니다.
밝게 보이기 때문에
주변은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우울은 깊어집니다.
김누리
사회는 결과로 판단합니다.
성적이 유지되고,
학교를 다니고,
문제가 표면화되지 않으면
괜찮다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감정은 성적표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로로
저는 아이들이 스스로도
자기 감정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진짜 힘든 게 맞나?”
“다들 웃는데, 나만 이상한 건가?”
이 의심이 쌓이면
자기 감각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신형철
문학은 여기서 균열을 만듭니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인물이
속으로 무너지는 장면을 보여줄 때,
독자는 자기 안의 균열을 인식합니다.
그 인식이 지연을 줄입니다.
최진석
가면이 오래 지속되면
자기 동일성이 흔들립니다.
나는 밝은 사람인가,
힘든 사람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존재가 분열됩니다.
정혜신
그래서 저는 아이에게 묻습니다.
“밝지 않아도 괜찮아.”
그 말을 처음 듣고
우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질문 3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환경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김현수
첫째, 감정을 말해도 불이익이 없다는 경험.
김누리
둘째, 비교가 줄어드는 공간.
한로로
셋째,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분위기.
저는 소설 속에서
아이들이 서로에게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신형철
넷째, 언어를 세분화하는 훈련.
“힘들다” 대신
“지쳤다”, “외롭다”, “창피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감정은 숨지 않습니다.
최진석
마지막으로, 존재를 성과와 분리하는 태도.
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
스튜디오 안의 공기가 조금 부드러워진다.
밝음은 죄가 아니다.
웃음도 진짜다.
그러나 그 웃음이
유일한 표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 청소년은
강해서 숨기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숨긴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그 가면을 벗기려 하기보다
가면을 써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주제 5.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 소설 — 그것은 회피인가, 윤리인가

스튜디오 안은 한층 고요해졌다.
앞선 네 개의 주제가 개인과 구조, 감정과 관계를 다뤘다면
이제는 문학 자체를 묻는다.
사회: 정혜신
이 소설은 명확한 해결을 주지 않습니다.
누군가 극적으로 구원받지도 않고,
사회가 갑자기 바뀌지도 않습니다.
어떤 독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뭐가 달라졌죠?”
첫 번째 질문입니다.
질문 1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 문학은 무책임한가?
신형철 (문학평론가)
저는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청소년 자살처럼 복합적인 문제에
간단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비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문학은 해결을 설계하는 장르가 아닙니다.
문학은 이해를 확장하는 장르입니다.
이 소설은 정답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을 더 깊게 만듭니다.
김현수 (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임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치료는 즉각적 해결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입니다.
한 번의 상담으로 인생이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듣고 있다”는 경험은
위험을 낮춥니다.
이 소설은 치료적 기능을 하지는 않지만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 둡니다.
김누리 (교육 비평가)
저는 구조적 문제에 대해
개인 서사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봅니다.
“마음가짐을 바꾸면 된다”
이런 메시지는 사회적 책임을 희석시킵니다.
이 소설이 해결을 말하지 않는 것은
문제를 개인화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읽힙니다.
최진석 (철학자)
철학적으로 말하면
해결은 종종 사유를 멈추게 합니다.
“이게 답이다”라는 순간
질문은 닫힙니다.
이 소설은 질문을 열어 둡니다.
열린 질문은 불편하지만
그 불편이 사고를 지속시킵니다.
한로로 (작가)
저는 아이들을 영웅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완전히 구원받는 이야기보다
조금 더 같이 버티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해결을 제시하지 않은 이유는
제가 모르는 답을 꾸며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 순간을 서두르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정혜신 (사회)
저는 상담 현장에서
“오늘은 그냥 여기까지”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 말은 포기가 아닙니다.
오늘을 넘겼다는 뜻입니다.
질문 2
그렇다면 이 소설이 실제로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김현수
“지연 효과”라고 생각합니다.
극단적 선택은 순간적입니다.
이 소설은 그 순간을 늦추는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 이 장면을 떠올리면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생깁니다.
신형철
저는 “해석의 변화”라고 봅니다.
독자는 이제
“죽고 싶다”라는 말을
이전처럼 단순하게 듣지 않습니다.
언어의 의미가 변하면
사회적 반응도 변합니다.
김누리
이 소설은 개인의 고통을
구조와 연결하는 다리를 놓습니다.
그 연결이 보이면
책임은 개인을 넘어 확장됩니다.
최진석
존재의 밀도를 높입니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
그 인식은 고립을 줄입니다.
한로로
저는 단 하나만 남기고 싶었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같이 있어보자.
조금만 더 들어보자.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그 “조금”이
누군가에게는 충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정혜신
저는 이 소설이
해결책이 아니라 “공간”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을 말해도 되는 공간.
결론을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공간.
질문 3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신형철
정답 대신 질문을 남기는 소설.
김현수
고립을 줄이는 이야기.
김누리
개인과 구조를 동시에 바라보는 서사.
최진석
의미를 닫지 않는 문학.
한로로
결론을 서두르지 말자는 이야기.
스튜디오 안은 조용하다.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는다.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 알고 있다.
이 소설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대신 시간을 벌어준다.
그리고 때로는
그 시간이 생명을 지킨다.
마치며

한로로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난 뒤에도
저는 여전히 확신이 없습니다.
문학이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쉽게 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가지는 믿습니다.
문학은 시간을 벌어줄 수 있다는 것.
극단적인 선택은 종종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 순간을 조금만 늦출 수 있다면,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다면,
조금 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 “조금”이
어떤 사람에게는 전부일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공간을 남깁니다.
말해도 되는 공간,
침묵해도 괜찮은 공간,
결론을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공간.
저는 우리가 서로에게
이 한 문장만은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만 더 같이 있어보자.”
희망을 크게 외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완전히 혼자는 아니라는 감각.
그 감각이 이어진다면
오늘은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이야기가
누군가의 밤을 조금 덜 외롭게 만들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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