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Talk https://tabletalk.kr Fri, 11 Sep 2026 18:52:24 +0000 en-US hourly 1 https://wordpress.org/?v=7.1 박경리 토지 현대 단편소설: 잃어버린 것과 함께 다시 살아가는 다섯 이야기 https://tabletalk.kr/park-kyungni-toji-modern-short-stories/ https://tabletalk.kr/park-kyungni-toji-modern-short-stories/#respond Fri, 11 Sep 2026 16:30:30 +0000 https://tabletalk.kr/?p=1467

들어가는 글

박경리의 『토지』는 오래전 한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집을 잃은 사람은 집만 잃는 것일까요.

한 세대가 겪은 상처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으로 남을까요.

역사책에 이름 한 줄 남지 않은 사람들의 삶은 정말 역사 밖에 있었던 것일까요.

땅은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재산일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살아온 시간을 품고 있는 장소일까요.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인간은 어떻게 다시 다음 날을 시작할까요.

앞선 두 개의 대화에서 『토지』의 인물들과 전문가들은 땅, 복수, 한, 기억, 역사, 사랑, 치유 그리고 생명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Part 3에서는 그 질문들을 오늘의 한국으로 옮깁니다.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

한 가족 안에 남겨진 식민지 시대의 기억.

수십 년 동안 노동자들에게 밥을 해 온 조선소 식당.

개발을 앞둔 시골의 마지막 논.

그리고 하루아침에 삶의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사람.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하나의 질문이 흐릅니다.

인간은 잃어버린 것을 모두 되찾은 뒤에야 다시 살아갈 수 있는가.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돌아오지 않는 것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과거의 집도, 사라진 마을도, 지나간 시대도 그대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때때로 그 자리에서 다시 무언가를 시작합니다.

집에 사람을 초대하고,

아이에게 기억은 남기되 미움까지 물려주지 않고,

이름 없던 사람들의 얼굴을 벽에 올리고,

오래된 논에 새로운 모를 심고,

누군가에게 한 그릇의 밥을 건넵니다.

이 다섯 이야기는 거대한 영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음 날을 만들어 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Story 1: 아버지의 집을 되찾은 날

park kyungni toji modern stories

김도현은 계약서 마지막 장에 서명한 뒤에도 한동안 펜을 놓지 못했다.

부동산 중개인이 환하게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이 집은 고객님 겁니다.”

그 말이었다.

스무 해 넘게 기다린 말.

어릴 때부터 마음속에서 수백 번 상상했던 말.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도 듣고 싶었고,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더 듣고 싶었던 말.

이제 이 집은 당신 것입니다.

그런데 도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기쁨도 없었다.

안도도 없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분명 같은 주소였다.

같은 동.

같은 층.

같은 방향.

그런데 창밖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릴 때 놀던 작은 놀이터 자리에는 유리 외벽의 고층 건물이 올라가 있었다.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며 내려다보던 낡은 상가는 사라졌다.

베란다 옆 화분을 놓았던 자리는 확장 공사로 벽이 되어 있었다.

도현은 천천히 손을 뻗어 벽을 만졌다.

그 벽 너머 어딘가에,

예전에는 아버지의 방이 있었다.

도현이 열네 살이던 해였다.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졌다.

처음에는 부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평소보다 더 자주 설거지를 했고, 아버지는 밤늦게까지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낯선 남자들이 집에 찾아왔다.

벨을 길게 눌렀다.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는 불을 끄고 아이들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했다.

도현은 그때 처음 알았다.

집이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어느 비 오는 오후, 아버지는 가족을 거실에 불러 앉혔다.

“이사를 가야겠다.”

그 말 한마디였다.

도현은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왜?”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고개를 숙였다.

여동생 수진은 울기 시작했다.

도현은 울지 않았다.

대신 화가 났다.

아버지에게.

사업에.

문을 두드리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집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이사하던 날, 그는 자기 방 문틀에 새겨 둔 키 표시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초등학교 3학년.

5학년.

중학교 1학년.

연필 자국 옆에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삿짐센터 직원이 말했다.

“학생, 이제 가야지.”

도현은 문틀에서 손을 떼었다.

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다시 올 거야.

그날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사 뒤에도 가끔 그 집 이야기를 했다.

술을 조금 마신 밤이면 더 자주 했다.

“거기 베란다 기억나냐?”

“너희 엄마가 처음 에어컨 사자고 난리쳤던 것도 그 집이었지.”

“수진이가 거실에서 자전거 타다가 장식장 깨먹은 것도.”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는 늘 비슷한 말을 했다.

“언젠가 다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다시 그 집에 살지 못했다.

사업 실패 이후 그는 작은 일을 전전했다.

돈이 조금 모이면 또 무언가를 시작했다.

잘되지 않았다.

점점 말수가 줄었다.

그리고 쉰일곱 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이 끝난 날 밤, 도현은 혼자 차 안에 앉아 있었다.

휴대전화로 그 아파트 시세를 검색했다.

가격을 본 뒤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그때 마음속으로 말했다.

아버지, 내가 살게요.

그 순간부터 집은 집이 아니었다.

목표가 되었다.

도현은 열심히 일했다.

남들보다 먼저 출근했다.

늦게 퇴근했다.

회사에서 기회가 생기면 잡았다.

직장을 옮겼다.

연봉이 올랐다.

스톡옵션을 받았다.

투자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마흔두 살에 이혼했을 때도 그는 일을 쉬지 않았다.

전처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있었다.

“당신은 항상 어딘가로 돌아가려고만 해.”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도현은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 가고 있다고.

더 높은 직책.

더 많은 돈.

더 좋은 차.

그리고 언젠가 그 집.

그런데 지금,

마흔여섯 살의 그는 마침내 그 집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며칠 뒤, 수진이 왔다.

“진짜 샀네.”

현관에 들어온 여동생은 신발을 벗지도 않고 잠시 주변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놀랄 줄 알았다.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기 기억나지?”

수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잘 모르겠어.”

도현은 웃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몇 년을 살았는데.”

“구조가 다 바뀌었잖아.”

“그래도 여기야.”

“주소는 그렇지.”

도현의 표정이 굳었다.

“주소는 그렇다니?”

수진은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오빠, 아빠 방 어디 있었어?”

도현이 벽을 가리켰다.

“저쪽.”

“엄마 화장대는?”

“안방.”

“내가 장식장 깬 곳은?”

도현은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수진이 조용히 말했다.

“없잖아.”

“그래도 같은 집이야.”

수진이 오빠를 바라보았다.

“오빠는 정말 이 집이 그리웠어?”

도현은 짜증이 났다.

“그럼 내가 왜 샀겠어?”

“모르겠어.”

“아빠가 얼마나 다시 오고 싶어 했는지 너도 알잖아.”

“알아.”

“그런데?”

수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말했다.

“오빠는 이 집을 그리워한 게 아니야.”

도현의 얼굴이 굳었다.

“뭔 소리야?”

수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빠 사업 망하기 전의 우리를 그리워한 거야.”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진은 계속했다.

“아빠가 아직 아빠 같았던 때.”

“엄마가 늘 걱정하지 않았던 때.”

“오빠가 돈 생각 안 하던 때.”

도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해.”

“오빠.”

“그만하라고.”

수진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신발을 다시 신었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돌아보며 말했다.

“집을 산 건 잘했어.”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근데 여기서 다시 살아야 해.”

문이 닫혔다.

그날 밤 도현은 불을 모두 끄고 거실에 앉았다.

아파트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가구는 거의 없었다.

이사도 아직 하지 않았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았다.

예전에 아버지 방이 있었던 곳이었다.

도현은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기침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신문 넘기는 소리.

야구 중계.

어머니가 거실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

수진이 웃는 소리.

열네 살의 자신이 방문을 세게 닫는 소리.

눈을 뜨자 아무것도 없었다.

흰 벽뿐이었다.

도현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버지 사진을 찾았다.

장례식 전에 찍힌 마지막 사진이 아니었다.

오래된 사진.

그 집 거실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아버지는 젊었다.

머리숱도 많았다.

엄마는 웃고 있었다.

수진은 초등학생이었다.

그리고 도현 자신은 아버지 옆에서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 밖으로 말했다.

“아버지.”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

그는 다시 말했다.

“아버지, 샀어요.”

잠시 기다렸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도현의 목이 막혔다.

“진짜 샀어요.”

이번에는 웃음 같은 것이 조금 섞였다.

“아버지가 다시 오고 싶어 했던 집.”

그는 벽을 바라보았다.

“샀어요.”

긴 침묵.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없네요.”

그 순간 무언가가 무너졌다.

도현은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동안 울지 않았던 모든 날이 한꺼번에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버지 장례식에서도 제대로 울지 않았다.

사업이 무너졌을 때도.

집을 떠날 때도.

이혼할 때도.

늘 다음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마지막 목표까지 이루고 나니,

숨을 곳이 없었다.

그는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인정했다.

그가 되찾으려 했던 것은 이 집이 아니었다.

이 집을 잃기 전의 세상 전체였다.

그 세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몇 주 동안 도현은 아파트에 거의 가지 않았다.

팔아 버릴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상했다.

스무 해 넘게 원한 것을 얻자마자 다시 버리는 것 같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 수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 해?”

“집.”

“어느 집?”

도현은 잠시 웃었다.

“그 집.”

수진도 조금 웃었다.

“애들이 서울 가고 싶대.”

“그래?”

“응.”

침묵.

도현이 먼저 말했다.

“그럼 와.”

“어디로?”

“여기로.”

수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은 괜히 말을 덧붙였다.

“밥이나 먹게.”

“오빠가 해?”

“시키지.”

수진이 웃었다.

“그건 인정.”

그날 저녁, 아파트에는 처음으로 사람 냄새가 났다.

배달 음식 상자가 식탁 위에 쌓였다.

수진의 남편이 맥주를 열었다.

아이들은 방을 뛰어다녔다.

도현은 처음에는 신경이 쓰였다.

새 바닥에 발자국이 생겼다.

소파 위에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그러다가 조카가 주스를 엎었다.

빨간 액체가 바닥을 따라 번졌다.

도현이 벌떡 일어났다.

“야!”

아이가 얼어붙었다.

수진도 순간 조용해졌다.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바닥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상하게 아버지가 떠올랐다.

수진이 장식장을 깨던 날.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다.

그날 밤엔 또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도현은 천천히 앉았다.

“휴지 가져와.”

조카가 겁먹은 얼굴로 휴지를 가져왔다.

도현은 아이와 같이 바닥을 닦았다.

“삼촌 화났어?”

도현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조금.”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도현은 웃었다.

“근데 괜찮아.”

아이는 다시 뛰어갔다.

수진이 맞은편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다.

저녁이 끝나갈 무렵, 도현은 작은 액자를 꺼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이었다.

수진이 물었다.

“거기 둘 거야?”

도현은 한참 고민하다가 책장 한쪽에 놓았다.

가운데가 아니었다.

특별히 조명을 비추지도 않았다.

아이들 사진 옆.

수진 가족이 여행 가서 찍은 사진 옆.

어머니 생일 사진 옆.

여러 사진 가운데 하나였다.

수진이 사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빠 좋아하겠다.”

도현은 사진을 보았다.

“모르지.”

“왜?”

도현이 웃었다.

“아빠 생각보다 까다로웠잖아.”

둘은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수진 가족이 돌아간 뒤,

도현은 혼자 거실에 남았다.

바닥 한쪽에는 아직 희미하게 주스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지웠을 것이다.

그날은 그냥 두었다.

창밖에는 새로운 건물들의 불빛이 보였다.

어린 시절의 풍경은 없었다.

아버지도 없었다.

그때의 가족도 없었다.

그는 다시는 열네 살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처음 이 집을 샀던 날보다 오늘이 더 집처럼 느껴졌다.

도현은 베란다 문을 조금 열었다.

밤공기가 들어왔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해 온 문장을 떠올렸다.

집을 되찾았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집은 되찾는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사람이 다시 만들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도현은 불을 끄려다 책장 위의 사진을 한 번 보았다.

“아버지.”

그리고 이번에는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

그는 불을 껐다.

아버지의 집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그곳에는 다시 한 가족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Topic 2: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인간은 치유되는가

park kyungni toji modern stories 2

평사리의 햇빛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아까까지 들판 위에 남아 있던 안개는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탁자 주위에는 첫 번째 대화가 남긴 질문이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상처도 치유되는가.

펄 벅이 먼저 입을 열었다.

펄 S. 벅:
“서희는 결국 빼앗긴 땅을 되찾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순간을 승리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요?”

이승윤이 잠시 생각했다.

이승윤:
“승리라고 부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회복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죠.”

주디스 허먼:
“그 두 단어를 분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현백:
“승리와 회복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주디스 허먼:
“네.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과 마음이 치유되는 것은 같은 사건이 아닙니다.”

펄 벅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펄 S. 벅:
“하지만 정의가 없으면 치유도 어렵지 않습니까?”

주디스 허먼:
“그럴 수 있습니다. 빼앗긴 것을 돌려받는 일, 잘못을 인정받는 일, 책임을 묻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그것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지는 못합니다.”

마리안느 허시:
“특히 죽은 사람이 있다면요.”

허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 허먼:
“그렇죠.”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이승윤이 『토지』를 펼쳤다.

이승윤:
“서희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그녀는 조준구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오랫동안 살아갑니다. 그 목표가 그녀를 버티게 한 것도 사실입니다.”

폴 리쾨르:
“목표가 삶의 방향을 제공한 셈이군요.”

이승윤: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질문이 생깁니다.”

그가 책을 덮었다.

“목표를 이루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펄 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펄 S. 벅:
“복수를 위해 살아온 사람이 복수를 끝낸 뒤에 마주하는 공허함.”

주디스 허먼:
“혹은 회복을 복수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 온 사람이, 두 가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정현백:
“서희에게 조준구는 단순히 미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가족의 몰락과 빼앗긴 땅, 어린 시절의 상실이 하나로 묶여 있었죠.”

마리안느 허시:
“그러면 조준구를 이긴다고 해서 그 모든 상실을 이기는 것은 아니군요.”

이승윤:
“바로 그 문제입니다.”

펄 벅이 조금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펄 S. 벅:
“제가 서희에게 직접 물을 수 있다면,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가장 되찾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리쾨르가 말했다.

폴 리쾨르:
“그리고 아마 서희 자신도 처음부터 그 답을 알지는 못했을 겁니다.”

주디스 허먼:
“사람은 종종 하나의 구체적인 목표에 상실 전체를 걸어 둡니다. 집, 돈, 재판의 승리, 가해자의 처벌.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인간의 마음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잃었을 수 있습니다.”

펄 S. 벅:
“어떤 것들 말입니까?”

허먼은 천천히 답했다.

주디스 허먼:
“안전하다는 감각. 세상이 어느 정도 믿을 만하다는 감각. 가족은 계속 곁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 미래에 대한 자연스러운 기대.”

마리안느 허시가 말을 이었다.

마리안느 허시:
“그리고 가족의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요.”

정현백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정현백:
“서희가 잃은 것은 집 한 채가 아니었으니까요.”

펄 벅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펄 S. 벅:
“그렇다면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겠군요.”

그녀가 또렷하게 말했다.

“정의를 되찾는 것과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왜 다른가?”

주디스 허먼이 바로 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말했다.

주디스 허먼:
“정의는 바깥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폴 리쾨르:
“바깥에서?”

주디스 허먼:
“재산이 반환됩니다. 판결이 내려집니다. 가해자가 처벌받습니다. 사회가 잘못을 인정합니다. 이런 변화는 실제이고 중요합니다.”

그녀가 손을 가슴 가까이에 놓았다.

“하지만 상처는 안쪽에도 남아 있습니다.”

펄 S. 벅:
“그러면 바깥의 정의와 안쪽의 회복이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겁니까?”

주디스 허먼:
“그렇습니다. 때로는 아주 다른 속도로.”

이승윤:
“서희가 땅을 되찾았다고 해서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모두 조용해졌다.

펄 벅이 아주 낮게 말했다.

펄 S. 벅:
“그날 밤에도 죽은 사람들은 죽어 있었겠군요.”

이승윤:
“네.”

잠시 뒤 그가 덧붙였다.

“그날 밤에도 죽은 사람들은 죽어 있었습니다.”

그 말은 이상할 만큼 단순했고, 그래서 더 무거웠다.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그렇다고 해서 땅을 되찾은 일이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디스 허먼: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현백:
“그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마음의 평화가 더 중요하니 재산이나 정의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펄 S. 벅:
“그렇군요.”

정현백:
“빼앗긴 것은 돌려받아야 합니다. 잘못은 잘못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폴 리쾨르:
“정의는 과거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시간 자체를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요.”

마리안느 허시:
“시간이 바로 핵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펄 S. 벅:
“어떤 의미에서요?”

마리안느 허시:
“서희가 빼앗긴 순간과 되찾은 순간 사이에는 수많은 해가 있습니다. 그 사이에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가족도 달라졌고요.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어 같은 장소에 다시 서는 겁니다.”

리쾨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폴 리쾨르:
“그렇다면 회복은 ‘이전으로 돌아감’이 아니라 ‘이후를 살아갈 수 있게 됨’에 더 가까울 수 있겠군요.”

허먼이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주디스 허먼:
“저도 그렇게 보고 싶습니다.”

펄 벅이 잠시 침묵한 뒤 물었다.

펄 S. 벅:
“두 번째 질문입니다. 복수는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요?”

정현백이 한숨처럼 웃었다.

정현백:
“아주 오래된 질문이군요.”

폴 리쾨르: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주디스 허먼:
“복수하고 싶은 마음 자체를 쉽게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펄 벅이 눈썹을 올렸다.

펄 S. 벅:
“왜 그렇습니까?”

주디스 허먼: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분노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이 일이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분노 속에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분노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주디스 허먼:
“내 삶 전체가 가해자와의 관계 속에 붙잡혀 있느냐는 겁니다.”

리쾨르가 천천히 말했다.

폴 리쾨르:
“미워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 사람에게 묶여 있을 수 있다는 말이군요.”

주디스 허먼:
“그렇습니다.”

이승윤이 서희와 조준구의 관계를 떠올리듯 말했다.

이승윤:
“서희가 조준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당신은 땅을 빼앗았다고 생각했겠죠. 나는 세상을 빼앗겼습니다.”

펄 벅의 눈빛이 달라졌다.

펄 S. 벅:
“그 차이가 크군요.”

이승윤:
“조준구에게는 재산이었을 수 있습니다. 서희에게는 세계였습니다.”

정현백:
“그러니 서희에게 그를 이긴다는 것은 단순한 경쟁의 승리가 아니었겠죠.”

이승윤:
“네. 하지만 그를 이긴 뒤에도 그가 빼앗아 간 세계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때 서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허먼이 말했다.

주디스 허먼:
“바로 거기서 회복의 다른 단계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펄 S. 벅:
“다른 단계?”

주디스 허먼:
“가해자를 중심으로 살지 않는 것.”

리쾨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폴 리쾨르:
“용서하라는 말입니까?”

허먼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주디스 허먼:
“아닙니다.”

방 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주디스 허먼:
“회복과 용서를 같은 것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정현백:
“그 점은 아주 중요하군요.”

주디스 허먼:
“피해자가 반드시 용서해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문제 자체를 더 이상 자기 삶의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펄 벅이 말했다.

펄 S. 벅:
“그러면 용서하지 않고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겁니까?”

주디스 허먼:
“그럴 수 있습니다.”

이승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승윤:
“서희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잠시 침묵.

그리고 그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제 당신 때문에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무도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마리안느 허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리안느 허시:
“그 문장은 용서보다 더 강할 수도 있겠네요.”

폴 리쾨르:
“관계를 끊는 선언이니까요.”

주디스 허먼:
“정확히는 가해자가 더 이상 내 삶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선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정현백: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죠?”

주디스 허먼:
“아닙니다.”

마리안느 허시:
“기억을 지우는 것도 아니고요.”

주디스 허먼:
“그렇습니다.”

리쾨르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폴 리쾨르:
“그러면 우리가 찾는 말은 ‘잊음’이 아니라 ‘거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펄 S. 벅:
“과거와의 거리?”

폴 리쾨르: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과거가 현재의 모든 선택을 대신하지 못하게 하는 거리.”

허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 허먼:
“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

“과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더 이상 내 미래의 모든 문장을 대신 쓰지 못하게 하는 것.”

펄 벅이 그 문장을 반복했다.

펄 S. 벅:
“내 미래의 모든 문장을 대신 쓰지 못하게 한다.”

바람이 창문을 스쳤다.

멀리서 새 한 마리가 논 위로 낮게 날아갔다.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상처가 사회의 상처와 연결되어 있다면요.”

마리안느 허시:
“가족의 기억으로 남기도 하고요.”

정현백:
“그렇죠. 식민지 경험, 전쟁, 이산, 계급의 상처 같은 것은 한 사람의 마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펄 S. 벅:
“다음 세대에게 넘어간다는 뜻입니까?”

마리안느 허시:
“때로는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때로는 침묵으로 넘어갑니다.”

폴 리쾨르:
“침묵으로도?”

마리안느 허시:
“네. 가족이 어떤 일을 전혀 말하지 않아도 아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정한 이름을 피하고, 특정한 장소에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누군가의 사진이 서랍 안에 숨겨져 있다면요.”

주디스 허먼:
“상처는 말로만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승윤:
“그렇다면 서희 한 사람의 상처를 넘어, 『토지』 전체에 퍼져 있는 감정으로 가야겠군요.”

펄 벅이 그를 바라보았다.

펄 S. 벅:
“어떤 감정입니까?”

이승윤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펄 벅이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치유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허먼이 손을 모았다.

주디스 허먼:
“상처가 없었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현백:
“잊는 것도 아니고.”

마리안느 허시:
“역사를 없애는 것도 아니고.”

폴 리쾨르:
“과거와 화해했다는 아름다운 결론을 반드시 얻는 것도 아니겠군요.”

주디스 허먼:
“네. 저는 오히려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돌아오는 것을 중요하게 봅니다.”

펄 S. 벅:
“선택?”

주디스 허먼:
“과거 때문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에서 내가 무엇을 할지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

이승윤:
“그렇다면 서희에게 회복은 조준구를 이기는 순간보다, 조준구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게 되는 순간에 가까울 수도 있겠군요.”

허먼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 허먼: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펄 벅이 말했다.

펄 S. 벅:
“『대지』에서도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룽은 오랫동안 땅이 모든 문제의 답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땅을 많이 가져도 가족의 균열까지 막지는 못합니다.”

정현백:
“소유는 안전을 줄 수 있지만, 모든 관계를 구해 주지는 못하죠.”

펄 S. 벅: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작품이 아주 다른 문화와 역사를 다루면서도 비슷한 질문을 한다고 느낍니다.”

폴 리쾨르:
“무엇을 가졌는가보다, 그것을 통해 무엇을 되찾고 싶어 하는가.”

펄 S. 벅:
“네.”

마리안느 허시가 조용히 말했다.

마리안느 허시:
“그런데 서희가 조준구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합시다.”

주디스 허먼:
“네.”

마리안느 허시:
“그렇다면 그 분노와 기억은 어디로 갑니까?”

아무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정현백:
“사라지지는 않겠죠.”

폴 리쾨르:
“기억은 형태를 바꿀 수는 있어도, 단순히 삭제되지는 않으니까요.”

이승윤:
“아마 그 지점에서 한국어의 한이라는 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펄 벅이 고개를 들었다.

펄 S. 벅:
“한.”

이승윤:
“네.”

그는 창밖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되찾아도 남아 있는 것.”

잠시 뒤 정현백이 말했다.

“잊지 못해서 남아 있는 것만도 아니고요.”

마리안느 허시가 물었다.

“그렇다면 한은 상처입니까? 기억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무엇입니까?”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펄 벅이 『토지』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다음 대화의 제목처럼 한 단어를 말했다.

“한.”

그 한 단어가 다음 질문을 열었다.

Topic 3 한은 기억인가, 상처인가, 정체성인가

park kyungni toji modern stories

평사리의 햇빛은 이제 들판 전체에 내려앉아 있었다.

아침 안개는 거의 사라졌지만, 여섯 사람의 대화에는 다른 종류의 안개가 남아 있었다.

조금 전 마리안느 허시는 물었다.

“그렇다면 한은 상처입니까? 기억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무엇입니까?”

펄 벅은 『토지』 위에 손을 올린 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펄 S. 벅:
“제가 한이라는 말을 완전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승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윤:
“그 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펄 S. 벅:
“슬픔이라고 번역하면 부족하고, 원한이라고 해도 부족하고, 비애라고 해도 부족하겠죠?”

이승윤:
“네. 그리고 한을 하나의 감정으로만 정의하려 할수록 오히려 멀어질 수 있습니다.”

주디스 허먼:
“저는 특히 한을 곧바로 트라우마와 같은 것으로 부르는 데 조심하고 싶습니다.”

펄 S. 벅:
“둘은 다릅니까?”

주디스 허먼:
“겹치는 부분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특정한 심리적 경험과 반응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입니다. 한은 훨씬 더 넓은 역사적, 문화적, 관계적 의미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현백:
“한에는 개인의 고통만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식민지 경험, 전쟁, 가난, 계급, 가족, 여성의 삶, 이루지 못한 사랑, 억울함, 기다림, 떠나지 못한 마음. 그런 것들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쌓이기도 합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렇다면 한은 한 사람이 혼자 만들어 낸 감정이라고만 보기는 어렵겠군요.”

이승윤:
“그렇습니다. 어떤 한은 한 사람의 생애보다 오래 남기도 하니까요.”

펄 벅이 물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질문입니다. 한은 개인의 상처입니까, 역사가 개인 안에 남은 흔적입니까?”

정현백이 먼저 대답했다.

정현백:
“둘 중 하나로 고르기 어렵습니다.”

폴 리쾨르:
“왜 그렇습니까?”

정현백:
“역사는 언제나 추상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식민지가 되었다는 문장은 역사책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 역사적 사건은 실제 사람의 집을 잃게 하고, 가족을 흩어지게 하고,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고, 어떤 여성을 평생 기다리게 합니다.”

마리안느 허시:
“큰 역사가 개인의 몸과 가족 안으로 들어오는군요.”

정현백:
“그렇죠.”

이승윤:
“『토지』가 강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역사를 사건 목록으로 보여 주지 않습니다. 역사가 한 사람의 결혼에 들어오고, 밥상에 들어오고, 사랑에 들어오고, 땅에 들어옵니다.”

펄 S. 벅:
“그 점에서는 『대지』와도 닮았습니다.”

이승윤:
“어떤 점에서요?”

펄 S. 벅:
“전쟁이나 기근이 왕룽에게는 정치적 사건으로 먼저 오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사라지고, 가족이 굶고, 땅을 떠나야 하는 경험으로 옵니다.”

정현백:
“맞습니다. 역사란 많은 사람에게 그렇게 옵니다.”

주디스 허먼:
“그리고 그런 경험은 사건이 끝났다고 해서 바로 끝나지 않습니다.”

폴 리쾨르:
“사건은 끝나도 그 사건이 만든 시간은 계속된다는 뜻입니까?”

주디스 허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안느 허시가 조용히 말했다.

마리안느 허시:
“저는 여기서 세대의 문제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펄 S. 벅:
“다음 세대 말입니까?”

마리안느 허시:
“네. 어떤 사람은 직접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시기를 살지도 않았습니다. 가족이 쫓겨나는 장면을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건들이 자기 삶 안에 깊이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정현백:
“가족 이야기 때문입니까?”

마리안느 허시:
“이야기뿐만은 아닙니다.”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진. 침묵. 반복되는 이야기. 말하지 않는 이름. 가족이 특정한 장소를 피하는 방식. 어떤 질문을 했을 때 갑자기 어른들의 얼굴이 굳어지는 순간.”

폴 리쾨르:
“말하지 않은 것도 기억이 될 수 있다는 말이군요.”

마리안느 허시:
“그렇습니다.”

주디스 허먼:
“아이들은 가족의 감정적 분위기를 배우기도 합니다. 정확한 사건을 몰라도요.”

펄 S. 벅:
“그러면 다음 세대는 자기 것이 아닌 기억을 가지고 살 수도 있습니까?”

마리안느 허시:
“정확히 같은 기억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전 세대의 경험이 이미지와 이야기와 감정을 통해 이후 세대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는 있습니다.”

이승윤:
“한도 그런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허시는 잠시 생각했다.

마리안느 허시:
“저는 한이라는 개념 전체를 제 연구 용어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가족의 고통이 다음 세대의 삶을 구성하는 방식은 분명 존재합니다.”

펄 벅이 책상 위에 놓인 두 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펄 S. 벅:
“그렇다면 기억을 이어 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까?”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폴 리쾨르:
“기억에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부정의가 있었을 때, 잊지 않는 것은 중요합니다.”

정현백:
“그렇지만 기억이 어떤 형태로 전달되는지도 중요하겠죠.”

펄 S. 벅:
“무슨 뜻입니까?”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아이에게 ‘이 일이 있었다’고 가르치는 것과 ‘그러니 너도 저 사람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마리안느 허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느 허시:
“바로 그 차이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기억하는 것과 미워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다릅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펄 벅이 그 말을 다시 되뇌었다.

펄 S. 벅:
“기억하는 것과 미워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폴 리쾨르가 손을 모았다.

폴 리쾨르: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을 해 봅시다.”

“우리는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과거에게 미래를 맡기지 않을 수 있는가?”

주디스 허먼이 말했다.

주디스 허먼:
“가능해야 합니다.”

펄 S. 벅:
“가능해야 한다?”

주디스 허먼:
“그렇지 않으면 피해를 입은 세대뿐 아니라 그 다음 세대까지 계속 가해자의 영향 아래 살게 됩니다.”

마리안느 허시:
“하지만 ‘이제 미래를 살아라’라는 말이 기억을 버리라는 압력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정현백:
“한국 역사에서는 특히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펄 S. 벅:
“왜 그렇습니까?”

정현백:
“상처를 말하는 사람에게 너무 빨리 ‘이제 잊자’고 하면, 그것은 화해가 아니라 침묵을 요구하는 말이 될 수 있으니까요.”

폴 리쾨르:
“그렇다면 기억과 해방을 반대말로 만들어서는 안 되겠군요.”

마리안느 허시:
“네.”

주디스 허먼:
“기억하면서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승윤:
“『토지』의 인물들에게도 그런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펄 S. 벅:
“어떤 차이입니까?”

이승윤:
“상처를 품고 사는 것과, 상처에 붙잡혀 사는 것.”

그가 한 번 더 또렷하게 말했다.

“품고 사는 것과 붙잡혀 사는 것은 다릅니다.”

펄 벅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했다.

펄 S. 벅:
“그 차이를 실제 삶에서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주디스 허먼:
“쉽지 않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기억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붙잡혀 있다고 할 수는 없겠죠.”

주디스 허먼:
“그렇습니다. 자주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병적인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억이 현재의 삶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입니다.”

폴 리쾨르:
“현재를 대신 살아 버리는가.”

주디스 허먼:
“네.”

정현백:
“그리고 다음 세대의 선택까지 대신하려 하는가.”

마리안느 허시:
“그것도 중요합니다.”

펄 벅이 말했다.

펄 S. 벅:
“그렇다면 이런 표현은 어떨까요.”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억하되, 거기서 살지는 않는 것.”

마리안느 허시가 미소를 지었다.

마리안느 허시:
“좋은 표현입니다.”

폴 리쾨르:
“과거를 지우지 않지만, 과거를 현재의 주소로 만들지도 않는다는 뜻이군요.”

잠시 후 이승윤이 말했다.

이승윤:
“하지만 한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빠지기 쉬운 다른 위험도 있습니다.”

펄 S. 벅:
“어떤 위험입니까?”

이승윤:
“한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이 강해졌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겁니다.”

주디스 허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주디스 허먼:
“그 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정현백:
“저도 동의합니다.”

펄 S. 벅:
“왜 위험합니까?”

주디스 허먼:
“고통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고통 자체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쉽습니다.”

정현백:
“식민지 지배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강해졌다고 말한다면, 어느 순간 식민지 지배가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전쟁도 마찬가지겠군요.”

정현백:
“그렇습니다.”

주디스 허먼:
“어떤 사람은 고통 속에서 새로운 힘을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어떤 사람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성장의 도구처럼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방 안이 오래 조용했다.

펄 벅이 천천히 말했다.

펄 S. 벅:
“그러면 한이 사람을 살게 했다는 말도 조심해야겠군요.”

이승윤:
“네.”

펄 S. 벅:
“하지만 『토지』의 인물들은 그렇게 많은 것을 견디고도 계속 살아갑니다.”

이승윤:
“그렇기 때문에 질문을 바꾸는 편이 좋습니다.”

펄 S. 벅:
“어떻게요?”

이승윤은 창밖의 논을 바라보았다.

이승윤:
“한이 사람을 살게 한 것이 아니라…”

잠시 말을 멈췄다.

“한을 가지고도 살아가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허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 허먼:
“그 차이는 큽니다.”

마리안느 허시:
“고통에게 공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니까요.”

정현백:
“그리고 살아남지 못한 사람을 약한 사람으로 만들지도 않고요.”

펄 벅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세 번째 질문을 꺼냈다.

“한이 정체성의 일부라면,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배신하는 것일까?”

폴 리쾨르가 먼저 말했다.

폴 리쾨르:
“사람은 자기 과거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펄 S. 벅:
“조금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폴 리쾨르:
“나는 내가 겪은 일들로 구성되지만, 그 일들의 합계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계속 이야기되고 수정됩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렇다면 가족에게 물려받은 기억도 나의 일부일 수 있지만, 나의 전부는 아니겠군요.”

폴 리쾨르:
“그렇습니다.”

정현백:
“그런데 역사적 기억을 내려놓는다는 표현은 조금 조심하고 싶습니다.”

펄 S. 벅:
“왜요?”

정현백:
“무엇을 내려놓는 것인지 분명해야 하니까요. 사실을 내려놓는 것인지, 책임을 내려놓는 것인지, 미움을 내려놓는 것인지 서로 다릅니다.”

주디스 허먼:
“아주 중요한 구별입니다.”

마리안느 허시:
“기억을 보존하면서도, 그 기억이 요구하는 감정까지 그대로 물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승윤:
“결국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넘길 것인가의 문제가 되겠군요.”

펄 벅이 말했다.

펄 S. 벅:
“그렇다면 부모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이것은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다.”

“잊지 말아라.”

“하지만 네가 누구를 사랑할지, 누구와 친구가 될지, 네 미래를 어떻게 만들지는 네가 선택해라.”

마리안느 허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느 허시:
“그것이 가능하다면 기억은 짐만이 아니라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폴 리쾨르: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의 관계.”

정현백:
“과거와 미래 사이의 관계.”

주디스 허먼:
“다만 그 관계가 명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승윤이 말했다.

이승윤:
“『토지』의 언어로 말하면 이런 문장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우리의 한을 아이의 운명으로 만들지 않는 것.”

아무도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멀리서 누군가가 논두렁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바구니를 든 나이 든 여자였다.

조금 뒤 다른 여자가 집 앞에서 빨래를 널었다.

누군가는 아기를 업고 있었다.

정현백이 창밖을 바라보다 말했다.

정현백:
“한에 대해 이야기하면 한 가지 문제가 더 생깁니다.”

펄 S. 벅:
“어떤 문제입니까?”

정현백:
“누가 그 한을 실제로 살아 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펄 S. 벅:
“누가?”

정현백은 창밖을 가리켰다.

정현백:
“역사책에 이름이 남은 사람들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마리안느 허시가 말했다.

마리안느 허시:
“오히려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았겠죠.”

정현백:
“남자들이 전쟁과 정치와 독립운동으로 기록될 때,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밥을 하고, 아픈 사람을 돌보고, 기다리고, 가족을 이어 간 사람들은 무엇으로 기록되었을까요?”

펄 S. 벅:
“생활.”

정현백:
“그렇죠.”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전쟁은 역사라고 부르면서, 사람을 먹이고 살린 일은 왜 생활이라고만 불렀을까요?”

펄 벅의 시선이 창밖의 여성에게 머물렀다.

그녀는 자신의 소설 속 오란을 떠올리는 듯했다.

펄 S. 벅:
“그 질문은 제가 오랫동안 생각해 온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승윤이 말했다.

이승윤:
“『토지』에도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정현백:
“그렇다면 다음에는 그 사람들을 봐야겠군요.”

펄 S. 벅:
“역사에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들.”

정현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대화의 문을 여는 듯 물었다.

“역사는 정말 누가 만들었을까요?”

Story 4: 마지막 논

park kyungni toji modern stories

Story 4: 마지막 논


강태준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구두 끝을 내려다봤다.

진흙이 묻어 있었다.

서울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다.

주차장도, 사무실도, 호텔도, 분양 현장도 대부분 바닥이 반듯했다.

하지만 하림군의 이 마을은 달랐다.

좁은 길.

낮은 집.

오래된 담장.

그리고 길 끝까지 이어진 논.

태준은 수행 직원에게 말했다.

“차를 좀 더 안쪽에 댈 수 없었어?”

직원이 난처하게 웃었다.

“대표님, 여기부터는 농로라서요.”

태준은 한숨을 쉬었다.

“됐어.”

그는 서류가방을 들고 논두렁을 따라 걸었다.

멀리 한 노인이 허리를 굽힌 채 잡초를 뽑고 있었다.

최병수.

여든두 살.

하림군 신평리의 마지막 미매입 농지 소유자.

태준의 회사는 이미 주변 토지 대부분을 샀다.

고급 실버타운.

소형 병원.

상가.

주거단지.

산책로.

농촌 체험공간.

프로젝트 전체 규모는 수천억 원이었다.

문제는 병수의 논 하나였다.

개발 계획의 한가운데.

태준은 서류가방을 열었다.

오늘 제시할 금액은 25억 원이었다.

기존 감정가보다 훨씬 높았다.

태준은 확신했다.

이번에는 끝날 것이다.

병수는 태준이 가까이 올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태준이 먼저 말했다.

“어르신.”

병수가 허리를 폈다.

“왔소?”

“네.”

“또 땅 사러?”

태준이 웃었다.

“그렇죠.”

병수는 장갑 낀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지난번에 안 판다고 했는데.”

“조건을 조금 더 좋게 가져왔습니다.”

태준은 서류를 꺼냈다.

“25억입니다.”

병수는 서류를 보지도 않았다.

“안 팝니다.”

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한번 보시죠.”

“안 봐도 돼.”

“감정가보다 훨씬 높습니다.”

“알아.”

“자녀분들도 서울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농사 이어받을 사람도 없고요.”

병수는 태준을 바라봤다.

“그래서?”

태준이 조금 답답한 듯 말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셔야죠.”

병수가 웃었다.

“현실.”

“네.”

“서울 사람들은 꼭 그 말 좋아하더라.”

태준은 입술을 다물었다.

병수는 다시 논을 바라봤다.

“당신은 계속 값만 묻네.”

태준이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병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한 번도 안 묻고.”

태준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감상적인 협상에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경계했다.

토지는 토지다.

등기부가 있고,

감정가가 있고,

용도지역이 있고,

개발 가능성이 있다.

그는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그렇게 돈을 벌었다.

태준은 말했다.

“어르신, 추억이 중요한 건 압니다.”

병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알아?”

“네.”

“뭘 아는데?”

태준은 잠시 말이 막혔다.

병수가 말했다.

“당신 아버지는 농사 지었소?”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태준이 멈췄다.

“…지었습니다.”

병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은 알겠네.”

태준의 얼굴이 굳었다.

“그 얘기랑 이 논은 관계없습니다.”

병수는 다시 웃었다.

“사람들은 관계없는 얘기라고 할 때 제일 관계있는 얘기를 하지.”

태준의 할아버지는 소작농이었다.

태준은 그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때 부모는 농촌 출신이라는 것을 거의 자랑하지 않았다.

가난했다.

정말 가난했다.

태준의 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시로 나왔다.

공장에서 일했다.

밤에는 공부했다.

태준이 어릴 때 아버지는 자주 말했다.

“너는 흙 묻히고 살지 마라.”

태준은 그 말을 기억했다.

흙은 가난이었다.

흙은 젖은 양말이었다.

흙은 굽은 허리였다.

흙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고도 남는 것이 없던 할아버지였다.

태준은 흙에서 멀어지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했다.

서울로 갔다.

부동산 개발회사에 들어갔다.

도시를 바꾸는 일을 배웠다.

낡은 건물을 허물고,

땅의 가치를 올리고,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일.

그는 자신이 과거에서 멀리 왔다고 믿었다.

병수가 말했다.

“한번 걸어봅시다.”

“어디를요?”

“논.”

태준이 자기 구두를 봤다.

병수가 피식 웃었다.

“그 신발 벗어도 되고.”

태준은 벗지 않았다.

둘은 논두렁을 따라 걸었다.

병수가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뭐가 있습니까?”

“아버지가 쓰러진 데.”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수는 조금 더 걸었다.

“저쪽은 큰물 났던 해에 마을 사람들이 밤새 둑 막은 자리.”

다시 몇 걸음.

“거기는 우리 큰애 돌잔치 했던 데.”

태준이 웃었다.

“논에서 돌잔치를요?”

“집에 사람 다 못 들어왔어.”

조금 더 갔다.

병수의 걸음이 느려졌다.

“저기 둑 밑에는…”

그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태준이 기다렸다.

병수가 말했다.

“우리 둘째 묻었다.”

태준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이요?”

병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난 지 며칠 못 살았어.”

바람이 논 위를 지나갔다.

병수는 한동안 그곳을 보았다.

“그땐 병원도 멀었지.”

태준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병수는 계속 걸었다.

“여기는 내가 장가오고 첫 벼 벤 데.”

“저기는 아내랑 대판 싸운 데.”

“저 끝은 아들이 서울 간다고 처음 말한 자리.”

태준이 물었다.

“이 논에서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습니까?”

병수가 태준을 봤다.

“사람이 오래 살면 어디든 일이 많아.”

“그래도…”

병수는 말했다.

“당신 눈에는 평수겠지.”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 눈에는 시간이고.”

태준은 며칠 뒤 서울로 돌아갔다.

회의실에는 개발도면이 펼쳐져 있었다.

팀장이 말했다.

“대표님, 그 필지만 들어오면 전체 동선이 완성됩니다.”

“알아.”

“법적으로는 수용 절차 검토도 가능합니다.”

태준은 도면을 바라봤다.

논 한가운데 빨간색으로 표시된 작은 구역.

병수의 땅.

팀장이 계속 말했다.

“사실 농지로 계속 유지할 이유도 없습니다. 생산성도 낮고요.”

태준은 말했다.

“그건 맞아.”

“자녀들도 농사 안 짓고.”

“알아.”

“주민들 다 찬성입니다.”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팀장이 물었다.

“대표님?”

태준은 도면을 접었다.

“조금 더 보자.”

며칠 뒤 병수의 아들 재현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병수는 마당에 앉아 있었다.

재현이 화를 냈다.

“아버지, 25억이에요.”

병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25억.”

“알아.”

“그 돈이면 아버지 편하게 살 수 있어요.”

“나 지금 불편하냐?”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럼 무슨 얘긴데.”

재현은 한숨을 쉬었다.

“제가 농사 이어받을 것도 아니고, 누나도 안 와요.”

병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현이 말했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누가 이 논 지어요?”

병수의 얼굴이 굳었다.

“말 조심해.”

“틀린 말 아니잖아요.”

“내 죽는 얘기 하지 마.”

“그럼 제가 거짓말해요?”

병수는 화를 내려다 멈췄다.

재현은 계속했다.

“아버지가 지키고 싶어 하는 거 알아요.”

“근데 지키기만 하면 뭐 해요?”

병수가 아들을 바라봤다.

“사람이 없는데.”

그 말은 오래 남았다.

그날 밤 병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논을 지키는 것이 자기 삶의 마지막 의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지켰고,

자기가 지켰고,

아내와 아이들의 시간이 들어 있었다.

팔아 버리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재현의 말이 맞기도 했다.

자기가 죽으면?

아들이 농사짓지 않는다.

손자도 농촌에 관심 없다.

논을 그대로 둔다고 기억이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사라진 뒤 잡초만 자랄 수도 있다.

병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지키는 것과 살게 하는 것은 같은가.

태준은 다시 마을을 찾았다.

이번에는 양복이 아니었다.

편한 바지.

운동화.

병수가 말했다.

“구두는 버렸소?”

태준이 웃었다.

“살렸습니다.”

둘은 마루에 앉았다.

태준이 먼저 말했다.

“어르신 말이 맞았습니다.”

병수는 그를 봤다.

“뭐가.”

“제가 값만 물었습니다.”

병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태준이 계속했다.

“근데 저도 하나 말하고 싶습니다.”

“말해 봐.”

“추억만으로 마을이 살아남지는 않습니다.”

병수의 얼굴이 굳었다.

태준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 병원 멀죠.”

“멀지.”

“젊은 사람 거의 없고.”

“없지.”

“빈집 늘고.”

병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농사만으로 먹고살기 어렵고.”

“그것도 알아.”

태준은 말했다.

“저는 이 마을을 다 부수러 온 게 아닙니다.”

병수가 비웃었다.

“개발업자가 하는 말이네.”

“알아요.”

태준도 웃었다.

“그래도 사실입니다.”

태준은 새로운 도면을 펼쳤다.

병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요?”

“계획 바꿔 봤습니다.”

기존 개발 면적 일부가 줄어 있었다.

병수의 논 전체를 없애는 대신, 한 구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기는 뭐요?”

“공동 농지.”

병수가 태준을 봤다.

“누가 농사짓는데.”

“마을하고 학교가 같이 운영하면 어떨까 합니다.”

“애들이 농사를 짓는다고?”

“농업 체험만 하자는 게 아닙니다.”

태준이 말했다.

“계절별로 실제 작물 키우고, 지역 어르신들이 알려주고.”

“병원하고 주거단지 들어오는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게 하고.”

“농산물은 지역 식당이나 복지시설에서 쓰고요.”

병수는 한동안 도면을 봤다.

“장난 같네.”

태준이 웃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돈이 되나?”

“큰돈은 안 됩니다.”

“개발업자가 돈 안 되는 걸 해?”

태준이 병수를 바라봤다.

“이 부분 때문에 전체 사업이 더 오래 갈 수도 있습니다.”

병수는 코웃음을 쳤다.

“말은 잘하네.”

태준은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뭔데.”

“어르신이 처음 몇 년은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병수가 태준을 봤다.

“나를 부려먹겠다고?”

“네.”

병수가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협상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병수는 면적을 더 남기라고 했다.

태준은 너무 많다고 했다.

병수는 오래된 물길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태준은 도로 때문에 어렵다고 했다.

둘은 몇 번이나 싸웠다.

병수는 태준을 “땅장사”라고 불렀다.

태준은 병수를 “고집쟁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어느 날 병수가 말했다.

“저 돌담은 남겨.”

“왜요?”

“우리 아버지가 쌓았어.”

태준은 도면에 표시했다.

또 어느 날 태준이 말했다.

“여기엔 작은 진료소가 꼭 들어가야 합니다.”

병수가 물었다.

“왜.”

태준이 말했다.

“어르신 둘째 같은 일이 다시는 없게.”

병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건 해.”

몇 달 뒤 개발 계획이 확정됐다.

마을 사람 모두가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더 개발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아예 개발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병수도 완전히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태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둘은 한 가지는 알았다.

누군가 전부 이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을은 과거 그대로 보존될 수도 없었다.

첫 공동 논의 모내기 날.

초등학생 스무 명이 장화를 신고 줄지어 서 있었다.

병수는 소리쳤다.

“그렇게 잡으면 다 죽어!”

아이 하나가 물었다.

“뭐가 죽어요?”

“벼가 죽지!”

“다시 심으면 되잖아요.”

병수는 입을 벌린 채 아이를 봤다.

“요즘 애들은…”

멀리서 태준이 웃었다.

병수가 소리쳤다.

“거기 웃는 사람!”

태준이 손을 들었다.

“저요?”

“당신도 들어와.”

“저는 오늘 행사만…”

“논 만들어 놨으면 들어와.”

사람들이 웃었다.

태준은 어쩔 수 없이 장화를 신었다.

처음 몇 걸음은 괜찮았다.

그러다 발이 진흙에 깊이 빠졌다.

태준이 중심을 잃었다.

한쪽 손을 땅에 짚었다.

아이들이 일제히 웃었다.

“아저씨 넘어졌다!”

태준이 민망한 얼굴로 일어났다.

옷에 진흙이 묻었다.

병수는 옆에서 웃고 있었다.

“서울 사람도 흙 묻네.”

태준이 말했다.

“오늘만입니다.”

병수가 작은 모를 한 줌 내밀었다.

“잡아.”

태준이 받았다.

병수가 말했다.

“너무 깊이 꽂지 마.”

“왜요?”

“숨 막혀.”

“벼도요?”

병수가 그를 봤다.

“살아 있는 건 다 그래.”

태준은 웃지 않았다.

그 말을 잠시 생각했다.

아이들이 모를 심기 시작했다.

줄은 삐뚤었다.

어떤 모는 넘어졌다.

병수는 처음에는 계속 잔소리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만두었다.

그냥 바라봤다.

자신이 수십 년 동안 걸어 온 논 위에 아이들이 있었다.

자기 손자도 아닌 아이들.

자기 가족도 아닌 사람들.

그런데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병수의 아들 재현도 멀리 서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논 안으로 들어왔다.

병수가 말했다.

“너는 왜 들어와.”

재현이 웃었다.

“누가 지을 거냐며.”

병수가 아들을 바라봤다.

재현이 말했다.

“평생은 못 해도 오늘은 할게요.”

병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모 한 줌을 건넸다.

태준은 잠시 논 가장자리로 나왔다.

운동화 대신 장화가 진흙투성이였다.

멀리 공사 현장이 보였다.

새로운 진료소의 골조가 올라가고 있었다.

반대편에는 오래된 돌담이 남아 있었다.

그 사이에 논이 있었다.

완전히 옛날도 아니었다.

완전히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태준은 갑자기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너는 흙 묻히고 살지 마라.”

아버지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제도 알았다.

가난했으니까.

힘들었으니까.

아들이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그 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태준은 성공하기 위해 흙에서 떠났다.

그것도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흙에서 떠났다고 해서,

자신의 과거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병수가 옆으로 왔다.

“뭐 봐?”

태준이 말했다.

“그냥요.”

병수가 공사 현장을 봤다.

“많이 변하겠네.”

“네.”

“싫다.”

태준이 웃었다.

“솔직하시네요.”

“근데…”

병수는 아이들이 모를 심는 모습을 봤다.

“저건 좀 괜찮네.”

태준이 말했다.

“그 정도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병수는 태준에게 물었다.

“땅이 누구 거라고 생각해?”

태준이 웃었다.

“그 질문 또 하시게요?”

“대답해 봐.”

태준은 잠시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등기부상 소유자라고 말했을 것이다.

법적으로는 그게 맞았다.

그런데 지금은 대답이 잘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병수가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태준이 그를 봤다.

“어르신도요?”

“응.”

병수는 논을 바라봤다.

“예전에는 내 땅인 줄 알았어.”

“그다음엔 아버지 땅이라고 생각했고.”

“또 어떤 날은 자식들한테 물려줄 땅이라고 생각했지.”

잠시 멈췄다.

“근데 다 지나가더라고.”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수가 말했다.

“사람이 땅을 갖는 게 아니라, 잠깐 맡고 있는 건지도 몰라.”

태준은 논을 바라봤다.

“그럼 누구한테 돌려줍니까?”

병수가 아이들을 가리켰다.

“저런 놈들한테.”

태준이 웃었다.

“저 애들 농사 안 지을 수도 있어요.”

“그럼 안 짓겠지.”

“그럼 이 논은요?”

병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고.”

해가 조금 기울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논 밖으로 나갔다.

장화에서 진흙이 떨어졌다.

누군가는 피곤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재미있다고 했다.

한 아이가 병수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이거 언제 쌀 돼요?”

병수가 말했다.

“가을.”

“그때 저희 또 와요?”

병수는 잠시 생각했다.

“와.”

“진짜요?”

“안 오면 내가 학교 찾아간다.”

아이들이 웃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떠난 뒤,

병수와 태준만 잠시 논가에 남았다.

병수는 작은 모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남은 것이었다.

그가 태준에게 건넸다.

“이거.”

“왜요?”

“남았잖아.”

태준이 받았다.

뿌리에 진흙이 묻어 있었다.

작고 약해 보였다.

태준이 물었다.

“어디 심습니까?”

병수가 논 한쪽을 가리켰다.

“빈 데 있잖아.”

태준은 다시 논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넘어지지 않았다.

진흙 속에 손을 넣었다.

모를 세웠다.

너무 깊지 않게.

손을 떼자 작은 모가 바람에 흔들렸다.

뒤에는 오래된 돌담이 있었다.

그 너머로 새 진료소 공사가 보였다.

병수의 오래된 논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새로운 마을이

한 시야 안에 함께 있었다.

태준은 그 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땅은 그대로 남지 않았다.

사람도 그대로 남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어떤 것은 바뀌었고,

어떤 것은 남았고,

어떤 것은 다음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병수가 뒤에서 소리쳤다.

“뭘 그렇게 봐!”

태준이 돌아봤다.

“다 했습니다.”

“그럼 나와.”

태준은 논 밖으로 걸어 나왔다.

마지막 모는 뒤에서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Story 5 그래도 아침은 왔다

park kyungni toji modern stories

새벽 3시 17분.

한미정은 발밑이 차가워서 잠에서 깼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발가락 사이로 차가운 것이 스며들었다.

눈을 뜨고 손을 뻗어 침대 옆 스탠드를 켰다.

바닥에 물이 있었다.

얕았다.

발목도 되지 않았다.

미정은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 부엌 쪽에서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쿵.

그리고 또 한 번.

쾅.

그제야 미정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뭐야…”

방문을 열었다.

복도 바닥을 따라 흙탕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미정은 바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재난문자가 여러 개 와 있었다.

하천 범람 위험. 저지대 주민 즉시 대피.

그녀는 창문으로 달려갔다.

비가 세상을 지워 버릴 것처럼 내리고 있었다.

집 앞 골목은 이미 강처럼 변해 있었다.

미정은 숨을 들이켰다.

“안 돼.”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녀는 거실로 뛰어갔다.

벽장 아래 서랍을 열었다.

서류.

통장.

현금 조금.

남편의 사진.

그 순간 냉장고가 기울었다.

미정은 놀라 뒤로 물러났다.

물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대피하세요!”

“지금 바로 나오세요!”

미정은 남편 사진첩을 들었다.

표지가 낡은 갈색 앨범이었다.

남편이 죽은 뒤 한 번도 버리지 못했던 것.

결혼식.

신혼여행.

아이 없이 둘이 살았던 첫 집.

식당을 열던 날.

남편이 앞치마를 두르고 우스운 표정을 짓던 사진.

그 사진첩을 가슴에 안았다.

현관문을 열려고 했는데 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물이 밀어붙이고 있었다.

밖에서 구조대원이 다시 소리쳤다.

“아주머니! 빨리 나오셔야 합니다!”

미정은 문을 힘껏 밀었다.

겨우 틈이 열렸다.

구조대원이 팔을 잡았다.

“손에 든 거 놓으세요!”

미정은 앨범을 더 세게 안았다.

“이건 안 돼요.”

“위험합니다!”

“이건…”

그 순간 물살이 문 안으로 세게 밀려왔다.

미정의 몸이 휘청했다.

구조대원이 그녀를 끌어냈다.

앨범이 손에서 빠졌다.

“안 돼!”

갈색 앨범이 물 위로 떠올랐다.

몇 장이 벌어졌다.

사진들이 물에 젖었다.

미정이 손을 뻗었다.

구조대원이 소리쳤다.

“안 됩니다!”

“저거…”

“사람이 먼저예요!”

미정은 물속을 끌려가면서 앨범을 바라봤다.

그것은 골목 아래로 떠내려갔다.

남편의 얼굴도 함께 사라졌다.

대피소는 초등학교 체육관이었다.

새벽 네 시가 넘었지만 불이 환했다.

젖은 사람들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울었다.

누군가는 전화만 계속 걸었다.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바닥을 바라봤다.

미정은 체육관 벽에 기대앉았다.

누가 담요를 줬다.

누가 따뜻한 물도 줬다.

“괜찮으세요?”

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설명하기도 싫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하나둘 피해 상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미정의 집은 1층이었다.

식당도 바로 옆 건물 1층이었다.

둘 다 물에 잠겼다.

냉장고.

식탁.

주방기구.

식재료.

가구.

장부.

통장 사본.

남편 물건.

사진.

모두.

누군가 미정에게 말했다.

“그래도 몸은 괜찮아서 다행이에요.”

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사람만 살아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죠.”

미정은 고개를 끄덕이는 척했다.

속으로는 한마디만 떠올랐다.

그래서 뭐.

살아 있다고 해서 집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살아 있다고 해서 남편 사진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살아 있다고 해서 18년 동안 운영한 식당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뭐.

미정의 남편은 6년 전에 죽었다.

암이었다.

마지막 8개월 동안 그는 식당에 거의 나오지 못했다.

그래도 상태가 좋은 날이면 오후 늦게 잠깐 들렀다.

“장사 잘돼?”

미정이 말했다.

“당신 없으니까 더 잘돼.”

남편은 웃었다.

“그럼 내가 진작 빠질걸.”

그가 죽은 뒤에도 미정은 식당을 계속했다.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했다.

“혼자서도 잘하시네요.”

미정은 그 말을 싫어했다.

잘한 적이 없었다.

그냥 아침에 문을 열었다.

쌀을 씻었다.

국을 끓였다.

손님이 오면 밥을 줬다.

저녁이 되면 문을 닫았다.

다음 날 또 했다.

그게 6년이었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식당은 남아 있었다.

집도 남아 있었다.

주방도 남아 있었다.

컵도 남아 있었다.

그래서 미정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둘째 날 아침.

대피소에서 한 노인이 계속 기침했다.

미정은 처음엔 신경 쓰지 않았다.

자기도 힘들었다.

모두 힘들었다.

그런데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노인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정은 물병을 하나 들었다.

“아버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물 좀 드세요.”

노인은 손을 내밀었다.

손이 떨렸다.

미정은 병뚜껑을 열어 줬다.

노인은 두 모금 마셨다.

“고마워요.”

“천천히 드세요.”

그게 끝이었다.

미정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몇 분 뒤 자원봉사자가 다가왔다.

“혹시 식당 하신다고 들었는데 맞으세요?”

미정은 고개를 들었다.

“했죠.”

“혹시 죽 끓이는 것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미정은 사람을 바라봤다.

“지금요?”

“아이들이 아침을 거의 못 먹어서요.”

미정은 어이가 없었다.

자기 집도 없어졌다.

식당도 없어졌다.

남편 사진도 없어졌다.

그런데 죽을 끓여 달라고 했다.

“다른 사람 없어요?”

“있긴 한데…”

자원봉사자가 난처하게 웃었다.

“큰 솥을 다뤄 본 분이 별로 없어서요.”

미정은 거절하려 했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체육관 한쪽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종이컵에 든 과자를 먹고 있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젖은 옷을 말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정은 한숨을 쉬었다.

“쌀 어디 있어요?”

처음에는 스무 명분이었다.

미정은 큰 솥을 보자마자 불부터 낮췄다.

“이렇게 세게 끓이면 바닥 눌어붙어요.”

젊은 자원봉사자가 물었다.

“물 더 넣을까요?”

“조금.”

“이 정도?”

“너무 많아.”

미정은 직접 국자를 잡았다.

쌀알이 퍼지는 것을 보았다.

소금 간을 했다.

참기름을 조금 넣었다.

“김 있으면 잘라요.”

첫 번째 죽이 나왔다.

아이들이 먹었다.

한 아이가 말했다.

“맛있다.”

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에는 쉰 명분이었다.

점심에는 백 명이 넘었다.

저녁에는 다른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들어왔다.

미정은 계속 솥 앞에 있었다.

누가 말했다.

“사장님, 좀 쉬세요.”

미정은 말했다.

“이거 끝나고.”

“아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럼 말을 듣지 마.”

셋째 날 오후,

트럭 한 대가 대피소 앞에 멈췄다.

문이 열리고 커다란 솥이 내려왔다.

그 뒤에서 60대 후반의 여자가 소리쳤다.

“그렇게 끓이면 백 명 못 먹여!”

미정이 돌아봤다.

“뭐라고요?”

여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솥 작은 걸 두 개 돌리면 불만 많이 먹어.”

“누구세요?”

“오명숙.”

미정은 모르는 이름이었다.

명숙이 앞치마를 묶었다.

“조선소 식당에서 37년 밥했어.”

미정이 국자를 놓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서요?”

명숙이 미정을 보더니 웃었다.

“성질 있네.”

“아주머니도 만만치 않네요.”

명숙이 큰 솥을 손으로 두드렸다.

“비켜 봐.”

미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요?”

“그렇게 끓이면 백 명 못 먹여. 비켜 봐.”

주변 자원봉사자들이 두 여자를 번갈아 봤다.

잠시 뒤 미정이 국자를 내밀었다.

“그럼 해 보세요.”

명숙은 받았다.

“쌀 더 불려 놨어?”

“저쪽에.”

“몇 포대?”

“세 포대.”

명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됐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170명분을 만들었다.

서로 계속 싸우면서.

“간 세요.”

“안 세.”

“짜요.”

“당신 집이 싱겁게 먹는 거야.”

“당근 그렇게 크게 썰면 애들이 안 먹어요.”

“먹어.”

“안 먹는다니까.”

결국 아이들은 먹었다.

며칠이 지나자 대피소에 낯익지 않은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

중학교 역사 교사 박준호는 아이들을 모아 임시 수업을 시작했다.

“학교는 며칠 못 갈 수도 있으니까 여기서 조금씩 하자.”

아이들이 불평했다.

“재난 났는데 공부도 해요?”

준호가 웃었다.

“그러게.”

그래도 칠판을 세웠다.

서울에서 온 남매가 그릇과 컵을 한가득 가져왔다.

오빠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그가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버지 고향이 여기 근처라서요.”

미정은 그를 잘 몰랐다.

“거기 두세요.”

그 남자가 상자 속 그릇을 보다가 웃었다.

“이번엔 깨져도 괜찮은 것들입니다.”

미정은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에는 건설회사 차량들이 들어왔다.

접이식 테이블.

합판.

작업등.

장갑.

정리용 컨테이너.

차에서 내린 남자가 직원들에게 말했다.

“진료소 쪽 길 먼저 열어 주세요.”

누군가 그를 강태준 대표라고 불렀다.

미정에게는 이름이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왔다.

사람들이 뭔가를 했다.

그리고 또 갔다.

그것뿐이었다.

일주일째 되던 날,

물이 조금 빠졌다.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가 물건을 정리해도 된다는 안내가 나왔다.

미정은 처음에 가지 않으려 했다.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장화를 신고 골목으로 갔다.

자기 집 앞에서 멈췄다.

문짝 한쪽이 떨어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냄새부터 달랐다.

흙.

썩은 나무.

하수 냄새.

젖은 벽지.

냉장고는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서랍은 모두 열려 있었다.

그릇은 깨졌다.

장롱 안 옷들은 진흙에 젖어 있었다.

미정은 한 걸음씩 안으로 들어갔다.

사진첩을 찾았다.

없었다.

남편의 셔츠가 한 장 나왔다.

진흙으로 갈색이 되어 있었다.

미정은 들어 올렸다.

천이 무거웠다.

다시 내려놓았다.

식당으로 갔다.

간판 일부가 떨어져 있었다.

미정네 백반

‘미정네’의 ‘정’ 글자가 사라졌다.

미정은 한동안 그것을 봤다.

식당 안은 더 심했다.

의자가 뒤집혀 있었다.

밥솥은 망가졌다.

냉동고는 열려 있었다.

반찬통이 바닥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미정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생전에 늘 쓰던 작은 선반이 무너져 있었다.

거기에는 그의 컵이 있었다.

흰색 찻잔.

파란 꽃이 하나 그려진 싸구려 컵.

남편은 이상하게 그 컵만 썼다.

미정이 여러 번 새 컵을 사 줬다.

“이거 버려.”

남편은 늘 말했다.

“아직 멀쩡한데 왜 버려.”

미정은 진흙 속을 손으로 뒤졌다.

손끝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컵 손잡이였다.

그녀는 꺼냈다.

컵은 두 조각으로 깨져 있었다.

한쪽에는 파란 꽃의 반쪽이 남아 있었다.

미정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처음에는 울지 않았다.

두 조각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주방 밖에서 사람들이 무언가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망치 소리.

삽 소리.

누군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

미정은 컵을 바라봤다.

남편이 아침마다 그 컵에 보리차를 마셨다.

손님이 없으면 계산대에 앉아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암 진단을 받은 날도 그 컵을 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식당에 나온 날에도.

그런데 이제 두 조각이었다.

미정이 손가락으로 파란 꽃을 만졌다.

그리고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리가 없었다.

어깨만 떨렸다.

그러다 숨이 막히듯 울었다.

“왜…”

누구에게 묻는 말인지도 몰랐다.

“왜 이것까지…”

남편은 이미 죽었다.

그건 알고 있었다.

사진도 사람은 아니다.

컵도 사람은 아니다.

식당도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이 떠난 뒤에는

그 사람이 만졌던 것들이

사람의 자리를 조금씩 대신한다.

컵 하나.

셔츠 하나.

의자 하나.

사진 한 장.

그것들이 사라지면

사람을 또 한 번 잃는 것 같았다.

미정은 바닥에 앉아 오래 울었다.

그날 저녁 대피소로 돌아왔을 때 명숙이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숙이 그녀 손에 든 비닐봉지를 봤다.

“뭐야?”

“컵.”

“컵?”

미정은 봉지를 열지 않았다.

명숙은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말했다.

“죽 좀 봐.”

미정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못 해요.”

“그래.”

명숙은 바로 돌아섰다.

미정은 조금 놀랐다.

“왜 안 잡아요?”

명숙이 말했다.

“싫다는데 왜 잡아.”

그리고 몇 걸음 가다가 덧붙였다.

“내일 하면 되지.”

미정은 그 말을 듣고 한참 서 있었다.

내일.

그 말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다음 날 아침,

미정은 다시 주방 텐트로 갔다.

명숙이 말했다.

“왔네.”

“네.”

그게 전부였다.

아무도 어제 왜 안 왔는지 묻지 않았다.

미정은 쌀을 씻었다.

물을 맞췄다.

파를 썰었다.

죽을 끓였다.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가 아니었다.

상처가 나아서도 아니었다.

그냥 죽을 끓일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피해 복구가 시작되면서 대피소 사람들은 조금씩 줄었다.

일부는 친척 집으로 갔다.

일부는 임시주택으로 옮겼다.

미정은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체육관에 남았다.

어느 날 군청 직원이 말했다.

“식당 건물은 철거해야 할 가능성이 큽니다.”

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난지원금하고 소상공인 지원 신청 도와드릴게요.”

“네.”

“다시 장사하실 계획 있으세요?”

미정은 대답하지 못했다.

직원이 다시 물었다.

“사장님?”

“모르겠어요.”

정말 몰랐다.

누군가 같으면 말했다.

다시 시작해야지.

남편도 그걸 원할 거야.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하지만 미정은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뭘 원했을지는 이제 알 수 없었다.

자기도 뭘 원하는지 몰랐다.

그저 모르겠다고 했다.

며칠 뒤,

건설회사에서 임시 조립식 건물을 하나 지원했다.

원래는 복구 작업자들이 쉴 공간으로 쓰려던 것이었다.

주민들은 그중 한 칸을 공동 식당으로 쓰기로 했다.

명숙이 미정을 쳐다봤다.

“할 거지?”

미정이 물었다.

“뭘요?”

“밥.”

“왜 제가 해요?”

“잘하니까.”

“아주머니가 더 잘하잖아요.”

“난 집에 갈 거야.”

“언제요?”

“내일.”

미정이 놀랐다.

“벌써요?”

“조선소도 사람이 밥 먹어야 돼.”

미정은 피식 웃었다.

명숙이 말했다.

“여기 계속 있을 사람은 당신이잖아.”

미정은 조립식 건물을 바라봤다.

작았다.

예전 식당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간판도 없었다.

냉장고 하나.

가스레인지 두 개.

중고 식탁 네 개.

“이걸 식당이라고 해요?”

명숙이 말했다.

“밥 나오면 식당이지.”

명숙이 떠나는 날,

두 사람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미정이 봉투 하나를 건넸다.

“뭐야?”

“김치.”

“내가 김치가 없겠어?”

“그럼 놓고 가요.”

명숙이 받았다.

“짜게 했지?”

“아주머니 입에는 딱 맞을 거예요.”

명숙이 웃었다.

차에 타기 전 미정에게 말했다.

“죽 끓일 때 불 너무 세게 하지 마.”

미정이 대꾸했다.

“누가 누구한테.”

명숙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떠났다.

임시 식당은 며칠 뒤 문을 열었다.

정식 영업은 아니었다.

복구 작업자와 마을 사람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첫날 23명이 왔다.

둘째 날 31명.

일주일 뒤에는 50명이 넘었다.

사람들은 돈을 조금씩 놓고 갔다.

누군가는 채소를 가져왔다.

누군가는 쌀을 줬다.

누군가는 생선을 들고 왔다.

미정은 장부를 새로 만들었다.

첫 페이지를 오래 바라봤다.

예전 장부가 떠올랐다.

18년 동안 숫자가 쌓여 있었다.

외상값.

식재료비.

매출.

남편이 잘못 적어 놓은 숫자.

그 모든 것이 없어졌다.

미정은 새 장부 첫 줄에 날짜를 적었다.

그리고 메뉴를 적었다.

된장찌개. 고등어구이. 계란말이.

그게 시작이었다.

어느 오후,

박준호가 아이들과 식당으로 왔다.

“오늘 수업 끝났습니다.”

미정이 말했다.

“수업하면 밥 더 먹어요?”

준호가 웃었다.

“아마도요.”

민재와 유토도 함께 있었다.

두 아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반찬을 놓고 싸웠다.

“그거 내 거야.”

“같이 먹는 거야.”

미정이 말했다.

“싸우면 둘 다 안 줘.”

아이들은 조용해졌다.

잠시 뒤 다시 웃었다.

미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아주 조금이었다.

서울에서 그릇을 가져왔던 김도현도 다시 왔다.

이번에는 여동생 가족과 함께였다.

조카가 그릇을 들다가 떨어뜨렸다.

쨍.

모두가 멈췄다.

도현이 아이를 바라봤다.

미정도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가 얼굴이 하얘졌다.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아.”

미정이 빗자루를 가져왔다.

“안 다쳤으면 됐어요.”

도현은 미정을 바라봤다.

“그렇죠.”

둘은 깨진 그릇을 함께 치웠다.

미정은 잠시 자기 비닐봉지 안의 깨진 컵을 생각했다.

모든 깨진 것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것은 버려도 된다.

어떤 것은 버릴 수 없다.

그리고 어떤 것은 고치지 않아도 곁에 둘 수 있다.

미정은 남편의 컵을 붙이지 않았다.

접착제를 사려다가 그만뒀다.

두 조각을 작은 선반 위에 나란히 놓았다.

누군가 물었다.

“깨진 컵을 왜 두세요?”

미정은 말했다.

“그냥.”

“붙이면 되잖아요.”

“안 붙일 거예요.”

“왜요?”

미정은 잠시 생각했다.

“깨졌으니까.”

상대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미정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깨진 것을 깨지지 않은 것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컵은 깨졌다.

남편은 죽었다.

집은 떠내려갔다.

식당은 무너졌다.

그 사실들은 그대로 있었다.

그렇다고 두 조각을 버릴 필요도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미정은 임시 식당 뒤편 흙바닥에 작은 모종 몇 개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고추 모종이었다.

누가 가져다 놓은지 몰랐다.

종이컵에 흙을 담아 키운 어린 모종.

줄기가 가늘었다.

잎이 네다섯 장.

미정은 하나를 들어 올렸다.

강태준이 지나가다 물었다.

“그거 심으시게요?”

미정이 말했다.

“그럴까 봐요.”

태준은 주변을 봤다.

“근데 여기 임시 부지라 언제 정리할지 아직 모릅니다.”

“알아요.”

“몇 달 뒤 옮길 수도 있어요.”

미정은 고추 모종을 바라봤다.

“그렇겠죠.”

태준이 물었다.

“그럼 왜 심으세요?”

미정은 잠시 생각했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냥 고추를 왜 심느냐고 묻는 말이었다.

그래서 미정도 그냥 대답했다.

“몰라요.”

그녀는 무릎을 굽혔다.

손으로 작은 구멍을 팠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도 오늘은 심어야 하니까.”

태준은 더 묻지 않았다.

미정은 모종을 흙 속에 세웠다.

손으로 흙을 모아 뿌리 주변을 눌렀다.

물을 조금 부었다.

잎이 흔들렸다.

그 옆에 두 번째 모종을 심었다.

그리고 세 번째.

식당 안에서는 사람들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

아이 웃음소리.

누군가 커피를 찾는 소리.

준호가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

공사 차량이 움직이는 소리.

멀리서는 아직 무너진 집을 철거하는 소리도 들렸다.

모든 것이 끝난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둘 다 동시에 있었다.

미정은 고개를 들어 마을을 바라봤다.

아직 진흙이 남아 있었다.

벽에는 물이 올라왔던 자국이 선명했다.

어떤 집은 비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진은 사라졌다.

남편의 앨범도 찾지 못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가운데가 아팠다.

그녀는 남편을 잊지 않았다.

잊고 싶지도 않았다.

홍수를 감사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 일이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이다.

그게 진실이었다.

하지만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녀는 여기 있었다.

미정은 손에 묻은 흙을 털었다.

임시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 아이가 말했다.

“아줌마, 계란 더 주세요.”

미정이 말했다.

“하나 먹었잖아.”

“배고파요.”

“두 개 먹으면 점심 못 먹어.”

“먹을 수 있어요.”

미정이 계란말이 한 조각을 더 줬다.

“이게 마지막.”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사장님, 국 좀 더요.”

미정이 국자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 멈췄다.

사장님.

오랜만에 들은 말 같았다.

미정은 아무 말 없이 국을 퍼 줬다.

그날 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

미정은 식당 불을 끄기 전에 선반을 바라봤다.

깨진 컵 두 조각이 나란히 있었다.

그 옆에는 남편의 사진이 없었다.

사진은 없었다.

그녀는 잠시 서 있었다.

“당신.”

말이 저절로 나왔다.

대답은 없었다.

“오늘 고추 심었어.”

미정은 조금 웃었다.

“당신 있었으면 또 뭐라 했겠지.”

남편이 뭐라고 했을지 떠올랐다.

거기다 심으면 햇빛이 부족해.

아니면,

고추는 간격 더 띄워야지.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미정이 혼잣말을 했다.

“알았어. 내일 옮길게.”

그리고 잠시 침묵했다.

“아니.”

“그냥 둘래.”

그녀는 컵 조각 하나를 손끝으로 살짝 만졌다.

불을 껐다.

새벽 5시 40분.

미정은 다음 날에도 일어났다.

누가 깨운 것은 아니었다.

알람이 울렸다.

잠시 천장을 봤다.

몸이 무거웠다.

일어나기 싫었다.

그냥 계속 누워 있고 싶었다.

그런데 6시 반이면 복구 작업자 몇 명이 온다고 했다.

미정은 천천히 일어났다.

세수했다.

머리를 묶었다.

앞치마를 입었다.

식당 문을 열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들어왔다.

밖에는 어제 심은 고추 모종이 있었다.

밤사이 쓰러지지 않았다.

잎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미정은 한참 바라봤다.

기적은 아니었다.

답도 아니었다.

희망이라고 부르기에도 아직 너무 작았다.

그저 고추 한 포기였다.

살아 있었다.

미정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쌀을 씻었다.

솥에 물을 넣었다.

가스 불을 켰다.

불이 붙었다.

파란 불꽃이 올라왔다.

그 순간 동쪽 산 너머에서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조금.

그러다 천천히 마을 전체를 비췄다.

무너진 집도.

진흙 자국도.

임시 식당도.

고추 모종도.

그리고 미정도.

그녀는 창문을 열었다.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첫 손님이었다.

미정은 밥솥 뚜껑을 열었다.

따뜻한 김이 얼굴로 올라왔다.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집도 돌아오지 않았다.

예전 식당도 돌아오지 않았다.

미정은 왜 살아야 하는지 아직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면 설명하지 못한 채 오래 살아갈지도 몰랐다.

그런데 아침은 이미 와 있었다.

누군가는 곧 배가 고플 것이다.

누군가는 밥을 먹어야 했다.

미정은 국자를 들었다.

그리고 첫 그릇에 국을 담았다.

밖에서는 작은 고추 모종이 아침 햇빛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아침은 왔다.

마지막 글

park kyungni toji modern stories

『토지』에서 시작된 질문은 결국 아주 가까운 곳으로 돌아옵니다.

사람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은 뒤에야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끝내 돌아오지 않습니다. 사람도, 집도, 지나간 시간도, 한때 우리가 알고 있던 가족의 모습도 그대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아프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삶은 다른 방식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누군가는 오래 잃어버렸던 집을 되찾지만, 그 집 안에 예전의 가족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누군가는 할머니의 아픈 기억을 물려받지만, 그 기억과 함께 미움까지 다음 세대에 넘길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누군가는 수십 년 동안 사람들에게 밥을 했지만 역사책에는 이름이 없었고, 또 누군가는 평생 지켜 온 논이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가족과 마을의 시간이 쌓인 자리였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잃은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희망이 갑자기 생기지도 않습니다. 슬픔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다만 누군가에게 물을 건네고, 죽을 끓이고, 밥을 퍼 주고, 작은 고추 모종 하나를 흙에 심습니다.

그 작은 행동은 거대한 해답이 아닙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거대한 해답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 밥을 짓는 것,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아이에게 한 조각 더 내어 주는 것, 오래된 기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다음 세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것, 그런 아주 작은 행동들이 사람을 다음 날까지 데려갑니다.

상처가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고통은 없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빼앗기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고, 죽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고, 헤어지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없앨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조금 달라집니다.

그 상처를 안고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기억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

내가 받은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건넬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멈출 것인가.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다음 사람에게 넘길 것인가.

그리고 오늘,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조금 더 살아 있게 할 것인가.

어쩌면 『토지』가 끝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왜 살아야 하는가”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보다 더 작고, 더 일상적이고, 더 어려운 질문일 수 있습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오늘 나는 누구를 조금 더 살아 있게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말보다 먼저 행동으로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밥 한 그릇.

따뜻한 물 한 병.

기억해야 할 이름 하나.

다시 심은 모 한 포기.

작은 고추 모종 하나.

그렇게 사람은 모든 것을 이해한 뒤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서로를 붙잡으며 다음 날을 만들어 갑니다.

김도현

「아버지의 집을 되찾은 날」

46세의 서울 IT 기업 임원.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잃은 집을 되찾는 일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집을 다시 산 뒤 자신이 진짜 찾고 있던 것은 건물이 아니라 잃어버리기 전의 가족과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박준호

「할머니가 미워하던 나라」

39세의 중학교 역사 교사. 식민지 시대의 상처를 겪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역사적 진실을 지키려는 마음과 다음 세대에게 미움을 물려주지 않는 일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시 생각한다.

오명숙

「역사책에 없던 여자」

67세. 조선소 식당에서 37년 동안 일한 조리원. 강하고 직설적이며 사람들의 식습관과 사정을 놀라울 만큼 잘 기억한다. 자신이 영웅으로 기록되는 것보다 함께 사람들을 살렸던 이름 없는 사람들의 존재가 기록되기를 원한다.

강태준

「마지막 논」

51세의 부동산 개발회사 대표. 농촌 빈곤에서 벗어난 가족의 후손으로, 흙에서 멀어지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마지막 논을 둘러싼 협상 속에서 땅을 가격이 아니라 시간과 관계로 보기 시작한다.

최병수

「마지막 논」

82세 농부. 평생 한 논을 지켜 왔다. 그곳에는 가족의 삶과 죽음, 사랑, 갈등, 마을의 기억이 겹쳐 있다. 하지만 땅을 그대로 남기는 것만이 진정한 보존인지 스스로 묻게 된다.

한미정

「그래도 아침은 왔다」

54세의 작은 식당 주인.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남편의 흔적과 집, 식당, 생활의 기반을 잃는다. 삶의 의미를 곧바로 찾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물을 건네고 죽을 끓이고 작은 것을 심는 행동 속에서 다음 날을 시작한다.

]]>
https://tabletalk.kr/park-kyungni-toji-modern-short-stories/feed/ 0
박경리 토지 전문가 대화 | 펄 벅, 한, 기억, 생명 https://tabletalk.kr/park-kyungni-toji-expert-dialogue/ https://tabletalk.kr/park-kyungni-toji-expert-dialogue/#respond Fri, 11 Sep 2026 15:36:33 +0000 https://tabletalk.kr/?p=1452

들어가는 글

박경리의 『토지』는 처음에는 땅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질문은 달라집니다.

왜 인간은 땅을 잃었을 때 재산만 잃었다고 느끼지 않는가.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상처도 함께 치유되는가.

한은 기억인가, 상처인가, 정체성인가.

역사를 실제로 이어 온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땅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잃을 수 있는 인간은 왜 다시 다음 날을 살아가는가.

Part 1에서는 최서희, 김길상, 이용, 공월선, 조준구, 김환이 자신의 삶 안에서 이 질문들을 마주했습니다.

Part 2에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납니다.

『대지』의 작가 펄 S. 벅, 『토지』 연구자 이승윤, 트라우마와 회복을 연구한 주디스 허먼, 기억과 포스트메모리를 연구한 마리안느 허시, 여성사 연구자 정현백, 기억과 서사적 정체성을 깊이 탐구한 철학자 폴 리쾨르가 평사리에 모입니다.

이들은 『토지』에 하나의 정답을 붙이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서로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펄 벅은 왕룽과 최서희를 바라보며 묻습니다.

인간이 땅을 소유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삶이 땅에 잠시 머무는 것일까.

주디스 허먼은 묻습니다.

빼앗긴 것을 되찾는 것과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는 것은 같은가.

마리안느 허시는 묻습니다.

한 세대의 상처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으로 남는가. 기억인가, 침묵인가, 아니면 감정인가.

정현백은 역사의 시선을 바꿉니다.

왜 전쟁과 정치에는 이름이 남는데, 사람을 먹이고 키우고 돌본 이들은 생활이라는 말 속에 사라졌는가.

폴 리쾨르는 묻습니다.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과거에게 미래 전체를 맡기지 않을 수 있는가.

그리고 이승윤은 마지막으로 『토지』 전체를 향해 묻습니다.

이 수많은 인물들이 지나간 뒤에도 남는 진짜 중심은 생명 자체가 아닐까.

이 대화는 땅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이 어떻게 상처를 기억하고, 서로를 살게 하며, 계속 살아가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향합니다.

※ 본 글은 실제 인터뷰나 실제 대화가 아니라, 주제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가기 위해 구성한 가상의 상상 대화입니다. 등장인물의 발언은 실제 발언이 아니며, 특정 인물의 공식 견해를 대변하지 않습니다.

Topic 1: 땅은 인간의 것인가, 인간이 땅의 것인가

park kyungni toji

평사리의 아침은 조용했다.

섬진강 위로 엷은 안개가 떠 있었고, 멀리 들판에는 아직 햇빛이 완전히 내려앉지 않았다.

낡은 나무 탁자 위에는 두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박경리의 『토지』.

그리고 펄 S. 벅의 『대지』.

펄 벅이 두 책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펄 S. 벅:
“나도 땅에 관한 소설을 썼습니다. 박경리도 땅에 관한 소설을 썼고요. 그런데 정말 우리가 땅에 관해 쓴 것일까요?”

이승윤이 미소를 지었다.

이승윤:
“아마 그래서 두 작품의 제목이 그렇게 단순하면서도 무거운 것 같습니다. 『대지』와 『토지』. 제목만 보면 땅 이야기 같지만, 책을 읽고 나면 결국 인간 이야기였다는 걸 알게 되니까요.”

펄 S. 벅:
“내 소설에서 왕룽은 땅을 떠나면 불안해집니다. 돈을 벌어도, 도시로 가도, 결국 다시 땅으로 돌아가죠. 처음에는 그걸 아주 현실적인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땅이 있어야 먹고살 수 있으니까요.”

주디스 허먼:
“생존의 기반이라는 뜻이군요.”

펄 S. 벅:
“그렇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땅은 먹고사는 수단 이상이 됩니다. 왕룽에게 땅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장소가 됩니다.”

폴 리쾨르가 『토지』의 표지를 손끝으로 가볍게 만졌다.

폴 리쾨르: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바꿀 수 있겠군요. 인간이 땅을 소유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자기 이야기를 땅에 묶어 두는 것인지.”

이승윤:
“최서희에게는 그 문제가 더 복잡합니다. 왕룽에게 땅은 삶을 일으키는 기반에 가깝지만, 서희에게 땅은 이미 잃어버린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가족의 기억까지 포함해서요?”

이승윤:
“그렇죠. 집안, 조상, 어린 시절, 죽은 사람들, 빼앗긴 것들. 서희가 되찾으려는 것은 토지 문서에 적힌 면적만이 아닙니다.”

펄 벅이 고개를 끄덕였다.

펄 S. 벅:
“그 점에서 왕룽과 서희는 비슷하면서도 다르군요. 왕룽은 땅을 얻으며 자기 삶을 세우고, 서희는 땅을 되찾으며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려 합니다.”

주디스 허먼:
“그 차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디스 허먼:
“처음 얻는 것과 빼앗겼다가 되찾는 것은 심리적으로 같은 경험이 아닙니다. 서희에게 땅에는 상실 이전의 삶이 붙어 있습니다.”

정현백:
“그리고 그 상실은 개인적인 사건만도 아니죠. 그 시대에 땅을 잃는다는 것은 가족의 몰락뿐 아니라 사회 변화, 계급 관계, 식민지화 과정과도 연결됩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러니까 한 사람의 기억과 한 시대의 기억이 같은 땅 안에서 겹치는군요.”

이승윤:
“그렇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창밖에서 바람이 논 위를 지나갔다.

펄 벅이 다시 물었다.

펄 S. 벅:
“그렇다면 첫 번째 질문을 해 봅시다. 사람은 왜 땅을 잃었을 때 단순히 재산을 잃었다고 느끼지 않을까요?”

정현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현백:
“전근대와 근대를 거치는 한국 사회에서 땅은 경제적 자원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족의 위치, 혈연,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 조상과 후손의 연결이 모두 걸려 있었죠.”

폴 리쾨르:
“그렇다면 장소가 정체성의 일부가 됩니다.”

마리안느 허시:
“저는 거기에 기억을 더하고 싶습니다. 어떤 집이나 땅은 그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훨씬 많은 것을 품게 됩니다. 가족이 반복해서 이야기하면서 장소가 기억의 저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디스 허먼:
“상실이 큰 이유도 거기에 있겠죠. 집을 잃는 순간 벽과 지붕만 잃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내가 누구였는가’라는 감각까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펄 벅이 천천히 말했다.

펄 S. 벅:
“왕룽도 그랬습니다. 도시에서 굶주리며 살아갈 때도 그에게는 돌아갈 땅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사라져도 땅은 자기 삶이 다시 시작될 수 있는 곳이었어요.”

이승윤:
“서희에게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버티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곳을 빼앗겼기 때문에 반드시 되찾으려는 힘이 생깁니다.”

폴 리쾨르:
“흥미롭군요. 한 사람에게 땅은 미래를 가능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과거를 되찾게 하는 약속이 되는군요.”

주디스 허먼:
“하지만 바로 거기서 위험한 기대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펄 S. 벅:
“어떤 기대입니까?”

주디스 허먼:
“잃어버린 장소를 되찾으면, 잃어버리기 전의 자신도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마리안느 허시가 『토지』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마리안느 허시:
“서희가 되찾고 싶었던 것이 정말 땅이었을까요?”

이승윤:
“물론 땅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걸 상징으로만 만들어 버리면 작품을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읽게 됩니다. 재산도 실제였고, 빼앗긴 것도 실제였습니다.”

정현백:
“맞습니다. 물질적인 박탈을 심리적 상징으로만 바꾸면 안 됩니다.”

이승윤:
“그런데 동시에 서희의 집착이 재산 가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도 분명합니다.”

펄 S. 벅:
“그러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겠군요.”

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

펄 S. 벅:
“서희가 되찾으려 한 것은 땅이었을까요, 아니면 땅을 빼앗기기 전의 자기 자신이었을까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폴 리쾨르가 조용히 말했다.

폴 리쾨르:
“사람은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하지만 돌아가고 싶어 할 수는 있죠.”

주디스 허먼: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 목표를 향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정현백:
“특히 상실이 폭력적으로 일어났다면 더 그렇습니다. 내가 선택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빼앗겼다면, 되찾는 행위는 정의의 문제까지 됩니다.”

이승윤:
“서희에게 조준구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는 일은 단순한 재산 회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족의 명예와 자신의 의지, 과거의 부정의를 바로잡는 일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펄 S. 벅:
“그렇다면 땅은 기억이고, 정의이고, 자기 자신이군요.”

이승윤:
“어느 하나만은 아닐 겁니다.”

펄 벅이 창밖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펄 S. 벅: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폴 리쾨르:
“무엇입니까?”

펄 S. 벅:
“왕룽은 땅을 얻을수록 더 많은 땅을 원합니다.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 나중에는 소유의 욕망으로 변합니다.”

정현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현백:
“땅이 인간에게 뿌리를 주기도 하지만, 땅을 소유한다는 사실이 사람을 다른 사람 위에 서게 만들기도 합니다.”

펄 S. 벅:
“그렇습니다. 왕룽은 자신이 땅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공한 뒤에는 땅을 통해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폴 리쾨르:
“그러면 ‘땅이 인간을 살린다’는 말도 아름답게만 들을 수는 없겠군요.”

이승윤:
“『토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은 생명의 터전이지만 동시에 권력과 욕망과 계급 갈등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정현백:
“누가 땅을 가질 수 있었는가, 누가 남의 땅을 경작했는가, 누가 떠나야 했는가. 그런 질문을 빼고 토지를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렇다면 장소를 사랑하는 것과 장소를 소유하려는 것은 서로 다른 감정일 수도 있겠네요.”

펄 S. 벅:
“아주 다른 감정일지도 모릅니다.”

폴 리쾨르가 두 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폴 리쾨르:
“두 번째 질문을 해 보죠. 우리가 ‘내 땅’이라고 말할 때, 그 ‘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정현백:
“법적으로는 소유권이겠죠.”

폴 리쾨르: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는?”

마리안느 허시:
“‘내가 기억하는 곳.’”

주디스 허먼:
“‘내가 안전했다고 느꼈던 곳.’ 또는 반대로, 안전을 빼앗긴 곳.”

펄 S. 벅:
“‘내 가족이 먹고살았던 곳.’”

이승윤:
“‘내가 누구인지를 형성한 곳.’”

리쾨르가 말했다.

폴 리쾨르:
“그렇다면 소유권 문서는 땅의 모든 의미를 기록하지 못합니다.”

정현백:
“그렇죠. 하지만 소유권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디스 허먼:
“두 가지를 함께 봐야 합니다. 실제로 빼앗긴 물질적 권리를 인정하면서, 그 손실이 인간 내부에 남긴 흔적도 보는 것.”

펄 벅이 웃었다.

펄 S. 벅:
“왕룽이라면 아주 간단하게 말할지도 모르겠군요. ‘땅이 있어야 먹고산다.’”

이승윤:
“서희라면 조금 다르게 말할 것 같습니다.”

펄 S. 벅:
“뭐라고 할까요?”

이승윤이 잠시 생각했다.

이승윤:
“‘이 땅이 없으면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다.’”

펄 벅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잠시 뒤 그녀가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펄 S. 벅:
“그러면 인간이 땅을 소유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폴 리쾨르가 웃었다.

폴 리쾨르:
“사람은 몇십 년을 삽니다. 땅은 그보다 오래 남아 있죠.”

정현백:
“하지만 땅도 변합니다. 전쟁으로 경계가 바뀌고, 개발로 사라지고, 강의 흐름이 달라지고, 사람이 떠나면 황폐해집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리고 한 세대가 ‘우리 집’이라고 부른 곳을 다음 세대는 전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디스 허먼:
“그렇다면 인간과 땅의 관계는 영구적 소유보다는 일시적인 관계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펄 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펄 S. 벅:
“내가 『대지』를 쓰던 때에는 인간이 땅에서 태어나고, 땅에서 먹고, 결국 땅으로 돌아간다는 감각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인간이 땅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보다, 잠시 그 위에서 살아갈 기회를 받은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승윤이 말했다.

이승윤:
“『토지』가 마지막까지 보여 주는 것도 비슷합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바뀝니다. 죽고, 태어나고, 떠나고, 돌아옵니다. 집안도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납니다. 나라까지 사라졌다가 다시 생깁니다.”

폴 리쾨르:
“그런데 땅 위의 이야기는 계속되는군요.”

이승윤:
“예.”

펄 벅은 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한쪽에는 『대지』가 있었다.

다른 쪽에는 『토지』가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펄 S. 벅:
“어쩌면 두 작품 모두 땅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땅을 지나가는 인간을 이야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리안느 허시가 물었다.

마리안느 허시:
“지나간다는 표현이 중요하군요.”

펄 S. 벅:
“네. 왕룽도 지나갑니다. 서희도 지나갑니다. 우리도 지나갑니다.”

정현백이 창밖을 보았다.

멀리 한 사람이 논둑을 따라 걷고 있었다.

정현백:
“그리고 이름이 남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도요.”

잠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때 주디스 허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주디스 허먼:
“그런데 아직 하나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펄 S. 벅:
“무엇입니까?”

허먼은 『토지』를 바라보았다.

주디스 허먼:
“만약 서희가 빼앗긴 땅을 되찾았다면, 왜 마음까지 되돌아오지는 않았을까요?”

침묵이 내려앉았다.

펄 벅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펄 S. 벅:
“그렇군요.”

그녀는 손끝으로 책 표지를 가볍게 눌렀다.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상처도 치유되는가.”

그 질문은 다음 대화가 시작될 자리처럼 그들 사이에 남았다.

Topic 2: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인간은 치유되는가

park kyungni toji

평사리의 햇빛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아까까지 들판 위에 남아 있던 안개는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탁자 주위에는 첫 번째 대화가 남긴 질문이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상처도 치유되는가.

펄 벅이 먼저 입을 열었다.

펄 S. 벅:
“서희는 결국 빼앗긴 땅을 되찾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순간을 승리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요?”

이승윤이 잠시 생각했다.

이승윤:
“승리라고 부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회복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죠.”

주디스 허먼:
“그 두 단어를 분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현백:
“승리와 회복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주디스 허먼:
“네.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과 마음이 치유되는 것은 같은 사건이 아닙니다.”

펄 벅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펄 S. 벅:
“하지만 정의가 없으면 치유도 어렵지 않습니까?”

주디스 허먼:
“그럴 수 있습니다. 빼앗긴 것을 돌려받는 일, 잘못을 인정받는 일, 책임을 묻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그것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지는 못합니다.”

마리안느 허시:
“특히 죽은 사람이 있다면요.”

허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 허먼:
“그렇죠.”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이승윤이 『토지』를 펼쳤다.

이승윤:
“서희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그녀는 조준구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오랫동안 살아갑니다. 그 목표가 그녀를 버티게 한 것도 사실입니다.”

폴 리쾨르:
“목표가 삶의 방향을 제공한 셈이군요.”

이승윤: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질문이 생깁니다.”

그가 책을 덮었다.

“목표를 이루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펄 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펄 S. 벅:
“복수를 위해 살아온 사람이 복수를 끝낸 뒤에 마주하는 공허함.”

주디스 허먼:
“혹은 회복을 복수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 온 사람이, 두 가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정현백:
“서희에게 조준구는 단순히 미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가족의 몰락과 빼앗긴 땅, 어린 시절의 상실이 하나로 묶여 있었죠.”

마리안느 허시:
“그러면 조준구를 이긴다고 해서 그 모든 상실을 이기는 것은 아니군요.”

이승윤:
“바로 그 문제입니다.”

펄 벅이 조금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펄 S. 벅:
“제가 서희에게 직접 물을 수 있다면,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가장 되찾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리쾨르가 말했다.

폴 리쾨르:
“그리고 아마 서희 자신도 처음부터 그 답을 알지는 못했을 겁니다.”

주디스 허먼:
“사람은 종종 하나의 구체적인 목표에 상실 전체를 걸어 둡니다. 집, 돈, 재판의 승리, 가해자의 처벌.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인간의 마음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잃었을 수 있습니다.”

펄 S. 벅:
“어떤 것들 말입니까?”

허먼은 천천히 답했다.

주디스 허먼:
“안전하다는 감각. 세상이 어느 정도 믿을 만하다는 감각. 가족은 계속 곁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 미래에 대한 자연스러운 기대.”

마리안느 허시가 말을 이었다.

마리안느 허시:
“그리고 가족의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요.”

정현백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정현백:
“서희가 잃은 것은 집 한 채가 아니었으니까요.”

펄 벅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펄 S. 벅:
“그렇다면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겠군요.”

그녀가 또렷하게 말했다.

“정의를 되찾는 것과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왜 다른가?”

주디스 허먼이 바로 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말했다.

주디스 허먼:
“정의는 바깥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폴 리쾨르:
“바깥에서?”

주디스 허먼:
“재산이 반환됩니다. 판결이 내려집니다. 가해자가 처벌받습니다. 사회가 잘못을 인정합니다. 이런 변화는 실제이고 중요합니다.”

그녀가 손을 가슴 가까이에 놓았다.

“하지만 상처는 안쪽에도 남아 있습니다.”

펄 S. 벅:
“그러면 바깥의 정의와 안쪽의 회복이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겁니까?”

주디스 허먼:
“그렇습니다. 때로는 아주 다른 속도로.”

이승윤:
“서희가 땅을 되찾았다고 해서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모두 조용해졌다.

펄 벅이 아주 낮게 말했다.

펄 S. 벅:
“그날 밤에도 죽은 사람들은 죽어 있었겠군요.”

이승윤:
“네.”

잠시 뒤 그가 덧붙였다.

“그날 밤에도 죽은 사람들은 죽어 있었습니다.”

그 말은 이상할 만큼 단순했고, 그래서 더 무거웠다.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그렇다고 해서 땅을 되찾은 일이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디스 허먼: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현백:
“그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마음의 평화가 더 중요하니 재산이나 정의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펄 S. 벅:
“그렇군요.”

정현백:
“빼앗긴 것은 돌려받아야 합니다. 잘못은 잘못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폴 리쾨르:
“정의는 과거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시간 자체를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요.”

마리안느 허시:
“시간이 바로 핵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펄 S. 벅:
“어떤 의미에서요?”

마리안느 허시:
“서희가 빼앗긴 순간과 되찾은 순간 사이에는 수많은 해가 있습니다. 그 사이에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가족도 달라졌고요.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어 같은 장소에 다시 서는 겁니다.”

리쾨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폴 리쾨르:
“그렇다면 회복은 ‘이전으로 돌아감’이 아니라 ‘이후를 살아갈 수 있게 됨’에 더 가까울 수 있겠군요.”

허먼이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주디스 허먼:
“저도 그렇게 보고 싶습니다.”

펄 벅이 잠시 침묵한 뒤 물었다.

펄 S. 벅:
“두 번째 질문입니다. 복수는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요?”

정현백이 한숨처럼 웃었다.

정현백:
“아주 오래된 질문이군요.”

폴 리쾨르: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주디스 허먼:
“복수하고 싶은 마음 자체를 쉽게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펄 벅이 눈썹을 올렸다.

펄 S. 벅:
“왜 그렇습니까?”

주디스 허먼: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분노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이 일이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분노 속에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분노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주디스 허먼:
“내 삶 전체가 가해자와의 관계 속에 붙잡혀 있느냐는 겁니다.”

리쾨르가 천천히 말했다.

폴 리쾨르:
“미워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 사람에게 묶여 있을 수 있다는 말이군요.”

주디스 허먼:
“그렇습니다.”

이승윤이 서희와 조준구의 관계를 떠올리듯 말했다.

이승윤:
“서희가 조준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당신은 땅을 빼앗았다고 생각했겠죠. 나는 세상을 빼앗겼습니다.”

펄 벅의 눈빛이 달라졌다.

펄 S. 벅:
“그 차이가 크군요.”

이승윤:
“조준구에게는 재산이었을 수 있습니다. 서희에게는 세계였습니다.”

정현백:
“그러니 서희에게 그를 이긴다는 것은 단순한 경쟁의 승리가 아니었겠죠.”

이승윤:
“네. 하지만 그를 이긴 뒤에도 그가 빼앗아 간 세계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때 서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허먼이 말했다.

주디스 허먼:
“바로 거기서 회복의 다른 단계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펄 S. 벅:
“다른 단계?”

주디스 허먼:
“가해자를 중심으로 살지 않는 것.”

리쾨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폴 리쾨르:
“용서하라는 말입니까?”

허먼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주디스 허먼:
“아닙니다.”

방 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주디스 허먼:
“회복과 용서를 같은 것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정현백:
“그 점은 아주 중요하군요.”

주디스 허먼:
“피해자가 반드시 용서해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문제 자체를 더 이상 자기 삶의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펄 벅이 말했다.

펄 S. 벅:
“그러면 용서하지 않고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겁니까?”

주디스 허먼:
“그럴 수 있습니다.”

이승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승윤:
“서희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잠시 침묵.

그리고 그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제 당신 때문에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무도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마리안느 허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리안느 허시:
“그 문장은 용서보다 더 강할 수도 있겠네요.”

폴 리쾨르:
“관계를 끊는 선언이니까요.”

주디스 허먼:
“정확히는 가해자가 더 이상 내 삶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선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정현백: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죠?”

주디스 허먼:
“아닙니다.”

마리안느 허시:
“기억을 지우는 것도 아니고요.”

주디스 허먼:
“그렇습니다.”

리쾨르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폴 리쾨르:
“그러면 우리가 찾는 말은 ‘잊음’이 아니라 ‘거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펄 S. 벅:
“과거와의 거리?”

폴 리쾨르: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과거가 현재의 모든 선택을 대신하지 못하게 하는 거리.”

허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 허먼:
“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

“과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더 이상 내 미래의 모든 문장을 대신 쓰지 못하게 하는 것.”

펄 벅이 그 문장을 반복했다.

펄 S. 벅:
“내 미래의 모든 문장을 대신 쓰지 못하게 한다.”

바람이 창문을 스쳤다.

멀리서 새 한 마리가 논 위로 낮게 날아갔다.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상처가 사회의 상처와 연결되어 있다면요.”

마리안느 허시:
“가족의 기억으로 남기도 하고요.”

정현백:
“그렇죠. 식민지 경험, 전쟁, 이산, 계급의 상처 같은 것은 한 사람의 마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펄 S. 벅:
“다음 세대에게 넘어간다는 뜻입니까?”

마리안느 허시:
“때로는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때로는 침묵으로 넘어갑니다.”

폴 리쾨르:
“침묵으로도?”

마리안느 허시:
“네. 가족이 어떤 일을 전혀 말하지 않아도 아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정한 이름을 피하고, 특정한 장소에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누군가의 사진이 서랍 안에 숨겨져 있다면요.”

주디스 허먼:
“상처는 말로만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승윤:
“그렇다면 서희 한 사람의 상처를 넘어, 『토지』 전체에 퍼져 있는 감정으로 가야겠군요.”

펄 벅이 그를 바라보았다.

펄 S. 벅:
“어떤 감정입니까?”

이승윤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펄 벅이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치유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허먼이 손을 모았다.

주디스 허먼:
“상처가 없었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현백:
“잊는 것도 아니고.”

마리안느 허시:
“역사를 없애는 것도 아니고.”

폴 리쾨르:
“과거와 화해했다는 아름다운 결론을 반드시 얻는 것도 아니겠군요.”

주디스 허먼:
“네. 저는 오히려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돌아오는 것을 중요하게 봅니다.”

펄 S. 벅:
“선택?”

주디스 허먼:
“과거 때문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에서 내가 무엇을 할지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

이승윤:
“그렇다면 서희에게 회복은 조준구를 이기는 순간보다, 조준구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게 되는 순간에 가까울 수도 있겠군요.”

허먼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 허먼: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펄 벅이 말했다.

펄 S. 벅:
“『대지』에서도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룽은 오랫동안 땅이 모든 문제의 답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땅을 많이 가져도 가족의 균열까지 막지는 못합니다.”

정현백:
“소유는 안전을 줄 수 있지만, 모든 관계를 구해 주지는 못하죠.”

펄 S. 벅: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작품이 아주 다른 문화와 역사를 다루면서도 비슷한 질문을 한다고 느낍니다.”

폴 리쾨르:
“무엇을 가졌는가보다, 그것을 통해 무엇을 되찾고 싶어 하는가.”

펄 S. 벅:
“네.”

마리안느 허시가 조용히 말했다.

마리안느 허시:
“그런데 서희가 조준구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합시다.”

주디스 허먼:
“네.”

마리안느 허시:
“그렇다면 그 분노와 기억은 어디로 갑니까?”

아무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정현백:
“사라지지는 않겠죠.”

폴 리쾨르:
“기억은 형태를 바꿀 수는 있어도, 단순히 삭제되지는 않으니까요.”

이승윤:
“아마 그 지점에서 한국어의 한이라는 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펄 벅이 고개를 들었다.

펄 S. 벅:
“한.”

이승윤:
“네.”

그는 창밖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되찾아도 남아 있는 것.”

잠시 뒤 정현백이 말했다.

“잊지 못해서 남아 있는 것만도 아니고요.”

마리안느 허시가 물었다.

“그렇다면 한은 상처입니까? 기억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무엇입니까?”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펄 벅이 『토지』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다음 대화의 제목처럼 한 단어를 말했다.

“한.”

그 한 단어가 다음 질문을 열었다.

Topic 3: 한은 기억인가, 상처인가, 정체성인가

park kyungni toji

평사리의 햇빛은 이제 들판 전체에 내려앉아 있었다.

아침 안개는 거의 사라졌지만, 여섯 사람의 대화에는 다른 종류의 안개가 남아 있었다.

조금 전 마리안느 허시는 물었다.

“그렇다면 한은 상처입니까? 기억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무엇입니까?”

펄 벅은 『토지』 위에 손을 올린 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펄 S. 벅:
“제가 한이라는 말을 완전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승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윤:
“그 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펄 S. 벅:
“슬픔이라고 번역하면 부족하고, 원한이라고 해도 부족하고, 비애라고 해도 부족하겠죠?”

이승윤:
“네. 그리고 한을 하나의 감정으로만 정의하려 할수록 오히려 멀어질 수 있습니다.”

주디스 허먼:
“저는 특히 한을 곧바로 트라우마와 같은 것으로 부르는 데 조심하고 싶습니다.”

펄 S. 벅:
“둘은 다릅니까?”

주디스 허먼:
“겹치는 부분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특정한 심리적 경험과 반응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입니다. 한은 훨씬 더 넓은 역사적, 문화적, 관계적 의미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현백:
“한에는 개인의 고통만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식민지 경험, 전쟁, 가난, 계급, 가족, 여성의 삶, 이루지 못한 사랑, 억울함, 기다림, 떠나지 못한 마음. 그런 것들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쌓이기도 합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렇다면 한은 한 사람이 혼자 만들어 낸 감정이라고만 보기는 어렵겠군요.”

이승윤:
“그렇습니다. 어떤 한은 한 사람의 생애보다 오래 남기도 하니까요.”

펄 벅이 물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질문입니다. 한은 개인의 상처입니까, 역사가 개인 안에 남은 흔적입니까?”

정현백이 먼저 대답했다.

정현백:
“둘 중 하나로 고르기 어렵습니다.”

폴 리쾨르:
“왜 그렇습니까?”

정현백:
“역사는 언제나 추상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식민지가 되었다는 문장은 역사책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 역사적 사건은 실제 사람의 집을 잃게 하고, 가족을 흩어지게 하고,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고, 어떤 여성을 평생 기다리게 합니다.”

마리안느 허시:
“큰 역사가 개인의 몸과 가족 안으로 들어오는군요.”

정현백:
“그렇죠.”

이승윤:
“『토지』가 강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역사를 사건 목록으로 보여 주지 않습니다. 역사가 한 사람의 결혼에 들어오고, 밥상에 들어오고, 사랑에 들어오고, 땅에 들어옵니다.”

펄 S. 벅:
“그 점에서는 『대지』와도 닮았습니다.”

이승윤:
“어떤 점에서요?”

펄 S. 벅:
“전쟁이나 기근이 왕룽에게는 정치적 사건으로 먼저 오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사라지고, 가족이 굶고, 땅을 떠나야 하는 경험으로 옵니다.”

정현백:
“맞습니다. 역사란 많은 사람에게 그렇게 옵니다.”

주디스 허먼:
“그리고 그런 경험은 사건이 끝났다고 해서 바로 끝나지 않습니다.”

폴 리쾨르:
“사건은 끝나도 그 사건이 만든 시간은 계속된다는 뜻입니까?”

주디스 허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안느 허시가 조용히 말했다.

마리안느 허시:
“저는 여기서 세대의 문제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펄 S. 벅:
“다음 세대 말입니까?”

마리안느 허시:
“네. 어떤 사람은 직접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시기를 살지도 않았습니다. 가족이 쫓겨나는 장면을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건들이 자기 삶 안에 깊이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정현백:
“가족 이야기 때문입니까?”

마리안느 허시:
“이야기뿐만은 아닙니다.”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진. 침묵. 반복되는 이야기. 말하지 않는 이름. 가족이 특정한 장소를 피하는 방식. 어떤 질문을 했을 때 갑자기 어른들의 얼굴이 굳어지는 순간.”

폴 리쾨르:
“말하지 않은 것도 기억이 될 수 있다는 말이군요.”

마리안느 허시:
“그렇습니다.”

주디스 허먼:
“아이들은 가족의 감정적 분위기를 배우기도 합니다. 정확한 사건을 몰라도요.”

펄 S. 벅:
“그러면 다음 세대는 자기 것이 아닌 기억을 가지고 살 수도 있습니까?”

마리안느 허시:
“정확히 같은 기억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전 세대의 경험이 이미지와 이야기와 감정을 통해 이후 세대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는 있습니다.”

이승윤:
“한도 그런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허시는 잠시 생각했다.

마리안느 허시:
“저는 한이라는 개념 전체를 제 연구 용어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가족의 고통이 다음 세대의 삶을 구성하는 방식은 분명 존재합니다.”

펄 벅이 책상 위에 놓인 두 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펄 S. 벅:
“그렇다면 기억을 이어 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까?”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폴 리쾨르:
“기억에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부정의가 있었을 때, 잊지 않는 것은 중요합니다.”

정현백:
“그렇지만 기억이 어떤 형태로 전달되는지도 중요하겠죠.”

펄 S. 벅:
“무슨 뜻입니까?”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아이에게 ‘이 일이 있었다’고 가르치는 것과 ‘그러니 너도 저 사람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마리안느 허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느 허시:
“바로 그 차이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기억하는 것과 미워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다릅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펄 벅이 그 말을 다시 되뇌었다.

펄 S. 벅:
“기억하는 것과 미워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폴 리쾨르가 손을 모았다.

폴 리쾨르: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을 해 봅시다.”

“우리는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과거에게 미래를 맡기지 않을 수 있는가?”

주디스 허먼이 말했다.

주디스 허먼:
“가능해야 합니다.”

펄 S. 벅:
“가능해야 한다?”

주디스 허먼:
“그렇지 않으면 피해를 입은 세대뿐 아니라 그 다음 세대까지 계속 가해자의 영향 아래 살게 됩니다.”

마리안느 허시:
“하지만 ‘이제 미래를 살아라’라는 말이 기억을 버리라는 압력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정현백:
“한국 역사에서는 특히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펄 S. 벅:
“왜 그렇습니까?”

정현백:
“상처를 말하는 사람에게 너무 빨리 ‘이제 잊자’고 하면, 그것은 화해가 아니라 침묵을 요구하는 말이 될 수 있으니까요.”

폴 리쾨르:
“그렇다면 기억과 해방을 반대말로 만들어서는 안 되겠군요.”

마리안느 허시:
“네.”

주디스 허먼:
“기억하면서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승윤:
“『토지』의 인물들에게도 그런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펄 S. 벅:
“어떤 차이입니까?”

이승윤:
“상처를 품고 사는 것과, 상처에 붙잡혀 사는 것.”

그가 한 번 더 또렷하게 말했다.

“품고 사는 것과 붙잡혀 사는 것은 다릅니다.”

펄 벅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했다.

펄 S. 벅:
“그 차이를 실제 삶에서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주디스 허먼:
“쉽지 않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기억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붙잡혀 있다고 할 수는 없겠죠.”

주디스 허먼:
“그렇습니다. 자주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병적인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억이 현재의 삶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입니다.”

폴 리쾨르:
“현재를 대신 살아 버리는가.”

주디스 허먼:
“네.”

정현백:
“그리고 다음 세대의 선택까지 대신하려 하는가.”

마리안느 허시:
“그것도 중요합니다.”

펄 벅이 말했다.

펄 S. 벅:
“그렇다면 이런 표현은 어떨까요.”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억하되, 거기서 살지는 않는 것.”

마리안느 허시가 미소를 지었다.

마리안느 허시:
“좋은 표현입니다.”

폴 리쾨르:
“과거를 지우지 않지만, 과거를 현재의 주소로 만들지도 않는다는 뜻이군요.”

잠시 후 이승윤이 말했다.

이승윤:
“하지만 한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빠지기 쉬운 다른 위험도 있습니다.”

펄 S. 벅:
“어떤 위험입니까?”

이승윤:
“한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이 강해졌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겁니다.”

주디스 허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주디스 허먼:
“그 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정현백:
“저도 동의합니다.”

펄 S. 벅:
“왜 위험합니까?”

주디스 허먼:
“고통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고통 자체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쉽습니다.”

정현백:
“식민지 지배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강해졌다고 말한다면, 어느 순간 식민지 지배가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전쟁도 마찬가지겠군요.”

정현백:
“그렇습니다.”

주디스 허먼:
“어떤 사람은 고통 속에서 새로운 힘을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어떤 사람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성장의 도구처럼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방 안이 오래 조용했다.

펄 벅이 천천히 말했다.

펄 S. 벅:
“그러면 한이 사람을 살게 했다는 말도 조심해야겠군요.”

이승윤:
“네.”

펄 S. 벅:
“하지만 『토지』의 인물들은 그렇게 많은 것을 견디고도 계속 살아갑니다.”

이승윤:
“그렇기 때문에 질문을 바꾸는 편이 좋습니다.”

펄 S. 벅:
“어떻게요?”

이승윤은 창밖의 논을 바라보았다.

이승윤:
“한이 사람을 살게 한 것이 아니라…”

잠시 말을 멈췄다.

“한을 가지고도 살아가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허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 허먼:
“그 차이는 큽니다.”

마리안느 허시:
“고통에게 공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니까요.”

정현백:
“그리고 살아남지 못한 사람을 약한 사람으로 만들지도 않고요.”

펄 벅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세 번째 질문을 꺼냈다.

“한이 정체성의 일부라면,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배신하는 것일까?”

폴 리쾨르가 먼저 말했다.

폴 리쾨르:
“사람은 자기 과거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펄 S. 벅:
“조금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폴 리쾨르:
“나는 내가 겪은 일들로 구성되지만, 그 일들의 합계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계속 이야기되고 수정됩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렇다면 가족에게 물려받은 기억도 나의 일부일 수 있지만, 나의 전부는 아니겠군요.”

폴 리쾨르:
“그렇습니다.”

정현백:
“그런데 역사적 기억을 내려놓는다는 표현은 조금 조심하고 싶습니다.”

펄 S. 벅:
“왜요?”

정현백:
“무엇을 내려놓는 것인지 분명해야 하니까요. 사실을 내려놓는 것인지, 책임을 내려놓는 것인지, 미움을 내려놓는 것인지 서로 다릅니다.”

주디스 허먼:
“아주 중요한 구별입니다.”

마리안느 허시:
“기억을 보존하면서도, 그 기억이 요구하는 감정까지 그대로 물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승윤:
“결국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넘길 것인가의 문제가 되겠군요.”

펄 벅이 말했다.

펄 S. 벅:
“그렇다면 부모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이것은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다.”

“잊지 말아라.”

“하지만 네가 누구를 사랑할지, 누구와 친구가 될지, 네 미래를 어떻게 만들지는 네가 선택해라.”

마리안느 허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느 허시:
“그것이 가능하다면 기억은 짐만이 아니라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폴 리쾨르: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의 관계.”

정현백:
“과거와 미래 사이의 관계.”

주디스 허먼:
“다만 그 관계가 명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승윤이 말했다.

이승윤:
“『토지』의 언어로 말하면 이런 문장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우리의 한을 아이의 운명으로 만들지 않는 것.”

아무도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멀리서 누군가가 논두렁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바구니를 든 나이 든 여자였다.

조금 뒤 다른 여자가 집 앞에서 빨래를 널었다.

누군가는 아기를 업고 있었다.

정현백이 창밖을 바라보다 말했다.

정현백:
“한에 대해 이야기하면 한 가지 문제가 더 생깁니다.”

펄 S. 벅:
“어떤 문제입니까?”

정현백:
“누가 그 한을 실제로 살아 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펄 S. 벅:
“누가?”

정현백은 창밖을 가리켰다.

정현백:
“역사책에 이름이 남은 사람들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마리안느 허시가 말했다.

마리안느 허시:
“오히려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았겠죠.”

정현백:
“남자들이 전쟁과 정치와 독립운동으로 기록될 때,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밥을 하고, 아픈 사람을 돌보고, 기다리고, 가족을 이어 간 사람들은 무엇으로 기록되었을까요?”

펄 S. 벅:
“생활.”

정현백:
“그렇죠.”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전쟁은 역사라고 부르면서, 사람을 먹이고 살린 일은 왜 생활이라고만 불렀을까요?”

펄 벅의 시선이 창밖의 여성에게 머물렀다.

그녀는 자신의 소설 속 오란을 떠올리는 듯했다.

펄 S. 벅:
“그 질문은 제가 오랫동안 생각해 온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승윤이 말했다.

이승윤:
“『토지』에도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정현백:
“그렇다면 다음에는 그 사람들을 봐야겠군요.”

펄 S. 벅:
“역사에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들.”

정현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대화의 문을 여는 듯 물었다.

“역사는 정말 누가 만들었을까요?”

Topic 4: 역사에서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park kyungni toji

평사리의 들판에는 이제 사람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논두렁을 따라 걷는 노인.

마당에서 채소를 다듬는 여자.

아이 손을 잡고 우물가로 가는 젊은 어머니.

멀리서는 누군가 장작을 쌓고 있었다.

정현백이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정현백:
“저 사람들의 이름을 우리는 알까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펄 벅이 창밖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펄 S. 벅:
“대부분은 모르겠죠.”

정현백:
“그렇죠.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폴 리쾨르:
“무엇이 말입니까?”

정현백:
“전쟁을 시작한 사람의 이름은 남습니다. 법을 만든 사람의 이름도 남습니다. 왕과 장군과 정치가의 이름도 남죠.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을 먹인 사람의 이름은 거의 남지 않습니다.”

마리안느 허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느 허시:
“아이를 살린 사람, 병든 사람을 돌본 사람, 집을 다시 일으킨 사람도요.”

정현백:
“네.”

펄 벅이 조용히 말했다.

펄 S. 벅:
“제 소설의 오란도 생각나는군요.”

이승윤:
“『토지』의 공월선도 그렇습니다.”

펄 S. 벅:
“그들은 역사책의 중심에 서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삶에서는 중심이었겠죠.”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그게 오늘 우리가 봐야 할 문제입니다.”

펄 벅이 첫 번째 질문을 꺼냈다.

“왜 싸운 사람은 역사에 들어가고, 사람을 살게 한 사람은 생활로 남는가?”

정현백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말했다.

정현백:
“역사는 오랫동안 큰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왔습니다.”

폴 리쾨르:
“큰 사건이라는 건 무엇입니까?”

정현백:
“전쟁, 정권 변화, 혁명, 조약, 독립운동, 경제 위기 같은 것들이죠.”

펄 S. 벅:
“날짜를 붙일 수 있는 것들.”

정현백:
“맞습니다. 시작과 끝을 비교적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일들.”

마리안느 허시:
“밥을 짓는 일에는 시작일과 종료일이 없으니까요.”

정현백:
“그렇죠.”

주디스 허먼:
“누군가를 돌보는 일도 비슷합니다. 한 번의 극적인 사건보다 매일 반복되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이승윤:
“그래서 기록하기 어렵고, 기록하더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기 쉽습니다.”

펄 벅이 미소를 지었다.

펄 S. 벅:
“그런데 사람은 매일 먹어야 합니다.”

정현백:
“바로 그겁니다.”

창밖에서 한 여자가 큰 대야에 채소를 씻고 있었다.

펄 벅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펄 S. 벅:
“전쟁은 몇 년에 시작했는지 적을 수 있습니다. 누가 지휘했는지도 적을 수 있고요.”

그녀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어느 여자가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열 명의 아이에게 죽을 끓였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주디스 허먼:
“그 죽이 없었다면 그 아이들 중 누군가는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는데도요.”

정현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현백:
“그래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의 기준 자체를 다시 봐야 합니다.”

폴 리쾨르:
“우리가 큰 것과 작은 것을 잘못 나누어 온 것일 수도 있겠군요.”

정현백:
“네.”

이승윤이 『토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승윤:
“『토지』에는 아주 많은 사람이 나옵니다. 700명에 이를 정도로 수많은 인물이 얽혀 있죠.”

펄 S. 벅:
“그 많은 사람을 통해 박경리가 무엇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까?”

이승윤:
“역사는 한 사람의 영웅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 같습니다.”

정현백:
“그리고 한 종류의 노동으로도 완성되지 않죠.”

이승윤:
“맞습니다. 누군가는 싸우고,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누군가는 장사를 하고, 누군가는 아이를 키웁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 모든 것이 함께 있을 때 공동체가 이어집니다.”

펄 벅이 두 번째 질문을 꺼냈다.

“먹이고, 키우고, 돌보고, 기다리는 것도 역사인가?”

주디스 허먼이 먼저 말했다.

주디스 허먼: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폴 리쾨르:
“어떤 의미에서요?”

주디스 허먼:
“사람의 삶을 유지시키는 행위라는 점에서요.”

정현백:
“특히 여성의 노동이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게 처리되어 왔습니다.”

펄 S. 벅:
“보이지 않게?”

정현백:
“가족을 먹이고, 아이를 키우고, 병든 사람을 돌보고, 남편이나 자식을 기다리고, 집을 유지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당연한 일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당연하다고 여겨진 일이 실제로는 공동체를 유지한 핵심이었는데요.”

정현백:
“그렇습니다.”

펄 벅이 조용히 말했다.

펄 S. 벅:
“오란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펄 S. 벅:
“사람들은 왕룽의 성공을 볼 때 땅을 봅니다. 하지만 그 집이 처음부터 무너지지 않고 버틴 데에는 오란의 노동이 있었습니다.”

정현백:
“공월선도 비슷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승윤:
“공월선을 이용과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만으로 기억한다면 그녀를 너무 작게 만드는 겁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녀가 사랑한 것과 그녀가 살아낸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니까요.”

이승윤:
“그렇습니다.”

펄 벅이 천천히 말했다.

펄 S. 벅:
“오란을 단지 왕룽의 아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군요.”

정현백:
“바로 그 문제입니다.”

폴 리쾨르가 말했다.

폴 리쾨르:
“그렇다면 역사라는 것은 이름을 남기는 문제라기보다, 관계를 유지하는 문제로도 볼 수 있겠군요.”

정현백:
“네.”

주디스 허먼:
“사람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든 사람들.”

펄 벅이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펄 S. 벅:
“그러면 역사에 던질 질문도 바꿔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펄 S. 벅:
“‘누가 역사에 이름을 남겼는가’가 아니라…”

그녀가 창밖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누가 사람들이 다음 날까지 살아 있게 했는가.”

그 말이 방 안에 오래 남았다.

정현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현백:
“그 질문이라면 역사책에 들어갈 사람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지겠네요.”

펄 S. 벅: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정현백:
“아마도요.”

마리안느 허시가 말했다.

마리안느 허시:
“기억도 비슷합니다. 가족에게는 역사책보다 다른 사람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펄 S. 벅:
“예를 들면요?”

마리안느 허시:
“매일 도시락을 싸 준 어머니. 겨울마다 장작을 해 온 할아버지. 전쟁 중 아이들을 숨긴 이웃. 그 사람들은 국가의 기억에서는 작을 수 있지만 가족의 기억에서는 중심입니다.”

폴 리쾨르:
“큰 역사와 작은 역사를 나누는 기준 자체가 흔들리는군요.”

마리안느 허시:
“네.”

정현백이 세 번째 질문을 꺼냈다.

“그렇다면 『토지』의 진짜 주인공은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인가?”

이승윤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뒤 말했다.

이승윤:
“저는 ‘진짜 주인공’이라는 표현에는 조금 조심하고 싶습니다.”

펄 S. 벅:
“왜 그렇습니까?”

이승윤:
“『토지』가 한 사람에게 의미를 모으지 않으려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폴 리쾨르:
“서희도 아니고, 길상도 아니고?”

이승윤:
“둘 다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둘만으로 작품을 설명하면 『토지』가 작아집니다.”

정현백:
“평범한 사람들 전체가 주인공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승윤이 잠시 생각했다.

이승윤:
“그 표현은 가깝습니다.”

펄 S. 벅:
“하지만?”

이승윤:
“사람들도 결국 지나갑니다.”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펄 벅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논두렁을 걷던 노인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채소를 씻던 여자도 집 안으로 들어갔다.

펄 S. 벅:
“사람도 지나간다.”

이승윤:
“네.”

폴 리쾨르:
“공동체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기억도 사라질 수 있고요.”

정현백:
“이름은 더 쉽게 사라집니다.”

펄 벅은 오랫동안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말했다.

펄 S. 벅:
“중국 농촌에서도 그런 것을 많이 봤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사람이 죽습니다.”

“집이 무너집니다.”

“전쟁이 옵니다.”

“가난이 옵니다.”

“그런데 어느 아침이 되면 누군가는 또 밥을 합니다.”

“누군가는 밭으로 갑니다.”

“아이가 태어납니다.”

“누군가는 사랑하고, 울고, 일합니다.”

그녀는 이승윤을 바라보았다.

펄 S. 벅:
“그렇다면 사람이 아니라면 무엇이 주인공일까요?”

이승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긴 침묵 뒤에 말했다.

이승윤:
“생명일지도 모릅니다.”

주디스 허먼이 그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주디스 허먼:
“다만 여기서 한 가지는 꼭 조심했으면 합니다.”

펄 S. 벅:
“무엇입니까?”

주디스 허먼:
“‘생명은 계속된다’는 말을 너무 아름답게 만들지 않는 겁니다.”

정현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 허먼:
“계속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완전히 무너진 사람도 있고요. 어떤 사람에게는 다시 일어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마리안느 허시:
“삶이 계속된다고 말하면서, 살아남지 못한 사람을 지워서는 안 되겠군요.”

주디스 허먼:
“맞습니다.”

이승윤:
“그렇다면 ‘생명은 언제나 승리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네요.”

주디스 허먼:
“저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펄 S. 벅:
“그럼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허먼은 잠시 생각했다.

주디스 허먼:
“어떤 생명은 계속되려고 합니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멀리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조금 뒤 누군가 그 아이를 달래는 목소리도 들렸다.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본 모든 것이 그 질문으로 모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펄 S. 벅:
“어떤 질문이요?”

정현백은 창밖을 보았다.

정현백:
“땅도 빼앗깁니다.”

“가족도 사라집니다.”

“나라도 잃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떠납니다.”

“역사에 이름조차 남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도 사람은 왜 다음 날 다시 일어날까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펄 벅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주디스 허먼은 창밖의 길을 바라보았다.

마리안느 허시는 오래된 집의 문을 바라보았다.

폴 리쾨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이승윤은 『토지』의 표지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펄 벅이 아주 조용히 말했다.

“모든 것을 잃어도,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

그 질문이 마지막 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Topic 5: 모든 것을 잃어도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

park kyungni toji

※ 아래 대화는 각 인물의 저술과 연구 분야에서 영감을 받아 구성한 가상의 문학적 대화입니다. 실제 발언이나 인용이 아닙니다.

평사리에는 어느새 오후의 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논은 바람에 따라 한쪽으로 누웠다가 다시 일어났다.

멀리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조금 뒤 누군가 아이를 달래는 목소리가 따라왔다.

조금 전 정현백이 물었다.

“모든 것을 잃어도, 인간은 왜 다음 날 다시 일어나는가.”

펄 벅은 오래도록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조용히 말했다.

펄 S. 벅:
“사실 저는 이 질문에 아름다운 답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디스 허먼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디스 허먼:
“저도 그렇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사랑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정현백:
“희망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도, 희망을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간 사람도 있고요.”

폴 리쾨르:
“책임 때문이라고 하기에도,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이승윤이 말했다.

이승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다르게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펄 S. 벅:
“어떻게요?”

이승윤:
“사람은 매일 아침 ‘왜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에 답한 뒤에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펄 벅이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펄 S. 벅:
“그렇군요.”

이승윤:
“어떤 날은 이유를 몰라도 일어납니다.”

주디스 허먼:
“어떤 날은 물을 마십니다.”

마리안느 허시:
“창문을 엽니다.”

정현백:
“아이에게 밥을 줍니다.”

폴 리쾨르:
“누군가의 이름을 부릅니다.”

펄 벅이 천천히 말했다.

펄 S. 벅:
“그리고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는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펄 벅이 첫 번째 질문을 꺼냈다.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사랑인가, 희망인가, 책임인가, 한인가, 아니면 생명 그 자체인가?”

이승윤이 웃었다.

이승윤:
“하나를 고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펄 S. 벅:
“그래도 하나씩 생각해 보죠.”

그녀가 자신의 소설을 바라보았다.

펄 S. 벅:
“예전의 저라면 땅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현백:
“왕룽처럼요?”

펄 S. 벅:
“네. 왕룽은 땅으로 돌아가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땅이 있으면 먹고살 수 있고, 가족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사람은 땅을 잃고도 살아갑니다.”

이승윤:
“서희도 결국 땅을 되찾았지만, 그녀를 살아가게 한 것이 오직 땅뿐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마리안느 허시:
“그녀에게는 죽은 사람들의 기억도 있었습니다.”

주디스 허먼:
“분노도 있었고요.”

정현백:
“책임도 있었습니다.”

폴 리쾨르:
“미래도 있었고.”

펄 벅이 허먼에게 물었다.

펄 S. 벅:
“책임은 사람을 살게 할 수 있습니까?”

주디스 허먼:
“그럴 수 있습니다.”

펄 S. 벅:
“사랑과 비슷한 겁니까?”

주디스 허먼: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현백:
“그 차이가 중요합니다.”

주디스 허먼:
“어떤 사람은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느낄 여유조차 없지만 아이를 먹여야 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마리안느 허시: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지쳐서 감정을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고요.”

주디스 허먼:
“그렇죠.”

펄 S. 벅:
“그런 날에도 삶은 계속됩니다.”

주디스 허먼:
“네.”

폴 리쾨르가 말했다.

폴 리쾨르:
“기억도 사람을 붙들어 줄 수 있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하지만 동시에 짓누를 수도 있습니다.”

폴 리쾨르:
“그렇습니다.”

펄 S. 벅:
“그럼 한은 어떻습니까?”

이승윤이 바로 대답했다.

이승윤:
“한이 사람을 살게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펄 S. 벅:
“Topic 3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요.”

이승윤:
“네. 한은 어떤 사람에게는 힘의 방향이 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디스 허먼:
“그리고 어떤 사람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정현백:
“그러니 한을 생존의 비밀처럼 말하면 안 되겠죠.”

이승윤:
“그렇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한이 사람을 살린 것이 아니라, 한을 안고도 살아가려는 사람이 있었던 겁니다.”

펄 벅이 그 말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펄 S. 벅:
“그렇다면 결국 사람 안에 무언가가 있는 걸까요?”

이승윤:
“저는 그걸 생명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주디스 허먼이 곧바로 말했다.

주디스 허먼:
“다만 그 말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승윤:
“왜요?”

주디스 허먼:
“생명력이 있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면, 견디지 못한 사람을 약한 사람처럼 만들 수 있으니까요.”

정현백:
“살아남지 못한 사람이 생명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죠.”

주디스 허먼:
“그렇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럼 생명이라는 말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허먼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주디스 허먼:
“아마도 인간에게는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움직이는 것이 있다는 정도로요.”

펄 S. 벅:
“이유보다 먼저 움직이는 것.”

주디스 허먼:
“네.”

폴 리쾨르:
“씨앗이 왜 싹을 틔우는지 설명하지 않고 싹을 틔우는 것처럼?”

펄 벅이 작게 웃었다.

펄 S. 벅:
“그 비유는 마음에 드네요.”

바깥에서 바람이 불었다.

논 끝에서 한 아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몇 번이나 넘어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계속 달렸다.

펄 벅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펄 S. 벅:
“어쩌면 삶이라는 것은 거대한 결심보다 작은 행동들의 연속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디스 허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펄 S. 벅:
“일어난다.”

“물을 마신다.”

“밥을 만든다.”

“누군가에게 대답한다.”

“문을 연다.”

마리안느 허시:
“누군가의 사진을 다시 본다.”

정현백:
“장사를 다시 연다.”

폴 리쾨르:
“오늘의 문장을 하나 더 쓴다.”

이승윤이 말했다.

이승윤:
“생명은 거창한 선언보다 그런 데서 더 잘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펄 벅이 두 번째 질문을 꺼냈다.

“고통은 인간을 강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인간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가?”

주디스 허먼이 바로 말했다.

주디스 허먼:
“저는 두 번째 표현을 더 선호합니다.”

펄 S. 벅:
“고통에도 불구하고.”

주디스 허먼:
“네.”

정현백: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을 강하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전쟁이 사람들에게 필요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고요.”

주디스 허먼:
“심한 고통은 사람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관계를 무너뜨리고, 몸을 아프게 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까지 가져갈 수 있습니다.”

펄 S. 벅:
“그런데 우리는 고통을 이겨 낸 사람을 보면 자꾸 ‘그 고통 때문에 강해졌다’고 말합니다.”

주디스 허먼:
“그 사람이 강해진 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이 필요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폴 리쾨르가 조용히 말했다.

폴 리쾨르: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군요.”

펄 S. 벅:
“어떤 차이입니까?”

폴 리쾨르:
“‘이 고통에는 원래 의미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이 고통 이후에 내가 의미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주디스 허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 허먼:
“아주 큰 차이입니다.”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우리는 오란을 보고 ‘고생했기 때문에 위대한 여자가 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펄 벅이 오래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펄 S. 벅:
“그렇습니다.”

정현백:
“공월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승윤:
“서희도요.”

펄 S. 벅:
“그들의 고통을 빼앗아 갈 수 있었다면, 차라리 없었어야 했겠죠.”

주디스 허먼:
“네.”

펄 S. 벅:
“그렇다면 우리가 귀하게 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이승윤이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승윤:
“고통이 있었는데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생명.”

아무도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주디스 허먼이 천천히 덧붙였다.

주디스 허먼:
“그리고 사라진 사람들을 약했다고 부르지 않는 것.”

해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논 위의 빛이 금빛으로 바뀌었다.

펄 벅이 세 번째 질문을 꺼냈다.

“그렇다면 『토지』의 마지막 주인공은 결국 생명인가?”

이승윤이 웃었다.

이승윤:
“아주 큰 질문이네요.”

펄 S. 벅:
“Topic 4에서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이승윤:
“그렇죠.”

펄 S. 벅:
“서희도 지나갑니다. 길상도 지나갑니다. 월선도 지나갑니다. 조준구도 지나갑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모두 지나면서 남는 것은 생명이라는 뜻입니까?”

이승윤은 대답하기 전에 잠시 생각했다.

이승윤:
“그렇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안느 허시:
“그런데 ‘생명’을 너무 추상적인 말로 만들면 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이승윤:
“맞습니다.”

폴 리쾨르:
“생명은 누군가의 실제 삶 속에서 나타나니까요.”

이승윤:
“서희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길상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월선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펄 벅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펄 S. 벅:
“조준구의 방식으로도요?”

잠시 침묵.

이승윤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승윤: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정현백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현백:
“그 말은 조금 설명해야겠네요.”

이승윤:
“생명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펄 S. 벅:
“살아 있으려는 욕망도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으니까요.”

이승윤:
“그렇습니다.”

폴 리쾨르:
“살아가는 것과 잘 살아가는 것은 다른 문제군요.”

이승윤:
“네.”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그렇다면 박경리의 생명사상을 단순히 ‘살아남아라’라고 읽어서는 안 되겠네요.”

이승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현백:
“사람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마리안느 허시:
“가족과도 연결되어 있고.”

주디스 허먼:
“공동체와도 연결되어 있고.”

펄 S. 벅:
“땅과도 연결되어 있고.”

폴 리쾨르:
“죽은 사람들의 기억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승윤이 말했다.

이승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단지 생존이 아니라, 다른 생명을 짓밟지 않으면서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펄 벅이 고개를 끄덕였다.

펄 S. 벅:
“조준구도 살고 싶어 했습니다.”

정현백:
“하지만 다른 사람을 밀어내면서 살려고 했죠.”

이승윤:
“그래서 생명이라는 말에는 관계가 함께 들어가야 합니다.”

펄 벅이 두 책을 다시 바라보았다.

『대지』.

『토지』.

그녀가 말했다.

펄 S. 벅:
“Topic 1에서 우리는 인간이 땅을 소유하는지, 땅이 인간을 소유하는지 물었습니다.”

폴 리쾨르:
“기억합니다.”

펄 S. 벅:
“지금은 둘 다 조금 틀린 질문처럼 느껴집니다.”

마리안느 허시:
“왜요?”

펄 벅은 창밖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펄 S. 벅:
“인간이 땅을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땅이 인간을 소유한다고 말하기도 이상합니다.”

잠시 멈췄다.

“서로 잠시 만나는 것이겠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펄 S. 벅:
“인간과 땅이 잠시 만납니다.”

“사람과 사람이 잠시 만납니다.”

“한 세대와 다음 세대가 잠시 만납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도 잠시 만납니다.”

폴 리쾨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폴 리쾨르:
“그리고 결국 헤어집니다.”

펄 S. 벅:
“네.”

마리안느 허시가 조용히 물었다.

마리안느 허시:
“그러면 죽은 사람들은 어디에 남습니까?”

펄 벅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승윤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폴 리쾨르가 입을 열었다.

폴 리쾨르:
“기억 속에 남을 수 있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하지만 기억도 언젠가는 사라질 수 있죠.”

폴 리쾨르:
“그렇습니다.”

주디스 허먼:
“그래서 생명이 계속된다는 말을 할 때, 죽은 사람들을 지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현백:
“이름도 남지 못한 사람들도요.”

마리안느 허시: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도.”

이승윤이 말했다.

이승윤:
“생명이 계속된다는 것은 그들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폴 리쾨르: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대신해서 평생 고통받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마리안느 허시가 그를 바라보았다.

마리안느 허시:
“기억하면서도 살아가야 한다.”

폴 리쾨르:
“네.”

펄 벅은 잠시 생각하다가 모두에게 물었다.

펄 S. 벅:
“만약 여러분이 서희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면 무엇을 묻겠습니까?”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당신이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마리안느 허시가 말했다.

마리안느 허시:
“당신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기억하게 하고, 무엇은 넘겨주고 싶지 않았습니까.”

주디스 허먼이 말했다.

주디스 허먼:
“당신이 조준구 없는 삶을 처음 상상한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폴 리쾨르가 말했다.

폴 리쾨르:
“당신의 과거가 더 이상 당신의 미래 전체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습니까.”

이승윤은 잠시 침묵했다.

이승윤:
“저라면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다시 같은 삶을 살겠습니까?”

방 안이 조용해졌다.

펄 벅이 얼굴을 찌푸렸다.

펄 S. 벅:
“저는 그 질문에는 조금 조심하고 싶습니다.”

주디스 허먼:
“저도요.”

이승윤:
“왜요?”

주디스 허먼:
“고통을 겪은 사람에게 ‘그래도 그 삶을 다시 선택하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그 고통까지 긍정해야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사람은 자기 삶을 사랑하면서도, 그 안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들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현백:
“그렇다고 그 삶이 가치 없었던 것도 아니고요.”

이승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윤:
“그렇군요.”

펄 벅이 말했다.

펄 S. 벅:
“오란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펄 S. 벅:
“그녀가 고통받았기 때문에 위대했던 것이 아닙니다.”

잠시 후 조용히 덧붙였다.

“그녀가 살았기 때문에 그 삶이 중요했던 겁니다.”

이승윤이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이승윤:
“삶의 가치는 고통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햇빛이 더욱 낮아졌다.

펄 벅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마당 끝으로 걸어갔다.

바닥의 흙을 조금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렸다.

나머지 사람들도 조용히 바라보았다.

펄 S. 벅:
“처음에는 인간이 땅을 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손바닥의 흙을 바라보았다.

“그다음에는 땅이 인간을 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씩 손가락을 폈다.

흙이 손 사이로 떨어졌다.

“지금은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습니다.”

흙이 다시 땅으로 돌아갔다.

“잠시 만나는 것이겠죠.”

이승윤도 밖으로 나왔다.

이승윤:
“『토지』에서는 집안이 무너집니다.”

“다시 일어섭니다.”

“사람이 태어납니다.”

“사람이 죽습니다.”

“사랑합니다.”

“배신합니다.”

“떠납니다.”

“돌아옵니다.”

“나라를 잃습니다.”

“그리고 해방을 맞습니다.”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그런데 해방이 왔다고 모든 문제가 끝난 것도 아니죠.”

이승윤:
“그렇습니다.”

펄 벅이 『토지』와 『대지』를 돌아보았다.

펄 S. 벅:
“그러고 보면 두 제목 모두 결국 같은 것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리안느 허시:
“무엇을요?”

펄 벅이 말했다.

“땅 위를 지나가는 생명.”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멀리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왔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웃었다.

평범한 저녁이 시작되고 있었다.

펄 벅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펄 S. 벅:
“결국 인간은 왜 살아가는 걸까요?”

이승윤이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저녁빛이 내려앉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승윤:
“꼭 이유가 있어서만은 아닐 겁니다.”

잠시 멈췄다.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날도 있습니다.”

주디스 허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 허먼:
“어떤 날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마리안느 허시가 말했다.

마리안느 허시:
“기억하면서.”

정현백이 말했다.

정현백:
“서로를 살아 있게 하면서.”

폴 리쾨르가 말했다.

폴 리쾨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펄 벅은 땅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에는 이제 흙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웃었다.

해가 산 너머로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아이를 씻기고 있었다.

누군가는 오늘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잃어버린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아무 이유도 찾지 못한 채 내일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지』의 이야기는 끝날 수 있다.

하지만 땅 위의 생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글

park kyungni toji

다섯 번의 대화는 하나의 긴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땅을 이야기했습니다.

왕룽에게 땅은 생존과 상승의 기반이었습니다.

최서희에게 땅은 훨씬 더 복잡했습니다.

가족.

기억.

상실.

정의.

그리고 빼앗기기 전의 자기 자신.

그래서 첫 번째 질문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인간도 되돌아오는가.

답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서희는 땅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습니다.

잃어버린 어린 시절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날 밤에도 죽은 사람들은 죽어 있습니다.

여기서 Part 2는 중요한 구별을 만들었습니다.

정의와 복수는 같지 않습니다.
복수와 회복도 같지 않습니다.
용서와 자유 역시 같은 말이 아닙니다.

빼앗긴 것을 돌려받는 일은 중요합니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회복은 과거가 사라지는 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가 더 이상 내 미래의 모든 문장을 대신 쓰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것이 회복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그 질문은 곧 한으로 이어졌습니다.

한을 단순히 슬픔이나 원망이나 트라우마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개인의 상처와 가족의 기억.

역사적 폭력과 침묵.

사랑과 기다림.

억울함과 분노가 서로 겹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기억하는 것과 미워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다릅니다.

과거를 기억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세대가 반드시 같은 증오를 물려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한을 아이의 운명으로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은 기억을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기억이 다음 세대의 선택을 대신하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Part 2는 또 하나의 위험을 피했습니다.

고통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

한이 사람을 살렸다고 말하면, 고통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은 사람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전쟁도, 식민지 지배도, 폭력도 사람에게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화는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한이 사람을 살린 것이 아니다.
한을 안고도 살아가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가 존중해야 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이 있었는데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생명입니다.

그리고 살아남지 못한 사람을 약했다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Topic 4에서는 역사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사람의 이름은 남습니다.

정치를 바꾼 사람의 이름도 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밥을 해 준 사람.

아이를 키운 사람.

병자를 돌본 사람.

기다린 사람.

가족을 이어 간 사람의 이름은 쉽게 사라집니다.

그래서 펄 벅은 역사에 대한 질문을 바꿉니다.

“누가 역사에 이름을 남겼는가”가 아니라
“누가 사람들이 다음 날까지 살아 있게 했는가.”

그 질문은 오란을 다시 보게 합니다.

공월선을 다시 보게 합니다.

그리고 『토지』의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합니다.

마지막 Topic 5에서는 모든 질문이 하나로 모였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

사랑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었습니다.

희망 때문이라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책임, 기억, 한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유를 찾기 전에 먼저 일어납니다.

물을 마십니다.

문을 엽니다.

밥을 합니다.

아이에게 대답합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릅니다.

삶은 때로 거대한 결심보다 그런 작은 행동 속에서 계속됩니다.

그래서 Part 2는 하나의 조심스러운 답에 도달했습니다.

생명.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단순한 생존 본능이 아닙니다.

조준구 역시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짓밟으며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생명사상은 단순히 살아남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생명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땅의 의미도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인간이 땅을 소유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에는 땅이 인간을 품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펄 벅은 다른 생각에 도달합니다.

인간과 땅은 서로를 영원히 소유하지 않는다.
잠시 만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도 잠시 만납니다.

세대와 세대도 잠시 만납니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도 잠시 만납니다.

그리고 헤어집니다.

그렇다고 그 만남이 의미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펄 벅의 손에서 흙이 다시 땅으로 떨어집니다.

『대지』와 『토지』는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그리고 있지만, 마지막에는 비슷한 것을 바라봅니다.

땅 위를 지나가는 생명.

그래서 Part 2의 마지막 질문은 처음의 질문과 조금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물었습니다.

왜 인간은 살아가는가.

그러나 다섯 번의 대화를 지나고 나면 더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살아 있게 할 것인가.

Short Bios:

펄 S. 벅

미국 소설가이자 『대지』의 작가. 중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농민, 가족, 가난, 여성, 전통과 변화, 인간과 땅의 관계를 작품 속에 담았습니다. 193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대지』의 왕룽과 오란을 『토지』의 인물들과 비교하며 땅과 생명의 의미를 묻습니다.

이승윤

박경리 『토지』의 서사 구조와 생명사상을 연구해 온 한국문학 연구자. 『토지』의 수많은 인물이 만들어 내는 다성적 구조와 인간, 공동체, 자연의 관계를 중심으로 작품을 읽습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토지』의 중심을 한 인물에 한정하지 않고 생명이라는 더 큰 질문으로 연결합니다.

주디스 허먼

트라우마와 회복에 관한 연구로 잘 알려진 정신의학자. 폭력 이후의 안전, 기억, 선택, 관계 회복 문제를 탐구해 왔습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정의와 회복, 복수와 자유, 용서와 치유를 구별하며, 고통을 미화하지 않는 시각을 제시합니다.

마리안느 허시

문학과 문화, 기억 연구를 해 온 학자. 특히 이전 세대의 경험이 사진, 이야기, 침묵, 가족 감정을 통해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포스트메모리 개념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한과 역사적 기억이 세대를 넘어 어떻게 남는지를 묻습니다.

정현백

한국의 역사학자이자 여성사 연구자. 여성, 가족, 민족주의, 사회운동, 역사에서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을 연구해 왔습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전쟁과 정치만이 아니라 먹이고, 돌보고, 기다리고, 가족을 이어 온 행위 또한 역사로 보아야 하는지 묻습니다.

폴 리쾨르

프랑스 철학자. 기억, 망각, 용서, 역사, 서사적 정체성에 관한 깊은 사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인간이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그 과거가 미래 전체를 결정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합니다.


이 글의 대화는 실제 대담이 아닙니다. 각 인물의 저술, 연구 분야,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상과 『토지』의 주제를 바탕으로 구성한 가상의 문학적 대화입니다. 대화 속 문장은 실제 발언이나 직접 인용이 아닙니다.

]]>
https://tabletalk.kr/park-kyungni-toji-expert-dialogue/feed/ 0
박경리 『토지』 인물 대화: 최서희와 김길상이 묻는 고향, 한, 사랑 그리고 삶 https://tabletalk.kr/park-kyungni-toji-character-dialogue/ https://tabletalk.kr/park-kyungni-toji-character-dialogue/#respond Thu, 10 Sep 2026 22:55:42 +0000 https://tabletalk.kr/?p=1435

들어가는 글

박경리의 『토지』는 땅을 둘러싼 이야기이면서,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인간이 무엇을 잃고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 작품이다.

평사리의 최참판댁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한 가족의 몰락과 복수에 머물지 않는다.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사랑하면서도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 나라를 빼앗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하루를 견딘 사람들의 삶으로 넓어진다.

이번 대화에서는 『토지』의 주요 인물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다섯 가지 질문과 마주한다.

고향은 땅인가, 사람인가, 기억인가.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상처도 치유되는가.

한은 사람을 무너뜨리는가, 아니면 살아가게 하는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많은 것을 잃고도 인간은 왜 계속 살아가는가.

최서희, 김길상, 이용, 공월선, 김환, 조준구.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그들이 선택한 삶은 모두 달랐다.

누군가는 되찾으려 했고, 누군가는 떠났으며, 누군가는 기다렸고, 누군가는 사랑했고, 누군가는 빼앗았고, 누군가는 그저 하루를 버텼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토지』라는 제목도 조금씩 다른 뜻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소유해야 할 땅이었다.

그다음에는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되었다.

그리고 기억과 가족, 한과 역사를 담는 장소가 되었다.

마지막에는 한 가지 질문만 남는다.

과연 사람이 땅을 소유하는 것일까.

아니면 땅이 수많은 인간의 삶을 잠시 받아 주고, 다음 세대로 넘겨주는 것일까.

Topic 1: 고향은 장소인가, 사람인가, 기억인가

park kyungni toji

해가 지고 있었다.

평사리 들판 너머로 마지막 햇빛이 길게 누웠다. 섬진강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벼 사이를 지나 오래된 최참판댁 마당까지 올라왔다.

아무도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서희는 마당 끝에 서서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상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용이는 마당 한쪽의 흙을 발끝으로 천천히 밟았다. 월선은 말없이 먼 산을 바라보았고, 김환은 오래전에 사라진 누군가를 찾듯 낡은 기둥에 손을 얹었다.

조준구만이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조준구: 결국 다시 왔군.

서희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서희: 어디로요?

조준구: 뭐?

서희: 어디로 돌아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조준구가 피식 웃었다.

조준구: 여기가 평사리 아니냐. 최참판댁이고. 네가 그렇게 되찾고 싶어 했던 땅이고.

그제야 서희가 천천히 돌아섰다.

서희: 땅이 그대로 있다고 해서, 그곳이 예전의 고향입니까?

조준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길상이 들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길상: 사람은 없지.

서희가 길상을 바라보았다.

길상: 집은 남아 있을 수 있어. 산도 남아 있고, 강도 흐르지.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없어.

용이가 낮게 웃었다.

용이: 그러면 고향은 사람이란 말인가?

길상: 모르겠소.

용이: 나도 모르겠네.

월선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월선: 나는 알아요.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월선: 내 고향은 사람이었어요.

용이의 표정이 굳었다.

월선은 그를 보지 않았다.

월선: 그래서 더 힘들었어요. 땅은 찾아갈 수 있잖아요. 집도 찾아갈 수 있고. 산도 멀리서라도 볼 수 있고. 그런데 사람이 고향이 되어 버리면...

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

월선: 그 사람에게 돌아갈 수 없을 때는 어디로 가야 해요?

용이가 고개를 숙였다.

서희가 월선을 오래 바라보았다.

평사리의 저녁바람만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Question 1

고향을 고향으로 만드는 것은 땅인가, 사람인가, 기억인가?

서희: 나는 오랫동안 땅이라고 생각했어요.

길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빼앗겼으니까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집도, 논도, 밭도. 최씨 집안의 것이었으니까.

조준구: 역시 땅이었군.

서희가 차갑게 그를 바라보았다.

서희: 끝까지 들으세요.

조준구가 입을 다물었다.

서희: 그런데 되찾고 나서 알았어요. 내가 원했던 것은 땅만이 아니었다는 걸.

길상: 무엇이었소?

서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서희: 어머니였을지도 모르고... 어린 시절이었을지도 모르고...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서희: 아무 일도 일어나기 전의 나였을지도 모르죠.

길상의 눈빛이 달라졌다.

서희: 나는 땅을 되찾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줄 알았어요.

용이: 돌아가지 않더군.

서희: 네.

용이: 사람은 땅처럼 되찾을 수 없으니까.

조준구가 팔짱을 꼈다.

조준구: 그러면 이상하지 않나? 그렇게까지 땅을 되찾으려고 살았으면서, 이제 와서 땅이 중요하지 않았다고?

서희: 중요하지 않았다고 한 적 없습니다.

조준구: 그럼?

서희: 땅이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었던 겁니다.

김환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김환: 맞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김환: 사람들은 땅을 밟고 산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땅에는 죽은 사람도 함께 산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김환: 어머니가 걸었던 길. 사랑했던 사람이 앉았던 자리. 아이가 뛰놀던 마당.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방. 그런 것들이 다 땅에 붙어 있다.

월선: 그래서 어떤 곳에 가면 갑자기 가슴이 아픈가 봐요.

김환: 기억이 먼저 알아보니까.

용이가 월선을 바라보았다.

월선은 여전히 그를 보지 않았다.

용이: 나는 평생 땅에서 일했네. 그런데 내 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별로 없었어.

그가 흙을 한 줌 집었다.

용이: 이상하지. 내 것이 아닌 땅에서 평생 땀을 흘렸는데도 이 흙 냄새를 맡으면 집에 온 것 같으니.

서희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그녀에게 그 말은 불편한 진실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평사리는 빼앗긴 소유지였다.

용이에게 같은 평사리는 평생 일했던 삶의 자리였다.

서희: 그러면 이 땅은 누구의 고향이었을까요?

용이가 웃었다.

용이: 그걸 이제 묻는군.

서희도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용이: 최씨 집안만의 것은 아니었겠지.

조준구가 말했다.

조준구: 결국 내 말도 조금은 맞다는 건가? 땅에 이름을 써 놓았다고 영원히 그 사람 것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

서희가 그를 보았다.

서희: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 참 편리하게 들리는군요.

용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월선도 작게 웃었다.

긴장했던 공기가 잠깐 풀렸다.

길상이 말했다.

길상: 어쩌면 고향은 땅, 사람, 기억 가운데 하나가 아닌 것 같소.

서희: 그러면요?

길상: 셋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던 시간.

서희는 다시 들판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Question 2

고향을 떠난 사람은 정말 그곳에서 떠날 수 있는가?

김환이 천천히 마당을 걸었다.

김환: 떠나는 건 어렵지 않다.

길상: 돌아오는 게 어렵지.

김환: 아니.

길상이 그를 바라보았다.

김환: 정말 떠나는 게 어렵다는 말이다.

그는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김환: 몸은 떠날 수 있어. 여기서 간도로 갈 수도 있고, 서울로 갈 수도 있고, 바다를 건널 수도 있지. 그런데 여기 있는 것은 같이 간다.

서희: 기억.

김환: 기억만이 아니야.

월선: 한도 따라가죠.

김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김환: 그렇지.

월선은 이번에는 용이를 바라보았다.

월선: 사람도 따라가요.

용이가 숨을 들이마셨다.

월선: 실제 사람이 아니라 마음속의 사람이요.

용이: 월선아...

월선: 괜찮아요. 이제는 말할 수 있어요.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월선: 나는 여러 번 당신을 잊어 보려고 했어요.

용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월선: 미워하면 잊을 수 있을 줄 알았고, 체념하면 잊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 되더라고요.

용이: 미안하다.

월선이 고개를 저었다.

월선: 지금 사과를 받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월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에요. 어떤 사람은 고향을 떠나도 고향을 등에 지고 다녀요. 어떤 사람은 사람 하나를 마음에 넣고 평생 데리고 다니고요.

서희가 조용히 말했다.

서희: 나도 평사리를 가지고 간도로 갔던 것 같아요.

길상: 그랬소.

서희: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

길상: 당신이 평사리를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알고 있었소.

서희: 왜 말하지 않았어요?

길상: 당신에게는 돌아올 이유가 필요했으니까.

서희: 복수였어요.

길상: 처음에는.

서희의 얼굴이 굳었다.

길상: 나중에는 아니었소.

서희: 무엇이었는데요?

길상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길상: 당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으려 했던 것 같소.

그 말에 서희가 침묵했다.

조준구가 이번에는 비웃지 않았다.

용이가 말했다.

용이: 그러면 고향이라는 건 참 무서운 거구먼.

월선: 왜요?

용이: 아무리 멀리 도망가도 따라오잖아.

김환이 말했다.

김환: 그래서 고향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지.

서희: 살린다고요?

김환: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견디는 사람도 있으니까.

월선: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요?

김환: 그럴 때가 더 많지.

Question 3

돌아온 고향이 기억 속의 고향과 다르다면, 그래도 고향인가?

어느새 해는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서희가 천천히 옛집의 기둥을 만졌다.

서희: 이상하네요.

길상: 무엇이?

서희: 그렇게 돌아오고 싶었는데...

그녀가 마당을 둘러보았다.

서희: 돌아와 보니 내가 기억했던 곳이 아니에요.

용이: 집이 변해서?

서희가 고개를 저었다.

서희: 내가 변해서.

그 말에 모두 조용해졌다.

서희: 어린 서희가 이 마당을 보던 눈과 지금 내가 보는 눈은 다르잖아요.

월선이 말했다.

월선: 그러면 우리가 돌아가는 고향은 실제로는 없는 걸까요?

김환: 있을 수도 있지.

월선: 어디에요?

김환이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가 가슴을 가리켰다.

김환: 여기와 여기.

조준구가 말했다.

조준구: 그러면 땅은 필요 없다는 말 아닌가?

이번에는 서희가 화내지 않았다.

서희: 아니요.

조준구: 또 아니라고?

서희: 실제 장소가 있으니까 기억도 돌아갈 곳이 있는 겁니다.

그녀는 마당의 흙을 내려다보았다.

서희: 이 땅이 내 기억과 똑같을 필요는 없어요.

길상이 조용히 물었다.

길상: 그러면 무엇이면 되오?

서희는 한참 생각했다.

서희: 내가 여기서 살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곳.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문장이 모두에게 다른 의미로 닿았다.

용이에게는 노동이었다.

월선에게는 사랑이었다.

김환에게는 떠돌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

길상에게는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기억이었다.

조준구에게는 자신이 차지하려 했던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묻는 말이었다.

길상이 서희 옆으로 다가왔다.

길상: 이제 돌아온 것 같소?

서희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오래 생각한 뒤 말했다.

서희: 모르겠어요.

길상이 미소를 지었다.

길상: 그게 당신답군.

서희도 조금 웃었다.

그러다 그녀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서희: 그런데 한 가지는 알 것 같아요.

월선: 무엇을요?

서희: 나는 평생 이 땅을 되찾으려고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잠시 조준구를 바라보았다.

조준구도 피하지 않았다.

서희: 그런데 지금 여기 서 있으니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용이: 무슨 생각?

서희가 천천히 말했다.

서희: 내가 정말 되찾고 싶었던 것은...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서희: 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조준구가 눈을 좁혔다.

조준구: 그럼 뭐였는데?

서희가 대답하지 않았다.

길상도 대신 답하지 않았다.

월선도 기다렸다.

서희는 오래전 가족들이 걸었던 마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서희: 빼앗기기 전의 나.

바람이 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준구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자신만만한 표정이 사라졌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증오만 있는 눈이 아니었다.

서희: 그러니 이제 당신에게 물어봐야겠군요.

조준구: 나한테?

서희: 네.

서희가 한 걸음 그에게 가까이 갔다.

서희: 당신에게 빼앗긴 것을 모두 되찾았을 때...

잠시 침묵했다.

서희: 왜 내 상처는 그대로였을까요?

평사리에는 완전히 밤이 내려앉았다.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이미 다음 이야기를 열고 있었다.

다음 Topic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상처도 치유되는가

Topic 2: 빼앗긴 것을 되찾으면 상처도 치유되는가

park kyungni toji

서희: 당신에게 빼앗긴 것을 모두 되찾았는데……

서희는 조준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서희: 왜 내 상처는 그대로였을까요?

조준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평사리 들판을 지나던 바람이 멎은 듯했다.

용이가 조준구를 바라보았다.

길상은 서희 곁에 서 있었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월선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조준구가 입을 열었다.

조준구: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서희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조준구: 네 상처가 낫지 않은 것까지 내 책임인가?

서희: 무슨 뜻이죠?

조준구: 네가 원한 것은 되찾았잖아.

서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준구: 땅도 되찾았고, 재산도 되찾았고, 다시 최씨 집안의 주인이 되었어. 나도 잃을 만큼 잃었고.

그가 잠시 멈췄다.

조준구: 그런데 이제 와서 네 마음까지 내가 고쳐 놓으라고?

서희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길상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길상: 서희.

서희는 멈췄다.

하지만 조준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서희: 당신은 아직도 모르는군요.

조준구: 뭘?

서희: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준구: 땅 아니었나?

서희: 가족이었습니다.

조준구가 입을 다물었다.

서희: 어린 시절이었고, 집이었고, 내가 세상을 믿을 수 있었던 마음이었어요.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무거웠다.

서희: 당신은 땅을 빼앗았다고 생각했겠죠.

잠시 침묵했다.

서희: 나는 세상을 빼앗겼습니다.

Question 1

빼앗긴 것을 되찾는 것은 정의인가, 복수인가?

조준구가 헛웃음을 지었다.

조준구: 결국 나를 심판하려는 자리였군.

서희: 심판받을 일이 없었다고 생각합니까?

조준구: 내가 잘했다는 말은 아니야.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조준구: 하지만 한 가지는 묻고 싶군.

용이: 물어봐.

조준구가 평사리 들판을 가리켰다.

조준구: 저 땅은 원래 누구 것이었지?

서희: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조준구: 최씨 집안 것이었나?

서희: 그랬습니다.

용이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조준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조준구: 정말?

그가 용이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저 땅에서 평생 일한 사람은 누구였지?

서희가 조준구를 노려보았다.

조준구: 씨를 뿌린 사람은? 벼를 벤 사람은? 겨울을 견디고 다시 밭으로 나온 사람은?

용이: 우리 같은 사람들이었지.

조준구: 그런데 땅은 최씨 집안 것이었다.

서희: 그래서 당신이 빼앗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조준구: 그런 말이 아니야.

서희: 바로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조준구: 아니.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내가 남의 것을 탐냈다고 말하지. 맞아. 탐냈다. 그런데 땅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욕망 위에 세워진 것 아닌가?

길상: 자기 욕망을 설명하는 것과 정당화하는 것은 다르오.

조준구가 길상을 바라보았다.

조준구: 너는 언제나 그렇게 깨끗한 척하는군.

길상: 깨끗하다고 한 적 없소.

조준구: 그러면?

길상: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해서 당신의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오.

조준구가 대답하려 했지만 용이가 먼저 말했다.

용이: 그래도 준구 말에 하나는 있네.

서희가 용이를 바라보았다.

용이: 아씨,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시오.

서희: 말씀하세요.

용이: 우리 같은 사람에게 땅은 이상한 것이었소.

그는 어둠 속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용이: 우리가 평생 갈고 심고 거두어도 우리 것은 아니었으니까.

서희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용이: 그러니 최씨 집안이 땅을 되찾은 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오. 준구가 한 짓이 옳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고.

그가 서희를 바라보았다.

용이: 다만 아씨에게는 '되찾은 땅'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땅이었다는 거요.

서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희: 맞습니다.

조준구가 놀란 듯 그녀를 보았다.

서희: 그것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조준구를 보았다.

서희: 하지만 당신이 저지른 일을 농민들의 삶 뒤에 숨기지는 마세요.

조준구의 얼굴이 굳었다.

서희: 당신은 그들을 위해 땅을 원한 것이 아니니까.

침묵.

서희: 당신 자신을 위해 원했죠.

조준구는 반박하지 않았다.

월선이 조용히 말했다.

월선: 그러면 같은 땅을 원해도 마음은 다를 수 있겠네요.

길상: 그렇소.

월선: 빼앗긴 것을 돌려받으려는 마음과,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마음.

김환: 그리고 그 둘 사이에도 욕망은 있다.

서희가 김환을 바라보았다.

김환: 정의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드물다. 복수만으로 움직이는 사람도 드물고.

서희: 그러면 나는 어느 쪽이었다고 생각하세요?

김환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김환: 둘 다였겠지.

서희의 눈이 흔들렸다.

길상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김환: 되찾아야 할 것은 있었다. 그것은 정의였을 것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김환: 그러나 준구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을 테고.

서희는 부정하지 않았다.

서희: 있었습니다.

조준구가 그녀를 보았다.

서희: 아주 많이.

Question 2

나를 괴롭힌 사람이 고통받으면 내 상처는 조금이라도 나아지는가?

조준구가 천천히 물었다.

조준구: 그래서?

서희가 그를 보았다.

조준구: 내가 무너졌을 때 기뻤나?

서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준구: 솔직히 말해 봐.

서희: 기뻤습니다.

월선이 서희를 바라보았다.

서희는 피하지 않았다.

서희: 당신이 가진 것을 잃었을 때 기뻤어요.

조준구의 턱이 굳어졌다.

서희: 당신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느꼈던 두려움을 당신도 느끼기를 바랐어요.

조준구: 만족했겠군.

서희: 잠깐은.

그 한마디에 조준구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준구: 잠깐?

서희: 네.

조준구: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서희: 그래서 더 이상했습니다.

서희가 마당을 바라보았다.

서희: 평생 기다린 순간이 왔는데, 생각했던 만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월선: 마음이요?

서희: 네.

서희: 그날 밤에도 죽은 사람들은 죽어 있었어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희: 내 어린 시절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가 조준구를 보았다.

서희: 당신이 불행해져도 내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더군요.

조준구가 처음으로 시선을 피했다.

용이가 낮게 말했다.

용이: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하지.

월선: 무엇이요?

용이: 우리를 아프게 한 사람이 아프면 내 아픔도 줄어들 것 같잖아.

월선: 네.

용이: 그런데 아픔이 둘이 될 뿐일 때가 있어.

월선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월선: 그래도 억울한 사람에게 "복수하지 마세요"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어요.

길상: 그렇소.

월선: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용서를 말하면 너무 쉽잖아요.

서희가 월선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처음으로 따뜻함이 보였다.

서희: 맞아요.

길상이 서희에게 말했다.

길상: 나는 당신에게 용서하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소.

서희: 알고 있어요.

길상: 용서는 명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김환이 말했다.

김환: 더구나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면 안 된다.

월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상처 입은 사람에게 또 하나의 짐을 주는 셈이니까.

조준구가 씁쓸하게 웃었다.

조준구: 이상한 자리군. 아무도 나를 용서하라고 하지 않네.

서희: 받고 싶습니까?

그 질문에 조준구가 멈췄다.

서희: 내 용서가 필요합니까?

조준구: 필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이번에는 서희가 놀랐다.

조준구: 하지만 네가 용서한다고 해서 내가 했던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서희: 맞습니다.

조준구: 그러면 용서라는 게 무슨 소용이지?

월선이 조용히 대답했다.

월선: 어쩌면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닐지도 몰라요.

조준구: 그러면?

월선은 서희를 바라보았다.

월선: 살아남은 사람이 계속 살아가기 위한 것일 수도 있죠.

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Question 3

용서하지 않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서희: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갑작스러웠다.

조준구가 서희를 바라보았다.

길상도 그녀를 보았다.

서희: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나는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조준구: 예상했어.

서희: 하지만……

서희가 숨을 들이쉬었다.

서희: 이제 당신 때문에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조준구의 표정이 변했다.

서희: 예전에는 달랐어요. 당신에게서 땅을 되찾는 것이 내 삶의 이유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녀는 평사리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서희: 그러면 결국 내 삶의 중심에 당신이 있었던 겁니다.

조준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희: 당신을 미워하면서도, 내 인생을 당신에게 묶어 두고 있었던 거죠.

길상이 아주 조용히 말했다.

길상: 그 끈을 놓는 것이 용서와 같을 필요는 없소.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용서하지 않아도 놓을 수 있소.

월선: 잊지 않아도요?

길상: 잊지 않아도.

김환: 미워하지 않는 것과 잊는 것도 다르지.

용이가 말했다.

용이: 그럼 용서도 안 하고, 잊지도 않고, 그래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건가?

김환: 사람은 실제로 그렇게 많이 살아간다.

월선이 희미하게 웃었다.

월선: 그러네요.

용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월선: 나는 잊지 않았어요.

용이의 얼굴이 굳었다.

월선: 당신도, 내가 아팠던 것도.

용이: 월선아……

월선: 그런데 그 아픔만으로 살지는 않았어요.

용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월선: 그것도 살아가는 것이겠죠.

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그렇지.

조준구가 서희에게 물었다.

조준구: 그러면 나는 이제 네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가?

서희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서희: 아니요.

조준구가 뜻밖이라는 듯 눈을 들었다.

서희: 당신은 내가 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서희: 하지만 이제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닙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조준구가 처음으로 서희의 눈을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용이가 낮게 말했다.

용이: 사람을 미워하는 데도 힘이 많이 들지.

월선: 사랑하는 것만큼요?

용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용이: 어쩌면 더 많이.

월선이 씁쓸하게 웃었다.

김환: 그런데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길상: 무엇이오?

김환이 서희를 바라보았다.

김환: 놓는다고 해서 상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잖아.

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잊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고, 용서하지 않고도 앞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상처는 남는다.

월선: 그러면 그 상처는 어디로 가죠?

김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희가 말했다.

서희: 없어지지 않는다면……

그녀는 자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서희: 결국 여기 남겠죠.

월선도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월선: 오래 남아 있는 슬픔.

용이가 말했다.

용이: 말하지 못한 마음.

길상이 덧붙였다.

길상: 잊을 수 없는 사람.

김환이 말했다.

김환: 갚지 못한 원한도.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조준구가 낮게 말했다.

조준구: 후회도 있겠지.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준구는 아무도 보지 않았다.

평사리의 어둠 속에서 월선이 아주 천천히 한 단어를 말했다.

월선: 한.

아무도 그 말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서희가 월선을 바라보았다.

월선은 용이를 보았다.

김환은 어둠 너머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각자의 가슴속에는 서로 다른 한이 있었다.

그때 서희가 물었다.

서희: 그런데 한 가지가 궁금합니다.

길상: 무엇이오?

서희: 이 한이라는 것이……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서희: 우리를 평생 붙잡고 있는 걸까요?

월선이 조용히 물었다.

월선: 아니면 우리가 살아갈 힘이 되어 준 걸까요?

이번에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그들 모두의 삶을 향하고 있었다.

다음 Topic

한은 우리를 무너뜨리는가, 살아가게 하는가

Topic 3: 한은 우리를 무너뜨리는가, 살아가게 하는가

park kyungni toji

월선: 한.

그 한마디가 밤공기 속에 오래 남았다.

누구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같은 말을 알고 있다고 해서, 같은 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희에게는 빼앗긴 가족과 어린 시절이 있었다.

월선에게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있었다.

용이에게는 사랑하면서도 지키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

김환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운명이 있었다.

길상에게는 개인의 행복만을 바라볼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

조준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월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월선: 아까 서희 아씨가 물으셨죠.

서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한이 우리를 붙잡고 사는 건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지.

서희: 네.

월선이 희미하게 웃었다.

월선: 나는 오랫동안 한이 나를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용이가 고개를 들었다.

월선은 이번에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월선: 그런데 죽지는 않더라고요.

그 말이 너무 담담해서 더 아팠다.

월선: 아침이 오면 일어나야 했고, 배가 고프면 먹어야 했고, 누가 아프면 돌봐야 했어요.

그녀가 잠시 멈췄다.

월선: 마음은 끝난 것 같은데 몸은 계속 살아 있었어요.

용이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월선: 처음에는 그것이 잔인하다고 생각했어요.

서희: 무엇이요?

월선: 사람이 그렇게 슬픈데도 다음 날이 온다는 것이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월선: 그런데 나중에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어요.

길상: 어떻게?

월선은 어두운 들판을 바라보았다.

월선: 어쩌면 그게 생명인지도 모르겠다고.

Question 1

한은 잊어야 하는가, 품고 살아야 하는가?

용이: 잊을 수 있다면 잊는 게 낫지 않겠나.

월선이 그를 바라보았다.

용이는 그 시선을 견디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용이: 아니, 내가 할 말은 아니구나.

월선: 아니에요. 말해 보세요.

용이: 잊으면 덜 아프잖아.

월선: 그럴까요?

용이: 그렇지 않겠나?

월선은 한참 생각했다.

월선: 그런데 내가 당신을 잊으면……

용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아픈 것만 없어질까요?

용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월선: 좋았던 것도 같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침묵.

월선: 기다렸던 날도, 잠깐 행복했던 순간도, 당신이 나를 바라보던 눈도.

용이의 눈이 붉어졌다.

월선: 나는 아픔만 골라서 버릴 수가 없었어요.

서희가 조용히 말했다.

서희: 나도 그랬어요.

월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어머니를 잃은 기억을 없앨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김환: 그런데?

서희: 그 기억을 없애면 어머니까지 희미해질 것 같았어요.

김환의 표정이 굳었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서희: 그래서 붙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길상: 아픔을?

서희: 아니요.

잠시 생각했다.

서희: 사람을.

그 말에 월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월선: 맞아요.

서희: 그런데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픔까지 붙잡고 있었던 거죠.

김환이 낮게 말했다.

김환: 그게 한의 잔인한 점인지도 모르지.

용이: 무슨 말인가?

김환: 사랑과 아픔이 서로 엉켜 있어서 하나만 떼어낼 수 없다는 것.

길상이 물었다.

길상: 그러면 평생 품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오?

김환은 고개를 저었다.

김환: 품고 사는 것과 붙잡혀 사는 것은 다르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김환: 기억할 수는 있어. 그러나 그 기억에게 오늘의 삶까지 모두 내줄 필요는 없지.

월선이 아주 작게 말했다.

월선: 기억하되, 거기서 살지는 않는 것.

김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김환: 그래.

Question 2

한이 사라지면 나의 일부도 사라지는가?

조준구가 갑자기 웃었다.

크게 웃은 것은 아니었다.

조준구: 참 이상하군.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아까부터 너희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이라는 것이 무슨 귀한 유산이라도 되는 것 같아.

월선의 얼굴이 굳었다.

조준구: 아프면 버리면 되지. 왜 그렇게 소중하게 품고 있나?

서희가 차갑게 말했다.

서희: 버릴 수 있었으면 벌써 버렸겠죠.

조준구: 못 버린 건가, 안 버린 건가?

서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김환이 먼저 말했다.

김환: 좋은 질문이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김환: 정말 못 버린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버리지 않은 것인지.

서희: 내가 한을 원했다는 말입니까?

김환: 아니다.

그가 서희를 바라보았다.

김환: 다만 사람은 오래 품은 감정을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서희는 침묵했다.

김환: "나는 빼앗긴 사람이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김환: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다."

월선이 고개를 들었다.

김환: "나는 나라를 잃은 사람이다."

길상의 표정이 변했다.

김환: 그런 말이 너무 오래 계속되면, 어느 순간 사람은 묻게 된다.

용이: 뭘?

김환: 이것을 빼면 나는 누구인가.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서희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서희: 나는 오랫동안 "되찾아야 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길상: 알고 있소.

서희: 만약 되찾을 것이 없었다면……

그녀가 길상을 바라보았다.

서희: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을까요?

길상은 쉽게 답하지 않았다.

길상: 다른 이유를 찾았겠지.

서희: 그렇게 확신해요?

길상: 아니.

길상이 솔직하게 말했다.

길상: 하지만 당신의 생명은 복수보다 컸다고 믿소.

서희의 표정이 흔들렸다.

길상: 복수가 당신을 일으킨 날이 있었겠지. 분노가 당신에게 힘을 준 날도 있었을 것이오.

그는 서희를 바라보았다.

길상: 하지만 당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모든 것이 분노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서희: 그러면 무엇이었습니까?

길상: 사랑도 있었소.

서희가 말이 없었다.

길상: 죽은 사람을 사랑했고, 살아 있는 사람을 사랑했고, 지켜야 할 사람을 사랑했소.

월선이 말했다.

월선: 그러면 한이 사람을 살린 게 아니라……

길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한 속에 아직 사랑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걸까요?

이번에는 김환이 미소를 지었다.

김환: 그럴 수도 있겠지.

용이가 월선을 바라보았다.

용이: 그럼 네가 살아온 것도……

월선이 그의 말을 막았다.

월선: 당신 때문만은 아니에요.

용이가 멈췄다.

월선이 처음으로 조금 밝게 웃었다.

월선: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용이도 웃었다.

눈에는 아직 슬픔이 있었다.

월선: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많이 아팠어요. 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어요.

그녀는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월선: 나도 일했고, 사람을 돌봤고, 웃기도 했고, 다른 사람의 아픔도 보았어요.

그리고 용이를 바라보았다.

월선: 나는 당신을 사랑한 여자였지만, 그것만으로 끝나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용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이: 그래.

그 한마디에는 사과보다 더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Question 3

우리의 한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않고 끝낼 수 있는가?

길상이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길상: 개인의 한은 그래도 자기 가슴 안에서 끝낼 수 있을지 모른다.

김환이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그런데 나라의 한은 어떡하지?

아무도 가볍게 답하지 않았다.

길상: 나라를 빼앗겼다. 사람들이 죽었다. 고향을 떠났다. 이름과 말을 지키는 것조차 싸움이 되는 시대를 살았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길상: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잊으라고 할 수 있나?

서희: 안 됩니다.

대답은 단호했다.

서희: 잊어서는 안 됩니다.

월선: 그렇지만……

모두가 월선을 바라보았다.

월선: 미움까지 물려줘야 할까요?

서희의 표정이 멈췄다.

월선: 아이에게 "우리가 이렇게 아팠다"고 말하는 것과 "그러니 너도 저 사람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긴 침묵.

김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기억과 증오는 같은 것이 아니지.

길상: 역사를 잊지 않는 것과 증오를 의무로 만드는 것도 다르고.

용이: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서희: 무엇이요?

용이: 그렇게 깨끗하게 나눌 수 있겠느냐는 말이오.

그는 손으로 가슴을 가리켰다.

용이: 사람 마음이 책처럼 줄을 그어서 여기까지는 기억, 여기부터는 미움이라고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월선: 그렇죠.

용이: 부모가 울면서 이야기하면 아이는 그 눈물까지 기억할 거요.

서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용이의 말은 너무 현실적이었다.

김환이 말했다.

김환: 그래서 어려운 거다.

서희: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환은 한동안 생각했다.

김환: 사실을 말해야겠지.

서희: 그리고요?

김환: 아팠다고 말하고.

길상: 빼앗겼다고 말하고.

월선: 죽은 사람들의 이름도 기억하고.

용이: 그런데?

김환이 모두를 바라보았다.

김환: 다음에 무엇을 할지는 그 아이에게 남겨 두는 거다.

서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김환: 우리의 한을 아이의 운명으로 만들지 않는 것.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서희에게 깊이 들어갔다.

서희: 나는 내 아이들에게……

그녀가 말을 멈췄다.

길상이 기다렸다.

서희: 내가 잃은 것을 기억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길상: 그건 잘못이 아니오.

서희: 그런데 내가 미워한 것까지 물려주려고 한 적은 없었을까요?

길상은 대신 답하지 않았다.

서희도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월선이 말했다.

월선: 아마 우리 모두 그랬을 거예요.

용이: 뭘?

월선: 내가 아팠으니 네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녀가 잠시 웃었다.

월선: 그런데 알아주는 것과 대신 아파주는 것은 다른데.

서희가 월선을 바라보았다.

서희: 맞아요.

그때 조준구가 낮게 말했다.

조준구: 그렇다면 죄도 물려주지 말아야겠군.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서희: 무슨 뜻입니까?

조준구는 잠시 망설였다.

조준구: 아비가 잘못했다고 자식까지 평생 고개를 숙여야 하는가?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준구: 너희가 한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말자고 한다면……

그는 서희를 보았다.

조준구: 죄도 자식에게 물려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서희는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서희: 맞습니다.

조준구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서희: 당신의 죄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녀가 또렷하게 말했다.

서희: 당신의 자식이 대신 갚을 이유는 없습니다.

조준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희: 하지만 당신도 당신의 죄를 조상이나 시대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조준구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서희: 각자의 것은 각자가 짊어져야 합니다.

김환이 조용히 말했다.

김환: 그래야 끊을 수 있겠지.

월선: 무엇을요?

김환: 한이든 죄든, 대대로 운명처럼 내려가는 것을.

평사리에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차갑지 않았다.

용이가 말했다.

용이: 그러면 한을 없애는 것이 답은 아니겠군.

월선: 네.

용이: 잊는 것도 아니고.

월선: 네.

용이: 그럼 뭔가?

월선은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월선: 다른 것으로 만드는 것 아닐까요?

서희: 무엇으로요?

월선: 나는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웃었다.

월선: 하지만 내가 받은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주지 않는 것부터 시작할 수는 있겠죠.

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한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한이 어디로 갈지를 선택하는 것.

서희가 그 말을 되뇌었다.

서희: 어디로 갈지를 선택한다……

길상이 말했다.

길상: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복수로 보낼 것이고.

김환: 어떤 사람은 사랑으로.

용이: 어떤 사람은 그냥 참고 살겠지.

월선: 어떤 사람은 아이를 더 따뜻하게 안아 줄 수도 있고요.

모두가 조용해졌다.

서희가 말했다.

서희: 그렇다면 한이 우리를 살게 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월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한을 가지고도 살아가려 했던 우리가 있었던 거죠.

월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월선: 그 말이 더 좋아요.

서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여자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조준구가 물었다.

조준구: 그런데 말이야.

모두가 그를 보았다.

조준구: 자기 한을 다음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그가 길상을 바라보았다.

조준구: 나라의 한은 어떻게 할 건가?

길상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준구: 너는 개인의 미움은 내려놓으라고 하면서, 나라를 위해서는 싸웠잖아.

길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준구가 한 걸음 다가왔다.

조준구: 가족이 있는데도.

서희의 얼굴이 굳었다.

조준구: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이번에는 평사리의 밤공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조준구가 물었다.

조준구: 나라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상처를 남기는 것은……

그가 서희와 길상을 번갈아 보았다.

조준구: 정말 옳은 일이었나?

길상이 천천히 서희를 바라보았다.

서희도 그를 보고 있었다.

이번 질문에는 조준구의 악의만 있다고 할 수 없었다.

서희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서희: 그건……

그녀는 길상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서희: 나도 한번은 묻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다음 Topic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Topic 4: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park kyungni toji

서희: 그건……

서희는 길상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서희: 나도 한번은 묻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길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준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조준구: 왜? 이제 와서 대답하기 어렵나?

길상: 어렵소.

조준구가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조준구: 인정은 하는군.

길상: 쉬운 일이었다면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지도 않았겠지.

서희가 천천히 말했다.

서희: 나는 당신이 왜 그런 길을 택했는지 압니다.

길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나라를 빼앗긴 시대였고, 사람들이 잡혀가고, 죽고, 사라졌습니다. 누군가는 싸워야 했겠죠.

잠시 침묵했다.

서희: 그런데 이해하는 것과 아프지 않은 것은 다릅니다.

길상의 얼굴이 굳었다.

서희: 당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서희: 하지만 나에게는 당신이 필요했습니다.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서희: 아이들에게도 필요했고요.

길상은 대답하려 했지만 서희가 먼저 말했다.

서희: 그러니 오늘은 나라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남겨진 사람 이야기부터 했으면 좋겠습니다.

Question 1

나라와 가족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길상: 나는 그 둘을 정말 따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소.

서희: 하지만 실제로는 선택했죠.

길상이 멈췄다.

서희: 당신이 떠나는 순간, 나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길상: 맞소.

서희는 그 대답을 예상하지 못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내가 어떤 뜻으로 떠났든, 남겨진 당신에게는 선택처럼 보였을 것이오.

서희: 나라가 나보다 중요했던 겁니까?

길상이 바로 답하지 않았다.

조준구가 비웃듯 말했다.

조준구: 이제 재미있어지는군.

용이가 그를 노려보았다.

용이: 조용히 좀 해.

조준구는 어깨를 으쓱했다.

길상이 서희에게 말했다.

길상: 당신보다 나라가 더 중요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소.

서희: 그런데?

길상: 당신과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무너지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소.

서희가 조용히 들었다.

길상: 나라가 없으면 가족도 위험해진다. 집도, 이름도, 말도, 아이들의 앞날도.

서희: 그래서 가족을 떠났다?

길상: 그래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소.

서희: 당신은 그 생각이 옳았다고 아직도 믿습니까?

길상은 오래 침묵했다.

길상: 옳았다고 믿고 싶소.

서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길상: 하지만 그 선택 때문에 당신이 아팠다는 사실까지 옳다고 말할 수는 없소.

그 말에 서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월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월선: 어쩌면 어떤 선택은 옳고 그름으로만 말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조준구가 말했다.

조준구: 그건 편리한 말이지.

월선이 그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사람을 아프게 해 놓고 "시대가 그랬다"고 하면 끝인가?

길상이 조준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길상: 아니오. 그래서 내가 책임을 피할 생각은 없소.

조준구: 무슨 책임?

길상: 내가 선택한 일 때문에 가족이 겪은 외로움과 두려움.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시대가 나를 밀었다고 해서, 내가 한 선택까지 시대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소.

김환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그 말은 맞다.

용이가 한숨을 쉬었다.

용이: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은 그런 선택을 할 기회조차 없었네.

모두가 용이를 바라보았다.

용이: 나라는 크고, 집은 당장 배가 고팠으니까.

서희: 그것도 선택 아닙니까?

용이: 선택이라기보다 하루를 버틴 거지.

그가 웃었다.

용이: 누가 잡혀가면 무섭고, 세상이 뒤집히면 무섭고, 그래도 아침 되면 밥은 해야 하고 논에도 나가야 하고.

월선이 말했다.

월선: 그런 사람들은 나라를 사랑하지 않은 걸까요?

용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용이: 글쎄.

길상이 말했다.

길상: 아니오.

용이가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Question 2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가족을 지키며 살아간 사람들도 나라를 사랑한 것인가?

조준구: 참 좋군.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해도 다 애국자인가?

길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누가 말했소?

조준구가 입을 다물었다.

길상: 아이를 키운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월선: 아니죠.

길상: 굶지 않게 밥을 지은 사람은?

용이: 그것도 일이었지.

길상: 이름도 남지 않은 채 사람을 숨겨 주고, 먹이고, 소식을 전한 사람은?

김환이 말했다.

김환: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다.

길상: 바로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싸운 사람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오.

서희가 길상을 보았다.

서희: 그러면 당신은 왜 그렇게 오래 스스로 짐을 졌습니까?

길상: 무슨 뜻이오?

서희: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고 늘 생각했잖아요.

길상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길상: 아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외면하면 평생 나 자신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던 것 같소.

김환이 말했다.

김환: 그건 나라를 사랑해서였나, 자기 자신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였나?

길상이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둘 다였겠지.

서희가 말했다.

서희: 그러면 결국 독립운동도 아주 개인적인 일이었네요.

길상: 그럴 수 있소.

서희: 나라를 위한 일인데도?

길상: 사람은 나라라는 말만으로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는 평사리를 바라보았다.

길상: 아는 사람의 얼굴이 있었고, 빼앗긴 집이 있었고, 죽은 사람이 있었고, 아이들의 앞날이 있었소.

월선이 조용히 말했다.

월선: 그러면 나라는 결국 사람들의 얼굴이네요.

길상이 그녀를 보았다.

길상: 나에게는 그랬소.

용이가 웃었다.

용이: 그 말은 좀 알겠네.

조준구: 나는 잘 모르겠군.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나라라는 것은 나한테 뭘 해 줬지?

아무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조준구: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라고 말하지. 그런데 평생 힘 있는 놈들이 위에 있고, 힘없는 놈들이 밑에 있는 건 똑같았잖아.

용이의 표정이 굳었다.

조준구: 왕이 있든 일본이 있든, 땅 없는 놈은 땅이 없었고 돈 없는 놈은 돈이 없었어.

서희가 말했다.

서희: 그래서 나라를 빼앗겨도 상관없었다는 겁니까?

조준구: 적어도 나라라는 말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뜻은 아니었다는 거다.

김환이 말했다.

김환: 그건 맞다.

서희가 김환을 바라보았다.

김환: 조준구가 옳다는 말은 아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김환: 다만 나라가 사람들에게 보호받을 가치가 있으려면, 그 나라도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

길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상: 맞소.

용이: 나라가 뭔지도 모르겠는 사람에게 나라를 위해 죽으라고만 하면 안 되겠지.

월선이 말했다.

월선: 그러면 나라를 사랑하는 일은 나라를 비판하는 것과도 함께 갈 수 있겠네요.

김환이 말했다.

김환: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묻는 것일 수도 있지.

서희: 어떤 나라를 지키려는 것인지.

길상: 그렇소.

서희: 단순히 빼앗기지 않는 나라?

길상: 그것으로는 부족하오.

용이: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

길상이 용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상: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도 그런 것이었소.

Question 3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충돌하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월선이 길상을 바라보았다.

월선: 그래도 하나는 남았어요.

길상: 무엇이오?

월선: 사람이요.

서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나라를 사랑해서 떠났다는 말을 이해할 수는 있어요.

그녀가 잠시 용이를 보았다.

월선: 하지만 남겨진 사람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밤을 견디는 게 아니잖아요.

길상이 고개를 숙였다.

월선: 기다리는 사람은 한 사람을 기다려요.

용이는 월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월선: 나라가 아니라요.

긴 침묵.

서희가 말했다.

서희: 맞습니다.

길상이 서희를 바라보았다.

서희: 나는 조선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조용했다.

서희: 당신을 기다렸어요.

길상의 얼굴이 굳었다.

서희: 나라를 사랑하는 당신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잠시 멈췄다.

서희: 하지만 당신을 이해할수록 내가 외로워지는 날도 있었어요.

길상이 한 걸음 가까이 왔다.

길상: 미안하오.

서희: 사과를 받으려는 말이 아닙니다.

월선이 아주 약하게 웃었다. 조금 전 자신이 용이에게 했던 말과 같았다.

서희도 그것을 알아차린 듯 월선을 잠깐 보았다.

서희: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녀가 길상을 바라보았다.

서희: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하겠습니까?

모두가 길상을 바라보았다.

길상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흘렀다.

길상: 모르겠소.

서희의 표정이 움직였다.

길상: 예전 같으면 바로 그렇다고 했을 것이오.

서희: 지금은요?

길상: 지금은 내가 옳았다는 말보다, 내가 무엇을 잃게 했는지를 더 많이 보게 되오.

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길상: 그래도 다시 그 시대를 산다면……

그가 숨을 들이쉬었다.

길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소.

서희의 눈이 젖었다.

길상이 말을 이었다.

길상: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떠나는 것이 내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남아 있는 사람도 희생한다는 것을 더 일찍 알았을 것이오.

서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서희: 그 말은 듣고 싶었습니다.

길상은 고개를 숙였다.

용이가 낮게 말했다.

용이: 싸우러 가는 사람만 용기 있는 건 아니겠군.

김환이 그를 바라보았다.

용이: 남아서 가족을 먹이고, 기다리고, 하루를 버티는 것도 용기였겠지.

월선: 네.

용이: 그러면 나도 아주 쓸모없는 인생은 아니었나 보군.

월선이 즉시 말했다.

월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용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당신은 누군가의 역사책에 이름이 없었을 뿐이에요.

그녀의 눈이 젖었다.

월선: 내 인생에는 아주 크게 있었습니다.

용이는 말하지 못했다.

조준구가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비웃지 않았다.

김환이 천천히 말했다.

김환: 나라라는 것도 결국 그런 사람들로 남는 것이겠지.

서희: 어떤 사람들요?

김환: 큰 이름을 남긴 사람만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

길상이 말했다.

길상: 그리고 다음 사람에게 삶을 넘겨준 사람들.

월선이 들판을 바라보았다.

월선: 그러면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죽을 준비를 하는 것만은 아니겠네요.

용이: 살려는 것도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겠지.

조준구가 조용히 말했다.

조준구: 그래도 결국 다 죽잖아.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 말은 냉소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준구: 나라를 지켜도 죽고, 가족을 지켜도 죽고, 땅을 되찾아도 죽는다.

그가 서희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그러면 결국 무엇 때문에 그토록 버티는 거지?

이번에는 누구도 바로 답하지 못했다.

평사리의 밤은 깊어져 있었다.

서희가 천천히 말했다.

서희: 정말 그렇네요.

길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땅도 영원하지 않고, 나라도 영원하지 않고, 사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월선이 말했다.

월선: 사랑도 끝날 수 있고요.

용이가 고개를 숙였다.

김환이 아주 조용히 물었다.

김환: 그런데도 왜 사는 걸까.

그 질문이 여섯 사람 사이에 남았다.

조금 전까지 그들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제 질문은 더 작고, 더 깊어졌다.

왜 인간은 살아가는가.

서희가 어두운 들판 끝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다.

하지만 밤이 영원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다음 Topic

그래도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

Topic 5: 그래도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

park kyungni toji

김환: 그래도 왜 사는 걸까.

그 말이 여섯 사람 사이에 남았다.

평사리의 밤은 깊었다.

멀리서 바람이 들판을 훑고 지나갔다.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 큰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서희는 어둠 속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월선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용이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길상은 고개를 든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조준구만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

조준구: 대답 못 하겠지.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땅도 사라지고, 사람도 죽고, 나라까지 빼앗겼다가 돌아온다. 사랑도 끝나고, 집안도 무너지고.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조준구: 그래도 산다고?

용이: 살았지.

조준구: 왜?

용이가 대답하지 못했다.

조준구가 다시 웃었다.

조준구: 봐. 아무도 모르잖아.

월선이 조용히 말했다.

월선: 몰라도 살 수는 있잖아요.

조준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사람은 이유를 다 알아야만 사는 건 아니니까요.

조준구: 그럼 뭘 믿고 사는데?

월선은 잠시 생각했다.

월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는 것.

조준구: 그게 이유야?

월선: 어떤 날에는 그 정도면 충분했어요.

조준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Question 1

이렇게 많은 것을 빼앗긴 삶도 살아볼 가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서희가 먼저 말했다.

서희: 나는 쉽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길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서희: 너무 많은 것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월선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희: 누군가 내게 "그래도 좋은 인생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잠시 말을 멈췄다.

서희: 나는 모른다고 할 것 같습니다.

길상이 말했다.

길상: 그래도 후회합니까?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서희: 무엇을요?

길상: 살아온 것을.

서희는 오래 생각했다.

서희: 아니요.

길상이 눈을 들었다.

서희: 아팠습니다. 미웠습니다. 되돌리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서희: 하지만 내가 살아온 것 자체를 없애고 싶지는 않습니다.

월선이 서희를 바라보았다.

서희: 그 삶 속에 내가 사랑한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월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월선: 나도 그래요.

용이가 그녀를 보았다.

월선: 다시 살고 싶지는 않아요.

용이의 표정이 굳었다.

월선이 아주 조금 웃었다.

월선: 너무 힘들었으니까.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월선: 그런데 없었던 삶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아요.

용이: 왜?

월선이 용이를 바라보았다.

월선: 당신을 사랑했던 것도 그 안에 있으니까요.

용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월선: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은 것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용이가 겨우 말했다.

용이: 그렇지.

월선이 말을 이었다.

월선: 아팠다는 이유로 내 삶 전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사람은 고통의 크기만으로 자기 삶을 판단할 수 없겠지.

조준구가 비웃듯 물었다.

조준구: 그럼 고통도 다 의미가 있다는 건가?

김환이 즉시 고개를 저었다.

김환: 아니다.

조준구: 아니라고?

김환: 고통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조준구를 바라보았다.

김환: 사람을 죽이는 고통도 있다. 망가뜨리는 고통도 있다.

서희가 조용히 들었다.

김환: 중요한 것은 고통이 사람을 좋게 만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월선이 김환을 바라보았다.

김환: 그 고통 속에서도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길상이 물었다.

길상: 무엇이 남는다는 말이오?

김환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김환: 살아 있으려는 마음.

Question 2

인간을 마지막까지 살게 하는 것은 사랑인가, 한인가, 희망인가, 책임인가, 아니면 생명 그 자체인가?

용이가 말했다.

용이: 나는 책임이었던 것 같네.

월선이 그를 바라보았다.

용이: 누가 먹어야 하고, 누가 기다리고 있고, 누가 아프고.

그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용이: 그런 것 때문에 다음 날도 일어났지.

월선이 말했다.

월선: 나는 사랑이었던 것 같아요.

용이의 표정이 흔들렸다.

월선: 꼭 사랑받아서가 아니에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월선: 사랑하는 마음이 내 안에 남아 있었으니까.

서희가 말했다.

서희: 나는 처음에는 한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준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반드시 되찾겠다는 생각.

길상: 나중에는?

서희가 잠시 생각했다.

서희: 사람.

길상: 사람?

서희: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기니까 달라졌습니다.

그녀는 길상을 보았다.

서희: 복수만으로는 오래 살 수 없더군요.

길상이 조용히 말했다.

길상: 나는 책임이라고 생각했소.

김환이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나라에 대한 책임, 사람에 대한 책임.

잠시 멈췄다.

길상: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서희를 보았다.

길상: 책임이라는 말 뒤에 사랑이 있었던 것 같소.

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환이 말했다.

김환: 나는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조준구가 눈을 좁혔다.

조준구: 너무 큰 말이군.

김환: 큰 말이 아니다.

조준구: 그럼 뭔데?

김환은 땅을 가리켰다.

김환: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온다.

조준구: 그래서?

김환: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온다.

그는 조준구를 바라보았다.

김환: 생명은 이유를 설명한 뒤에 움직이지 않는다.

모두 조용히 들었다.

김환: 사람도 그런 순간이 있다.

월선: 무슨 뜻이에요?

김환: 너무 슬퍼서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아침이 오면 눈을 뜬다.

월선의 눈이 흔들렸다.

김환: 밥을 먹고, 누군가를 돌보고, 또 하루를 산다.

서희가 말했다.

서희: 아까 월선 씨가 했던 말이군요.

월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환: 그래.

그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김환: 어쩌면 생명은 우리가 이해하기 전에 이미 우리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준구가 물었다.

조준구: 그럼 나 같은 인간도?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 질문에는 평소의 비웃음이 없었다.

조준구: 나도 살려고 했어.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조준구: 남보다 많이 가지려고 했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고, 내가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했지.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그게 내 방식이었어.

서희: 살아남는 것과 남을 짓밟는 것은 다릅니다.

조준구: 알아.

서희의 표정이 변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조준구: 이제는 알아.

조준구가 땅을 내려다보았다.

조준구: 나는 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기려고 한 건지도 모르지.

길상이 말했다.

길상: 둘은 다르오.

조준구: 그래.

조준구가 씁쓸하게 웃었다.

조준구: 너무 늦게 알았군.

김환이 말했다.

김환: 늦게 아는 것도 아는 것이다.

조준구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Question 3

다시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면,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같은 길을 선택할 것인가?

월선이 먼저 웃었다.

아주 슬픈 웃음이었다.

월선: 이 질문은 잔인하네요.

용이가 그녀를 보았다.

용이: 대답 안 해도 된다.

월선: 아니요.

그녀가 용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월선: 대답할 수 있어요.

용이는 숨을 멈춘 듯했다.

월선: 다시 태어나도……

잠시 멈췄다.

월선: 당신을 사랑할 것 같아요.

용이의 눈이 젖었다.

용이: 월선아.

월선: 하지만 이번에는……

용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나 자신도 조금 더 사랑할 거예요.

용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용이: 그래야 한다.

월선이 미소를 지었다.

용이: 나는……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월선은 기다렸다.

용이: 다시 살게 된다면 네 마음을 그렇게 오래 혼자 두고 싶지 않다.

월선의 얼굴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웃었다.

월선: 그 말이면 됐어요.

서희가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길상을 보았다.

길상도 이미 그녀를 보고 있었다.

서희: 당신은요?

길상이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길상: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또 외면하지 못할 것이오.

서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길상이 말을 이었다.

길상: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길상: 내가 옳다는 생각만으로 당신에게 침묵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오.

서희의 눈이 젖었다.

길상: 내가 감당하는 것만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고.

서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길상: 그리고……

그가 미소를 지었다.

길상: 다시 살아도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서희가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 뒤 말했다.

서희: 나도요.

길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하지만 다음번에는 좀 덜 고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용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월선도 웃었다.

길상까지 웃었다.

잠시 동안, 그들은 역사 속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오래 아팠던 사람들이었다.

김환이 말했다.

김환: 나는 잘 모르겠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김환: 어떤 삶은 다시 살고 싶다고 쉽게 말할 수 없으니까.

그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김환: 그래도 같은 사람들을 사랑했을 것 같다.

월선: 길도 같았을까요?

김환은 오래 생각했다.

김환: 아니.

월선: 왜요?

김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과 운명에 끌려가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아니까.

조준구가 비웃지 않고 물었다.

조준구: 나한테도 묻겠지?

서희가 말했다.

서희: 묻겠습니다.

조준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준구: 다시 살아도 많이 갖고 싶을 것 같다.

용이가 웃었다.

용이: 사람 쉽게 안 변하는군.

조준구도 아주 조금 웃었다.

조준구: 하지만 남의 것을 빼앗아서까지 가지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서희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준구: 아마.

서희: 아마?

조준구: 사람이 그렇게 쉽게 자신을 장담할 수 있나?

서희는 잠시 그를 보다가 작은 웃음을 지었다.

서희: 그 말은 처음으로 믿을 만하군요.

잠시 뒤, 아주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월선이 고개를 들었다.

월선: 아침이 오나 봐요.

평사리의 동쪽 하늘이 아주 조금 밝아지고 있었다.

아직 해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밤의 색이 달라지고 있었다.

길상이 말했다.

길상: 많은 것이 끝났군.

서희가 고개를 저었다.

서희: 아니요.

길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끝난 것은 많지만,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용이가 들판을 바라보았다.

용이: 내일도 누군가는 저 밭에 나가겠지.

월선: 아이도 태어날 거고요.

김환: 누군가는 또 사랑할 것이다.

조준구: 또 싸우기도 하겠지.

서희가 말했다.

서희: 그리고 또 잃겠죠.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길상이 물었다.

길상: 그런데도?

서희는 아주 오래 평사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서희: 그런데도 살아가겠죠.

월선이 미소를 지었다.

월선: 왜요?

서희는 잠시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땅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가문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복수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서희: 꼭 이유가 있어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김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살아 있기 때문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첫 햇빛이 평사리 들판 위로 번졌다.

서희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손으로 흙을 만졌다.

평생 되찾으려 했던 땅이었다.

그녀가 손 안의 흙을 바라보았다.

서희: 나는 오랫동안 이 땅이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용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희: 그러다 빼앗기고, 다시 되찾았습니다.

잠시 멈췄다.

서희: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이네요.

길상: 어떻게?

서희는 흙을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떨어뜨렸다.

서희: 우리가 이 땅을 가진 것이 아니라……

흙이 다시 땅으로 돌아갔다.

서희: 이 땅이 우리를 잠시 받아 주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환이 미소를 지었다.

용이는 아무 말 없이 들판을 보았다.

월선도 고개를 들었다.

조준구조차 침묵했다.

서희가 말했다.

서희: 할머니도, 어머니도, 나도, 아이들도……

그녀가 들판을 바라보았다.

서희: 모두 잠시 이곳을 지나갑니다.

길상이 말했다.

길상: 그리고 다음 사람이 오겠지.

서희: 네.

햇빛이 조금 더 넓게 퍼졌다.

평사리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위를 지나온 사람들은 모두 달랐다.

사랑한 사람도 있었다.

배신한 사람도 있었다.

빼앗긴 사람도 있었다.

빼앗은 사람도 있었다.

싸운 사람도 있었다.

그저 하루를 버틴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라진다.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월선이 아주 조용히 말했다.

월선: 이제 알 것 같아요.

용이: 뭘?

월선이 햇빛이 퍼지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월선: 한이 우리를 살린 것도 아니고, 땅이 우리를 살린 것도 아니었어요.

김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선: 그냥……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월선: 우리 안의 생명이 끝까지 살려고 했던 거예요.

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시 한 번 흙을 만졌다.

이번에는 움켜쥐지 않았다.

그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놓아주었다.

아침이 왔다.

『토지』의 이야기는 끝나도,

땅 위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글

박경리 토지  땅과 인간의 대화

다섯 번의 대화 끝에서 인물들은 하나의 답에 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삶이 서로 다른 답을 남긴다.

서희에게 고향은 한때 되찾아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뒤 그녀는 자신이 진짜 찾고 싶었던 것이 땅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길상은 나라와 가족 사이에서 자신의 선택을 다시 바라본다. 나라를 위한 행동이 필요했다고 믿으면서도, 떠난 사람만 희생한 것이 아니라 남은 사람도 함께 대가를 치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월선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랑까지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을 사랑의 상처 하나로만 규정하지 않으려 한다.

용이는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가치를 보여 준다. 밥을 짓고, 논을 갈고, 가족을 지키고, 다음 날을 살아낸 삶도 역사의 일부였다.

김환은 한을 단순히 미움이나 슬픔으로 보지 않는다. 기억할 것은 기억하되, 그 아픔을 다음 세대의 운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조준구조차 마지막에는 자신이 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이기려고 했던 것인지 모른다고 인정한다.

그 순간 『토지』의 가장 깊은 질문이 드러난다.

인간을 살게 한 것은 복수였을까.

사랑이었을까.

한이었을까.

나라였을까.

책임이었을까.

대화의 마지막에서 그들은 더 근원적인 답에 가까워진다.

생명 그 자체.

사람은 모든 이유를 알고 난 뒤에 사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무너져도 아침이 오고, 누군가는 밥을 먹고, 아이를 돌보고, 밭으로 나가고, 또 사랑한다.

한이 사람을 살린 것이 아니라, 한을 품고도 계속 살아가려는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서희는 평생 되찾으려 했던 흙을 손에 올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움켜쥐지 않는다.

천천히 놓아준다.

그 순간 땅은 더 이상 소유물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사랑하고, 다투고, 잃고, 죽고, 다음 사람에게 삶을 넘겨주는 장소가 된다.

『토지』의 이야기는 끝나지만,

그 땅 위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최서희

최참판댁의 후손이자 『토지』의 중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 가족과 집, 땅을 잃은 뒤 강한 의지로 살아남는다. 빼앗긴 재산을 되찾는 과정에서 복수와 정의, 가족, 사랑,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마주한다.

이번 대화에서는 고향과 소유, 상처와 복수, 그리고 끝내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를 가장 깊이 질문하는 인물이다.

김길상

최서희와 긴 인연을 맺으며 개인의 사랑과 역사적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삶은 가족만을 위한 것도, 나라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이번 대화에서는 독립운동과 가족 사이의 선택,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이 함께 치르는 희생을 돌아본다.

이용

평사리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거대한 이념이나 영웅적 행동보다 농사, 가족, 사랑, 생계를 통해 시대를 견딘다.

이번 대화에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삶도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가장 인간적인 답을 들려준다.

공월선

이용을 깊이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삶을 살아간 여성이다.

그녀의 삶에는 기다림과 외로움, 사랑과 한이 깊게 남아 있다.

그러나 이번 대화에서 월선은 자신을 단지 상처받은 여성으로만 규정하지 않는다. 사랑했지만 자신의 삶 전체가 그 사랑 하나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김환 · 구천이

가족의 비밀과 개인의 운명, 시대적 혼란을 함께 짊어진 인물이다.

그는 『토지』의 한과 생명이라는 주제를 깊이 연결한다.

이번 대화에서는 기억과 증오의 차이, 한을 다음 세대에게 넘기지 않는 문제, 그리고 인간 안에서 끝까지 살아 움직이는 생명에 대해 말한다.

조준구

최씨 집안의 몰락과 재산 문제에서 중요한 갈등을 만들어 내는 인물이다.

욕망과 탐욕, 자기 합리화의 얼굴을 보여 주지만 이번 대화에서는 단순한 악인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그의 질문은 다른 인물들의 정의와 복수, 소유, 애국심까지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살아남으려 했던 것인지, 남보다 이기려 했던 것인지 스스로 묻게 된다.

]]>
https://tabletalk.kr/park-kyungni-toji-character-dialogue/feed/ 0